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위대한 건 나다. 너희들이 아니야 - (1)
12월 4일, 하네다 공항 근처는 기자와 그 밖의 인파로 북적거렸다.
보스턴의 월드시리즈 3연패를 이끈 영웅의 귀국, 주인공이 나타나자 여기저기서 함성과 카메라 플래시가 터져나왔다.
키리코는 어린 아들이 놀라지 않도록 한 손으로 눈을 가려줬고, 다카기는 덤덤한 얼굴로 기자들 앞에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앞으로의 일정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작년과 비슷할 것 같습니다.”
다카기는 올해도 모교를 방문할 예정, 한국으로 건너가 수해를 입었다는 조상들 묘를 둘러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관리 하기도 어렵고 언제까지 해외에 무덤을 둬야 하는지, 유해를 일본으로 옮겨오는 일은 가족회의를 거쳐 결정하기로 했다.
“올해도 국민영예상은 거부하시는 겁니까?”
이 때 한 기자가 화제를 틀었다.
일본의 명예를 드높이고 국민에게 모범이 될 만한 자를 표창하는 상, 다카기는 그 자격을 작년에 거절한 적이 있다.
하지만 총리는 올해도 다카기를 후보군에 올린 상황, 입장은 작년과 다르지 않았다.
“왜 상을 안 받으시려고 하는 겁니까?”
“그 상은 나라의 명예를 드높였다고 주는 상 아닙니까.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위대한 건 접니다. 제가 위대하다고 일본이 위대해지는 건 아니다. 뭐, 이런 뜻이죠.”
다카기는 얼마 전, 일본에서 일어난 소동을 뉴스를 통해 접했다.
요즘 일본은 대내외적으로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한 때 미국의 뒤를 이어 세계를 주름잡던 경제대국이었지만 무서운 성장세를 보인 중국에게 추월당하고 이제는 한국에게 쫓기는 상황, 그러다보니 빗나간 애국심이 여기저기서 들고 일어나고 있다.
특정 국가를 향한 지나친 혐오와 근거없는 폭력, 여기에 눈꼴 시리는 자국 미화까지, 다카기도 어느새 위대한 일본을 찬양하는 도구가 돼버렸다.
그런데 내가 국민영예상을 수상한다?
어림도 없는 소리, 위대한 건 나지 이 나라가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인터뷰를 마친 다카기는 스기토모 그룹 관계자의 호위를 받으며 호텔로 이동, 아늑한 침실에 짐을 풀었다.
“오늘 고생 많았어요 ~ ♡”
“우웅”
키리코는 품에 안긴 아들을 다독였다.
낮을 많이 가리는데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으니 많이 놀랐겠지, 피곤했는지 젖먹이는 곧 잠에 빠져들었다.
“씻을 거지?”
“응”
“그럼 같이 들어갈까?”
남편의 제안에 키리코는 얼굴을 붉혔다. 아무리 부부라도 훤한 불빛 속에서 몸을 드러내는 건 부끄러운 일, 하지만 손해볼 거 없는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왔다 갔다 하는 거 피곤하면 그냥 미국에 눌러 앉을까?”
그렇게 시작된 욕탕 속의 밀회, 남편의 제안에 키리코는 답을 망설였다.
의사 공부도 해야 하고 솔직히 미국에 머무는 게 편하다. 남편도 훈련을 해야 하니 그게 좋겠지, 하지만 일본에 있는 가족들 때문에 결단이 서질 않았다.
“자기는 미국에서 커리어 마무리 할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일본에서 프로 생활 마무리 할 생각은 없냐고”
키리코는 바로 반격에 나섰다.
지금까지 mlb 도전을 선언한 선수들은 대부분 고향에서 커리어를 마쳤다.
아직 24살 밖에 안 된 남편이지만 언젠간 찾아올 황혼기, 마지막은 역시 고향에서 마무리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다카기는 선을 확실히 그었다.
“프로한텐 돈 많이 주는 도시가 고향이야.”
“훗 ~ 진심이야?”
“당연하지. 다음 고향이 어디가 될 지는 나도 몰라”
다카기는 6년 차에 옵트아웃을 실현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어느새 절반이 훌쩍 흘러갔으니 그리 먼 일도 아니겠지, 구단에서 계약서를 수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만 어지간한 액수가 아니면 응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돈 벌어서 어디에 쓰게?”
