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205화 (205/361)

205화. 위대한 건 나다. 너희들이 아니야 - (5)

“아가, 내가 누군지 말해 봐라.”

“으음 ~ 큰 ~ 할아버지 ~ ”

“하하 ~ 그래 그래, 내가 네 큰 할아버지다. 오구 ~ 이쁜 녀석”

이곳은 오사카 부의 고즈넉한 대저택, 고영길은 증손자를 품에서 놓아주질 않았다.

24개월이 넘었다고 알아듣는 기특한 녀석, 손자가 태어났을 때 느낀 환희를 다시 느끼면서 미소가 입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회장님, 오늘 일정이 ··· ”

“아 ··· 그렇지. 깜빡했군.”

그렇게 얼마나 즐겼을까. 고영길은 오늘 중요한 행사가 있다는 걸 떠올렸다.

최근 일본은 국민연금 문제로 골머리를 않고 있다.

전 국민이 가입하는 국민연금과 회사원이 가입하는 후생연금을 통합해 개혁을 이뤄냈지만 이것도 한계, 일본 정부는 기업들의 협조를 얻어 사적연금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연금이라는 것 자체가 수익을 내서 고객들에게 지급하는 구조 아닌가. 그렇다면 수익을 창출하는 기업이 연금을 관리하는 게 낫지 않을까.

정부에선 기업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기 위해 세금 혜택 등을 제안, 일본 최대 그룹으로 성장한 스기토모 그룹도 사회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순 없는 입장이다.

기업 일에서 완전히 손을 뗐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으로서 기업 관계자들에게 지혜를 전달해 줄 순 있겠지, 증손자와 놀아주느라 오늘이 바로 그날이라는 걸 잊었다.

‘이거 어쩐다 ··· 이 녀석이랑 떨어지기 싫은데 ··· ’

고영길은 품에 안은 증손자를 빤히 쳐다봤다.

공과 사는 냉정해야 하는 법, 손님들이 모인 자리에 이 녀석을 데려가도 괜찮은 걸까. 자칫 무례해 보일 수도 있는 일, 한참을 망설이다 손주와 타협에 나섰다.

“아가, 할아버지 손님 만나러 가야 되는데 거기서 얌전히 있어줄 수 있니?”

“네에 ~ ”

“하하 ~ 그래, 그럼 같이 가자꾸나.”

그렇게 고영길은 증손자를 품에 안고 손님들을 맞이했다.

다행히 손님들은 이해해주는 분위기, 훗날 스기토모 그룹의 후계자가 될 지도 모르는 황태자에게 아부가 쏟아졌다.

‘이 아저씨들, 왜 나한테 인사하지?’

아직 낯을 가리는 황태자는 큰 할아버지 품으로 피신했다. 처음보는 사람들이 아는 척을 하니 이상한 게 당연, 손주의 재롱에 왕회장이 넉넉한 미소를 지으면서 딱딱한 분위기는 많이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진지한 분위기에서 대화가 시작됐고, 타다요시는 기업 관계자들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는 할아버지를 유심히 지켜봤다.

따분한데 뭔가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 어린 아기는 장난삼아 큰 할아버지의 행동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냔냔 ~ 냔 ~ 냐아아 ~ ”

하지만 복잡한 어른들의 대화까지 따라하는 건 불가능, 아무 말이나 지껄였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하 ~ 회장님, 벌써부터 후계자 교육시키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 있나. 이 녀석이 따분한 모양이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미소는 숨길 수 없는 일, 고영길은 손님을 배웅할 때도 손주를 품에서 놓아주질 않았다.

“그럼 회장님, 나중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살펴가게.”

“도련님, 다음에는 선물도 챙겨오겠습니다.”

“네에 ~ ”

기업관계자들도 은근 타다요시를 의식했다.

공과 사를 엄격히 가리는 왕회장이 손님들 앞에 데리고 나온 아기, 그만큼 총애가 깊다는 뜻 아닌가. 미래를 위한 투자는 철저해야 하는 법. 선물까지 약속하며 눈도장을 찍었다.

벌써부터 속이 훤히 보이는 놈들, 걱정이 됐는지 고영길은 갓 두 살을 넘긴 손자에게 이런저런 충고를 늘어놨다.

“아가, 앞으로 훌륭한 사람 돼야 된다. 그래야지 사람들이 널 무시하지 않는단다.”

“할아버지 옆에 있으면 되잖아요.”

타다요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할아버지 옆에 있었더니 알아서 고개를 숙인 사람들, 그럼 나는 할아버지 옆에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어린 녀석이 벌써 여기까지 머리가 트이다니, 고영길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할아버지가 언제까지 네 곁에 있어줄 순 없다. 그리고 사람은 누군가의 후광에 의지하면 곧 ··· ”

“후광이 뭐예요?”

