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왕좌 앞에 군림하는 자 - (7)
“아 ~ 떨어지는 볼 따라 나옵니다. 울반스키는 삼진으로 물러나는 군요.”
“변화구로 계속 승부를 걸었는데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하네요. 그래도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산호세 배터리의 집요한 선택은 승리로 막을 내렸다.
기회 남아 있지만 다소 맥이 빠지는 전개, 결정적인 찬스를 놓친 울반스키는 고개를 좌우로 가로지르며 아쉬움을 표했다.
다음 타석은 작년 월드시리즈에서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렸던 알 디즌, 결정적인 실책으로 5차전을 날려먹었던 경험 덕분에 이 정도 부담 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따악 ~ !!
“밀어 친 타구가 좌익수 앞에 떨어집니다!! 2루 주자는 일단 3루에서 멈추는 군요. 2사 주자 만루가 됩니다.”
“지금은 잘 세웠습니다. 돈론의 발이 느린 건 아니지만 홈을 노리기엔 조금 애매했어요.”
이제 타석에는 후안 위긴스, 첩첩산중에 산호세 진영은 한숨을 토해냈다.
최근 10년 동안 이렇게 강한 타선을 보유한 팀이 있었던가. 선발투수를 오래 끌고 가긴 어려운 분위기, 일찌감치 불펜을 예열시켰다.
‘이건 내 스타일이 아닌데’
타격을 앞둔 위긴스는 생각을 정리했다.
많은 코치들이 공이 홈 플레이트 안으로 들어 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지시를 하지만, 위긴스는 홈 플레이트 앞에 히팅 포인트를 두고 스윙을 한다.
문제는 이런 타격접근법은 변화구에 약점을 보인다는 것, 그래도 위긴스는 올 시즌 변화구에 문제없이 대처해 왔다.
투수가 변화구로 카운트를 잡을 수 있다는 걸 확인할 때까지는 무조건 빠른 볼을 노렸고, 초구에 원하는 볼이 들어오면 부숴버렸다.
올 시즌 위긴스가 성적을 대폭 끌어 올린 비결은 바로 0.411에 이르는 초구 타율, 그런데 지금 마운드를 지키고 있는 녀석은 변화구만 던져 울반스키를 잡아냈다.
위긴스의 타격접근법과 상극, 그걸 알고 있는 브라이스 감독은 오늘 변화구에 강점이 있는 j. j. 핵먼을 2번, 위긴스를 6번에 배치했다.
나는 이 상황에서도 빠른 볼을 노리는 타격을 해야 할까.
야구는 전략 게임, 위긴스는 그 짧은 순간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간파했다.
‘그럼 그렇지. 네가 별 수 있겠어?’
초구는 볼, 위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날 상대로 초구부터 빠른 볼을 던질 수 있을까? 2구도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공, 유리한 카운트를 만들어낸 위긴스는 3구에 승부를 걸었다.
따아악 ~ !!
“우측으로 멀리 가는 타구!! 계속 갑니다!! 넘어가느냐?!! 아 ···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일단 1루심은 홈런을 선언한 것 같은데 산호세에서 비디오 판독을 요청 했습니다.”
환희로 둘러싸였던 백 베이 파크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마침 전광판에 드러난 문제의 장면, 중계석에서도 타구를 두고 이런 저런 말이 오고 갔다.
‘금 넘었네.’
불펜에서 몸을 풀던 다카기는 화면을 확인하고 미련 없이 돌아섰다.
육안으로 봐도 파울 폴 대를 벗어난 타구, 쓸데없는 희망에 매달리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파울로 정정된 판정, 허공에 아쉬움 섞인 발차기를 날린 위긴스는 터벅터벅 타석으로 돌아왔다.
“바깥쪽!! 들어왔다는 판정입니다. 오 ~ 여기서 이런 제구를 보여주나요?”
“역시 산호세가 저력이 있네요. 쉽게 무너지진 않습니다.”
스트라이크 판정에 위긴스는 다소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절대 흥분해선 안 된다는 금기를 깬 타자가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결과는 좌익수 플라이, 안타 세 개를 때리고도 득점을 올리지 못한 보스턴이 아쉬움을 삼키는 사이, 산호세 선수단은 격렬한 하이파이브를 주고받았다.
‘공세? 꿈도 꾸지마라.’
2회 초 산호세의 반격, 다카기는 전력으로 세 타자를 찍어눌렀다.
체력을 아끼겠다는 어설픈 생각은 틈을 열어주기 마련, 적이 공세를 준비하기 전에 폭격을 퍼부었다.
