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196화 (196/361)

196화. 왕좌 앞에 군림하는 자 - (10)

“다들, 오늘은 연습을 조금 할까?”

ALCS 1차전을 앞두고 브라이스 감독은 이례적인 사전훈련을 실시했다.

코치가 공을 옆에서 던져주는 티 배팅, 배팅 볼 투수가 던져주는 볼은 실전에 가까운 스피드로 날아오기 때문에, 타격할 때 자세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기 어렵다.

보스턴 타선이 포스트시즌에서 정규시즌 만큼 파괴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답을 찾으려면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이쪽은 라이브볼 피칭으로’

주전 선수들과 달리 벤치 멤버들은 라이브볼 배팅을 했다.

주전들은 거의 매일 경기에 나가기 때문에 티 배팅을 해도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후보 선수가 티배팅을 한다? 라이브볼 배팅으로 실전 감각을 유지하는 게 효과적, 그리고 포스트 시즌은 단기전 아닌가.

대타를 쓰더라도 컨디션이 좋은 선수를 쓰는 게 당연, 눈에 보이는 통계보다 라이브볼 배팅 결과를 더 중시했다.

브라이스 감독은 겉보기엔 방관주의자처럼 보이고 선수 덕을 본다는 조롱 아닌 조롱도 당하지만, 사실 감독이 할 수 있는 일은 다하는 편이다.

올 시즌 보스턴이 118승을 거둔 건 오로지 선수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눈에 보이지 않는 지휘봉을 휘두르는 브라이스 감독의 존재도 무시하기 어려웠다.

따악 ~ !!

사전훈련이 효과가 있었는지 보스턴 타선은 초반부터 폭발했다.

여기에 대타 작전까지 성공하며 순조롭게 풀린 공격, 9대 4로 ALCS 1차전을 잡아냈다.

[숀 캔디오티, 사인 훔치기 의혹 제기]

하지만 서로 얼굴을 붉힐 일도 발생, 보스턴 타선에 난타를 당한 캔디오티는 보스턴이 사인을 훔친 탓에 제대로 투구를 할 수 없었다는 말을 흘렸다.

휴스턴의 포수 잭 리더만도 같은 입장, 주루코치가 수상한 행동을 하기에 포수 미트를 계속 움직여야 했고 이때문에 캔디오티의 제구가 흔들렸다는 여론전을 펼쳤다.

[118승 거둔 팀이 95승 한 팀 사인을 훔쳐서 뭐하나? 훔쳐도 그쪽에서 훔치는 게 맞는 거 아닌가?]

경기엔 나서지 않았지만 다카기는 근거없는 소리라고 맞받아쳤다. 사인 훔치기는 약팀이 강팀을 이기기 위해 하는 짓 아닌가.

그리고 정말 그랬다고 하더라도 전자장비를 동원하지 않은 도둑질은 눈감아 주는 게 이 세계의 룰, 여기에 보스턴의 주루코치 브라이언 콘티의 반응이 압권이었다.

[노안이라 수술을 준비하고 있다. 사인을 훔칠 정도로 눈이 좋아졌다면 지금 당장 수술 취소할 것]

브라이언 콘티는 실제로 수술을 잡아둔 병원과 예정일까지 공개했다.

망신살이 뻗친 휴스턴은 유구무언, 그리고 사인훔치기 피하겠다고 포수 미트를 움직이는 바보가 어디에 있나.

포수 미트는 투수의 과녘같은 존재, 무슨 아케이드 게임도 아니고 이걸 움직이면 투수가 총을 제대로 쏠 수 있을까.

괜히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자멸했을 뿐, 수더랜드 단장은 대응할 가치도 없다며 의혹을 일축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2차전, 감을 잡은 보스턴 타선은 미친듯이 폭발했다.

ALDS에서 경기 당 4점에 그쳤던 그 타선이 맞나. 사실 이것도 나쁜 건 아니지만, 정규시즌에서 경기 당 6점을 냈던 기록을 생각하면 아쉬웠던 게 사실, 감을 잡은 타선 덕분에 2차전도 11대 2로 잡아냈다.

[다카기, 3차전 등판 안 한다.]

여유를 얻은 덕분일까. 보스턴은 3차전 선발로 브랜든 맥케이브를 예고했다. 그래도 4차전은 등판할 예정, 다카기는 선수단과 함께 휴스턴으로 이동했다.

‘나도 한 대 때려야 되는데’

훈련을 앞두고 다카기는 간만에 배트를 잡았다.

1 - 2차전에서 무려 21점을 낸 타선, 남들은 다 신나게 치는데 나는 거기 끼면 안 되는 건가.

