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왕좌 앞에 군림하는 자 - (12)
[1승만 더하면 역대 단독 2위]
월드시리즈를 앞두고 보스턴 지역 신문은 기사 하나를 내보냈다.
다카기의 통산 포스트 시즌 성적은 13승, 역대 포스트 시즌 10승을 거둔 6명의 대선배는 일찌감치 제쳐버렸다.
포스트 시즌 역대 2위는 세인트루이스 캡을 쓰고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마이크 무손, 1위는 뉴욕의 전설 샘 파슨스의 22승이다.
샘 파슨스는 뉴욕의 월드시리즈 5회 우승을 이끈 전설적인 에이스, 하지만 마이크 무손은 포스트 시즌에서 많은 승을 거두고도 월드시리즈 우승에 이르지 못했다.
통산 월드시리즈 성적이 0승 4패 평균자책점 5.73으로 부진했던 탓, 너무 끔찍한 투구라 비교적 온건한 세인트루이스 팬들도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무관의 제왕이라는 별명에 딱 어울렸던 선수, 올해 69세가 된 마이크 무손은 기자들의 인터뷰에 겸손한 반응을 내놨다.
“다카기는 월드시리즈 우승을 2번이나 경험한 선수입니다. 거기다 월드시리즈에서만 4승을 했죠. 제 위를 뛰어넘을 자격이 충분합니다.”
어쩐지 짠한 내용의 인터뷰, 월드시리즈 우승을 한 번도 못 했으니 본인 기록이 언급될 때마다 얼마나 속이 쓰릴까.
뭣보다 모든 책임을 무손에게 떠넘길 순 없었다.
당시 메이저리그는 200이닝 투구는 알아주지도 않을 정도로 선발투수 혹사가 심했다.
마이크 무손도 전성기동안 매년 260 이닝을 넘게 던진 고무팔, 특히 1982년엔 정규 시즌 포함 339이닝을 던졌다.
올해 정규시즌 포함 243이닝을 던진 다카기가 어린애처럼 보일 정도, 아무리 야구를 바라보는 시선이 차이가 있던 시대라고 해도 너무 가혹한 투구였다.
그런데도 팀을 위해 꾸역꾸역 던져댄 투수, 통산 287승 - 3702 이닝 - 3559탈삼진을 기록한 대투수 아닌가.
내가 무손을 뛰어넘었다는 말을 들을 자격이 있을까. 다카기는 그건 아닌 것 같다고 선을 그었다.
“무손은 충분히 정상에 오를 실력이 있는 선수였습니다. 다만 주위의 도움을 못 받았을 뿐이죠. 제가 월드시리즈에서 잘 던진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받쳐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편안하게 던질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죠. 포스트 시즌에서 몇 경기 잘 던졌다고 제가 무손을 뛰어넘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아직도 제가 넘어야 할 산은 많고 무손도 그 중 하나입니다.”
평소와 다른 겸손한 인터뷰, 스스로를 낮췄던 무손은 다카기의 떠받침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날 넘어서야 할 목표로 생각해준다면 영광이라는 말도 덧붙였지만 세인트루이스 팬들의 반응은 달갑지 않았다.
[도대체 누구 편이야?]
[당신은 세인트루이스의 전설이다. 상대팀을 응원하는 건 보기 좋지 않다.]
세인트루이는 올 시즌도 월드시리즈 무대에 올랐다.
작년에 보스턴에게 당한 치욕을 갚아줄 차례, 그런데 팀 레전드라는 사람이 상대팀 에이스를 칭찬하고 그 칭찬에 우쭐하다니, 창피하지도 않은가.
배신감을 느낀 팬들은 스타디움 앞에 설치된 무손의 동상을 철거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왕을 그 따위로 대접하니 우승을 못하는 거다.]
다카기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내부분열을 조장했다.
무손은 커리어 내내 세인트루이스에서만 뛰었고 팀을 위해 높은 연봉을 받을 수 있는 기회도 놔버렸다.
그렇게 계속된 투혼으로 포장된 혹사, 다른 팀에서 좀 더 나은 대접과 보좌를 받았다면 우승은 벌써 했을지도 모른다. 적장이라도 존중해야 할 상대, 서로 덕담 좀 나눴다고 무관의 제왕에게 돌을 던진다? 창피한 줄 알라며 비꼬았다.
[너도 세인트루이스 떠나는 게 좋을 거다. 그 팀은 가망 없어.]
여기서 그치지 않고 흔들기는 계속됐다.
