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179화 (179/361)

179화. 존경받는 사람 - (2)

‘처음 인사드립니다.’

이곳은 제주도의 안덕면 광평리, 신혼여행을 온 다카기는 무덤 앞에 고개를 숙였다.

중학생 때 일어난 일이라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먼 친척들의 재산 분쟁 때문에 한동안 방치 됐던 조상님들 무덤, 할아버지가 그동안 사람을 시켜 관리 했다고 들었지만 직접가서 보는 게 확실하지 않겠나.

신혼여행을 가기 전, 무덤을 둘러보고 그동안 관리에 힘을 써 준 분에게 감사를 표했다.

사실 가족회의에서 유해를 일본으로 옮기고 땅은 처분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돌아가신지 50년도 넘은 유해를 파헤쳐서 어쩌겠나.

고향 땅에서 편안히 잠들게 해드리는 것도 후손의 의무, 기업일로 바쁜 가족들을 대신해 앞으로 다카기가 관리를 하기로 했다.

말이 관리지 여행 중 한번 둘러보는 게 전부, 차를 타고 이곳 저곳을 둘러본 신혼 부부는 호텔로 방향을 틀었다.

“앞으로 매년 여기 와야 되는데 어때?”

“난 좋아, 좀 춥긴 하지만”

키리코는 제주도 여행을 꽤 마음에 들어했다.

이렇게 오붓한 데이트를 즐긴 게 얼마만인가. 일본에선 밖에 나갔다 하면 사방에서 날아드는 관심의 눈빛,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춥다고 해도 안 벗어 줄 거야.”

다카기는 이 와중에도 장난을 쳤다. 여자는 남자보다 피하지방층이 두꺼워 추위에 강하다고 들었다.

그런데 왜 한국드라마를 보면 남자들은 옷을 벗어 여자에게 덮어주는 건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행동, 뭣보다 어린 동생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것 같아 드라마의 남자주인공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이제 결혼했다고 나 홀대하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 나도 살아야 될 거 아냐.”

“어휴 ~ 진짜 낭만 없어”

키리코는 연신 불만을 중얼거렸다.

배우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훤칠하고 잘생긴 남편, 그런데 무드라는 게 너무 없다.

분위기 좀 잡아보려 해도 닭살 돋는다며 회피, 그런데 애는 어떻게 낳은 건가. 비쭉 내민 입술로 서운함을 표했다.

낭만은 없어도 눈치는 있는 남편, 다카기는 토라진 강아지를 옆구리에 끌어 안았다.

“이러면 불만없지? 원래 추위는 서로의 체온으로 녹이는 거야.”

“칫, 너무 약았어”

본인이 손해 안 보면서 실리는 챙기는 스타일, 키리코는 그런 남편이 싫지 않았다.

“야, 저거 ··· ”

“엇!!”

오붓한 데이트도 잠시, 한산한 묘지를 벗어나자 관심을 보이는 눈빛이 날아들었다.

제주도 출신으로 가장 큰 성공을 이룬 고씨 일가, 원태룡 제주지사는 한 때 스기토모 그룹의 창시자 고명출을 고장을 대표하는 인물로 선정하려 했다.

하지만 일본인을 고장 대표로 정하는 건 말이 안 된다는 의견이 들고 일어나며 무산, 그래도 고 씨 일가의 유명세는 지금도 근근히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그 일원인 다카기가 이곳에 올 줄이야. 말은 못 걸어도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적지 않았다.

* * *

“야, 이 근처에 다카기 있나 봐!!”

“뭐?! 장난치지 마 이 XX야!!”

“그럼 네 눈깔로 직접 봐.”

이곳은 제주고등학교 야구부, 인스타그램을 들춰보던  한 학생이 흥분한 목소리를 내질렀다.

제주고 야구부는 제주도의 유일한 야구부, 2년 전 공중분해 될 위기에 처했지만 어찌어찌 명맥은 유지하고 있다.

내부적인 문제도 있지만 더 큰 문제는 외압, 한국 소프트볼 야구 연맹은 동기훈련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학생들의 안전과 인권을 위해서라는데 하루도 쉬어선 안 되는 게 운동이다. 단체훈련은 금지하고 지도자들이 알아서 효과적인 프로그램을 짜라고 하는데 이게 앞 뒤가 맞는 정책인가.

학교에 모여서 훈련은 하고 있는데 단체훈련 금지 조항 때문에 뜀박질과 몸풀기가 전부다.

마침 제주도에 나타났다는 메이저리거, 사방에서 쏟아지는 목격담에 학생들은 흥분했다.

