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왕좌 앞에 군림하는 자 - (3)
“전에 부탁한 거 가지고 오셨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이곳은 보스턴 클럽하우스, 휴일을 맞아 다카기는 일본인 기자들의 인터뷰에 응했다.
다카기는 인터뷰 하기 가장 쉬운 선수 중 하나, 그렇다고 아무나 상대해 주진 않는다.
선물을 얼마나 가져오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태도, 캐러멜을 한 바구니 선물 받은 다카기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새로 나온 거냐?”
“어. 가져가라.”
뒤에서 불쑥 나타난 폴 돈론이 조공품을 낚아채갔다.
메이저리거가 경기 중 질겅거리는 게 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은 캐러멜인 경우가 많다.
껌과 달리 따로 뱉을 필요도 없고, 특히 일본산 캐러멜은 맛과 향이 뛰어나 1970년대부터 미국인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지금은 우주식량에 각종 스포츠 선수들 사이에도 널리 퍼진 세계적인 과자, 다카기 덕분에 보스턴 선수들은 일본에서 새로 출시된 캐러멜은 거의 다 맛을 봤다.
일본에서 손님이 왔다고 하면 다들 귀를 쫑긋 세우는 풍경은 이제 익숙, 덕분에 보스턴 클럽하우스는 오늘도 화기애애했다.
“다카기 선수는 캐러멜 안 드십니까?”
“애들이 좋하지 저는 별로 안 좋아해요.”
기자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자식들을 위해 좋아하지도 않는 군것질을 사다 날라야 하는 가장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23살에 클럽하우스 가장이라니, 그런데 선수들이 그만큼 따르는 존재라 농담으로 들리질 않았다.
“어우 시끄러워”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온 클럽하우스, 사방에서 짭짭거리는데 왜 이렇게 시끄러운지, 평소보다 귀에 거슬렸다.
“넌 안 먹어?”
“안 먹어.”
“그러지 말고 먹어 봐 맛있어.”
다카기는 마지 못 해 캐러멜을 우겨넣었다.
맛있는 거 있으면 엄마한테 먹어 보라고 권하는 아이들이 있지 않은가. 성의를 봐서 먹긴 먹었지만 어른 입맛에 가까운 다카기는 썩은 표정으로 동료들의 웃음을 유발했다.
‘적응이 안 돼’
하지만 겉도는 인간이 있었으니, 얼마 전 유니폼을 갈아입은 울반스키가 그 주인공이었다.
클럽하우스 하면 다들 여유로운 환경을 떠올리지만, 적어도 피츠버그는 아니었다.
동료들 간에 대화도 별로 없었고, 울반스키가 팀을 떠나기 2주 전엔 동료들 사이에 주먹다짐도 일어났다.
기자들 출입시간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 구단이 쉬쉬하면서 묻혔지만 어쨌든 절대 화목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 지경인데 동료 간의 소통이 이뤄졌을까? 울반스키의 포수 리드가 제멋대로인 이유가 바로 이것, 대화가 없으니 서로 따로 놀고 협업 플레이가 되질 않았다.
다 큰 어른이고 따지고 보면 모두 개인사업자, 애들이 아니라 문제가 커지면 위에서 어떻게 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구단은 문제를 일으킨 선수를 설득하기보다 치워버리는 것, 그게 편하고 현실적이다.
피츠버그는 왜 울반스키를 서둘러 팔아버린 걸까. 2년 후 fa 자격을 취득하니 유망주를 받고 팔아넘긴 건가.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울반스키는 막장인 피츠버그 클럽하우스 안에서 대장노릇을 하는 선수였다.
그렇다고 성격이 개방적이거나 대화가 많은 편도 아니고, 팀의 유일한 올스타급 선수라 아무도 건드리기 어려운 존재, 이것도 피츠버그가 울반스키를 치워낸 이유 중 하나다.
실력은 있지만 리더가 될 순 없는 선수, 개혁을 원하는 피츠버그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트레이드였다.
그런 배경을 울반스키는 이해하고 있을까?
현역시절, 명포수로 이름을 날린 짐 브라이스 감독은 미운오리를 따로 불러 면담을 나눴다.
“자네의 문제가 뭔지 알고 있나?”
울반스키는 답을 망설였다. 상대는 현역시절 올스타 선정 7회, 골드 글러브 4회 달성한 명포수, 당신이 포수에 대해서 뭘 아느냐는 말을 지껄일 상대가 아니라 최대한 예의를 지켰다.
