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왕좌 앞에 군림하는 자 - (14)
치열했던 1차전과 달리 2차전은 3회까지 0대 0, 팽팽한 접전이 이어졌다
하지만 쫓기는 쪽은 명백히 세인트루이스. 보스턴은 수비 시프트 따원 쓰지 않았다.
최근 몇 년 동안 한창 유행했던 수비 시프트, 하지만 이런 건 예상치 못한 변수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볼넷, 홈런, 삼진이 시프트를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대표적인 변수, 다카기가 등판하는 날은 굳이 시프트를 쓸 이유가 없다.
삼진 잡고 볼넷 잘 안 주는 투수가 마운드에 있는데 시프트는 뭐 하러 쓰나, 그에 비해 세인트 루이스는 상황에 따라 수비변화를 계속 줘야 하는 입장, 사인 교환이 많아질수록 선수들이 경기에 쏟는 집중력도 그만큼 커질 수 밖에 없다.
거기다 보스턴은 올 시즌 메이저리그를 대표한 홈런군단, 불의의 한 방이 선수단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미드키프 감독은 잘 알고 있었다.
‘절대 장타 주지 말 것,’
3회 말 보스턴의 공격, 1사 주자 1루에서 후안 위긴스가 타석에 들어섰다.
올 시즌 38홈런을 날린 거포, 어제도 2루타 포함 4타수 2안타 2타점을 기록했다.
장타를 주느니 단타로 막는 게 나을 정도, 세인트루이스는 3루를 비워두는 극단적인 시프트를 펼쳤다.
‘번트 안 대’
3루로 땅볼 하나 굴리면 거저 먹는 안타, 하지만 위긴스는 평소처럼 자세를 잡았다.
장타를 안주겠다면 도망치는 피칭을 하겠다는 건데, 내가 미쳤다고 투수의 투구수를 절약해 줘야하나.
여기서 볼넷이 나오면 몰리는 건 세인트루이스, 작은 것을 노리다 큰 것을 놓치진 않았다.
“바깥 쪽, 이번에도 따라 나오지 않습니다. 카운트는 투 볼 노 스트라이크, 보스턴이 조금씩 세인트루이스를 몰아세우고 있습니다.”
“제가 볼 때 지금 시프트는 의미 없습니다. 차라리 정상적인 수버에서 투구를 하는 게 나을 텐데요. 잘못하면 스스로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해설위원의 염려대로 세인트루이스의 선발 덕 매드만호프는 투구에 부담을 느꼈다.
반드시 스트라이크를 집어넣어야 할 상황, 타자는 그 길목을 노리고 있다.
던질 수는 있는데 마음이 따라주질 않는 상황, 결국 구석을 노리다 쓰리 볼에 몰리고 말았다.
세인트루이스 입장에선 무리한 승부를 할 이유가 없는 상황, 스트레이트 볼넷이 나오자 미드키프 감독은 선발투수를 끌어내렸다.
마운드에 오른 건 필승조 칼 우드러프, 득점권에서 데이브 셰퍼드를 잡기 위해 칼을 뽑아들었다.
‘그럴 줄 알았지’
초구부터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오는 빠른 볼, 쥐구멍에서 머리를 내민 생쥐에게 가차없는 도끼질이 날아들었다.
엄청산 타격음과 함께 좌중간으로 뻗어나가는 타구, 홈런을 직감한 세퍼드는 배트를 내던진 채 멀어지는 타구를 감상했다.
볼넷에 이은 쓰리 런 홈런, 시프트를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공격에 세인트루이스 선수단의 사기는 곤두박질 쳤다.
‘끝났군.’
브라이스 감독은 환한 미소로 선수들을 맞이했다.
다카기가 등판한 경기에서 3득점은 곧 승리를 의미, 이번 월드시리즈에서 다카기를 2번 쓸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따아악 ~ !!
“이번에도 멀리 가는 타구!! 야수들은 움직이지 못합니다!! 울반스키의 백투백 홈런!! 보스턴이 완벽한 처형식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압도적!! 스코어는 이제 4대 0입니다!!”
“세인트루이스는 지금 최선의 대안을 다 쏟아 붓고 있거든요. 그런데도 전혀 상대가 안 된다 ··· 앞으로의 시리즈가 염려되네요. 진심입니다.”
피트 오어는 이렇게 재미없는 시리즈는 원치 않는 다며 여유를 부렸다.
세인트루이스는 작년에 보스턴을 상대로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보여줬다.
