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203화 (203/361)

203화. 위대한 건 나다. 너희들이 아니야 - (3)

‘우웅 ··· 하기 싫다.’

이곳은 시즈오카에 있는 다카기의 친가, 코하루는 오빠 옆에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간만에 집에 돌아온 오빠, 일본에 와서도 공식행사 참가 운동 때문에 동생과 거의 놀아주질 않는다.

오늘은 신나게 놀 기대에 부풀었는데 내 공부를 봐주겠다니, 뺀질거리느라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왜? 모르겠어?”

“으응”

다카기는 동생의 반응에 당황했다.

소학교에 들어갈 만큼 훌쩍 큰 동생, 이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막내라고 어머니가 너무 오냐 오냐 키운 걸까. 그럴 분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납득할 수 없었다.

[이 문제는 친절한 오빠가 답을 적어주세요.]

한참을 기다려 받은 답안지엔 이런 장난섞인 말도 적혀 있었다. 공부는 때가 있는데 이러다 큰일 나는 건 아닌지, 일단 동생을 앞에 앉혔다.

“시험 보는데 답 대신 적어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

“몰라”

훈계를 해도 듣는 둥 마는 둥, 어머니는 한참 동안 기싸움을 벌이는 남매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봤다.

“내일은 오빠랑 신나게 놀아야지 ~ ”

어머니는 어제부터 막내딸이 오빠와 신나게 노는 꿈에 부풀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교육도 철저히 신경썼으니 저 정도 문제는 금방 풀고 놀러갈 줄 알았는데, 머리가 많이 큰 딸은 이제 오빠 앞에서 반항할 줄도 알게 됐다.

뭐든 철저히 하는 아들이 이 상황을 어떻게 넘길지, 싸움이라도 일어나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에 전전긍긍했다.

‘잠깐, 내가 둔탱이인가?’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눈치없는 남자는 소녀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러고보니 평소 바쁘다고 동생과 놀아주지도 못했다. 친절한 오빠가 답을 적어달라는 건 나와 놀고 싶다는 고백 아닐까, 바로 설득에 나섰다.

“이거 답 다 적으면 오빠가 하자는대로 다 해줄 게”

“정말?”

“응, 그러니까 이번엔 제대로 하자. 알았지?”

답안지를 낚아 챈 코하루는 놀라운 속도로 손을 움직였다. 한참 동안 뺀질거리더니 거의 슈퍼컴퓨터 수준, 답안지를 받은 다카기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엄마, 저희 오늘 조금 늦을 거예요.”

“그래, 잘 다녀오렴”

남매는 그렇게 길을 나섰다.

집사람과 아들은 친정으로 투어를 떠났고 오늘 내 옆구리를 지켜줄 사람은 동생, 다카기는 훌쩍 자란 동생을 향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작아서 키를 맞춰줘야 했는데 이제는 알아서 오빠 손을 움켜 잡는 녀석, 차를 타고 갈까 했지만 남매는 맞잡은 팔을 흔들며 산책에 나섰다.

새해 맞이 준비로 바쁜 거리, 날씨는 약간 춥지만 코하루는 간만에 내 것이 된 오빠에만 집중했다.

“오빠, 나 하고 싶은 거 다 해준다고 했지?”

“그럼, 뭐든 말해”

기껏해야 선물 좀 사달라고 하겠지, 하지만 이어지는 답은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그럼 나 뽀뽀해 줘.”

“뭐라고?”

“해 줘, 응? 응?”

월드시리즈 등판도 이렇게 당황 안 했는데 미칠 지경, 주위 눈치를 보다 동생 볼에 입을 슬쩍댔다.

“이런 거 말고 여기!!”

코하루의 요구는 점 점 과격해졌다. 안 해주면 오빠는 거짓말쟁이라는 협박까지 작렬, 남매끼린 그런 거 하는 거 아니라고 설득했지만 소용없었다.

“얼른 해 줘!! 하자는 대로 다 해준다고 했잖아!!”

이젠 술주정에 가까운 난동, 주위 사람들 보기 민망했는지 다카기는 동생을 품에 안고 도주했다. 사람 많은 곳은  가선 안 될 분위기, 단단히 삐친 동생을 달래느라 진땀을 뺐다.

“그런 건 나중에 남자친구랑 해야지. 왜 오빠랑 하려고 그래?”

“나도 찾아보긴 했는데 오빠같은 왕자님이 없어.”

동생의 말에 다카기는 코웃음을 쳤다.