놀라울 정도로 똘똘하지만 아직 어린 녀석, 고영길은 맞춤형 가르침을 베풀었다.

“아까 손님들은 너한테 고개를 숙인 게 아니다. 날 보고 고개를 숙인 거지, 할아버지가 없어지면 그땐 어떻게 할 거냐?”

답이 없는 손자,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리는 건가. 이때 기대하지도 않은 답이 날아왔다.

“으음 ··· 제가 훌륭해져야 돼요.”

“옳지! 그래, 네 아버지처럼 훌륭해져야 한다. 알겠니?”

“네에 ~ ”

“옳지, 옳지, 아빠 엄마 닮아서 아주 총명하구나.”

고영길이 증손자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다카기는 차분하게 개막전 등판을 준비했다.

지난 친선경기는 몸 풀기도 못 됐다. 보스턴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NPB 대표 팀의 마운드를 초토화, 점수 차가 14대 2로 벌어지자 다카기는 미련 없이 벤치로 빠졌다.

더 놀아줘봤자 의미 없는 경기, 어차피 본 경기는 개막전 등판 아니었나. 일본 기자들은 불펜까지 들어와 대투수의 연습투구를 지켜봤다.

한때 스기토모 그룹의 유력한 후계자로 명성이 자자했던 다카기, 하지만 지금 그 후광에 주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기업 일과는 관계없는 분야에서 그 자체로 빛을 내는 입장, 여론도 이제 다카기에게 고영길의 손자라는 꼬리표를 붙이질 않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생각보다 빨리 끝난 훈련, 기자들은 인터뷰를 하길 원했지만 다카기는 사전 약속이 있다며 자리를 떴다. 발길이 닿은 곳은 도쿄 돔 근처에 있는 요릿집, 미리 와 있던 지인들은 환한 미소로 다카기를 반겼다.

“너 왜 이렇게 거물이 됐냐?”

“거물은 무슨 거물이에요.”

마이키 요시토모는 한 번 잡은 손을 놓아주질 않았다.

고시엔에서 내게 치욕을 안겨준 녀석, 언젠가 복수하겠다고 다짐했는데 지난 연습경기에서 실력 차를 깨닫고 깨끗이 마음을 접었다.

청소년 대표 팀에서 나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손이 닿지 않는 먼 곳까지 날아가 버린 녀석, 착각인지 몸에서도 빛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느꼈다.

“또 덤비고 싶냐?”

“아니요.”

그 다음으로 악수를 나눈 선수는 타키야마 요이치,

타키야마는 친선 경기를 앞두고 기자들 앞에서 다카기의 공을 한 번 쳐보고 싶다는 뜻을 밝힌 적이 있다. 하지만 한 경기로 꺾인 도전 의지, 일본의 에이스들을 개 패듯 두들긴 보스턴 타선을 보고 경악했다.

저런 괴물들이 우글거리는 메이저리그에서 3년 연속 정상에 오른 선배, 내가 도전해서 이길 수 있을까. 도전의지가 꺾여 버렸다.

“사내자식이 왜 이렇게 의지가 약하냐? 말이라도 도전해 보겠다고 해야지.”

“아니요. 저는 일본의 대장으로 만족할래요.”

작년 시즌, 타키야마는 애매했던 타격 성적을 확 끌어올렸다.

그 전 시즌 성적은 2할 8푼에 홈런은 10개도 못 친 수준, 그래도 유격수 치고 나쁜 성적은 아니라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홈런이 24개로 늘어나면서 연봉도 3배 이상 상승, 1억 엔이 넘는 돈을 받는 스타 선수로 성장했다.

메이저리그에 가지 않아도 행복한 선수생활, 일본에서 왕 노릇하겠다는데 뭘 어쩌겠나. 다카기는 네 마음대로 하라며 웃어 넘겼다.

“나는 도전할 거다. 기다려라.”

반면, 다카기의 2년 선배 이시다 토모카츠는 도전 의지를 불태웠다.

몇 년 전부터 차근차근 준비했던 메이저리그 진출, 단순한 구종을 극복하기 위해 투심이나 컷 패스트볼도 나름대로 가다듬었다. 하지만 이게 현지에서 통할지는 미지수, 메이저리그 선배인 다카기의 의견을 구했다.

“선배는 지난 연습경기에서 느낀 게 없었어요?”

“있지 ··· ”

지난 연습경기에서 구원투수로 등판한 이시다는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내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하지만 타자를 압도한다는 느낌은 없었다. 어찌어찌 범타를 이끌어 내긴 했지만 타자들은 모든 구종에 반응, 거기다 점수 차가 워낙 벌어진 상황이라 타선의 집중력도 초반과는 달랐다.

