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왕좌 앞에 군림하는 자 - (4)
[잘하면 투수 덕, 못해도 투수 책임]
짐 브라이스 감독은 현역시절 이런 말을 했다.
좋은 포수의 조건은 무엇인가. 정말 평균자책점을 낮춰주는 마법의 포수가 존재하는 걸까.
하지만 올스타 수상 7회에 빛나는 전설은 그딴 건 없다고 못을 박았다.
아무리 포수가 리드를 잘해도 투수가 던져주는 공을 받을 뿐, 투수진의 기량이 받쳐주질 않는데 포수 한 명 바뀐다고 평균자책점이 낮아진다?
그런데도 포수는 언제나 여론의 좋은 희생양이 된다.
볼배합은 절대 포수 혼자서 짜는 게 아니다. 투수와의 소통, 어떨 땐 벤치에서 사인이 날아들기도 한다.
내가 던지는 공도 아닌데 내가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 써야한다니 이런 웃긴 논리가 어디 있나. 그래서 브라이스 감독은 잘 던지면 투수 덕, 못 던져도 투수 탓이라는 말로 논란을 정리했다.
포수에게 정말 중요한 건 심리 전, 경기 중 상대 팀 뿐만 아니라 우리 팀 선수들과도 신경전을 벌이는 게 포수다.
심적으로 불안한 신인 투수는 어린애나 마찬가지, 그런데 사인대로 못 던졌다고 레이저를 쏘고 포수 멋대로 사인을 내면 결과가 어떨까.
실력은 둘 째 치고 투수를 다독일 줄 아는 포수가 좋은 평가를 받는 이유가 바로 이거다.
내가 할 일도 바쁜데 남까지 신경써야 하는 입장, 회사로 따지면 신입사원이 할 일까지 뒷바라지 하는 호구, 이런 불합리한 자리가 어디에 있나.
거기다 경기 내내 무거운 장비를 차고 쪼그려 앉아 있는 신세, 숙지해야 할 사인은 많고 욕은 욕대로 먹고, 누가 이런 포지션을 자처할까.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하는 자리, 그래서 포수는 언제나 자신을 낮춰야 한다.
그런데 잘 던져도 투수 책임 못 해도 투수 책임이라는 말을 한 브라이스 감독이 어떻게 명포수 반열에 오른 걸까.
그 비결은 간단했다.
“에이스급 투수면 자신만의 투구 패턴과 야구 철학을 갖추고 있다. 그런 선수는 내가 맞춰주면 그만이다. 본인이 원하는 대로 했으니 잘 던지든 못 던지든 본인 책임 아닌가? 하지만 신인은 그게 아니라 내가 리드를 했다. 그 뿐이다.”
포수 리드란 결국 사람을 다루는 기술, 보스턴의 데이빗 크로스도 그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삼진 위주의 투구를 하고 싶다는 다카기의 요구는 들어주고, 아직 부족한 신예들은 자기가 리드를 해줬다.
하지만 보스턴으로 이적한 울반스키는 상대를 다루는 기술이 언제나 일정, 이러니 에이스는 물론 나머지 투수들에게도 인정을 못 받는 거다.
울반스키는 이번 시리즈에서 그걸 깨달을 수 있을까. 브라이스 감독은 반신반의 하는 마음으로 경기를 지켜봤다.
‘자네가 컨트롤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맞춰주라고’
오늘 마운드에 오른 투수는 다카기, 초특급 에이스를 누가 조종하려 들겠나. 피츠버그라는 막장 팀에서 뛰었으니, 이 정도 레벨의 선수와 호흡을 맞춰볼 일은 거의 없었겠지.
다카기와 호흡을 맞추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울반스키도 긴장감을 바짝 끌어올렸다.
따악 ~ !!
“오, 초구를 때려 안타를 만들어냅니다. 보기 힘든 광경이군요.”
“다카기 선수가 올 시즌 빠른 볼 피안타율이 0.231, 피장타율은 0.345밖에 안 되거든요. 메이저리그에서도 손 꼽히는 빠른 볼인데 안타를 허용했습니다.”
초구 안타가 나오자 울반스키는 바깥쪽으로 빠져 앉았다. 조금 더 신중하게 가자는 뜻, 하지만 다카기는 지금 뭐하는 짓이냐는 눈총을 보냈다.
포수 위치도 스트라이크 콜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다. 그런데 저렇게 빠져 앉다니, 내가 아마추어인가.
그제야 울반스키는 원래 자리로 들어갔다.
‘점수 깎였군.’
벤치에 앉은 크로스는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볼배합은 몰라도 절대 건드려선 안 되는 게 에이스의 자존심, 하긴, 하위권 팀에서 뛴 포수가 초특급 에이스의 자존심을 어떻게 이해할까.