이런 때는 투수도 타격을 하는 내셔널리그가 부러울 지경, 아쉬운대로 프리배팅에 나섰다.

따아악 ~ !!

‘어이쿠’

타격을 지켜보던 브라이스 감독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잠시 잊고 있었던 다카기의 타격재능, 훈련이 끝나고 남는 시간에 하는 타격이라 말릴 이유는 없는데 저러다 몸에 무리가 오는 게 아닌지 염려됐다.

“그 정도로 하지 그러나?”

“오늘 한 타석 나가게 해 준다면 생각해 볼게요.”

소심한 반란에 브라이스 감독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타격은 이제 포기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 라이브 볼도 저만큼 멀리 칠 수 있다면 생각해 보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조심해서 던져야지.’

배팅볼 전담 투수 마이크 피스터는 바깥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상대는 팀 내 최고 연봉자이자 상징이나 다름없는 선수, 여기서 배팅 볼 하나 잘못 던졌다가 다치면 누가 욕을 먹을까. 다카기가 벌인 일이지만 잘못하면 내가 욕을 먹을 수도 있는 일, 그리고 바깥쪽은 몸 쪽에 비해 풀 스윙을 하기 어렵다.

모두의 안전을 위한 일, 하지만 다카기는 멀찌감치 도망가는 볼에 못마땅한 반응을 보였다.

“칠 수 있게 던져야지 이게 뭐야?”

“알았어. 알았어.”

면박을 당한 마이크 피스터는 손짓으로 상대를 다독였다.

대충 던지면 알아서 포기할 줄 알았는데, 그냥 하나 던져주고 끝내는 게 낫겠다며 마음을 정했다.

따아악 ~ !!

“오 ~ ”

가볍게 밀어낸 타구는 쭉쭉 뻗어 우측 담장을 직격했다. 그렇게 몸을 많이 틀지도 않았는데 생각보다 멀리 가는 타구, 몇몇 선수들은 그 타고난 파워에 놀라움을 표했다.

‘자네가 타석에 설 일은 없을 거야.’

브라이스 감독은 연습 타격이라도 마음껏 하게 내버려뒀다.

2패에 몰린 휴스턴은 지금 한껏 민감해 져 있다. 에이스를 타석에 내세우는 건 그냥 싸우자는 짓, 한동안 타격을 못해 금단현상에 시달리는 것 같은데 지금만이라도 마음껏 휘두르게 내버려뒀다.

“자네는 오늘 쉬는 게 어떻겠나?”

“뭐라고요?!!”

경기를 앞두고 브라이스 감독은 실 쿠퍼에게 벤치 행을 지시했다.

7번이라고 해도 올 시즌 22홈런을 친 나를 벤치에 앉히겠다니, 쿠퍼는 이유가 뭐냐며 반발했다.

“그 이유는 자네도 알잖나. 그걸 내 입으로 말하길 바라나?”

오늘 휴스턴은 로니 에스타시오를 선발로 예고했다.

최고 97마일까지 나오는 포심에 낙차 큰 커브를 앞세우는데 실 쿠퍼는 그 앞에서 통산 37타수 4안타, 철저하게 약한 모습을 보였다.

이 정도면 그냥 빠져주는 게 나을 정도, 하지만 쿠퍼는 오늘은 다를 거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오늘은 정말 자신 있나?”

“당연하죠. 그 자식은 그동안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요.”

“ ··· 좋아, 자네를 믿어보지”

브라이스 감독은 입장을 철회했다.

사실 처음부터 쿠퍼를 명단에서 제외할 생각은 없었다. 그동안 쿠퍼가 에스타시오에게 너무 약세를 보였기에 약간의 자극을 줬을 뿐, 감독의 작전에 걸려든 쿠퍼는 평소보다 의욕을 불태웠다.

‘나도 미리 배워둬야 하나.’

한편, 다카기는 브라이스 감독의 용병술에 주목했다.

세상이 저 사람에 내리는 평가는 불펜을 잘 다루는 사람, 하지만 브라이스 감독과 3년을 함께 보낸 다카기는 그 이상의 평가를 내렸다.

보스턴이 브라이스 감독의 지휘 아래에서 월드시리즈 우승 3회를 이끌어 낸 게 단순한 우연일까?

타격 훈련이나 선발 투수 관리, 불펜 운용 그리고 심리전까지, 뭐 하나 딱히 부족한 게 없는 유형, 스타 출신 감독은 성공하기 어렵다는 편견을 단번에 뒤집어 버렸다.

은퇴를 생각할 나이는 아니지만 미래에 어떻게 될지 누가 아나, 좋은 지도자가 되려면 명장의 덕목도 알아둬야겠지. 오늘은 경기보다 감독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기울였다.

