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왕좌 앞에 군림하는 자 - (6)
[산호세, ALDS에서 보스턴과 격돌]
보스턴의 쓰리 핏 달성 도전기, 그 첫 관문이 결정됐다.
산호세는 미국 실리콘벨리의 중심지답게 많은 고소득자 층이 몰려있다.
오를랜드가 이곳으로 연고지를 옮기면서 흥행과 성적 도약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으려 했지만 현실은 시궁창, 임대료가 급등하면서 산호세는 노숙자들이 들끓는 도시로 전락했다.
설상가상, 자원봉사자들이 노숙자들을 위해 임시 거처를 마련했지만 시 당국의 허락을 받지 않은 이유로 모두 철거 당했고, 이에 격분한 노숙자들이 폭동을 일으키면서 도시는 아수라장이 됐다.
혼란이 너무 심해 선수들의 안전까지 위험했을 정도. 이 때문에 산호세 선수단은 한동안 샌프란시스코에서 홈 아닌 홈 경기를 치러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와일드카드 결정전을 거쳐 올라 온 ALDS, 물론 그 진격이 계속 될 거라 예상한 전문가는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압도적이었던 보스턴의 2022 시즌, 쓰리 핏을 향한 팬들의 기대도 그만큼 높아졌다.
[노숙자들이여, 잠시나마 편히 머물다 가기를]
[3일 이상은 못 봐준다. 또 강제철거 당하기 싫으면 알아서 옮겨라.]
극성을 넘어 악질적인 보스턴 팬들은 원정을 온 산호세에 거한 환영식을 치러줬다.
한 때 홈구장도 없이 지방을 떠돌아다녔던 산호세, 그 입장을 이렇게 조롱해도 되는 건가.
시리즈를 앞두고 산호세는 과도한 조롱은 규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지만, 사무국은 직접적인 폭력이 아니라면 규제할 근거가 없다는 입장을 표했다.
덕분에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조롱과 욕설,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1차전의 막이 올랐다.
“자, 다카기 하루요시가 1차전 선발로 나섭니다. 올 시즌 33경기 등판, 24승 3패 평균자책점 1.81, 223이닝 동안 볼넷 46개, 탈삼진은 311개를 기록했습니다.”
“선발투수로 풀타임을 치르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제대로 보여준 시즌이었죠. 올해는 야수출전이 한 경기도 없었는데, 그래서 저는 더 좋았습니다.”
해설위원 피트 오어는 앞으로도 다카기가 딴길로 새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반응을 내놨다.
만테냐 어위드를 넘어 리그 mvp까지 논해야 할 수준, 실력도 실력이지만 일단 나이가 괴물이다.
23살에 통산 57승이라니, 요즘은 200승만 달성해도 명예의 전당을 논하는 시대다.
지금 페이스를 앞으로 10년만 유지해 준다면 300승도 헛소리는 아니겠지. 보스턴 최고의 투수를 넘어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의 투수로 이름을 올리는 것도 가능하다는 극찬을 쏟아냈다.
‘나도 거기에 한 술 떠야지.’
올 시즌 보스턴으로 둥지를 옮긴 울반스키는 의욕을 불태웠다.
생애 첫 포스트 시즌이라 내친 김에 월드시리즈 우승도 차지하고 싶은 게 사실, 그리고 다카기의 파트너로 낙점 받으면 향후 10년이 보장된다.
데뷔 시즌에 신인왕 2위, 2년 차 징크스 따윈 씹어 먹고 달성한 20홈런 - 20도루 시즌, 이후 조금씩 내리막을 타면서 울반스키는 내 전성기는 끝났다고 스스로 단정해버렸다.
그러다 보스턴으로 이적하면서 다시 피기 시작한 야구 인생, 올 시즌도 타율은 0.245로 별 볼 일 없었지만 43홈런을 때려내며 커리어 하이를 새로 썼다.
내년도 올해만큼 해준다면 장기계약은 확실, 여기서 저 녀석과 오랫동안 해먹겠다는 의지는 확고했다.
따악!
‘어라?’
평소처럼 카운트를 잡기 위한 리드, 초구가 안타로 이어지자 울반스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흔치 않은 일이라 살짝 당황, 투심으로 땅볼을 유도해야 하나, 여기선 1인자가 아니라 에이스의 심기를 살폈다.
‘그냥 go’
다카기는 삼진을 우선으로 삼았다.
병살 유도? 듣기는 그럴싸하지만 결국 타격을 허용하는 작전이다.
