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왕좌 앞에 군림하는 자 - (1)
[버논 슈바이처, 다카기와 맞대결]
7윌 21일, 뉴욕 알룸나이(Alumni) 스타디움에서 보스턴과 뉴욕의 맞대결이 펼쳐졌다.
버논 슈바이처는 올 시즌 9승 7패, 평균자책점 3.67을 기록하고 있는 신인, 평균 96마일이 넘는 직구와 고속 슬라이더, 스플리터 조합으로 많은 삼진을 잡아내고 있다.
문제는 기복,
3실점 이하를 기록한 경기에선 9승 2패, 평균자책점 2.37로 좋은 활약을 펼쳤지만, 나머지 경기에선 승리 없이 5패 평균자책점 9.54로 무너졌다.
너무도 극명한 차이, 어느 쪽이 슈바이처의 본 모습일까.
큰 키에 폭발적인 구위로 타자를 몰아세우는 패턴은 다카기와 다를 게 없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뉴욕 현지 중계진은 오늘도 그 원인을 찾아나섰다.
“자, 1회 초 보스턴의 공격으로 시작합니다. 선두타자는 폴 돈론, 올 시즌 타율 0.357, 홈런 16개, 42타점, 타율 - 최다안타 모두 메이저리그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컨택능력이 아주 좋은 선수죠. 섵부른 승부는 위험합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폴 돈론은 초구를 잡아당겨 우중간에 떨어지는 안타를 만들어냈다.
예전엔 볼을 신중히 골라냈지만, 빠른 카운트에서 타격했을 때 생산력이 좋다는 통계를 적용하면서 몸을 감싸고 있던 유망주 껍질을 깨버렸다.
그렇다고 선구안이 나쁜 것도 아니라 투수 입장에선 까다로운 상대, 슈바이처는 다음 타자 위긴스마저 볼넷으로 내보내며 수세에 몰렸다.
이제 타석엔 데이브 셰퍼드, 올 시즌 가장 무서운 타자 아닌가. 전반기에 때려낸 홈런은 무려 29개, 그것보다 더 무서운 건 타점 생산 능력이다.
현재 88타점으로 무려 151타점 페이스, 타율(0.341)까지 높으니 정면승부도 위험하다.
그렇다고 만루를 채우고 알 디즌(0.297, 0.357, 0.532)을 상대할 건가. 숨 쉴 틈도 없는 밀도를 지닌 보스턴 타선, j.j. 핵먼이 이탈했지만 그 위용은 시즌 초와 별 다를 게 없었다.
“아, 다시 볼입니다. 볼넷, 무사 만루에서 알 디즌을 상대합니다.”
“이해가 안 되네요. 구속이나 투구 패턴도 다카기와 다를 게 없는데, 도대체 문제가 뭐죠? 뉴욕 코치진도 저희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야 될 텐데요.”
뉴욕 해설위원이 답답함을 토로하는 사이, 알 디즌은 좌중간을 가르는 싹쓸이 3타점 2루타를 작렬시켰다.
여기에 후속타자 데이빗 크로스의 적시타가 이어지며 스코어는 4대 0, 아웃카운트를 하나도 잡지 못한 형편없는 투구에 홈 팬들은 유감을 표했다.
결국 슈바이처는 2회를 넘기지 못하고 강판, 그에 비해 다카기는 상대타선을 차분히 분쇄했다.
“슈바이처는 절대 다카기가 될 수 없습니다. 비교 자체가 실례죠.”
보스턴 지역방송 피트 오어는 뉴욕의 심기를 거스르는 발언을 이어갔다.
겉보기에 두 선수의 체격이나 구위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런데 뭐가 이런 큰 차이를 만들어 낸 걸까. 피트 오어는 운동능력이라고 단정했다.
“많은 사람들이 운동능력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100m를 얼마에 뛰고, 얼마나 멀리 던지는가, 이런 것만을 운동능력이라고 생각하죠.”
“그럼 당신이 생각하는 운동능력의 개념이 뭡니까?”
“밸런스죠. 같은 동작을 얼마나 오랫동안 꾸준히 반복할 수 있느냐, 이게 바로 운동능력입니다. 슬럼프가 길지 않은 선수들의 특징이기도 하죠.”
투구를 할 때 팔과 몸이 분리되는 건 당연, 그런데 이 과정에서 슈바이처는 밸런스가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였다.
안 좋을 때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 뉴욕 코치진은 물론 순바이처 본인도 뭐가 문제인지는 알고 있다.
그래도 마음대로 안 되는 일, 혹시 팔이 너무 오랫동안 뒤에 머물고 있는 게 문제인가?