현재 세인트루이스를 대표하는 선수는 도허티, 작년 시즌 22홈런을 때리며 혜성처럼 등장하더니, 올 시즌은 타율 0.327, 홈런 34개, 113타점을 찍어버렸다.
더 무서운 건 갓 스물을 넘긴 나이, 앞으로 세인트루이스를 넘어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타자가 될 재목이다.
세인트루이스는 역대 9회, 내셔널리그에서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한 구단, 하지만 통산 23번의 월드시리즈 진출에서 14번이나 들러리 신세가 된 어둠을 공유하고 있다.
도허티는 작년에 이미 들러리가 된 경험이 있는 선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다카기에게 당한 작년 시즌을 보면 제 2의 무손이 될 위험은 충분했다.
[제발 부탁인데 좀 닥쳐줬으면 좋겠다.]
[왜 그래? 난 재미있는데?]
도허티는 여론전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팀 레전드를 흔들더니 이젠 나까지 흔드는 건가. 다카기의 실력은 인정했지만, 우리가 해야 할 대화는 이게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실전에서 전력을 다할 뿐, 하지만 다카기는 난 재미있다며 코웃음 섞인 반응을 보였다.
* * *
“자, 2022 시즌의 대미를 장식할 경기를 앞두고 있습니다. 이곳은 보스턴의 홈구장 벡 배이 파크, 5만 관중석은 이미 발 디딜 곳 없이 들어찼습니다.”
“경기장 밖도 상황은 마찬가지죠. 구단 역사상 첫 쓰리 핏 도전, 보스턴 시민들은 축제를 즐길 준비가 돼 있습니다.”
월드시리즈 1차전을 앞두고 벡 배이 파크 일대는 15만이 넘는 인파로 북적거렸다.
보스턴 구단은 티켓을 구하지 못한 팬들을 위해 도시 곳곳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 보스턴 최고의 번화가답게 분위기는 뜨겁게 타올랐다.
“와아아 ~ !!”
“King!! King!! King!!”
잠시 스쳐지나간 왕의 얼굴, 별로 오늘 등판하는 것도 아닌데, 시민들은 열화와 같은 함성을 내질렀다.
구장 안에서도 들리는 바깥세상의 함성, 급할 게 없는 다카기는 여유롭게 코코아 한잔을 들이켰다.
해안 근처의 도시라 겨울이 되면 유독 쌀쌀해지는 날씨, 관중이 된 기분으로 경기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자, 오늘 선발 투수는 로버트 클레이튼입니다. 정규 시즌 32경기 등판, 16승 5패, 평균자책점 3.51, 192이닝 동안 볼넷 60개, 탈삼진은 180개를 기록했습니다.”
“정규시즌도 잘 해줬지만 포스트 시즌 성적은 더 좋죠. 지금까지 3승 무패, 평균자책점 2.50입니다.”
“보스턴이 무서운 게 주력 선수 중 25살을 넘는 선수가 거의 없다는 겁니다. 지금 이 라인업만 지켜도 우승권이라는 건데, 앞으로 우승은 최대한 뽑아내야겠죠.”
많은 구단이 30세가 다 된 선수에게 억 소리가 나는 대형계약을 안겨주는 건 윈 나우 전략 때문이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급함이 있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쓰는 것, 하지만 팜에서 건져 올린 선수가 줄줄이 터져버린 보스턴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오프 시즌 동안 부족한 부분만 살짝 덧칠하면 그만, 올 시즌 전력도 작년과 비교해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주요 전력층이 고정됐다는 건 그만큼 무서운 일, 당분간 전력 누수가 거의 없는 보스턴은 당분간 강력한 우승 후보로 군림할 게 분명하다.
어지간한 강팀도 넘어서기 어려운 전력, 올 시즌 95승을 거둔 휴스턴도 내리 4연패를 당하며 무너졌다.
세인트루이스는 얼마나 다른 모습을 보여줄지, 전문가들은 거의 다 비관적인 입장을 내놨다. 도박사들도 보스턴의 승리에 올 인, 그만큼 세인트루이스의 우승을 점치는 의견은 거의 없었다.
‘오늘도 내가 해야 되나.’
1회 초 세인트루이스의 공격,
도허티는 선봉부대가 전멸한 전장에 들어섰다. 다카기도 대단하지만 로버트 클레이튼의 활약도 무시 못 할 수준, 그래도 너는 잡고 간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스윙!! 크게 헛칩니다.”
“역시 싱커죠. 도허티도 쉽게 공략하진 못할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쉽진 않았다.
올 시즌, 로버트 클레이튼은 싱커 구사율을 70%까지 끌어올렸다.
