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존경받는 사람 - (4)
“오늘 뭐하고 놀았어? 말해 봐.”
스프링캠프 첫 날, 하루일과를 마친 다카기는 여느 때처럼 아들을 품에 안았다.
이제는 물건도 집을 줄 알고 걸음마도 시작한 녀석, 초보아빠는 다음 진화를 위해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하지만 찡긋 눈웃음만 짓는 아들, 아빠라는 말을 들으려면 아직 기다려야 되는 건가. 그래도 좋은 아빠는 아들과 놀아주며 한가로운 저녁을 보냈다.
“떽 ~ 그건 물어뜯는 거 아니야. 반칙, 반칙”
“ ··· 웅?”
“반칙이라고, 반칙”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다카기는 야구공을 입에 문 아들을 다독였다.
공을 입에 무는 건 반칙, 정확히 말하면 침을 묻히거나 실밥을 뜯어내는 게 반칙이다.
어린 녀석이 뭘 알고 그랬겠는가. 하지만 직업정신이 투철한 아빠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표했다.
“아니 애기가 뭘 안다고 그래?”
키리코는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1살도 안 된 아들에게 그런 말해서 뭘 어쩌나. 하지만 다카기는 나쁜 버릇은 지금부터 못 하게 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건 던지는 거야. 이렇게”
아빠와 시선교환을 나누던 아기는 공을 내팽개쳤다. 바로 날아드는 칭찬, 신이 난 녀석은 꺄르르거리며 기뻐했고 아빠도 따라 웃었다.
“알았지? 그거 입에 무는 거 아니야. 막 집어던져”
“우웅 ~ ”
부자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키리코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보기엔 집안에서 뭘 집어던지는 게 더 나쁜 버릇 같은데 오히려 잘했다고 칭찬하고 있으니, 이걸 어찌해야 하나.
하지만 야구공은 던지라고 만든 것, 딱히 반박할 명분이 없었다.
“다른 건 좋은데 사람한텐 던지지 마.”
“그거 나한테 하는 소리야?”
“어”
키리코는 걱정 어린 잔소리를 이어갔다.
남편은 원하면 빈볼도 던질 수 있는 컨트롤을 지녔다. 물론 진짜 상대를 다치게 한 적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보는 입장에선 흠칫한게 사실, 하지만 다카기는 그건 당신이 야구를 몰라서 하는 말이라고 일축했다.
“투수에겐 투수의 영역이 있어. 그걸 침범하면 전쟁이지”
“투수의 영역? 그게 뭐야?”
홈 플레이트는 투수가 정당한 승부를 위해 마땅히 누려야 할 영역, 그런데 겁대가리 없이 이 영역에 침범하는 놈들이 있다.
스트라이드를 할 때 앞발이 스트라이크 존을 간섭하는 경우도 있고, 아예 처음부터 신체 일부가 그 영역을 침범하는 일도 적지 않다.
‘한방에 보내버려야지. 어설프게 하면 내가 당해’
다카기는 일격필살로 그런 행위를 응징했다.
투수만 타자에게 위협구를 던진다고 생각하면 오산, 타자도 투수에게 위협구를 던진다.
타격코치들은 센터 쪽으로 타구를 보내라는 말을 하는데 이게 뭘 뜻하겠는가. 바로 투수강습이다.
실제로 타자들은 그런 식으로 투수에게 위협을 주는 입장, 보는 사람은 즐겁고 공정한 게임을 바라겠지만 선수들에겐 매 타석, 공 하나가 전쟁이다.
우리 팀 선수가 공에 맞았다면 응징하는 것도 야구의 일부, 다카기는 앞으로도 위협구 던질 거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게 프로인가.’
키리코는 그런 남편을 빤히 지켜봤다.
평소 장난도 웃음도 많지만 오늘 따라 무서워보이는 남편, 하지만 프로의 영역에 간섭한 건 내 실수 아닌가. 아직 학생 신분이라 프로 의식이 몸에 밴 남편을 다시 보게 됐다.
* * *
[다카기를 취재하고 싶다.]
어느덧 2주 차에 접어든 스프링캠프, 이때 한 노인이 보스턴 구단에 다카기를 취재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
그 주인공은 에릭 다트, 무려 61년 동안 백악관을 드나들며 대통령을 상대로 질문을 던진 사람이다.
대통령 담화가 있을 때마다 첫 질문은 에릭 다트에게 주어지는 게 관례였을 정도, 대통령이라도 그 앞에선 식은땀을 흘렸을 정도의 입지에 선 인물이다.
2년 전 은퇴하고 평온한 일생을 보내고 있는 91세 노인이 느닷없이 프로야구 선수를 취재하겠다니, 놀라운 일 아닌가.