그러나 디셉션을 위해 몸을 틀어주는 동작은 많은 선수들이 하고 있다. 깨끗한 투구 폼이 구위에 영향을 주진 않을지, 하지만 피트 오어는 그런 건 투구에 상관없다는 주장을 내놨다.
“다카기는 여느 일본 투수들과는 다릅니다. 슬라이드 스텝을 밟지도 않고, 불펜 투수처럼 깨끗한 투구 폼을 지니고 있죠. 하지만 늘 일정한 자세에서 공을 던집니다. 몰리는 공도 거의 없죠. 바로 이 밸런스가 보스턴의 마음을 사로잡은 겁니다.”
“근거가 있는 말입니까?”
“당연하죠. 수더랜드 단장에게 직접 물어 봤으니까요.”
보스턴은 왜 많은 유망주를 놔두고 일본의 고등학생에게 500만 달러가 넘는 계약금을 제시했을까.
메이저리그에 190이 넘는 거인 선발투수가 많은 건 사실, 그 중, 일정한 밸런스로 공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선수가 얼마나 될까.
몸이 클수록 바디 컨트롤이 어려운 건 사실, 그런데 다카기는 그 큰 덩치로 일정한 자세에서 150km가 넘는 공을 던져댔다.
상대는 고등학생이지만 그게 뭐가 중요한가.
오래 전부터 보스턴은 스포츠 과학을 토대로 유망주를 선별하는 기준을 세워두고 인재를 영입해 왔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간 터질 재목이라고 보고 영입, 그런데 1년 만에 마이너리그를 졸업하고 메이저리그를 폭격하고 있다.
보스턴 수뇌부도 경악한 투구 센스와 밸런스, 구위만 받쳐 준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슈바이처에겐 그 능력이 없었을 뿐, 상대는 적이지만 슈바이처는 감탄을 연발했다.
‘저게 가능해?’
다카기는 투 볼에서도 97마일 빠른 볼을 바깥쪽에 붙여 카운트를 잡아냈다.
볼 판정을 받은 공도 스트라이크 존과 멀지 않았던 코스, 공도 빠른데 이 정도 제구라면 타자 입장에선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카운트가 몰리면 스트라이크 존에 냅다 집어던지는 나와는 수준이 다른 컨트롤, 투구 폼이 깨끗하고 더럽고의 문제가 아니다.
알고도 못 친다는 말이 왜 나오는지 이해가 될 정도, 오늘은 완패했지만 슈바이처는 내일의 승리를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다카기의 투구를 분석했다.
‘이걸 쳐 말어?’
4구 연속 빠른 볼, 하지만 타자는 반응하지 않았다.
눈에는 익었지만 치긴 애매한 코스, 카운트에 여유가 있어 그냥 지켜봤다.
“스트라이크!!”
“젠장! 이건 아니잖아!”
스트라이크 판정에 제프리 슈버트는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이게 볼 판정을 받은 2구와 다를 게 뭔가.
하지만 주심도 헷갈리는 건 마찬가지,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컨트롤은 모두의 눈을 속였다.
결정구는 체인지업, 투 볼을 잘 골라놓고 삼진을 당할 줄이야. 더그아웃으로 향하던 슈버트는 주심을 향해 두 눈을 찌르는 항의를 표했다.
하지만 유쾌한 주심은 똑같은 포즈를 취하며 맞대응, 네 눈깔이 나와 다를 게 뭐가 있냐며 슈버트의 속을 긁었다.
‘이건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판정이 마냥 내 쪽으로 유리하게 흘러가겠나.
2볼 1스트라이크에서 던진 공이 볼 판정을 받자 다카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걸 또 따라하는 주심, 다카기는 피식 거리며 돌아섰다.
‘하나 우겨넣자.’
데이빗 크로스는 과감한 승부를 택했다. 스코어는 7대 0, 한 점 준다고 대세에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다카기는 오늘 따라 실점이 볼넷보다 싫었다.
‘어떻게 치기 쉬운 공이 하나도 없냐?’
구석을 찌르는 피칭에 존 헤링은 입맛을 다셨다. 이것마저 구석에 찔러 넣다니, 풀 카운트라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설마 또 빠른 볼? 아니면 떨어지는 체인지업인가. 답이 없는 문제라 눈과 운에 의지했다.
‘제발 콜 하지 마.’
바깥쪽을 찌르는 빠른 볼, 존 헤링은 움찔했지만 태연하게 1루로 걸어갔다. 다행히 조용한 주심, 그렇게 잘 가다 마지막에 발목이 붙잡혔다.