그런데 올해는 4대 0으로 끝나는 분위기, 이런 경기는 보스턴 선수들도 원치 않을 거라며 처형장에 핏물을 들이 부었다.
‘겨우 이 정도였나.’
마운드에 오른 다카기도 맥이 빠지는 건 마찬가지, 작년보다 더 강해진 줄 알았는데 세인트루이스는 고양이에서 생쥐로 전락했다.
아니, 상대는 작년처럼 고양이고 우리가 너무 강해진 건가.
어느 쪽이든 재미없긴 마찬가지, 벌어진 점수 차 때문에 긴장감도 떨어져버렸다.
‘무슨 공이 이 따위야?’
세인트루이스 타자들은 다카기의 빠른 볼에 전혀 대응하지 못 했다.
사이드암 투수는 공을 횡 방향으로 채기 때문에 역회전이 많이 걸린다.
그런데 다카기는 쓰리 쿼터 투수, 평균 96마일이 넘는 공이 역회전이 걸려 날아온다고 상상해 보자, 빠른 공은 궤적을 미리 예상하고 스트라이크 존 앞에서 때려야 하는데 역회전이 걸렸으니 공은 타자가 생각하는 반대 방향으로 흘러나가는 흘러간다.
한마디로 지랄 같은 공, 포수도 잡기 힘든 공을 타자가 제대로 칠 수 있을까.
지켜보면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가니 미칠 노릇, 빠른 볼이라는 걸 알고도 당하는 패턴은 계속 반복됐다.
“떨어집니다!! 체인지업!! 오늘 경기 8번 째 탈삼진입니다.”
“앞으로 보스턴은 월드시리즈를 할 때 다카기는 제외하고 경기를 해야겠네요. 그 정도는 봐줘야 시리즈가 팽팽하게 흘러갈 것 같습니다.”
“지금 포스트시즌 평균자책점이 0.26입니다. 0.26이요. 누가 이런 투수를 앞에 두고 희망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해설위원들의 칭찬이 쏟아지는 사이, 투 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서 스티브 도허티가 타석에 들어섰다.
오늘 두 타석 모두 범타, 내가 치지 않으면 누가 치겠나. 3차전을 위한 분위기 전환을 위해서라도 뭔가 보여줘야 했다.
“스트라이크!!”
보스턴 배터리는 스트라이크 존 바깥쪽을 공략했다.
도허티는 올 시즌 정규시즌에서 30홈런을 넘기는 동안 삼진을 67개 밖에 당하지 않았을 정도로 정교한 타격을 하는 선수다.
그 비결은 넓은 히팅 범위, 아무리 좋은 타자도 히팅 범위를 넓히는 건 어렵다. 그게 가능하다는 건 잡아당기기와 밀어치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는 건데, 기계가 아닌 이상 그런 복잡한 기술을 시즌 내내 유지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좌우를 찌르며 스윙을 흔드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첫 타석에서 몸 쪽 승부로 잡아당기는 타격을 유도한 보스턴 배터리는 두 번째 승부에서 철저한 바깥 쪽 승부로 도허티를 흔들었다.
이번에도 비슷한 패턴, 생각보다 먼 코스에 콜이 울리자 도허티는 불만을 중얼거렸다.
“이게 정말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거야? 미쳤군!!”
경기가 잘 안 풀리다보니 심판에게 짜증을 내는 상황, 첫 타석에서 보여준 그 냉정함은 어디에 간 건가. 2구가 파울이 되자 초조함은 더 심해졌다.
“끌려 나옵니다!! 삼진!! 도허티의 세 번째 타석은 삼구 삼진입니다!!”
“아 ~ 지금 설전이 오가고 있는 것 같은데요.”
헛스윙을 돌린 도허티는 배트를 집어던지며 판정에 불만을 표했다.
일이 커지기 전에 미드키프 감독이 튀어나와 중재에 나섰지만 도허티는 헬멧까지 집어던지며 불만을 표출, 이렇게 팀의 중심을 잡아줘야 할 선수까지 자멸해버렸다.
도저히 승리를 기대할 수 없는 분위기, 이날 세인트루이스는 9대 0, 아무 것도 못하고 보스턴에 2승을 내줬다.
다카기는 무손을 밀어내고 포스트 시즌 통산 승리 역대 2위에 등극, 덤덤한 표정으로 기자들의 인터뷰에 응했다.
“다카기 선수, 역대 포스트 시즌 최다승 단독 2위에 오르셨는데, 지금 기분이 어떠십니까?”