구속이 떨어진 선수들이 투심 비율을 높여 효과를 보기도하지만, 그런 투구는 평균구속을 떨어트릴 뿐, 실제로 95마일이 넘는 빠른 볼이 있다면 투심보다 포심을 던지는 게 효과적이라는 통계도 있다.
뭣보다 투심을 줄인 효과는 정규시즌 311 탈삼진으로 증명되지 않았나.
빠른 볼을 아끼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다.
“스윙!! 주자는 움직이지 못합니다.”
“지금은 뭔가 사인이 난 것 같네요. 산호세도 연속 안타는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브라운 감독이 작전을 많이 쓰는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역시 상대가 상대라 생각이 많은 것 같습니다.”
브라운 감독은 런 앤 히트로 작전을 변경했다.
히트 앤 런과 런 앤 히트의 차이는 타자의 스윙에 있다.
히트 앤 런은 반드시 스윙을 해서 주자를 보호해야 하지만 런 앤 히트는 그럴 필요가 없다.
다카기는 깨끗하고 빠른 투구 폼 덕분에 위력적인 공을 던지지만, 주자가 뛸 타이밍을 잡기엔 그다지 어렵지 않다. 지금도 헛스윙이 나왔지만 타이밍 상 2루로 뛰었다면 충분히 살 수도 있었던 상황, 그런데 왜 주자는 1루로 귀환한 건가?
히트 앤 런 상황이라 일단 귀루한 것 같은데, 브라운 감독은 융통성 없는 행동에 아쉬움을 표했다.
‘내가 잘못한 건가?’
1루 주자 라파엘 얀케는 아쉬움을 삼켰다.
히트 앤 런 상황에선 타자의 스윙 여부를 체크하는 게 기본, 헛스윙이 나오자 바로 1루로 귀환했다. 딱히 잘못한 건 없지만 본인이 생각해도 아쉬웠던 순간, 리드를 좀 더 벌려 2루 재침공을 노렸다.
‘다 보인다 이놈들아.’
울반스키는 수상한 움직임을 바로 캐치했다.
헛스윙이 나와도 이번엔 뛸 분위기, 바깥쪽으로 빠져 앉아 미트를 벌렸다. 제대로 낚인 라파엘 얀케는 움직이지 못했고, 주자를 묶어둔 울반스키는 바로 결정구를 요구했다.
딱 ~
“밀어 친 타구가 2루수 정면!! 2루에서 아웃!! 다시 1루에서 아웃입니다!! 더블 플레이!! 보스턴이 위기를 넘어갑니다!!”
“올 시즌 보스턴은 공격뿐만 아니라 수비도 완벽합니다. 산호세가 넘어서기엔 아무래도 버겁겠죠.”
병살을 유도한 울반스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수비는 예전부터 일가견이 있다는 평가를 받은 몸, 여기에 장타력까지 갖췄는데 현 시대 최고의 포수라 불리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최강의 투수와 최고의 포수의 만남, 약간의 트러블이 있었지만 지금은 별 문제 없는 관계,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시대를 지배하는 건 일도 아니라고 콧대를 세웠다.
다카기는 다음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우고 1회를 마무리, 보스턴은 1회 말 반격에 나섰다.
1번부터 7번까지 쉬어갈 틈이 없는 살인 타선, 산호세의 선발 제프리 리온은 나름대로 각오를 다지고 마운드에 올랐지만, 올 시즌 952득점을 올린 군단을 상대하는 건 쉽지 않았다.
일단 정규시즌 245안타, 출루율 0.433을 자랑하는 폴 돈론이 1차 관문, 볼은 골라내고 스트라이크는 귀신 같이 걷어내는 타격에 안타를 내줬다.
그 다음은 J. J. 핵먼, 스티븐 웹의 살인 태클 때문에 한 달 이상을 날려 먹었지만 타율 0.314, 28홈런을 기록하며 커리어 하이를 새로 썼다.
2루수의 공격력이 이 정도, 테이블 세터가 어지간한 팀의 중심타선 수준이라 산호세 야수진은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런 앤 히트? 우리에겐 필요 없지.’
보스턴의 브라이스 감독은 경기를 방관했다.
가만 놔둬도 알아서 득점 내는 타선, 불펜 야구와 작전으로 짤짤이를 하던 게 불과 몇 년 전이다.
감독 생활 8년차에 접어들었지만 이렇게 편하게 치른 시즌은 처음, 정말 강한 팀은 감독의 참견이 필요 없는 팀 아닐까? 명장 놀이는 때려치우고 관객 모드로 전환했다.
따악 ~ !!
