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존경받는 사람 - (3)
‘이제는 내 할 일 해야지.’
모교 방문을 마친 다카기는 개인훈련에 돌입했다.
기술적으로 크게 다듬을 부분이 없지만 구속 증가는 아직 열려있는 가능성, 메이저리그 로스터를 대충 살펴봐도 덩치가 가장 큰 선수는 선발투수다.
190이 넘는 키와 100kg대의 우람한 덩치는 기본, 다카기는 지난 2년 동안 선발로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선발치고 몸무게가 조금 가볍다는 지적을 밭았다.
체중을 늘리면 구속이 증가할 여지는 충분, 그렇게 최종진화 단계에 한 발 더 다가섰다.
[저는 안 되는 걸까요?]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절절한 고민이 담긴 문자 하나가 날아들었다.
발신인은 원 포인트 레슨을 받은 아사노 아키히토, 밸런스를 유지하라는 조언은 다나카 코치에게도 들었던 충고다.
하지만 작은 키로 구위를 살려주려다보니 계속 어긋나는 시도, 역시 투수는 키가 받쳐주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
속상한 마음에 푸념을 늘어놓고 말았다.
[지금 장난 하냐?]
돌아온 답은 냉정했다.
작은 키 때문에 투수를 못해먹겠다니, 키 큰 선수가 장점만 있는 건 아니라며 일축했다.
“중요한 건 아웃카운트를 많이 잡아줄 수 있는 투수를 찾는 거죠. 키는 그 다음입니다.”
메이저리거 스카우터로 이름 난 피터 울그만의 말이다.
키가 큰 선수가 선발로 뛰고 많은 아웃카운트를 잡아내는 게 사실, 스카우터들은 지금도 장신 유망주를 찾아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작은 선수는 보통 릴리버로 분류되기 마련, 하지만 그들이 잡아내는 아웃카운트도 적지 않다.
“키가 큰 선수들은 보통 밸런스 유지에 어려움을 호소합니다. 하지만 작은 선수들은 그런 경우가 별로 없죠. 키가 작아도 수준급의 공을 던질 수 있다면 팀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울그만의 말은 통계로 증명됐다.
올 시즌 6피트 미만의 투수가 책임진 이닝은 9.2%, 9이닝 당 탈삼진은 무려 8.52개나 됐다.
6피트 2인치가 넘는 선수들이 전체 이닝의 66%를 소화했지만 이닝 당 탈삼진은 6.6개, 키가 작아도 수준급 공을 던질 수 있다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 내 키가 작아서 안 된다는 쓸데없는 잡소리를 늘어놓다니, 진짜 죽을 만큼 노력은 해봤냐며 몰아세웠다.
“세상의 모든 고난 다 짊어진 것처럼 말하지 마라. 넌 그냥 노력이 부족한 거야. 그렇게 할 거면 때려치워. 어중간한 노력만큼 쓸데없는 것도 없으니까.”
다카기는 어중간한 걸 제일 경멸하는 인간
어중간하면 강자한테 무시 당하는 건 기본이고, 아랫것들한테도 얕잡아보인다.
[내가 1등은 못 이겨도 10등은 이길 수 있다.]
[우리가 일본은 못 이겨도 한국은 이긴다.]
이게 바로 어중간한 자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 아닌가. 집안 식구들이라면 감싸 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다카기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내가 이런 소리나 하라고 전화번호 알려준 줄 알아? 키 작아도 잘 던지는 선수는 얼마든지 있어. 네 신체 조건을 원망할 거면 투수 따윈 하지도 마. 알았어?”
매몰차게 끓긴 통화에 아사노는 뜨끔했다.
1년 전부터 날 유심히 지켜봐 준 감독님과 코치님,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할 만큼 노력을 했을까.
관심을 믿고 그동안 어리광을 부린 건 아닌지, 불호령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몸이 너무 내려간다고? 이 정도면 괜찮은가?’
이 때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밸런스를 유지하는 훈련을 반복됐다.
사실 아사노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다이이치는 일본에서 손꼽히는 명문 사립고교, 몇 년 전부터 체육 특기생을 받기 시작했지만, 학업에 뛰어난 학생은 차고 넘칠 정도로 많다.
아사노의 부모님은 모두 대학 교수, 어렸을 때부터 공부라면 누구보다 잘했고 야구는 취미로 시작했다.
부모님은 알아서 잘하는 아들에게 별 터치를 안 하는 편, 당연히 크게 혼나 본 적도 없다.