“조금 허무하네요. 그 기록을 4년 만에 달성할 수 있는 거라곤 예상도 못했습니다.”
무손이 커리어 19년 동안 쌓은 업적을 겨우 4년 만에 달성하다니, 이걸 기뻐해야 하나.
앞으로 올라야 할 산이 하나 씩 줄어드는 기분, 기록지 좀 잘 찾아보라는 농담을 던졌다. 가끔 기록원들의 실수로 숨겨져 있던 기록이 하나 둘 나오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더 거대한 산이 나타나길 바라지만 기대하기 어려운 일, 다음 기자의 질문을 받았다.
“도허티와의 맞대결에서 완승을 거두셨는데, 그것도 허무하신가요?”
“허무하다기 보다는 ··· 실망이죠. 한때는 도허티가 제 목을 노릴 수도 있겠다는 위협을 느꼈는데, 이제는 그것도 아닙니다.”
도허티는 약점이 없는 선수로 알려져 있지만, 오늘 상대해보니 그런 것도 아니었다.
첫 타석은 힘으로 눌렀지만 그 다음은 좌우 제구로 흔들어 놓고 체인지업으로 마무리, 전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다른 걸 떠나서 생각이 있다면 주심과 설전을 주고받는 짓은 안 했을 텐데, 그런 정신력으로는 팀을 이끌 수 없다며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도허티는 당신의 라이벌이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겁니까?”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제 목을 노리는 게 도허티 한 명 뿐입니까? 클럽하우스만 들춰봐도 그런 놈은 수두룩합니다.”
울반스키는 대놓고 내 자리를 노리겠다고 선언했다.
팀 내에서도 반란분자가 있는데 나머지 29개 팀엔 얼마나 많은 선수들이 칼을 갈고 있을까.
그렇다고 쳐낼 수도 없는 스포츠의 세계, 다카기는 모든 선수들이 내 라이벌이라고 선언했다.
“처음부터 정해진 왕좌란 없는 거죠. 올해는 보스턴이 왕좌에 앉을 가능성이 높지만, 내년이 되면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비어있는 왕좌를 두고 30개 팀이 무한 경쟁을 벌이죠. 그 결과는 누구도 모릅니다. 내년에는 제가 왕좌에 앉을지 나락으로 떨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거죠.”
다카기는 왕좌 그 자체보다 야구를 즐기는 게임을 하고 싶다고 털어놨다.
누군가 내 목을 노린다면 그것도 재미있는 일, 정상의 자리에 올랐지만 덤벼오는 자를 비웃을 생각은 없었다.
“전 언제든 도전을 받아줄 용의가 있습니다. 그게 누구든 상관없죠, 다만, 오늘 같은 형편없는 결과는 바라지 않습니다.”
마지막까지 도허티를 저격한 다카기는 퇴근길에 올랐다.
3차전이 열리는 곳은 세인트루이스, 선수단을 따라가는 게 정상이지만 5차전까지 등판 계획이 없으니 집에서 승전보를 기다리기로 구단과 협의를 마쳤다.
“정말 괜찮아?”
“뭐가?”
“4차전에서 경기 끝나면 어쩌려고?”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키리코는 남편에게 질문을 던졌다.
4차전에서 끝나면 남편은 집에서 팀의 우승을 지켜보는 거 아닌가, 하지만 다카기는 상관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래야 선수들이 자극을 받겠지.”
다카기도 나름 계획을 세우고 보스턴에 남았다.
내가 세인트루이스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면 기자들은 어떤 기사를 내보낼까?
남은 경기는 다카기 없이도 이길 수 있다는 건가. 세인트루이스 입장에선 굉장히 자존심 상하는 일, 당연히 시리즈를 6차전까지 끌고 가기 위해 전력을 다할 거다.
그건 보스턴 선수단도 마찬가지, 거의 넘어 온 분위기가 다카기 한 명 빠졌다고 세인트루이스로 넘어가면 그것도 자존심 상하는 일 아닌가.
내가 빠져줘야 전력 승부가 되는 시리즈, 그렇게 싸움을 붙여놓고 구경하는 여유를 부렸다.
“그리고 여기 남은 이유는 또 있어.”
“뭔데?”
“알면서 왜 그래?”
둘째 만드는데 열중하고 있는데, 세인트루이스로 가버리면 뭐가 되나.
지금은 마침 아내의 배란기, 모든 건 때가 있는 법 아니겠나. 월드시리즈 우승도 중요하지만 가정사도 중요하게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