찾아보긴 했다니, 어린 녀석이 벌써부터 남자친구를 물색했다는 건가. 일찍 결혼한 오빠보다 더 크게 될 녀석, 다카기는 너무 앞서나가진 말라는 뜻으로 서비스를 해줬다.

세상에 아무리 멋진 남자가 많다고 동생 눈엔 오빠가 최고, 기분이 풀린 코하루는 다시 오빠와 산책에 나섰다.

“오빠야.”

“응, 왜?”

“이번에 가면 또 못 오는 거지?”

동생은 벌써부터 오빠와의 이별을 걱정했다.

아빠나 언니처럼 회사 다니면 되는데 왜 오빠는 그 먼곳까지 가서 공놀이를 하는 걸까. 당장 그만두고 여기서 나랑 같이 살자고 하고 싶었지만 무리한 요구라는 걸 알 만큼 머리가 커버렸다.

“코하루는 오빠가 야구하는 거 싫어?”

“응.”

“그러니까 너는 나중에 운동하는 사람이랑 결혼하지 마. 알았지?”

코하루는 콧방귀로 섭섭함을 드러냈다.

드라마에서도 봤지만 짝사랑은 언제나 괴로운 법, 내 곁에 있어주지 못하는데 그게 무슨 사랑인가. 눈물을 머금고 마음을 접었다.

“저기, 다카기 선수 맞으시죠?”

“네.”

“죄송하지만 사진촬영 한 번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한무리의 팬이 접근해왔다. 이런저런 요구가 쏟아지는 상황, 평소라면 흔쾌히 해줬겠지만 다카기는 동생의 눈치를 살폈다.

“제가 오늘은 손발이 묶여 있거든요. 사인 받으시려면 저분 허락 얻으셔야 돼요.”

말뜻을 이해한 팬들은 코하루에게 아부 공세를 펼쳤다. 오늘은 나만의 오빠인데 확 거절해버릴까. 하지만 너그러운 동생은 유명인사인 오빠의 입장을 배려했다.

“우리 오빠 어떻게 생각하세요? 멋지죠? 위대하죠?”

“그럼요. 그러니까 다들 좋아하는 거죠.”

“으음 ··· 좋아요. 사인 받아가세요.”

별로 자기가 사인해 주는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콧대를 세우는 건지,

귀여운 동생 덕분에 팬들은 사인은 물론 또 다른 즐거움을 안고 갔다.

* * *

[2023시즌 개막전, 도쿄에서 열린다]

시간은 흘러 해를 넘긴 1월, 일본 열도는 열기에 휩싸였다.

무려 5년 만에 열리는 메이저리그 개막전, 보스턴의 수더랜드 단장은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사업을 추진했다. 다카기라는 절대 흥행 수표가 있는데 뭐가 걱정일까. 일본 야구협회와 논의를 거쳐 보스턴과 일본 대표 팀의 친선경기도 진지하게 논의했다.

“선배님의 공을 꼭 한 번 쳐보고 싶습니다.”

도쿄 자이언츠의 주전 유격수로 자리 잡은 타키야마 요이치는 대표 팀에 뽑히고 싶다는 뜻을 여론에 공개했다.

안 뽑아주면 큰 일 날 분위기, 일본 대표팀 감독 안도 요시히사는 걱정하지 말라는 뜻을 전했다. 타키야마는 앞으로 일본 대표팀의 10년을 책임질 인재, 다른 대안이 없기에 선발은 당연했다.

“나도 좀 끼워 달라. 그 녀석에겐 갚아줘야 할 빚이 있다.”

이때, 의외의 인물이 일본 대표 팀 승선을 요구했다.

바로 잭 코틀봇, 벌써 9년이나 지난 일이다.

캐나다에서 열린 청소년대표 경기에서 다카기와 마주한 잭 코틀봇은 충격의 패배를 당했고, 메이저리그에서 일본으로 방향을 틀었다.

7년 계약은 이미 끝났고 이제는 메이저리그 진출을 노려야 할 상황, 2년 전에 메이저리그 진출을 타진했지만, 소속 팀 요코하마가 4년 22억 엔이라는 대형 계약을 제시하면서 마음이 흔들렸다.

요코하마를 우승시켜야한다는 의무 때문에 지금까지 미뤄왔던 꿈, 이번 친선경기에서 다카기를 꺾고 내년에 메이저리그 문을 두들기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

‘이러면 얘기가 복잡해지는데’

코틀봇의 발언에 일본야구 협회는 바쁘게 움직였다.

일본인도 아닌 선수 가슴에 일장기를 박을 순 없는 일 아닌가. 하지만 NPB 대표 팀이라면 코틀봇의 등판도 불가능한 건 아니다.