“당긴 타구가 내야를 빠져 나갑니다!! 연속 안타!! 보스턴이 무사 주자 1 - 2루 기회를 이어갑니다!!”
“자, 이제 데이브 셰퍼드의 타석이죠. 뭔가 일이 날 것 같습니다.”
보스턴 관중석은 환호로 들썩거렸다.
24년 만에 나타난 팀의 50홈런 타자, 여기에 148타점을 기록할 정도로 셰퍼드는 득점권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9타점을 쓸어 담은 활약은 눈이 부실 정도, 관객들의 환호를 외면할 수 없었는지 셰퍼드는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인필드 플라이, 제대로 찬물을 맞은 외야석은 침묵에 잠겼다.
‘여러분,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안심하시길’
대기타석에서 몸을 풀던 울반스키는 천천히 타석으로 향했다.
8 ~ 9월에만 17홈런을 때려낼 정도로 장타력에 불이 붙은 페이스, 포스트시즌 데뷔 타석이라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스윙!! 크게 돌려봅니다.”
“올 시즌 43홈런을 친 만큼 파워는 의심할 바 없지만, 삼진을 163개나 당하지 않았습니까? 득점권에서도 0.237,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는데 ··· 브라이스 감독이 왜 알 디즌이나 위긴스를 두고 울반스키를 4번에 기용했는지는 의문이네요.”
알 디즌은 올해 타율 0.284, 32홈런, 90타점,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
선구안도 좋고 타석에서의 안정성은 울반스키보다 한 수 위, 알 디즌과 후안 위긴스를 4 ~ 5번에 배치하고 울반스키는 6번에 놓는 게 좋지 않았을까?
이 기용은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팬들도 반신반의하는 반응을 보였다.
‘좋아, 잘 보고 있어.’
울반스키가 2구를 골라내자 브라이스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도는 떨어지지만 볼을 골라내는 능력은 수준급, 덕분에 울반스키는 163삼진과 84볼넷이라는 두 얼굴을 드러냈다.
산호세의 선발 제프리 리온은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체인지업을 잘 던지는 선수, 구위가 좋지 않아 공이 대부분 낮게 형성 된다.
낮은 공에 강점이 있는 울반스키라면 뭔가 보여주지 않을까. 그래서 약간 변화를 준 타선, 결과를 내는 건 선수 몫이라 침묵을 유지했다.
‘안 속는다.’
3구도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체인지업, 타석에서 벗어난 울반스키는 힘이 실린 어퍼 스윙으로 무력시위를 했다.
낮게 하나 들어오면 용서하지 않을 분위기, 거기다 땅볼 비율이 낮은 상대라 산호세 배터리의 생각은 깊어졌다.
“다시 낮게, 아 ~ 이게 따라 나오는 군요. 카운트는 2볼 2스트라이크가 됩니다.”
“지금은 너무 욕심을 부렸어요. 조금 더 집중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무릎이 주저앉을 정도로 큰 스윙을 돌린 울반스키는 타석 주위를 맴돌았다.
정규시즌에선 이 정도 참으면 칠만한 공이 들어왔다. 그런데 3구 연속 유인구라니, 역시 포스트 시즌은 다르다는 건가. 울반스키가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보스턴 벤치도 바쁘게 움직였다.
볼 카운트에 여유가 있으니 배터리는 또 유인구를 던지겠지, 어설픈 타격으로 땅볼이 되면 트리플 플레이가 나올 수도 있다.
그럴 바엔 주자를 보호하는 스윙을 지시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브라이스 감독은 끝까지 방관자 모드를 유지했다.
“와아아 ~ !!”
유인구를 골라내면서 풀 카운트, 볼 하나 골라내고 이렇게 큰 환호를 받은 적이 있었던가.
꿈도 희망도 없는 팀에서 5년을 보낸 울반스키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환호에 불타올랐다.
따악 ~ !!
“타격!! 파울 라인 벗어납니다.”
“지금도 유인구였는데 약간 덜 떨어졌거든요. 그래도 제프리 리온의 배짱은 칭찬할 만 하네요. 절대 좋은 공 주지 않습니다.”
타구를 확인한 울반스키는 혀를 비쭉 내밀었다.
여기서 날 거르면 알 디즌 - 후안 위긴스로 이어지는데, 그래도 좋은 공 안주겠다는 건가.
포스트 시즌은 처음이라 이런 볼 배합도 처음 경험, 생각을 정리하고 배트를 고쳐 잡았다. 이제 더는 물러날 곳이 없는 승부, 살아남는 건 나라며 입을 꾹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