“카드 비밀번호 알고 있는 사람이 그런 소리 해봤자. 설득력 없어”
남편의 반격에 키리코는 입을 다물었다.
매 주 들어오는 월급, 가끔 착오가 있을 수도 있으니 매번 확인해봐야 한다.
다카기는 그 권리를 아내에게 위임, 돈은 벌고 있지만 사실상 아내가 칼을 쥐고 있다. 거기다 둘째도 생각하고 있으니 생활비 지급은 철저히 해야겠지.
그런 뜻으로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뭣 때문에 아내를 이곳으로 유인했을까. 어린 아들은 침대 위에서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중, 엄마 아빠의 뒷사정 때문에 깨지 않도록 배려해줬다.
* * *
“와아아 ~ !!”
12월 7일, 다이이치 고교는 유명인사의 등장에 후끈 달아올랐다.
방학 중인데도 재학생이 전부 등교한 수준, 이사회 관계자들은 잊지 않고 모교를 방문해 준 부부에게 감사를 표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학생들에게 강연 좀 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강연이라고요?”
이사장은 부부에게 특별한 제안을 했다. 다카기는 이제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선수, 키리코도 학창시절에 전설적인 성적을 쌓고 다이이치 대학을 거쳐 지금은 미국에서 의사 공부를 하고 있다.
다이이치 고교는 일본에서 손꼽히는 명문인 만큼, 학생들의 진로 고민이나 상담도 신경을 쓰는 편, 성공궤도에 오른 이 사람들이라면 뭔가 특별한 말을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다카기는 못 할 것 없다고 흔쾌히 수락했지만 낯가림이 심한 키리코는 책임을 남편에게 떠맡겼다. 학창시절부터 워낙 조용했던 사람, 그 성격을 알고 있는 다카기는 강당에서 수 백 명이나 되는 후배들과 마주했다.
[성공의 기준은 무엇인가]
오늘의 강연 주제는 이것, 후배들은 무엇을 성공의 기준으로 보고 있을까. 다카기는 혼자 떠들지 않고 후배에게도 발언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저는 지위와 명예라고 생각합니다.”
“돈은 기준이 안 되는 겁니까?”
솔직한 발언에 강당은 웃음으로 들썩거렸지만, 학생은 제법 진지하게 자신만의 논리를 이어갔다.
“돈은 ··· 그렇게까지 중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째서죠?”
“성공한 사람은 사회와 국가에 모범이 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게 모교의 명성을 드높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카기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어린 학생이 무슨 사회와 국가에 모범이 되겠다는 건지, 학생은 어른의 보살핌을 받고 잘 커주는 게 할 일이다.
뭣보다 지위와 명예를 얻으면 돈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되는데, 그걸 정말 외면할 수 있을까. 일단 화제 전환으로 입을 뗐다.
“그럼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해 보죠. 학생은 왜 성공하고 싶죠?”
“그야 ··· 제가 행복해지기 위해섭니다.”
“그럼 어느 날 신이 나타나서 학생에게 소원을 한 가지 들어준다고 칩시다. 그때 무슨 소원을 빌 건가요? 국가와 사회를 위한 소원을 빌 건가요?”
그제야 학생은 아차 했다.
결국 성공은 내 행복을 위해서인데, 왜 거기에 국가와 사회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가져다 붙인 걸까.
본인이 논리적으로 따져 봐도 말이 안 되는 헛소리, 간단하게 논파당한 학생은 입을 다물었다.
“성공을 하고 싶다면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따져보는 게 중요합니다. 성공의 기준은 절대적인 게 없어요. 이 학생처럼 국가와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게 성공일 수도 있지만, 나의 개인적인 행복이 기준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렇죠?”
학생들은 침묵으로 동의, 다카기는 못 다한 말을 이어갔다.
“제가 얼마 전 기자들 앞에서 한 말이 있습니다. 저는 제 성공과 행복을 위해 야구를 할 뿐이라고 말이죠. 별로 국가의 명예를 드높이고 국민들에게 모범이 되기 위해 야구를 시작한 게 아닙니다. 그래요. 국가와 사회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게 아무리 중요해도 개인의 행복 위에 군림할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행복하지 않고, 부유하지 않은데 어떻게 남들에게 봉사하는 마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다카기는 성공하고 싶다면 일단 내 행복을 우선으로 삼으라고 조언했다.