하지만 에릭 다트의 과거를 알고 있는 수더랜드 단장은 고려해보겠다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상대가 대통령이라도 할 말은 했던 사람, 한동안 잠잠하더니 또 무슨 꿍꿍이인지, 상대는 스포츠 전문 기자도 아니고 뭣보다 이미 은퇴한 사람 아닌가.
굳이 인터뷰를 허락할 이유가 없었다.
[보스턴 클럽하우스는 백악관보다 문턱이 높다.]
하지만 에릭 다트는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은퇴한 지금도 8천 만 명의 팔로워를 보유한 유명인사, 페이스북을 통해 보스턴 구단은 취재를 허용하라는 여론전을 펼쳤다.
[여기는 백악관이 아니다.]
한동안 SNS를 끊고 조용히 지냈던 다카기는 구단을 대신해 반격에 나섰다.
에릭 다트가 백악관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고 역대 대통령을 쩔쩔 매게 한 인물이라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 하지만 여긴 백악관이 아니다.
이미 기자에서 은퇴한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클럽하우스에 들어오겠다는 건지, 옛 영광에 젖어 무례를 범하지 말라는 일침을 놨다.
대통령도 어쩌지 못했던 사람에게 이렇게 카운터를 날릴 줄이야. 사람들은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고, 에릭 다트도 무례에 용서를 구하며 다시 한 번 취재 요청을 했다.
한 방 먹었으니 좀 얌전해졌겠지. 수더랜드 단장이 취재에 응하면서 만남이 성사됐다.
“왜 날 보자고 한 겁니까?”
“하하 ~ 질문하지 않으면 대통령은 자기가 왕이 된 줄 알지요.”
에릭 다트는 제법 날카로운 답을 내놨다.
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공화국 내에서도 대통령은 무소불위의 귄력을 행사한다.
누군가 제동을 걸어주지 않으면 폭주하기 마련, 에릭 다트는 그동안 무례하다는 비난까지 감수하며 대통령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최근 2년간의 활약으로 팬들에게 king이라는 호칭을 부여받은 다카기, 에릭 다트는 당신이 폭주하기 전에 제동을 걸어주고 싶었다는 답을 내놨다.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겁니까?”
“당신은 왕치고 말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의도적으로 논란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혹시 인기를 끌기 위해서 입니까?”
다카기는 헛웃음을 지었다.
스포츠 인이 인기를 끌고 사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그리고 왕이 말이 많으면 안 된다니, 그런 법이 어디에 있나. 오히려 입을 다무는 게 불통이고 팬들에게 무례 되는 행동 아닐까.
다카기는 난 잘못 없다며 선을 그었다.
“그리고 제가 못할 말 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잘못된 걸 바로잡자고 한 말이 문제가 된다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기자가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아닌가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이 그겁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SNS 계속 하시길 바랍니다.”
에릭 다트는 교묘하게 카운터를 날렸다.
얼마 전, 다카기는 일본 내에서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생각보다 논란이 커지자 코치의 조언대로 야구만 하는 게 낫겠다며 입을 봉인해버렸고, 프론스키의 은퇴나 이런 저런 질문에 대해서도 말을 아꼈다.
좀 더 말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입을 다물어 버리다니, 기자들 입장에선 서운한 일 아닌가.
에릭 다트는 기자들의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기 위해 이곳에 나왔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당했다. 내가 낚이다니!!’
다카기는 속으로 분함을 삭였다.
왕이 말이 많으면 안 된다는 말에 발끈했는데, 그게 설마 유도 심문이었을 줄이야. 백악관을 60년 동안 드나든 내공이 이런 건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다음 질문을 받았다.
“프론스키가 불의의 사고로 은퇴를 했는데 왜 그동안 말을 아끼신 겁니까?”
“프론스키는 자존심이 강한 선수입니다. 어정쩡한 동정은 자존심에 상처를 주기 마련이죠. 마음을 다스릴 때까지 시간을 주는 게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웃는 얼굴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게 그렇게 냉정한 태도인가. 겉보기엔 냉정할지도 모르겠지만, 프론스키를 잘 알기에 그렇게 했던 것 뿐, 주위를 둘러싼 기자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걸 말 해줘야지 이해를 할 거 아닌가. 기자계의 전설 덕분에 일용할 양식을 주머니에 우겨넣었다.
“으음 ··· 다음 질문 드리겠습니다. 당신의 리더십은 어떤 겁니까? 동료를 믿고 말없이 지켜봐주는 겁니까?”
“글쎄요. 저한테 리더십을 논하는 겁니까?”