“야, 이것도 규정 위반인가?”

“글쎄 ··· ”

메이저리거에게 조언을 받는 건 괜찮지 않을까. 학생들은 신임 교장의 눈치를 살폈다. 규정을 어기고 단체훈련을 했다고 해임된 감독님, 이건 뭐 확실한 기준도 없고 뭘 어쩌라는 건가.

어버버 하는 사이 흘러간 시간, 그 사이 제주도 여행을 마친 다카기는 일본으로 귀국했다.

첫 공식일정은 모교 방문, 다이이치 고교는 성공해 돌아온 졸업생을 두 팔 벌려 환영했다.

동경과 관심으로 반짝거리는 후배들의 눈빛, 다카기는 당분간 이곳에 머물며 재능을 기부하기로 했다.

“선배님,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건가요?”

사방에서 쏟아지는 질문, 스윙궤적을 두고 고민하는 후배에게 진심어린 조언이 날아들었다.

“멀리 치고 싶으면 정확하게 쳐, 대신, 마지막에 스윙은 위로 향하는 느낌으로”

고등학생에게 맞는 스윙은 뭘까.

짧게 치는 다운 스윙? 이 기술은 스트라이크 존을 지나가는 면적이 좁아 예상치 못한 공에 대응하기 어렵다. 어퍼 스윙은 스트라이크 존을 지나가는 면적이 넓지만 스윙이 퍼지면서 배트 스피드가 떨어질 위험이 큰 편, 다카기는 두 스윙을 접목시켜 자신만의 스윙을 만들어 냈다.

하루아침에 이뤄내는 건 불가능한 기술, 몸소 자세를 잡으며 강의에 나섰다.

“가슴이 움직이면 안 돼. 큰 근육이 먼저 움직이면 힘을 제대로 실을 수가 없어.”

다카기는 마지막까지 가슴을 닫아뒀다.

배트 그립이 그만큼 뒤로 밀려있는 건 당연, 스윙이 최대한 뒤에서 나오기 때문에 스트라이크 존을 커버하는 면적은 그만큼 넓어진다.

문제는 스윙이 퍼지는 걸 방지하는 것, 몸은 닫아두고 팔만 움직여 날아오는 공에 스윙궤적을 맞췄다.

그 다음은 꼬아둔 몸을 풀어내면서 타격, 다운 스윙으로 시작해 그 다음은 레벨, 마지막에 어퍼로 마무리, 지금까지 이런 기술을 가르쳐 준 사람이 없었기에 학생들은 혼란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저희가 그걸 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안 되지. 한다고 해도 빈약한 몸으로는 무리야.”

고등학생은 대부분 근육이 제대로 잡혀있질 않다.

다카기는 고교 시절 90kg이 넘는 체격 조건을 갖췄지만 그건 극히 드문 경우, 대부분은 다운스윙으로 공을 맞추는데 급급하다.

하지만 그런 잘못된 습관이 몸에 익으면 고치기 어려운 게 사실, 다카기는 공을 정확히 맞추되 마지막에 스윙이 위로 향하는 느낌으로 치라는 대안을 제시했다.

이것도 어렵지만 성장을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 반복훈련 외엔 답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내가 기술을 가르쳐 줄 순 있지만 그걸 자기 것으로 만드는 건 너희들의 몫이야. 그러니까 놀지 말고 훈련해. 너희들은 쉴 자격이 없어.”

배려 없는 폭언에 후배들은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실력이 없는 놈은 쉴 자격이 없다니, 잔인하지만 맞는 말 아닌가.

다카기가 졸업한 후에도 다이이치 고교는 오사카 베스트 4, 전국 톱 텐에 드는 명성을 이어가고 있지만 그게 전부다. 고시엔을 정복하기엔 아직 부족한 실력, 부족하면 노력하라는 말에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넌 변한 게 없구나?”

다나카 코치는 제자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고교시절 때도 배려 없는 폭언으로 부원들을 몰아 세웠던 다카기, 잊지 않고 모교를 찾아준 것도 고마운데 겨울 방학동안 늘어질 수 있는 부원들의 정신상태를 바로 잡아줬으니, 소소한 감사를 표하는 건 당연했다.

“코치님, 혹시 눈여겨보고 있는 녀석 있나요?”

“있긴 있지. 그런데 ··· ”

다나카 코치는 기습 질문에 옅은 한숨을 토해냈다.