“글쎄요. 기술적인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요?”
“그게 아니야. 정말 모르겠나?”
계속되는 추궁에 울반스키는 마지 못 해 입을 열었다.
투수가 대화를 하자는 데도 비디오 게임기를 잡고 있던 피츠버그 시절, 난 왜 이렇게 삐딱한 성격이 된 걸까.
이제 이 클럽하우스의 대장은 나라는 자만감 때문이었을까. 누구도 감히 건드릴 수 없던 피츠버그의 상징 같은 존재, 하지만 보스턴에선 더 이상 1인자가 아니다.
다카기는 말 할 것도 없고 데이브 셰퍼드, 폴 돈론, 후안 위긴스, 알 디즌, j.j. 핵먼, 스티븐 루카스, 스캇 포데스와 등등, 올스타급 선수들이 즐비한 보스턴, 여기서 울반스키는 대장이 아니라 평범한 일원일 뿐이다.
그래서 어린 투수들 상대로 대장 노릇을 한 것, 하지만 이젠 그것도 안 통한다.
선수단 주위를 겉도는 미운오리 신세, 대화는 못 해도 상관없는데 대장노릇까지 못하니 미칠 지경, 최근 성적이 신통치 않은 이유가 이거였다.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건 소통이야. 대화가 안 되는데 투수가 어떻게 자넬 믿고 공을 던지겠어?”
“저도 문제가 뭔지는 알고 있어요. 하지만 잘 안 되네요.”
“자존심을 굽혀. 자네가 피츠버그 최고의 선수였다는 건 알고 있지만 여긴 보스턴이야. 자네는 왕이 될 수 없어. 아니, 왕이 된다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누구도 인정해주질 않아.”
자존심을 건드리는 질타지만 울반스키는 덤덤히 받아들였다.
이곳의 리더는 다카기, 주위에서 다 떠받들어 주는데도 권위를 부리긴 커녕 웃고 떠들며 편안하게 지낸다. 겉보기엔 쉬운데 난 그게 왜 안 되는 걸까.
브라이스 감독은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다음 다카기 선발 등판은 자네를 포수로 내보낼 거야.”
“정말입니까?”
“그래, 그러니까 대화 좀 나눠봐. 자네가 하는 거 보고 나도 결정을 내릴 테니까.”
계속 이렇게 겉돈다면 앞으로 어린 투수들의 성장을 어떻게 이끌어 내겠나. 브라이스 감독은 고민 끝에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보스턴, 지배구조 다시 바뀌나?]
울반스키도 이게 마지막 기회라는 걸 깨달았다.
얼마 전, 보스턴 지역 신문사는 팬들의 귀가 활짝 열릴만한 기사를 내보냈다.
광고 수익 부진으로 보스턴 구단 경영에서 손을 뗐던 마크 헬릭슨이 돌아온다는 것, 헬릭슨은 2년 전만해도 에디슨 헨리 구단주와 합쳐 보스턴 지분의 90%를 차지한 대주주였다.
보스턴 구단을 인수할 때부터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 그런데 광고 수익이 잠시 부진했다고 헬릭슨은 구단을 떠나버렸다.
그렇게 시작된 에디슨 헨리의 독주 체제, 보스턴은 2년 연속 우승으로 광고 수익까지 정상을 차지했다.
이제 와서 돌아오겠다면 뻔뻔한 짓, 하지만 에디슨 헨리는 옛 파트너를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헬릭슨까지 돌아오면 투자는 더욱 확대되겠지, 2년 후 FA 자격을 취득하는 울반스키가 이 기회를 놓치고 대형계약을 따낼 수 있을까. 여기서 밉보이면 가장 확실한 동아줄 하나가 끊어지는 꼴, 자존심을 굽혀야 했다.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자.”
“뭔데?”
“그런 게 있어.”
다음 등판 파트너가 이 자식이라니, 솔직히 불쾌했지만 다카기는 일단 그러려니 듣기만 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다음 경기는 네가 던지고 싶은 대로 던져. 난 그냥 받기만 할게”
적막이 흐르는 공기, 상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다카기는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그래, 그러시던가.”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어?”
“네 마음대로 하라고. 누가 뭐라고 했어?”
이번에도 대화는 1분을 넘기지 못했다. 투수 마음대로 던지라니, 그런데 무슨 대화가 필요한가.
대화라는 개념 자체를 이해 못하는 상대, 뭣보다 포수라는 놈이 투수에게 볼 배합을 맡긴다는 발상이 웃겼다.