여전히 자기 멋대로인 녀석, 그러나 다카기 앞에선 어림도 없었다.
“스윙! 헛칩니다. 95마일, 아직 몸이 덜 풀렸나요?”
“그러게 말입니다. 2마일은 더 나와야 하는데 조금 더 지켜보죠.”
해설위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97마일 빠른 볼이 미트에 박혔다.
멀리서 지켜봤을 때는 몰랐는데 직접 받아보니 상상 이상, 나는 안타 하나 맞았다고 이런 투수에게 도망치는 투구를 요구한 건가.
메이저리그 경력 5년차에 접어들었지만, 이 정도 공을 받아보는 건 처음, 신세계를 경험하면서 볼배합도 조금 달라졌다.
‘이 정도면 몸 쪽으로 붙여도 되겠어.’
3번 버나드 길키의 타석, 빠른 볼에 강한 선수로 정평이 나 있다. 통산 다카기를 상대로 홈런도 하나 있는 선수, 물론 도망치는 투구는 하지 않았다.
딱 ~ !
“파울입니다. 쫓아 오질 못하는데요.
“장타력은 살아 있는데 역시 세월의 무게는 어쩔 수 없습니다.”
버나드 길키는 2년 전만 해도 AL mvp 투표 상위권을 달린 선수, 하지만 올 시즌은 타율 0.249, 홈런 18개에 그치고 있다.
95마일이 넘는 공 상대로 현저히 떨어진 타율, 최근 평균 구속이 93마일을 넘긴 메이저리그에서 빠른 볼에 약점을 보인다?
약점을 보이면 잡아먹히는 야생, 포식자들은 늙고 병든 물소 다리를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다른 놈은 몰라도 네 공은 친다.’
물론 길키도 쉽게 물러나진 않았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상대가 누구인가. 작년 시즌, 토론토는 어렵게 포스트 시즌 진출 기회를 잡았지만 다카기를 선봉에 세운 보스턴에 막혀 꿈을 접었다.
거기다 이젠 쓰리 핏을 노리다니, 한 번도 정상을 밟아보지 못한 노장은 어린 선수에게 질투심을 느꼈다.
‘여기서 한 번 빼자.’
다카기는 바깥쪽으로 빠지는 사인을 보냈다.
누구보다 치고 싶어 하는 타자의 심리를 역이용하는 전략, 아니나 다를까 바깥쪽으로 흘러가는 커브에 배트가 따라 나왔다.
최근 빠른 볼 공략에 애를 먹고 있는 길키, 빠른 볼에 집중하고 있는데 변화구가 들어오니 대응이 되겠나. 울반스키는 에이스의 뜻에 맞춰줬다.
“XXXX!!”
빠른 볼에 체크스윙 삼진을 당한 길키는 헬멧을 집어던지며 아쉬움을 표했다.
7년 장기계약도 이제 막바지, 커리어 내내 우승도 못 해보고 친정팀을 떠나야 하나. 통산 500홈런을 달성할 때까지 프로 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지, 나이는 먹었지만 야구에 대한 열정까지 잃은 건 아니다.
가능하면 소속팀과 연장계약을 했으면 좋겠는데 구단은 개혁을 준비하는 분위기, 30대 중반에 접어든 노장의 미래는 불투명했다.
어쨌든 이렇게 양 팀은 득점 없이 1회를 넘겼고, 보스턴의 2회 초 공격이 시작됐다.
“자, 데이브 셰퍼드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올 시즌 타율 0.333, 홈런 33개, 102타점, 후반기에서도 좋은 흐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본인은 보스턴이 편한 덕분이라고 말을 하는데, 역시 장기계약을 맺은 게 크겠죠?”
“그렇죠. 500홈런을 달성하려면 일단 경기에 나서야 되는 거 아닙니까. 5년 계약에 지명타자까지 보장받았으니 경기력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죠.”
“아 ~ 이 타이밍에 길키를 비춰주네요. 저도 방송을 하고 있지만 정말이지 ···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하하 ~ 이게 프로의 세계죠. 지켜보는 입장에선 이런 것도 재미 아니겠습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데이브 셰퍼드는 좌측 담장을 넘어가는 대형 홈런을 날렸다.
작년 시즌, 바로 이곳에서 버나드 길키는 홈런을 치고 베이스를 도는 데이브 셰퍼드에게 시비를 걸었다.
몇 년 동안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거포로 호적수를 이뤘던 두 선수, 그런데 1년 만에 이렇게 운명이 갈릴 줄이야. 버나드 길키는 라이벌에게 창창한 앞길을 열어줘야 했다.
