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199화 (199/361)

199화. 왕좌 앞에 군림하는 자 - (13)

셰퍼드의 적시타로 기선을 제압한 보스턴은 차근차근 리드를 벌리며 승리에 가까워졌다.

세인트루이스는 작년 시즌의 악몽을 떨쳐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역부족, 데이빗 크로스는 내친 김에 도허티의 기꺾기에 나섰다.

“너 혹시 다카기를 라이벌로 생각 하냐?”

반응은 하지 않았지만 타격을 준비하던 도허티는 뜨끔했다.

의식을 안 한다면 거짓말, 이어지는 독설이 빈틈을 파고들었다.

“미안하지만 그 자식은 너한테 볼 일 없어. 우리부터 넘고 가라고 애송아,”

초구부터 깊숙한 몸쪽, 일본의 어느 포수는 타자가 다치는 걸 방지하기 위해 몸쪽 공이 오면 정보를 흘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그건 조금만 생각해보면 헛소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내가 살려면 상대를 잡아야 하는 게 스포츠, 그딴 식으로 리드를 하는 포수가 어디에 있나.

빈볼에 논란이 일어나자 임시방편으로 내세운 변명에 불과할 뿐, 몸쪽은 널 병원으로 보내더라도 이기겠다는 의지, 크로스 포수는 트래시 토크와 계속되는 위협구로 도허티의 신경을 건드렸다.

딱 ~ !!

“파울입니다. 카운트는 원 볼 투 스트라이크”

“도허티가 공을 끝까지 보는 편이라 몸에 맞는 볼이 올 시즌 유독 많았거든요. 역시 크로스가 노련하네요.”

도허티는 몸쪽 공을 따라다니다. 수세에 몰렸다.

팀의 중심타자라 집중견제에 시달린 게 사실, 올 시즌 좋은 성적을 거두긴 했지만 그 반작용으로 사구를 17개나 맞았다.

퇴장 당하면 나도 손해 팀도 손해, 강하게 어필하지 못하고 그냥 넘겼더니 몸 쪽 승부는 더 심해지고 있다.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이 자리는 월드시리즈, 화도 못 내고 끓는 속만 다스렸다.

“와아아 ~ !!”

결정구는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싱커, 헛스윙을 돌린 도허티는 온갖 조롱을 맞아가며 더그아웃에 입성했다.

왕좌가 코앞인데 올해도 보스턴에 막히는 건가. 주포가 연신 침묵하면서 세인트루이스 더그아웃은 침묵에 잠겼다.

“너무 괴롭히진 마. 내 몫도 남겨두라고”

한편 다카기는 더그아웃에서 크로스와 농담을 주고 받았다. 자신감을 짓이겨놓으면 내일이 재미 없는 법,  2차전 선발 등판을 앞둔 몸이라 재미없는 승부는 원치 않았다.

하지만 보스턴의 페이스에 완전히 말린 세인트루이는 7회까지 12점을 내주며 붕괴, 1루수로 출전한 도허티도 평범한 바운드 송구를 빠트리는 대형사고를 쳤다.

대등한 경기는 도저히 바랄 수 없는 분위기, 세인트루이스 선수단은 침통한 얼굴로 호텔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할 말은 많지만 다들 자제하는 분위기, 호텔에 입성한 도허티는 침대에 머리를 처박고 괴성을 내질렀다. 오늘은 인생에서 손꼽는 최악의 날, 내일 경기도 잘 될 것 같지 않아 불안감은 더욱 깊어졌다.

‘뭐야?’

마침 날아온 문자, 천천히 몸을 일으킨 도허티는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찬물에 샤워 한 번 하고 잊어버려라]

그 웬수 같은 놈에게 날아든 참견, 그러고 보니 지난 번에도 내게 통보로 가장한 협박을 하지 않았던가. 이제 와서 걱정해 주는 척 하다니, 곱게 들릴 리 없었다.

[문자를 보냈으면 답을 해 인마]

무시했더니 오히려 역정, 도허티는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냐는 답을 보냈다.

[너랑 붙는 건 그라운드면 충분해.]

[그럼 내일 붙으면 되잖아. 왜 문자까지 보내서 시비를 거는 건데?]

[네가 너무 형편없는 게임을 하기에 걱정 돼서 문자했다. 그래가지고 내 라이벌 노릇 하겠냐?]

도허티는 휴대폰을 세게 움켜쥐었다. 역시 날 놀리려고 이러는 게 분명, 집어던질까 하다가 이어지는 참견에 주목했다.