상대가 선배라도 평가는 냉정해야 하는 법, 다카기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선배는 빠른 볼을 조금 더 가다듬어야 할 것 같네요.”

빠른 볼을 던지는 투수들이 넘쳐나는 메이저리그, 당연히 타자들의 스윙도 빠른 볼에 맞춰져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타격은 빠른 볼을 치기 위한 준비과정이다. 그 상황에서 얼마나 변화구에 대응하느냐가 성공의 열쇠, 변화구가 아무리 위력적이라도 빠른 볼이 좋지 않으면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

이시다 선배는 투심이나 컷 패스트볼 등, 변종 구종을 연마했다고 하는데 이게 메이저리그에서 얼마나 큰 메리트가 될 수 있을까.

그런 구종은 이미 메이저리그에 널리 퍼졌고, 경쟁력을 갖추려면 역시 빠른 볼을 가다듬어야 했다. 그렇다고 구속을 갑자기 끌어올릴 순 없는 일, 다카기는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쿠사나기를 참고해 보세요. 공은 안 빨라도 구위는 확실하니까요.”

다카기의 그늘에 가려져서 그렇지, 뉴욕 유니폼을 입은 쿠사나기 하루타는 5년 연속 10승을 거두며 메이저리그에 안착했다.

빠른 볼 구속은 평균 92마일 정도, 이런 스피드로 어떻게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은 걸까.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쿠사나기는 공의 회전이 180도에 가까운 전형적인 오버스로 피처, 횡 변화는 4 ~ 5인치 내외지만 종 변화는 평균 7인치에 이른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손꼽히는 무브먼트, 덕분에 떨어지는 스플리터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시다의 투구 폼도 오버스로에 가까운 편, 쿠사나기와 달리 체인지업을 주무기로 삼지만 떨어지는 폭이 적지 않아 많은 삼진을 잡아낸다.

빠른 볼만 조금 더 가다듬으면 메이저리그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는 실력, 다카기는 조금만 더 실력을 가다듬으면 1억 달러 계약도 꿈이 아니라며 선배를 격려했다.

“나는 어떻겠냐?”

“선배도 경쟁력 있어요.”

다카기는 마이키 요시토모의 성공 가능성도 높게 평가했다.

고시엔에서 맞붙었을 때도 느꼈지만, 마이키는 스트라이크 존 좌우를 자유자재로 찌르는 제구력을 갖췄다.

특히 메이저리그는 일본보다 바깥쪽 공에 후한 편, 마이키도 볼은 빠르지 않지만 그 정도 제구라면 문제될 게 없다.

여기에 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을 던지는데 특히 슬라이더가 일품, 얼마 전 열린 연습경기에서도 슬라이더로 타자들의 타이밍을 뺏어내는 인상적인 투구를 펼쳤다.

메이저리그 관계자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가성비 좋은 선발로 한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럼 올 시즌 끝나고 포스팅 신청 해야겠네.”

“오더라도 보스턴은 오지 마세요. 재미없으니까.”

다카기는 메이저리그 진출을 앞둔 선배에게 보스턴은 오지 말라고 철벽을 쳤다.

좋은 선수들이 다 보스턴으로 오면 무슨 재미로 야구를 하나,

보스턴에서그나마나 약한 부분은 선발진, 다카기와 로버트 클레이튼을 제외하면 나머지 3자리는 무한 경쟁으로 쟁취해야 한다.

이시다 - 마이키는 메이저리그에서 한 자리 차지할 수 있는 기량을 갖춘 투수, 두 선수 중 한 명만 보스턴으로 와도 파급효과는 엄청났다.

“야, 네가 단장한테 추천 좀 해 줘.”

“안 돼요. 다른 팀 알아보세요.”

하지만 두 선배는 모두 보스턴으로 가길 원했다.

보스턴은 요즘 사치세도 감수한 투자로 선수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도박이나 중계권으로 들어오는 수익이 워낙 엄청나 가능한 일, 당연히 선수들도 많은 돈을 찔러 주는 보스턴으로 가길 원하고 있다.

이 녀석이 한 마디 하면 구단 관계자들이 우리에게 관심을 주지 않을까? 하지만 다카기의 입장은 단호했다.

“정말 능력 있는 선수들은 구단이 알아서 데려가요. 저한테 아부하지 말고, 실력으로 입증하세요.”

“그래, 치사해서 더는 부탁 안 한다.”

마이키는 나중에 후회할 거라며 찔러봤지만 다카기는 요지부동, 그래도 나중에 미국에서 다시 이렇게 모이자며 선배들을 격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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