30대 중반에 커리어 하이 시즌이라니, 거기다 길키 앞에서 날려준 한방이라 셰퍼드는 평소보다 과장이 섞인 세리머니를 펼쳤다.
“저 자식은 아무 것도 아니야!! 내가 이겼다고!!”
사실 셰퍼드는 오랫동안 길키를 의식하고 있었다.
양쪽 모두 아메리칸 리그를 대표하는 거포라는 수식어가 달렸지만, 수비력을 겸비한 길키가 조금 더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게 사실, 셰퍼드는 그게 늘 불만이었다.
하지만 작년 시즌 월드시리즈 우승과 올 시즌의 활약으로 두 선수의 평가는 완전히 엇갈렸다. 이제는 내가 아메리칸 리그의 홈런 왕, 너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라며 7년 동안 이어진 라이벌 전쟁에 쐐기를 박았다.
‘신나셨군, 신나셨어.’
다카기는 그런 셰퍼드를 빤히 지켜봤다.
라이벌이 있으니 저기까지 올라간 거 아닐까. 그런데 난 경쟁자가 없는 입장, 누굴 상대로 전의를 불태워야 하나.
덤벼오는 놈이 없는데 왕좌에 앉아봤자 무슨 재미? 호적수와 왕좌를 두고 재미있게 7년 동안 치고받은 셰퍼드가 부러웠다.
‘아무나 좀 덤벼 봐, 열어 둘게.’
그래서 다카기는 왕좌에 흥미가 없다는 발언을 한 거다.
왕좌를 열어둬야 반동분자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노리고 달려들 거 아닌가. 이 넓은 세상에 나와 라이벌 구도를 이룰 선수가 없다니, 이것보다 더 슬픈 일이 또 어디 있을까.
내 야구 인생에 라이벌이 있긴 있는 건지, 또 한 번 권태기에 접어들었다.
“저 그만 던질래요.”
6회를 마친 다카기는 감독에게 강판을 자처했다.
선발 투수 노릇은 다 했고, 천재지변이 없는 한 이긴 게임 아닌가. 그런 속사정을 알 리 없는 울반스키는 내가 뭘 잘못해서 투구를 그만둔 건 아닐까 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내가 뭐 잘못 했어?”
“그런 거 아니야. 오늘 너 잘 했어.”
경기가 끝난 후, 배터리는 대화를 나눴다.
1회에 도망치는 투구를 유도한 걸 제외하면 나무랄 게 없는 리드, 다카기는 문제는 네게 있는 게 아니라 내게 있다며 선을 그었다.
“그러지 말고 말을 해 봐.”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
“좋든 싫든 앞으로 우리는 파트너잖아. 네 심리도 알아 둬야지”
울반스키의 요구에 다카기는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특별히 호흡을 맞췄지만 앞으로도 그럴 거란 보장이 없는데 자기 멋대로 파트너라니, 그래도 일단 속사정을 털어놨다.
“솔직히 난 원해서 투수를 하고 있는 게 아니야. 어쩌다보니 배역이 정해져서 하고 있는 것뿐이지.”
“그래서, 투수가 하기 싫은 거야?”
“아니, 그것보다는 라이벌이 없는 게 더 허무해. 날 불타오르게 할 상대가 없다고, 그게 제일 큰 문제야.”
이번엔 울반스키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뭐 이런 녀석이 다 있는지, 혼자 다 해먹는데도 그게 마음에 안 든다는 건가. 왕좌보다 승부 자체를 즐기는 성격, 정말 야구를 즐긴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럼 그거 내가 해 줄게.”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는 이 팀의 리더가 되고 싶거든. 네가 지금 누리고 있는 지위가 탐이 난다고, 그러니까 안 뺏기게 정신 똑바로 차려”
다카기는 코웃음을 쳤다.
남 밑에 있을 놈이 아니라는 건 눈치 챘는데 이젠 대놓고 모반이라니, 너 따위에게 내 줄 왕좌가 아니라며 면박을 줬다.
“고작 2할 4푼치는 놈이 내 자리를 넘보겠다고?”
“이거 왜 이래? 홈런은 26개 치고 있잖아?”
울반스키는 바로 반박에 나섰다.
요즘 메이저리그에 20 ~ 30홈런 치는 포수가 어디에 있나. 거기다 지금 페이스면 35홈런까지 노려볼 수 있다.
수비는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혔고 리드는 개선하면 되겠지, 나도 보스턴을 대표할 자격이 있다며 맞불을 놨다.
‘그래, 아쉬우니 어쩔 수 없지.’
다카기는 일단 울반스키를 라이벌로 인정했다.
이 녀석이라도 의식해야 권태기를 극복할 수 있겠지, 진짜 라이벌이 나타날 때까지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