[찬물로 샤워하고 푹 자라. 그리고 내일 새로운 마음으로 나와]

[난 찬물 싫어해]

도허티는 바로 퇴짜를 놨다.

운동선수의 섬세한 몸에 찬 물을 대라니, 이게 지금 날 우롱하는 건가. 하지만 다카기는 찬물의 효능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놨다.

장인어른이 의사, 아내도 의사 코스를 밟고 있는 엘리트, 그동안 주워들은 게 있으니 거짓말 따윈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성 기능에도 좋지. 아, 좋아져 봤자 넌 쓸 데도 없지?]

걱정해주나 싶더니 깨알같이 이어지는 도발,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도허티는 수신차단을 해버렸다.

흥분해서 잠도 안 오고 침대 위에서 뒹굴뒹굴, 그러다 웬수의 조언을 떠올렸다.

정말 불면증에 효과가 있는 걸까. 태어나서 찬물 샤워는 처음, 정신이 번쩍드는 한기에 도허티는 가냘픈 신음소리를 냈다. 다른 건 몰라도 머릿속이 개운해진 느낌, 덕분에 늦게나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애기야, 저기 아빠 있다.”

“웅?”

“저기 봐, 저기”

다음 날 열린 월드시리즈 2차전, 키리코는 아들을 품에 안고 응원을 왔다.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있는데 어제 너무 무리를 한 남편, 어차피 둘째는 곧 가질 예정이었지만 하룻밤을 같이 보낸 아내 입장에선 살짝 걱정이 됐다.

“안녕하세요. 인터뷰 좀 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이때 끼어든 리포터, 유학 생활 4년 차에 접어든 키리코는 유창한 영어로 인터뷰에 응했다.

“남편이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있는데 걱정되진 않나요?”

“자기관리는 철저한 사람이에요. 별로 걱정하는 건 없습니다.”

“이건 좀 뜬금없는 질문일수도 있는데요. 일본을 대표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요? 일본에 대해 잘 모르는 팬들을 위해 간략하게 한 말씀 해주시죠.”

다카기가 유명해지면서 일본에 대한 보스턴 팬들의 관심도 높아진 게 사실, 하지만 냉정하게 따지면 미국인들은 중국 - 한국 - 일본을 구분하는 개념이 없다.

쿵푸를 하는 게 일본인지 한국인지 내가 알 게 뭐람?

생긴 것도 비슷하고 뭐가 다른지 구분이 안 되는 게 사실, 리포터의 질문에 키리코는 생각에 잠겼다.

‘음 ··· 그런 게 있었던가?’

일본을 대표할 수 있는 특징? 그게 뭘까? 어려운 설명을 해봤자 이 사람들이 알아들을 리 없고, 기지를 발휘했다.

“일본을 대표할 수 있는 건 제 남편이에요.”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요?”

“당연하죠. 일본은 잘 몰라도 제 남편을 아는 사람은 여기에 차고 넘쳤잖아요. 아닌가요?”

“하하 ~ 그렇군요. 그게 정답이네요.”

주위 팬들도 열화와 같은 함성으로 키리코의 뜻에 동조했다.

일본? 그까짓 거 모르면 어떤가. 저 위대한 선수가 우리 팀에 있다는 게 중요, 일본 사람들이 김치를 먹든 쿵푸를 하든 그딴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자, 오늘 보스턴의 마운드는 다카기 하루요시가 책임집니다. 이번 포스트 시즌 성적은 4경기 등판, 4승 무패 평균자책점 0.34, 26이닝 동안 볼넷 4개, 탈삼진은 35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난 휴스턴 전에서 살짝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5이닝만 던지고 마운드를 내려왔거든요. 오늘은 승리도 중요하지만 건재하다는 걸 보여줘야 합니다.”

다카기는 초구부터 96마일 빠른 볼을 스트라이크 존 구석에 꽂아 넣었다.

지난 경기와는 확실히 다른 구위, 피트 오어 해설위원은 쓸데없는 걱정을 한 것 같다는 입장을 표했다.

‘너는 달라진 게 없구나.’

공 하나 던졌을 뿐이지만, 세인트루이스 선수단이 느끼는 압박감은 대단했다. 저 녀석의 구위에 막혀 준우승에 그친 게 작년 일 아는가.