다카기는 그건 너무 나간 발언 아니냐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프로 생활 4년 차에 접어든 입장, 마이너리그 경력을 빼면 메이저리그 경력은 겨우 3년째다. 그런 내가 리더십을 논한다?
팬들은 몰라도 동료들이 인정할지 의문, 이때 저 멀리서 듣기 싫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한테 맞추라며? 이제 와서 왜 겸손한 척 해?”
메이저리그 경력 13년 차에 접어든 데이빗 크로스의 간섭, 세상에 어느 루키가 베테랑에게 볼 배합을 따지고 들겠나.
그런데 다카가는 그걸 현실로 이뤄냈다. 연차를 무시한 하극상, 왕이 눈치를 주자 크로스는 알아서 발을 뺐다. 스스로 이 팀의 실세임을 인정한 셈, 덕분에 인터뷰 현장은 폭소에 휘말렸다.
“당신 말대로 저는 말이 많은 편입니다. 하지만 다 잘해보자고 하는 짓이죠. 그게 불편하다면 저도 할 생각 없습니다.”
“그래선 안 됩니다. 리더란 의사소통이 중요하죠. 좋은 자세입니다.”
에릭 다트는 계속 수다를 부추겼다.
물론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보스턴 선수단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 간만에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난 다카기는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을 털어놨다.
“그렇죠? 다 잘 해보자고 하는 짓인데 왜 그렇게 싫어하는지 모르겠네요.”
“원래 리더가 부지런하면 주위 사람들이 피곤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그런 정부가 일을 잘해 왔죠. 좋은 현상입니다.”
보스턴 선수단은 지금 당장 인터뷰를 중지시켜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역대 대통령들을 곤란하게 한 것처럼, 다카기의 입도 억눌러주길 바랐는데 오히려 잔소리를 부추길 줄이야.
하지만 함부로 난입할 수도 없는 자리, 역대 어느 메이저리거도 에릭 다트와 얼굴을 마주하는 기회는 잡지 못했다. 대통령들이나 가능했던 일, 왕이라는 별명이 이젠 장난처럼 들리질 않았다.
“하지만 저도 정도는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실책을 하면 누구나 속이 상한데, 거기에 잔소리까지 하면 그냥 싸우자는 거죠. 그런데 프론스키는 그런 배려심이 조금 부족했습니다. 틀린 소리는 아닌데, 눈치가 너무 없었죠.”
“하하 ~ 그렇습니까?”
“네, 제 말에 동의하는 선수도 있을 겁니다.”
폴 돈론과 후안 위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걸핏하면 면박주고 내가 단장이라면 너 안 쓴다는 폭언까지 했던 프론스키, 물론 잘 해보자고 한 짓이겠지만 한 팀의 리더로서 바람직한 한동은 아니었다.
불의의 사고로 은퇴하면서 여론의 동정을 받았지만 그래도 공과 사는 구별해야 하는 법, 프론스키는 위대한 선수였지만 위대한 리더는 아니었다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 말이 프론스키에게 상처가 되진 않을까요?”
“그 녀석은 욕을 들으면 발끈하는 성격입니다. 주위에서 동정을 하니까 부끄러워서 계속 숨는 거죠. 다들 화끈하게 욕 한 번 해주세요. 그럼 알아서 그라운드로 돌아올 겁니다.”
빠르게 움직이는 기자들의 손, 정말 그럴까?
파고 파도 계속 나오는 기삿거리, 다음 발언에 주목했다.
“저는 일방적으로 동료들을 쏘아붙일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말을 하는 만큼 동료들도 저에게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거죠. 저는 보기보다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들 잔소리가 심하다고 하니까 어떨 땐 조금 서운합니다.”
“하하 ~ 제가 괜한 걱정을 했군요.”
대통령은 주위에서 계속 뭐라고 해주지 않으면 자기가 왕이 된 줄 착각하는 존재, 에릭 다트는 그 생각을 지금까지 지켜왔다.
그런데 이제 막 큰 성공을 거두고 왕이라는 칭호를 얻은 23살 어린 선수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팬으로서 걱정이 돼서 한소리 해주고 싶었는데 내가 괜한 걱정을 한 것 같다며 인터뷰를 마무리 했다.
[He is the president, not the king]
= 그는 왕이 아니라 대통령이다.
에릭 다트는 페이스북에 간단한 소감을 남겼다.
자신감이 넘치는 행동 때문에 얼핏 건방져 보일 수도 있지만 알고 보니 속이 깊었던 선수,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도 알지 않은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왕보다는 대통령이라는 칭호가 어울리는 존재, 이날부터 보스턴 팬들은 철벽의 에이스에게 Mr. president라는 칭호를 부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