“1회 초 보스턴의 선공으로 경기기 시작됩니다. 선두 타자는 폴 돈론, 올 시즌 타율 0.351, 24개, 90타점, 포스트 시즌에서도 타율 0.343, 홈런 없이 5타점, 좋은 활약을 하고 있습니다.”

“이 대결은 흥미롭네요. 에스타시오가 승부를 피하는 유형은 아닌데, 돈론도 올 시즌 공격적인 타격으로 재미를 보지 않았습니까? 초구부터 승부가 나올 수도 있겠네요.”

누구보다 공격적인 투타의 맞대결, 자신의 구위에 믿음이 있는 에스타시오는 초구부터 빠른 볼을 밀어 넣었다.

‘제법 괜찮은데, 마음에 들었어.’

초구는 파울, 크게 한 번 돌려본 돈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위력적이지만 못 칠 수준은 아니다. 그래도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아낸 상대는 빠른 볼에 자신감을 얻었겠지, 변화구는 일단 머릿속에서 치워냈다.

2구도 예상대로 빠른 볼, 하지만 스트라이크 존을 크게 벗어나면서 카운트는 1볼 1스트라이크가 됐다.

‘빠른 볼로 계속 가는 건 위험한가.’

휴스턴의 조이스 맥필드 포수는 신중히 생각을 정리했다.

돈론은 빠른 볼에 강점이 있는 선수, 그렇다고 에스타시오가 변화구로 카운트를 잡을 수 있는 제구를 갖춘 건 아니다. 모험을 하기엔 위험, 장고 끝에 빠른 볼을 택했다.

따악 ~ !!

“투수 옆을 빠져 나가는 안타!! 폴 돈론이 첫 타석부터 좋은 타격을 보여줍니다.”

“타구가 아주 이상적인 방향으로 나갔네요. ALDS에서도 안타는 제법 쳤지만 질이 좋다고 하긴 어려웠는데 이젠 감을 완전히 찾은 것 같습니다.”

휴스턴 벤치는 초조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지난 2경기에서 무려 21실점, 이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면 승리도 없다. 내일은 다카기가 선발 등판, 오늘도 지면 사실상 끝 아닌가. 3차전은 반드시 잡아야 하는 경기, 에스타시오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었다.

이어지는 첩첩산중, J. J. 핵먼에겐 초구부터 커브를 구사했다.

예상했다는 듯 반응 없는 타자, 1루 주자 돈론도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왠지 보스턴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느낌, 홈에서 치르는 경기지만 보스턴을 응원하는 목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다시 볼입니다. 카운트는 투 볼 노 스트라이크,”

“에스타시오가 자신 있게 볼을 못 던지네요. 갑자기 커브 구사율을 올렸는데, 이런 투구는 빠른 볼이 받쳐주질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궁지에 몰린 휴스턴 배터리는 빠른 볼을 던질 수밖에 없게 됐다.

머리 회전이 빠른 핵먼은 바로 3구를 강타, 맞는 순간 스타트를 끊은 돈론은 3루까지 들어갔다.

또 득점권, 지난 2경기에서 1회부터 선취점을 내준 휴스턴은 반복되는 악몽에 몸서리를 쳤다.

‘역시 그렇군.’

타석에 선 데이브 셰퍼드는 주위를 살폈다.

파울 라인 선상에 떨어지는 장타를 막기 위해 내야진은 더 넓게 흩어진 상황, 덕분에 내야 구멍은 더 넓어졌다.

그에 반해 중견수는 좌측으로 치우쳐져 있다. 득점권에서 셰퍼드를 상대하는 전형적인 패턴, 이런 상황에서도 타구를 띄우는 게 최선 일까.

3루 주자를 생각하면 플라이에 집중해야겠지만, 넓어진 내야를 활용하는 것도 방법, 포스트 시즌 들어 별 활약이 없다보니 생각이 많아졌다.

‘그건 아니네.’

셰퍼드가 높은 공을 찍어 치자(파울) 브라이스 감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야가 넓어져 봤자 외야보다 넓을까. 멀리 칠 수 있는 건 그 자체로 엄청난 재능, 쥐구멍을 노리는 스윙에 의문을 표했다.

“쥐구멍을 노려서 뭘 어쩌자는 거야?!! 먼 곳을 봐!! 먼 곳!!”

벤치에 앉은 다카기도 목소리를 높였다.

정규시즌에서 50홈런을 때린 선수가 저러고 있으니, 내가 방망이를 잡아도 너보다는 멀리 치겠다는 도발도 덧붙였다.

정신을 차린 셰퍼드는 플라이로 방향을 틀었고, 좌측으로 가는 큼지막한 플라이로 3루 주자를 불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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