제법 시간이 흐른 일이지만 그날의 악몽은 지금도 또렷, 정신을 바짝 차렸지만 그런다고 공략할 수 있는 공이 아니라는 게 문제, 첫 두 타자는 손도 못쓰고 아웃 당했다.

[First baseman, No 18, Steve Dougherty]

“우우 ~ 우 ~ ”

“XXXX off(X까 인마)!!”

이어지는 스티브 도허티의 타석, 극성팬들은 어제와 다름없는 환영을 표했다.

하지만 어제 악몽은 깨끗이 털어낸 도허티는 타석에서 차분한 자세를 유지, 초구부터 위협적인 타구를 날려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잠재웠다.

딱 ~ !!

“파울입니다. 오늘은 상당히 공격적인데요.”

“그것도 그렇지만 볼을 오래 안 보네요. 본인이 쳐야 할 공이 뭔지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몸 쪽 승부가 하루 이틀인가. 역시나 했는데 초구부터 몸 쪽, 파울은 됐지만 만족할만한 타격에 도허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위험한데’

울반스키는 바깥쪽으로 빠져 앉았다.

이런 리드가 에이스의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어제와는 확실히 다른 도허티의 스윙, 몸쪽 승부는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시끄러워, 방향은 내가 정한다.’

다카기는 바로 거부 사인을 냈다. 1년을 기다린 재대결, 피하는 승부는 하고 싶지 않았다.

따악 ~ !!

“다시 몸 쪽!! 이번에도 벗어납니다. 다카기도 후진이 없는데요.”

“작년 7차전에서 도허티에게 맞은 홈런을 기억하고 있겠죠. 자존심이 워낙 대단한 선수라 피하진 않을 겁니다.”

3구도 몸 쪽, 조금만 어긋나도 장타로 이어질 수 있는 코스지만 다카기는 그 범위를 살짝 벗어난 제구를 뽐냈다.

그걸 따라가서 걷어내는 도허티도 대단, 메이저리그 투타를 대표하는 선수의 맞대결에 다들 마른 침을 삼켰다.

따악 ~ !!

“다시 파울입니다!! 음 ··· 이쯤에서 변화구 하나 던지면 좋을 것 같은데요.”

“글쎄요. 지금 분위기가 변화구는 아닌 것 같고, 굳이 바꾼다면 코스에 변화를 주지 않을까요?”

피트 오어의 예상대로 바깥 쪽 높은 코스로 들어가는 공, 순간 움찔했지만 도허티는 차분하게 골라냈다.

올 시즌 골라낸 볼넷은 104개, 집중 견제를 받느라 이런 화끈한 정면 대결을 펼쳐준 투수는 손에 꼽을 정도다.

짜증은 나지만 실력과 배짱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대, 도허티는 반드시 널 넘고 가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딱 ~ !!

이번에는 끝에 걸린 파울, 구위를 이겨내지 못한 배트가 부러지자 도허티는 장비 교체를 위해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잘하고 있어. 오늘은 자네가 반드시 해줘야 돼”

세인트루이스의 존 미드키프 감독은 타석으로 향하는 도허티의 어깨에 힘을 실어줬다. 역시 다카기와 정면 승부를 할 수 있는 타자는 저 선수 뿐, 도허티가 해주지 못하면 오늘 경기도 어렵다고 봤다.

‘이번에도 빠른 볼이려나.’

그 사이, 도허티는 생각을 정리했다.

아무리 구위에 자신이 있더라도 빠른 볼을 연속해서 5개나 던질까. 불리한 볼 카운트라 빠른 볼에 타이밍을 맞췄지만 체인지업도 은근 의식됐다.

‘빠른 볼?!!’

5구도 빠른 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볼을 끝까지 보는 버릇이 도지면서 스윙은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배짱 승부에서 패배해버린 것, 도허티는 배트를 집어던지는 격한 반응을 보였다.

올 시즌 67개의 삼진을 당했지만 그 중 가장 짜증나고 분한 삼진, 반면 완승을 거둔 다카기는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팬들의 함성을 맞아가며 더그아웃에 입성했다.

“넌 정말 최고야!!”

“보는 나도 흥분됐다고!!”

보스턴 선수단은 어느 때보다 격한 환대를 표했다.

빠른 볼만 5개를 던져 도허티를 잡아내다니, 이런 승부를 할 수 있는 투수가 메이저리그에 몇 명이나 될까. 하지만 다카기는 벤치에서 차분하게 다음 투구를 준비했다.

재대결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 첫 타석에서 이겼다고 우쭐해 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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