“스트라이크 아웃!!”
“뭐라고?!!”
존 헤링은 펄쩍 뛰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폭발한 건 뉴욕의 감독 개리 페일도 마찬가지, 왜 이렇게 콜을 늦게 하는 거냐며 침을 튀겼다.
그러건 말건 다카기는 벤치로 귀환,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주고받으며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이것도 나름 맛이 좋네.’
다카기는 원래 투구를 좋아하지 않았다.
야구부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던 투구, 그런데 그게 밥벌이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이젠 레벨이 정점에 오르면서 주심의 눈까지 속일 정도, 상대를 농락하고 쾌락을 느끼는 건 악당의 전형적인 모습 아닌가.
투구에 재미를 붙이면서 야구를 대하는 자세도 한결 여유로워졌다.
“불쌍하니까 하나 주지 그래?”
“X까, 한 푼도 못 줘.”
다카기는 동료들의 장난에 웃기지 말라는 반응을 보였다.
실점하기 싫어서 볼넷을 감수한 투구를 하고 있는데 누구 좋으라고 적선을 하나, 베풂은 스타의 품격이지만 그라운드에서는 소금 울리는 투구를 이어갔다.
딱 ~
“높게 뜬 공, 3루수가 잡아냅니다. 투 아웃, 3회 이후 11타자를 연속해서 범타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이제 평균자책점이 1.83까지 내려갔네요. 조정자책점은 293, 이대로 간다면 역대 1위도 노려볼 수 있습니다.”
“TV를 보고 있는 아이들은 이 선수가 어떻게 투구를 하는지 잘 봐야 합니다. 이게 정답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중계는 다카기의 모교, 다이이치 야구부도 지켜보고 있었다.
8월 여름 대회는 이제 눈 앞, 방학을 맞아 훈련에 열중하던 부원들은 휴식 시간에 TV 앞에 모여들었다.
올해도 4명의 NPB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도전했지만 눈에 띄는 활약은 없다. 그 정도로 어려운 무대, 그 지옥의 왕좌를 대선배가 차지해 버렸다.
내년에도 가르침을 주기 위해 모교를 방문한다고 했는데 고시엔에서 우승을 해야 당당히 가슴을 펼 수 있지 않을까?
특히 지난 12월, 대선배에게 넌 밸런스가 안 잡혔다는 충고를 들은 아사노 아키히토는 해설위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강하게 던진다고 다 되는 게 아니었구나.’
다카기 선배는 왜 그렇게 밸런스를 중시했을까.
밸런스가 안 잡히면 97마일 공도 맞아나가는 무대, 그게 메이저리그다.
넌 기본도 안 됐고 노력도 안 하는 놈이라는 충고가 왜 이렇게 가슴을 후벼 파는 건지, 그날부터 밸런스를 잡는데 총력을 기울였고 지금은 나름 수준이 올라왔다.
하지만 아직 만족할 수 없는 투구, 지역예선 선발로 예정된 몸이라 의욕을 불태웠다.
‘빠른 볼만 던져도 되겠어.’
투구를 지켜본 후루타 감독, 다나카 코치는 만족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구위는 좋았던 녀석, 제구를 잡는 과정에서 팔을 내리면서 구위가 약간 떨어졌지만, 다카기의 교습을 받고 투구 폼은 오버핸드로 돌아갔다.
지금은 최고 151km까지 찍는 수준, 171cm 밖에 안 되는 체구로 이런 공을 던진다.
거기다 다이이치 야구부는 올해 A++ 평가를 받은 막강한 전력, 거기다 다카기의 모교라 언론의 관심을 안 받을 수가 없었다.
“아사노 선수, 올해 기량이 급격히 성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그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TV를 열심히 봤습니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대답인지, 기자들은 폭소했지만 아사노는 나름대로 근거를 제시했다.
“작년에 선배님이 밸런스를 중시하라는 충고를 해주셨거든요. 처음엔 그게 뭔지 몰랐는데, 선배님의 투구를 보다보니 그게 뭔지 조금은 깨달았습니다.”
“오호 ~ 그런가요? 그럼 이 자리에서 전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시죠.”
“음 ··· 선배님이 메이저리그의 왕좌를 차지했듯이 저희들은 일본의 왕좌를 차지하겠습니다. 그래야 내년에 선배님을 뵀을 때 저희들도 가슴을 펼 수 있겠죠. 반드시 우승할 겁니다. 그 이외의 답은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반드시 우승하겠다는 의지, 하지만 그 소식을 전해들은 다카기는 코웃음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