‘땅볼로 가는 게 어때?’
‘그냥 삼진 잡자.’
사실 다카기도 제멋대로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투심을 조금 더 활용하자는 크로스의 볼 배합에 삼진으로 가자고 고집을 부린 사람이 누구인가.
하지만 적어도 이때는 대화라는 개념이 있었다. 크로스는 나름대로의 근거를 두고 투심을 활용하자고 주장, 다카기도 자신의 탈삼진 능력을 조금 더 믿어보라고 크로스를 설득했다.
그 과정에서 합의를 보고 결정된 삼진 위주의 투구, 그런데 울반스키의 태도는 그냥 네 마음대로 하라는 거다.
포수라면 적어도 상대를 연구하고 그에 대한 성과를 기반으로 투수를 설득하려는 노력은 해야 한다. 그런데 울반스키는 그 기본도 안 되는 녀석, 이런 선수가 어떻게 어린 선수들의 잠재력을 끌어낼까?
대화를 할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
“그 자식 FA로 잡을 겁니까?”
“갑자기 왜 그런 말을 ··· ”
“저라면 안 잡을 겁니다. 다른 선수를 찾아보라고 권해드리고 싶네요.”
며칠 후, 선수단보다 먼저 토론토로 이동한 다카기는 비행기 안에서 수더랜드 단장과 깊은 대화를 나눴다.
울반스키는 절대 크로스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 다른 선수도 아니고 클럽하우스 분위기를 지휘하는 에이스의 말이라 단장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심각한가?”
“제 마음대로 던지라고 하는데, 그게 포수입니까? 메이저리그 5년차에 접어든 선수가 할 말이냐고요. 클럽하우스 분위기에 못 어울리는 건 이해하겠는데, 프로로서 기본이 안 됐어요. 이건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절대 못 고칩니다.”
기술은 어떻게든 노력해서 고치면 된다.
하지만 사람의 성격이나 태도가 그렇게 쉽게 바뀔까? 바뀐다고 해도 금방 원상복구 되기 마련, 울반스키는 보스턴의 미래가 될 수 없다는 목소리에 흔들림은 없었다.
‘으음 ··· 이건 생각보다 심각한데 ··· ’
어린 투수들이 왜 울반스키를 껄끄럽게 생각했던 걸까.
수더랜드 단장은 그제야 상황 파악을 끝냈다. 언젠간 치워낼 노장이라고 생각했는데 팀에서 차지하는 입지가 그 정도였을 줄이야, 월드시리즈 3회 우승을 이끌어낸 베테랑을 홀대한 걸 후회했다.
“그럼 자네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지금은 크로스가 주전으로 가는 게 맞습니다. 울반스키는 백업으로 쓰고 개선될 여지가 없으면 내보내야겠죠.”
“ ··· 알았네.”
수더랜드 단장은 쓴물을 들이킨 것처럼 인상을 구겼다.
트레이드는 단장의 안목을 볼 수 있는 척도, 미래를 위해 크로스의 대체자를 데려왔는데 말만 들어보면 완전 실패 아닌가.
아니, 이적 후 성적만 봐도 울반스키의 활약은 기대와 거리가 멀다.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클럽하우스에 녹아들지 못하면 무용지물, 지금 다카기는 울반스키를 의도적으로 따돌리는 건가.
그게 맞다면 다른 선수들과도 서먹서먹하겠지, 하지만 울반스키 외엔 대인 관계에 아무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 문제가 있는 쪽은 울반스키, 다카기를 책망할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 어떻게든 고쳐 쓸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겠나?”
“뭐라고요?”
“기술적으로 문제는 없다고 하지 않았나. 자네가 어떻게 좀 해 보게.”
포기를 모르는 단장의 요구에 다카기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트레이드 실패를 인정하는 게 그렇게 어렵나? 본인의 체면 때문에 이러는 것 같은데, 일단 알았다는 답을 했다.
[철저히 공부하고 와라. 그리고 일찍 나오고]
다음 날, 다카기는 호텔에서 울반스키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한테 다 떠넘기지 말고 너도 공부 좀 하라는 뜻, 그리고 평소보다 일찍 나오라는 추가 주문도 넣었다.
아니꼬워도 지금은 고개를 숙여야 하는 입장, 토론토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울반스키는 상대 타자들을 나름대로 분석했다.
5년 동안 내셔널리그에서만 뛰었으니 아메리칸 리그에 대한 정보는 부족한 게 사실, 분석 팀이 대략적인 자료를 주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림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