나는 야구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아사노는 그 물음에서 다시 출발했고, 불호령에 정신을 차렸다.
* * *
[저희도 야구 하고 싶습니다.]
12월, 다카기는 sns를 통해 딱한 사정을 접했다.
사연의 주인공은 제주고교 야구부, 규정에 발목이 잡혀 겨울 동안 제대로 된 훈련도 못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키가 작아서 안 되네 하는 어떤 못난 후배와는 전혀 다른 정신 자세, 다카기는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싶다는 뜻을 전했다.
최고의 메이저리거가 도움을 주겠다는데 학부모들이 열광한 건 당연, 실례가 안 된다면 내년부터 지도를 받을 수 있겠냐는 문의가 쏟아졌다.
“안 돼!”
이때 한국 소프트볼 야구 연맹이 태클을 걸었다.
누가 뭐래도 겨울 동안 단체훈련은 금지, 그리고 가르침이 필요하다면 국내 프로 선수들도 있지 않은가.
왜 굳이 일본인 선수에게 지도를 받겠다는 건지, 하지만 제주고교 야구부 학부모는 헛소리 하지 말라며 반박했다.
“아이들이 훈련을 원하는데 왜 못하게 하는 건가? 뮛보다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여기까지 올 프로 선수도 없다.”
돈 좀 번다는 프로 선수들은 사이판이나 날씨가 따뜻한 곳으로 전지훈련을 간다. 굳이 제주도에서 훈련을 할 선수가 몇 명이나 될까.
거기다 꼴에 프로라고 사인이나 팬서비스도 개판, 이런 사람들이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을까.
거기다 메이저리거가 도움을 주겠다고 하지 않는가? 세상에서 야구를 제일 잘하는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는 건 당연, 어중간한 선생님은 필요없다며 반발했다.
[한국 학생들을 가르쳐?]
[키워봤자 일본의 목을 물 놈들이다. 주인도 몰라보는 개 키워서 어디에 써?]
이 사건은 일본에서도 이슈를 일으켰다.
기왕 가르칠 거면 일본 학생들을 지도 할 것이지 하필이면 왜 한국? 그만 두라는 참견이 쏟아졌다.
[일본이 위대해서 초밥이 유명해진 건가?]
다카기는 바로 반격에 나섰다.
초밥이 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식이 된 걸까. 일본이 위대하니 음식의 위상도 덩달아 올라간 건가. 다카기는 그게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당신들은 모두 위대한 일본을 논하고 있는데 주변 나라들의 존경을 받으려면 그에 맞는 품위를 갖춰야 한다. 야구를 알고 배우고 싶다는 학생들이 있는데 국적을 이유로 거절한다면 그게 위대한 일본인의 태도라고 할 수 있나?]
초밥이 유명해진 건 맛 때문, 일본이 위대해서가 아니다.
국가의 품격도 마찬가지, 일본이 잘났다고 떠들어 봤자 세계인들이 인정해주겠나.
내가 모범을 보여야 국가의 품위도 올라가는 법, 당신들의 행동은 일본의 국격을 떨어트릴 뿐이라며 일침을 놨다.
[그리고 한국 웃기네. 왜 애들 훈련을 못하게 하는 거야? 실력이 없으면 훈련을 시켜야지, 왜 앞길을 막아?]
다카기는 한국 소프트볼 야구 연맹의 멱살까지 잡았다.
지도자들의 가혹한 방식이 문제라면 그놈들을 규제하면 될 거 아닌가. 왜 죄 없는 학생들 훈련을 못하게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쩜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콕 집어서 해주는 건지, 제주고교 야구부 학부모들은 그 말이 옳다며 여론전을 펼쳤다.
하지만 소프트볼야구 연맹은 묵묵부답, 이 문제는 프로야구로 확대됐다.
오프시즌 동안 단체훈련을 하면 안 된다니, 돈이 있는 선수들은 해외로 나가 최고의 시설을 갖춘 공간에서 여유 있게 컨디션을 끌어올린다.
하지만 그럴 형편이 안 되는 선수는 구단시설이나 코치진의 지도를 받는 게 필요하다.
도대체 누굴 위한 단체훈련 금지인지, 다카기의 말대로 진짜 문제는 지도자들의 가혹한 훈련 방식 아닌가.