마음에 두고 있는 녀석은 올해 2학년인 아사노 아키히토, 투구에 상당한 재능을 보이고 있는데 1년 동안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더욱 아쉬운 건 키, 아키히토는 투수 치고 키가 너무 작았다. 170cm를 겨우 넘는 정도, 일본 성인 기준으로 작은 키가 아니지만 요즘은 일본도 선발투수의 신장을 중요하게 여긴다.

투수로서의 성장은 제자리걸음이고 이대로 가도 괜찮은 걸까.

코치님이 눈여겨보고 있다면 발전 가능성은 있는 녀석, 다카기는 그 아사노라는 녀석을 눈여겨봤다.

‘예쁘게 생겼네.’

눈매가 약간 매섭지만 전체적으로 도도한 고양이 이미지, 한눈에 봐도 여리여리한 체격에 미소년 스타일이라 소녀들에게 인기가 제법 많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왜 저렇게 팔을 내려서 투구하지?’

다카기는 아사노의 투구를 덤덤히 지켜봤다.

작은 체구와 달리 구속은 빠른 편, 직접 보진 못했지만 다나카 코치의 말에 따르면 떨어지는 커브도 괜찮은 수준이다.

커브와 빠른 볼 구위를 살려 주려면 좀 더 팔을 올려 던져도 될 텐데, 혹시 제구 문제인가? 예상은 정확했다.

팔을 약간 내리면서 제구가 괜찮아졌다고 하는데 문제는 커브 구위가 떨어졌다는 것, 이러면 무슨 소용인가.

다카기는 바로 원 포인트 레슨에 나섰다.

평소 말도 없고 부원들과의 소통도 별로 없는 아사노, 그런 녀석이 대선배의 부름을 받을 줄이야. 부름을 받은 주인공도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너 슬라이더는 안 던지냐?”

“던지고 있습니다.”

“어디 한번 던져 봐.”

투구를 지켜본 다카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투구 폼 조정 후 던지기 시작한 슬라이더, 하지만 커브를 던지던 습관이 남아 있던 탓인지 아사노의 슬라이더는 커브와 비슷한 궤적을 보였다.

원래 두 구종의 차이는 손목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정도일 뿐, 다카기도 슬라이더를 개량한 커브를 던지고 있다.

하지만 그게 안 맞는 투수도 있기 마련, 다카기는 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며 수술용 칼을 집어 들었다.

“너 원래 오버핸드로 던졌다며?”

“그렇습니다.”

“하던 대로 해 봐. 실수해도 괜찮으니까”

다카기는 그렇게 한동안 아사노의 투구를 지켜봤다.

키는 작지만 공을 놓는 지점도 좋고 구위도 제법 묵직한 편, 하지만 몸이 일찍 열리면서 제구가 틀어지는 현상을 보였다.

그게 잘 안 되니 투구 폼을 바꿔보려고 했던 거겠지, 하지만 다카기는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라고 조언했다.

딜리버리는 투수마다 차이가 있기 마련, 하지만 밸런스가 유지 돼야 한다는 건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진리다.

스트라이드를 할 때, 몸과 발이 약간 내려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하지만 너무 내려가도 안 된다.

그런데 아사노는 자신의 작은 키를 의식한 건지 발을 많이 뻗으면서 몸도 그만큼 내려가는 모습을 보였다.

몸이 주저앉는다는 건 밸런스가 흔들린다는 것, 다카기는 마운드의 경사면을 가볍게 스치고 지나간다는 느낌으로 스트라이드를 하라는 조언을 제시했다.

스트라이드가 좁아진 만큼 포심 구위는 약간 줄어들겠지만, 이 녀석의 구위라면 그 정도는 어느 정도 상쇄될 거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투구판은 가운데를 밟아”

여기에 또 다른 조언도 추가했다.

가운데에 몰리더라도 상황에 따라 스트라이크를 집어넣는 건 투수의 기본 요건, 투구판 가운데를 밟으면 몸이 일찍 열리는 현상도 방지할 수 있고, 어지간한 공은 스트라이크 존에 집어넣을 수 있다.

다카기도 마지막에 공이 살짝 휘는 타입이라 투구 판 가운데를 밟고 던지는 편, 아사노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투구에 임했다.

“또 몸이 내려갔잖아. 다시”

조용하지만 묵직한 목소리, 딱히 면박을 준 것도 아닌데 아사노는 거대한 손이 등을 떠받치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 재능이 있는데 꽃을 피우지 못하고 져버리는 싹만큼 안타까운 게 또 있을까. 다카기는 코치님이 왜 이 녀석을 눈여겨보고 있는지 조금은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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