MLB와 NPB를 대표하는 투수의 맞대결이라니, 이런 좋은 화젯거리가 또 있을까. NPB 협회가 발 빠르게 움직이면서 다카기와 코틀봇의 맞대결이 성사됐다.

“코틀봇 선수가 도전장을 던졌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게 누군데요?”

기자회견에서 다카기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본인은 너와 난 9년 전에 맞대결을 한 사이라고 주장하는데 내가 알 게 뭔가. 뭣보다 메이저리그 최고 유망주라는 평가를 받았던 놈이 일본으로 가더니 그대로 눌러 앉을 줄이야.

사는 동네가 다른데 내가 옆 동네 골목대장 이름까지 기억해야 되나?  잘 모르겠다며 끝까지 잡아뗐다.

[I’ll never forgive him, You will pay for your impertinence]

=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넌 네 건방짐에 대한 대가를 치를 것이다.

화가 난 코틀봇은 SNS를 통해 도전의사를 분명히 밝혔지만, 다카기는 용서하고 자시고 간에 난 널 모른다며 도전자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날 선발등판은 내가 한다.]

이때, 또 다른 도전자가 고개를 들었다.

다카기의 고교 선배이자 미요시 호크스의 에이스 이시다 토모카츠, 코틀봇과 마찬가지로 이시다도 메이저리그 진출을 노리고 있다.

메이저리그 최강을 자랑하는 보스턴을 상대로 내 실력이 얼마나 통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코틀봇은 넌 빠지라며 맞불을 놨다.

[도전자를 정할 권리는 챔피언에게 있다. 네가 빠져라 마라 할 일이 아니다.]

이시다는 도전자를 정할 권리는 다카기에게 있다며 코틀봇의 의견을 일축했다.

여론도 이에 동조하는 분위기, 다카기는 과연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 기자들은 챔피언의 답을 기다렸지만 2월이 넘도록 다카기는 아무런 답도 주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3월 22일, 스프링 캠프 일정을 마친 보스턴 선수단은 미국을 떠나 일본으로 이동했다.

메이저리그 역대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강팀이라는 평가를 받는 보스턴 선수단의 등장, 그 얼굴을 가까이서 볼 기회가 언제 또 있을까. 공항 일대는 기자들은 물론 여기저기서 몰려온 인파로 북적거렸다.

“Tell me who I am(내가 누군지 말해 봐라)!!”

성대한 환대에 들뜬 폴 돈론은 일본 팬들을 향해 손가락 세리머니를 날렸다.

다카기를 제치고 차지한 아메리칸 리그 MVP, 쟁쟁한 경쟁자들이 많았기에 솔직히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MVP라니, 이제 나도 MLB를 대표하는 스타라는 생각에 콧대가 절로 들썩거렸다.

‘내가 무슨 아마추어도 아니고’

그러건 말건 다카기는 묵묵히 자기 길을 갔다.

MVP는 놓쳤지만 3년 연속 독점한 만테냐 어워드, 이젠 일상이 된 일이라 별로 자랑할 일도 아니다.

정상에 오른 게 처음인 돈론과는 차원이 다른 위상, 호텔에 입성한 보스턴 선수단은 잠깐 쉬었다가 팬 사인회가 열리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끝이 보이지 않는 행렬, 보스턴 선수단은 프로답게 악수까지 청하는 여유를 보였다. 그건 다카기도 마찬가지, 왼손으로 악수를 하고 오른손으로 사인을 하는 멀티 플레이를 선보였다.

“도전자는 정하셨나요?”

이때 한 팬이 뼈 있는 질문을 던졌다.

조만간 경기가 열리는데 언제까지 침묵할 건가. 다카기는 씩 웃을 뿐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저한테만 살짝 얘기해주세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저 그날 투구 안 할 거예요.”

질문을 던진 팬들은 물론, 뒤에 늘어선 인파도 깜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투구를 안 하겠다니, 설마 개막전에 태업을 하겠다는 건가.

다카기는 그게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그날은 타격할 거예요.”

“타격이요?”

“네, 일본의 에이스들이 어떻게 두들겨 맞는지 보세요.”

다카기는 메이저리그에서도 타격에 일가견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 몸이다.

2년 전엔 한 시즌 8홈런을 날렸을 정도, 지금도 방망이 실력은 녹슬지 않았다. 일본에서 열리는 행사인 만큼, 뭔가 팬들에게 특별한 즐거움을 줄 순 없을까.

그래서 배트를 잡고 도전장을 던진 자들을 두들겨 패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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