훈련을 원하는 선수들에게 단체훈련 금지는 족쇄, 학원에서 심화학습이 필요한 학생들에게 학원가지 말라고 하는 꼴과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요지부동인 선수협과 KBO 위원회, 각자 알아서 잘 하라고 하는데 그게 방치지 뭔가. 어쨌든 이 사건으로 다카기는 한국은 일본야구를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하긴, 처음부터 라이벌도 아니었지. 재수 없게 몇 번 물렸을 뿐’
일본이 국제대회에서 4강 이상의 성적을 거두는 동안, 한국은 뭘 했나.
그런데 몇 번 일본을 이겼다고 라이벌처럼 어깨를 나란히 하려했던 한국, 하지만 양국의 수준 차이는 명확하다.
매년 메이저리그 진출 선수가 쏟아져 나오는 일본, 그에 비해 한국은 어떤가. 웃긴 건 실력은 퇴보했는데 프로야구 연봉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KBO 선수들의 해외진출이 뜸해졌다는 거다.
이래저래 답이 없는 동네, 훈련도 못하게 하지 수준은 떨어지지 연봉은 올라가지, 이런 리그가 어떻게 발전을 하겠나.
여론전이 격화되자 알아서 하라며 관심을 껐다.
“공이 더 좋아졌는데?”
오프 시즌 동안 훈련을 도와 줄 잭 브라이드 코치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SNS를 너무 열심히 하는 것 같아 살짝 걱정했는데 역시 훈련만큼은 확실히 하는 선수, 부상만 없다면 내년에도 좋은 활약을 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SNS는 그만하지 그래? 자네한테 별로 도움 될 게 없어.”
“무슨 뜻이에요?”
“남들 일엔 신경 쓰지 말라고, 자네의 입장도 있지 않나?”
그래도 걱정이 됐는지 참견을 늘어놨다.
사생활에 간섭하는 건 브라이드의 스타일이 아니지만 이런 선수가 여론전에 휩쓸려 야구에 집중하지 못한다면? 본인은 물론 팬들에게도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끊으려고요. 제가 뭐라고 한다고 세상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 것 같네요.”
“잘 생각했어.”
브라이드는 잘했다며 어깨를 다독였다.
30년, 아니 5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선수, 세상일에 너무 무관심 한 것도 좋지 않지만 지금은 야구에만 집중하라며 거듭 충고했다.
어느덧 성큼 다가온 출국일, 구름처럼 몰려온 기자들은 다카기 주위를 에워싸듯 포위했다.
“새로운 시즌을 앞두고 계신데, 각오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제 일만 열심히 하고 살겠습니다. 다른 일은 관심 끌 테니, 앞으로 이런저런 일로 왈가왈부 할 일도 없을 겁니다.”
기자들은 흠칫했다.
다카기는 야구실력 뿐만 아니라 입담으로 기삿거리를 쏟아내는 밥줄, 앞으로 남 일은 신경 안 쓰겠다는 게 무슨 뜻인지, 기자들은 잘 알고 있었다.
더는 할 말 없다고 툭 던진 다카기는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먼저 스프링캠프에 도착한 동료들은 다카기를 두고 입담을 이어갔다.
“너 수다쟁이잖아? SNS 끊고 어떻게 살려고?”
“닥쳐”
면박을 당한 스캇 포데스와는 피식 웃고 말았다.
원래 이런 대접을 받았던 입장, 그리고 내가 작년 월드시리즈에서 확실히 하지 못한 탓에 다카기가 마무리를 책임지지 않았나. 면박을 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프론스키 소식은 들었어?”
“어”
다카기는 무덤덤한 말로 답했다.
작년 월드시리즈에서 머리를 직격당한 프로스키는 은퇴를 선언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선수생활을 이어가기엔 무리, 1년 2100만 달러 계약이 남아 있지만 선수생활에 미련이 없다는 뜻을 드러냈다.
프로에서 거둔 218승은 하나 하나가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 거라는 소감을 남겼다는데, 정말 미련이 없었을까.
인터뷰 마지막에 흘린 눈물은 그게 본심이 아니라는 걸 증명했다.
하지만 다카기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 어설픈 동정은 오히려 상처가 될 뿐, 통산 218승을 거뒀고 개인타이틀도 꿀리지 않으니 프론스키의 명예의 전당 입성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게 불의의 사고로 은퇴하게 된 선수에게 무슨 위로가 될까. 거기다 자존심이라면 누구보다 높았던 프론스키, 이런 은퇴는 생각해 본 적도 없을 거다.
다카기는 말이 많은 편이지만 이번만큼은 침묵을 지켜야 하는 상황이라고 판단, 이후에도 프론스키에 대해선 철저히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