물론 거기서 그치면 곤란한 일,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나. 그건 본인에게도 불행한 일, 내가 행복해 지면 그 기운을 주위에도 감염시킬 수 있다는 논리를 앞세웠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사회에 좋은 기운을 줄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명문고의 일원으로서 사회에 모범이 되고 싶다면 일단 행복해지세요. 그게 우선입니다. 저는 돈이 좋아요. 그래서 고액 연봉 받는 지금이 너무 행복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여러분들 앞에서 잘난 척도 할 수 있는 거죠. 그렇지 않습니까?”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돈도 성공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자신의 논리를 기어이 밀어붙이다니, 하지만 그게 틀린 말도 아니라 태클을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 선배님은 연봉을 얼마나 받고 싶으신 건가요?”
이때 날아든 다른 학생의 질문, 다카기는 그야 메이저리그 최고 수준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제가 메이저리그 진출하기 전에 기자들 앞에서 호언장담한 게 있습니다. 언젠가는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 연봉을 받는 선수가 되겠다고 말이죠. 그때는 절 비웃는 사람들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젠 누구도 감히 그럴 수 없죠. 그게 바로 실력이라는 겁니다.”
다카기는 성공의 또 다른 기준으로 실력을 앞세웠다.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실력을 가졌다면 뭐든 못하겠나. 예전엔 선택을 받는 입장이었지만 지금은 단장은 물론 구단주에게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입지, 그렇다고 막나가선 안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정의가 없는 힘은 폭력이고, 힘이 없는 정의는 무능할 뿐이라고 말이죠. 여러분들이 정말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일단 그에 맞는 실력과 인품, 명예를 갖추세요. 그렇지 않다면 정의가 없는 폭력, 무능한 정의가 될 뿐입니다. 어느 쪽이든 여러분들이 원하는 꿈은 아니겠죠. 진지하게 생각하세요, 그렇게 먼 일이 아닙니다.”
다이이치 고교는 일본에서 손꼽히는 수재들이 모인 곳이다.
거기다 내신이 받쳐주면 시험 없이 대학도 진출 가능하니, 이 중 상당수는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인재로 성장할 거다.
이들이 어떻게 성장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일본의 미래, 정의 없는 폭력 또는 무능한 정의가 돼야 되겠는가?
명문고의 일원이라면 그에 맞는 책임의식을 가지라는 말에 후배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 수업에선 절대 들을 수 없는 말들, 별 기대를 하지 않았던 이사장은 주옥같은 강의에 감동했다.
“대학교에서도 강의 한 번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대학이요?”
“꼭 좀 부탁드립니다.”
예정에도 없었던 대학 강의, 하지만 다이이치 고교와 대학은 한 몸이나 다름없다.
메이저리그 진출을 하지 않았다면 나도 지금쯤 그곳에서 졸업을 준비하고 있었겠지, 다카기는 이사회의 부탁대로 대학교에서도 강연을 이어갔다.
생각보다 좋았던 반응, 이사회는 다카기에게 특별한 제안을 했다.
“혹시 은퇴 이후의 계획은 세워두셨습니까?”
“저 이제 겨우 24살이에요. 은퇴 계획을 세우기엔 너무 이르죠.”
“그래도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인데 ··· ”
이사회는 다카기에게 교수직을 제안했다.
다이이치 대학엔 아직 스포츠와 관련된 학과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야구부가 고시엔 우승을 차지하기 전까지 이사회는 스포츠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체육 특기생을 선발하기 시작했고, 학생들의 미래를 위해 대학교에도 스포츠 관련 학과를 개설할 예정이다.
아직 먼 일이지만 다카기가 은퇴 후 모교로 돌아오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 교수가 되려면 필요한 과정을 이수해야겠지만 그래도 한번 고려 보라는 유혹이 이어졌다.
다카기는 일단 생각해보겠다며 발길을 돌렸고, 집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아내의 질문에 시달렸다.
“자기, 은퇴하면 교수 할 거야?”
“교수는 무슨 교수야. 안 어울려”
양복을 입고 강단에 올라 학생들을 가르친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봤지만 닭살이 돋을 정도로 안 어울리는 광경, 정말 할 일이 없다면 생각해 보겠지만 일단 뒤로 미뤄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