싱커의 구속은 천차만별, 포심보다 더 빠른 싱커를 던지는 선수도 있는 반면, 포심에 비해 10km 정도 느린 싱커를 던지는 선수도 있다.
클레이튼은 전자의 경우, 포심은 평균 93마일 정도인데 싱커 평균 구속은 94.8마일이다.
땅볼 유도를 위해 던지는 공이지만 어정쩡하게 들어가면 장타로 이어질 위험이 큰 구종, 하지만 올 시즌 클레이튼은 싱커를 철저하게 구석을 찌르는 제구와 싱커 특유의 낙폭을 이용해 제법 많은 삼진을 엮어 냈다.
단순한 투구로도 좋은 성적을 낸다는 건 싱커에 위력이 있다는 뜻, 싱커를 의식한 도허티는 바깥 쪽 낮은 코스에 집중했다.
‘이건 어떠냐.’
오늘 보스턴의 포수는 데이빗 크로스, 몸 쪽 승부는 위험하지만 최근 상승세에 올라탄 클레이튼의 제구를 믿었다.
멋지게 몸 쪽으로 파고드는 공, 콜은 울리지 않았지만 깜짝 놀란 도허티는 몸을 뒤로 젖혔다.
그리고 다시 싱커, 1루 땅볼이 나오면서 세인트루이스의 1회 초 공격은 성과 없이 끝났다.
‘이건 내 마지막 무대야. 완벽하게 끝내야 돼.’
데이빗 크로스는 올 시즌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기로 했다.
울반스키 영입으로 한때 홀대를 받았던 몸, 하지만 왕을 존중할 줄 모르는 팀은 우승할 자격이 없다는 다카기의 여론전에 수더랜드 단장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크로스는 월드시리즈 진출을 4번이나 이끈 베테랑, 이런 사람을 그냥 내치는 게 말이 되나. 짧았던 생각, 유니폼을 벗으면 구단 인스트럭터나 코치직을 맡기기로 했다.
그러다 잘 되면 감독까지 가는 것,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 크로스도 서운한 마음을 접고 구단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번 월드시리즈는 내 마지막 무대, 구단의 배려로 1차전 선발 출장 기회를 받은 크로스는 어느 때보다 열의를 불태웠다.
“매일 치는 것도 지겹다 지겨워.”
이어지는 1회 말 보스턴의 반격,
첫 타석에서 안타를 때려낸 폴 돈론은 도허티(작년 시즌 외야수 -> 올 시즌 1루로 전향)의 귀에 들으라는 식으로 말을 흘렸다.
정규 시즌 251안타, 포스트 시즌 15안타, 올 시즌에만 도합 266안타를 때려냈다.
안타 치는 게 지겨울 정도, 우리는 이만큼 여유가 넘치는데 너는 왜 이렇게 얼굴이 딱딱하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것들이 이제는 단체로 ··· ’
도허티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다카기는 원래 그런 인간이라 그러려니 했는데 이젠 단체로 지랄을 떠는 보스턴, 그 왕에 그 신하들이라고 다들 입이 더러운데 반드시 닥치게 해주겠다며 맞받아쳤다.
“그러시던가, 먼저 간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어진 J. J. 핵먼의 호쾌한 타구, 3루까지 진출한 돈론은 1루를 향해 손가락 세리머니를 날렸다.
닥치게 해준다더니 이게 그 답인가. 돈론의 조롱에 초조함까지 겹치면서 도허티의 냉정함은 조금씩 흔들렸다.
‘잘 컸네. 그렇게 해야지.’
벤치에 앉은 다카기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평소 틈만 나면 면박을 준 폴 돈론, 덕분에 어지간한 독설은 통하지도 않는 수준으로 멘탈이 올라갔다.
그것뿐만 아니라 이젠 알아서 상대 팀을 도발할 정도, 다카기가 워낙 독설가라 다른 선수들도 알 게 모르게 그 영향을 받았다.
팀 전체가 악의 소굴, 그보다 더 독한 보스턴 팬들은 ‘Cut him down(찍어버려)!!'을 연호하며 위협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따악 ~ !!
“투수 옆을 지나 내야를 빠져 나갑니다!! 3루 주자는 홈으로!! 1루 주자는 2루를 지나 3루까지 진출합니다!! 데이브 셰퍼드의 적시타!! 타점 머신의 본능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보스턴이 너무 강하네요. 이래서야 싸울 맛이 나겠습니까?”
해설위원 피트 오어는 지금의 보스턴을 상대하려면 과거의 강팀들을 소환해야 한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한 마디로 현시대에 맞설 수 있는 적수가 없다는 뜻, 전문가들의 예상은 현실과 어긋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