내가 마운드에 버티고 있는 한, 너희들은 방공호에 틀어박혀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닫게 해준 것, 덕분에 흐름이 산호세 쪽으로 넘어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폭격 좀 제대로 해라.’
하지만 보스턴의 공세도 시원치 않긴 마찬가지, 5회까지 안타 7개 포함 볼넷 3개를 얻어냈지만 산호세의 벌떼 불펜에 막혀 한 점도 내지 못했다.
포탄만 신나게 쓰고 성과는 제로, 세금 낭비에 성이 난 팬들은 좀 더 저돌적인 공세를 요구했다.
“아 ~ 이걸 따라 다니나요 ··· 울반스키는 세 번째 타석에서도 삼진으로 물러납니다.”
“글쎄요. 아직 지켜봐야겠지만, 지금까지의 결과만 보면 울반스키를 4번으로 올린 건 실수 같습니다.”
득점귄 기회를 두 번이나 날려먹은 울반스키는 홈팬들의 비난에 시달렸다.
우리 선수라도 못 하면 쌍욕에 망언까지 챙겨주는 친절한 팬들, 울반스키는 보스턴 이적 후 20홈런을 때려냈고 그 중 12개를 홈에서 기록했다.
홈에서 강했기에 이런 대우를 받는 건 처음, 이제야 보스턴의 일원이 됐다는 걸 실감했다.
“아 ~ 지금 뭐 하냐 ··· ”
6회 초 산호세의 공격, 뒤로 빠지는 볼에 다카기는 찌그러지는 얼굴을 겨우 붙들었다.
분명 빠른 볼 사인을 냈는데 엉뚱한 곳을 헤매고 있는 녀석, 잠깐 나 좀 보자는 손짓을 보냈다.
“너 정신 어디다 두고 있냐? 지금 내가 무슨 사인 냈어?”
그제야 울반스키는 자신의 실수를 알아챘다. 그나마 1회 초 수비에서 좋은 활약을 했는데 그것도 지워버리는 실책에 식은땀을 흘렸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경기에 집중 못 하는 거야. 알아들었으면 정신 똑바로 차려”
경고를 날린 다카기는 울반스키를 제자리로 돌려보냈다.
경기가 조금 안 풀린다고 초조해하는 선수들, 그럴 만도 한 게 올 시즌 보스턴은 118승 44패라는 압도적인 승률을 거뒀다.
특히 홈에서는 저승사자 수준(69승 12패), 이렇게 타이트 한 경기를 치러본 것도 정말 오랜만이다.
전력만 따지면 분명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상대는 매 경기 집중력을 유지하며 여기까지 올라온 산호세, 아차 하면 붕괴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주위 선수들에게도 집중하라는 사인을 냈다.
딱 ~ !
“밀립니다. 97마일, 다카기는 여전히 위력적인 공을 던지고 있군요.”
“하지만 언제까지 마운드를 지켜줄 순 없는 일이죠. 보스턴이 빨리 점수를 내야 합니다.”
다카기는 6회도 깔끔하게 막고 마운드를 내려갔다.
하지만 보스턴 타선은 여전히 헤매는 중, 경기가 풀리지 않자 의욕을 앞세우는 스윙이 늘어났다.
1번부터 7번까지 모두 20홈런을 넘긴 홈런 군단, 한방으로 분위기를 뒤집은 경기도 있지만 산호세의 불펜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수준이 아니었다.
차근차근 주자를 쌓던 1회와는 너무 다른 모습, 방관자 모드로 일관하던 브라이스 감독도 아차 했는지 신중한 스윙을 요구했다.
그리고 7회 말, 한 선수의 벼락 스윙이 기나긴 침묵을 깨트렸다.
따아악 ~ !!
“좌측 높게 날아가는 타구!!!! 다시는 볼 일 없을 겁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J. J. 핵먼의 솔로 홈런!! 드디어 0의 균형이 깨집니다!!”
“어디까지 날아간 거죠?!! 행인들은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어디에 떨어졌는지도 감이 안 잡히는 대형 홈런, 구장 밖에 자리 잡은 중계 카메라는 환호에 둘러싸인 야경을 비췄다.
벡 베이는 부자들이 모여 사는 지역으로 쇼핑센터, 빌딩, 고급 빌라들이 늘어서 있다.
그 한가운데 자리를 잡은 보스턴의 홈구장 백 베이 파크, 노숙자들이 우글거리는 다른 산호세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카메라에 잡혔다.
장외 홈런에 흥분한 팬들은 광기 어린 환호성을 내지르며 폭주, 보스턴 더그아웃에서도 비슷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살인 태클로 한 달을 날려먹었지만 어쨌든 성공적이었던 시즌, 거기다 디비즌 시리즈에서 팀을 살린 결정적인 한 방, 신데렐라로 거듭난 J. J. 핵먼은 쏟아지는 커튼콜을 외면하지 않았다.
하지만 보스턴의 7회 말 공격은 여기서 종료, 1대 0이라 승리를 장담하긴 어려웠다.
‘그냥 가자.’
브라이스 감독은 다카기를 8회에도 올려 보냈다.
믿음직한 불펜진이 있지만 오늘 경기는 에이스가 마무리 짓는 게 낫겠다고 판단, 다카기는 초구부터 98마일을 던져 팬들을 안심시켰다.
‘뭐 저런 자식이 다 있어?’
산호세 벤치는 경악했다. 100구를 넘기고도 오히려 올라가는 구속, 저게 정말 인간인가.
체력 게이지를 무한으로 설정한 게임 속의 투수를 상대하는 기분, 반면 에이스의 품격에 매료된 홈팬들은 ‘우리들의 왕’을 연호하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백 베이는 보스턴에서도 품격을 갖춘 도시, 저 정도는 돼야 팀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
부 - 실력 - 명예, 모든 것을 갖춘 남자, 당신은 이곳의 왕으로 군림할 자격이 있다는 환호를 보냈다.
“스윙!! 삼진입니다!! 오늘 경기 11번 째 탈삼진!! 이곳은 팬들의 환호성에 귀가 아플 정도입니다!!”
“글쎄요. 찬물을 끼얹는 것 같지만, 투구 수가 제법 많기 때문에 9회는 포데스와에게 맡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이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십니까?”
전광판에 찍힌 99마일, 캐스터의 지적에 해설위원은 입을 다물었다.
괜히 참견했다가 본전도 못 찾은 신세, 브라이스 감독은 8회도 삼자 범퇴로 막아낸 다카기에게 경외심이 담긴 악수를 건넸다.
문제는 지금부터, 이대로 9회도 맡길 것인가? 만일을 대비해 포데스와가 불펜에서 몸을 푸는 중, 일단 8회 말 공격을 지켜보기로 했다.
따악 ~ !!
핵먼의 홈런 외엔 이렇다 할 돌파구를 찾지 못한 타선은 8회에 들어서야 기지개를 켰다.
선두 타자 울반스키가 볼넷으로 걸어 나가고, 알 디즌이 우중간에 떨어지는 안타를 치면서 무사에 주자는 1 - 3루, 여기에 후안 위긴스의 희생 플라이가 이어지며 스코어는 2대 0으로 벌어졌다(1사 주자 1루).
이젠 완벽히 보스턴의 분위기, 올 시즌 22홈런을 치고도 7번에 틀어박힌 실 쿠퍼가 타석에 들어섰다.
따악 ~ !!
“당긴 타구가!! 1루수 옆을 빠져 나갑니다!!!! 1루 주자는 2루를 돌아 3루!! 3루에서 홈까지!! 들어!! 옵니다!!!! 타자 주자는 2루까지!!!! 스코어 3대 0!! 이제야 보스턴다운 공격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제야 한숨 돌리네요. 고생 많았습니다.”
중계석은 마침 벤치에 앉아있던 다카기의 얼굴을 비췄다.
이제는 됐다는 확신, 브라이스 감독은 망설임 없이 9회 초에 포데스와를 마운드에 올렸다.
올 시즌 승패 없이 평균자책점 1.33, 28세이브를 거둔 마무리, 올 시즌 보스턴의 공격력이 워낙 대단해 세이브를 올릴 기회가 많지 않았지만 블론 세이브가 1개 밖에 없을 정도로 안정적인 투구를 보여줬다.
지난 2년 동안 포스트 시즌에서 27이닝 동안 무실점을 기록한 철벽, 경험도 있겠다, 최고 104마일까지 나오는 구위까지 갖췄으니 누구도 그 실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우와아아 ~ !!”
초구부터 102마일, 다카기의 투구도 대단했지만 산호세 선수단은 포데스와의 구위에 입을 다물었다.
빠른 볼만 노리고 쳐도 따라가기 어려운 구속, 떨어지는 95마일 슬라이더에 체크 스윙을 돌린 펠리페 얀케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걸 어떻게 치라는 건가. 상대는 올 시즌 60이닝 동안 삼진 111개를 잡아낸 괴물,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낫겠다며 마음을 비웠다.
3구는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나는 102마일, 4구도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나면서 카운트를 2볼 2스트라이크까지 끌고 갔다.
‘뭔가 이상한데’
브라이스 감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떤 상황에서도 승부를 피하지 않는 포데스와가 계속 볼을 던지다니, 3대 0이라도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