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존경받는 사람 - (1)
“오빠 뭐해?”
“그냥 누워 있어.”
시즌을 마무리한 다카기는 간만에 친가에서 여유로운 하루를 보냈다.
결혼식, 신혼여행 그리고 이어지는 훈련, 앞으로의 일정도 스케줄이 꽉 차 있다.
쉬고 싶은데 오늘 따라 놀아달라는 칭얼거림이 심한 동생, 이제 클 만큼 컸으니 오빠에 대한 집착이나 관심도 줄어들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 좀 봐달라며 몸을 뒤척거렸다.
“하아 ~ 남자는 역시 성공하면 변하나 봐.”
다카기는 천천히 시선을 동생 쪽으로 돌렸다.
이게 저 쪼그만 녀석이 칠 대사인가. 이어지는 대사는 더 기가 막혔다.
“점 점 나한테 냉정해져. 예전엔 이러지 않았는데 ··· 애정이 식었나 봐. 하아 ~ ”
얘가 오늘 뭘 잘못 먹었나. 연기라고 하기엔 너무 리얼, 손짓으로 이리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너 그런 말 어디서 배웠어?”
“TV에서 봤어.”
다카기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라도 된 걸까. 바로 심문에 나섰다.
“너 지금 연기하는 거야 아니면 진심이야?”
“음 ··· 반반이야”
연기연습도 하고 싶지만 오빠랑 놀고 싶은 것도 진심, 동생의 요구대로 여주인공을 속 썩이는 못된 남자 연기를 시작했다.
“널 향한 애정이 식은 게 아니야. 그냥 좀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어.”
“그래서? 나야 아니면 그 여자야?”
코하루는 점 점 연기에 몰입했다. 이렇게 귀여운 동생을 두고 결혼을 하려는 오빠, 나 두고 갈 수 있냐는 눈빛 공격에 다카기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꾹 눌렀다.
“어휴 ~ 오글거려서 못하겠다.”
“오빠! 잘 나가다 빠지면 어떻게 해! NG!!”
초보 감독의 NG 선언, 그렇게 동생의 연기놀이를 받아주던 다카기는 시끄럽게 울리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발신인은 다카기의 에이전트이자 대리인 제임스 콜튼, 방금 전 일본정부 관방장관 스오 요시토모가 국민영예상 시상을 제안했다는 말이 이어졌다.
국민영예상은 일본국민에게 사랑받고 사회에 희망을 준 인물에게 주는 총리상, 말이 그렇지 거의 다 야구선수가 받아간다.
최근 5년을 살펴봐도 야구 선수가 4번이나 수상(17, 19, 20, 21회), 하지만 다카기는 상을 받을 생각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모범이 되기 위해 시작한 야구도 아니거니와, 앞으로 악당짓을 해야 하는데 그런 상을 받는 게 말이 되나.
뭣보다 이제 나는 세계에서 노는 몸, 일본 총리가 주는 상이라고 해봤자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인정한 명예보다 끌리지 않았다.
“오빠, 뭐야?”
“응, 상 준다는데 거절했어.”
많이 놀랐는지 코하루는 그렇잖아도 큰 눈을 더욱 크게 부풀렸다. 상은 내가 잘 해서 주는 거 아닌가. 고맙다고 넙죽 받아야지 그걸 왜 거절하는 건지, 해명을 요구했다.
“너 유치원에서 상 받은 적 있어?”
“응, 착한 일 많이 했다고 줬어.”
“그거 너 착하다고 준 거 아니야. 앞으로도 그렇게 하라고 협박하는 거지.”
상은 지금까지 잘 했으니 앞으로 더 잘하라고 주는 압박이다.
그러다 한 번 못하면 욕을 먹는 건 수상자, 국민영예상? 앞으로도 일본인으로서 국민에게 모범과 희망이 돼 달라니, 이게 압력이 아니면 뭔가.
착한 아이에게 주는 상도 마찬가지, 다카기는 동생을 교묘하게 압박했다.
“네가 지금 죽을 만큼 배가 고파, 그런데 그거 친구한테 나눠줄 수 있어? 그렇게 하라고 주는 게 착한아이 상이야.”
코하루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내가 잘해서 상을 받았으니 그걸로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뒤에 앞으로도 잘 하라는 압력이 숨어있었을 줄이야. 어린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
“지금이라도 돌려주면 안 될까?”
미끼를 덥썩 물어버린 순진한 녀석, 다카기는 이미 늦었으니 앞으로 상을 받을 땐 주의하라며 동생을 가지고 놀았다.
* * *
지금부터 식을 시작하겠습니다.
귀국한지 열흘 째 되는 날, 다카기는 스기토모 그룹이 운영하는 호텔에서 약혼녀와 정식으로 부부의 연을 맺었다.
세기의 결혼식도 아닌데 이 사람 저 사람 불러들일 이유는 없겠지, 최소한의 인연만 초대해 조용히 식을 올렸다.
“너 나중에 크면 우리 학교로 와라.”
다이이치 고교의 후루타 감독은 일찌감치 스카우트에 나섰다.
아직 젖도 못 뗀 아기에게 야구부로 들어오라는 게 웬 말인가. 다카기는 여기서 스카우트는 금지라며 아들을 보호했다.
“너 얘 야구 안 시킬 거냐?”
“왜 이렇게 눈독을 들이세요. 제가 알아서 할 게요.”
운동은 본인이 좋아하면 시키겠지만 지금은 논하기 너무 어린 시기, 감독님이 납치하기 전에 집안어른들 품으로 보냈다.
“저 녀석이 아빠라니 ···”
후루타 감독은 식을 올리는 제자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봤다. 야구와 공부 밖에 몰랐던 녀석이 이젠 한 아이의 아빠이자 가장이 될 줄이야.
자기 자식은 아니지만 3년 동안 애정을 쏟은 녀석이라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그 녀석은 내가 먼저 찜했다고’
도우묘 고교의 야부구 감독, 킨타 마사시게는 라이벌 옆에서 속마음을 중얼거렸다.
누가 뭐래도 다카기는 내 제자, 당연히 그 아들도 내가 가르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상도덕도 없이 먼저 침을 바르다니, 배냇머리도 안 빠진 아기를 두고 어른들은 유치한 기싸움을 벌였다.
“보기 좋네요.”
한편, 결혼식에 초대 받은 타키야마는 동석한 애인의 반응을 살폈다.
나도 곧 저 대열에 끼고 싶은데 애인의 생각은 어떨지, 하지만 스즈에는 못 들은 척 넘겨버렸다.
“너 다카기랑 훈련 같이하기로 했다며?”
이때, 다카기의 고교 선배 이시다 토모카츠가 타키야마의 관심을 끌었다.
이시다는 올해 프로 데뷔 5년차에 접어들었다. 이제는 NPB를 대표하는 투수, 올해 WBC에서 일본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은 거물로 성장했지만 미국에서 성공한 후배에게 자극을 받아 메이저리그 진출도 고려하고 있다.
다카기와 같이 훈련하면서 정보를 얻고 해외진출에 대비할 생각이었는데 이 녀석에 선수를 빼앗길 줄이야, 피 보기 전에 양보하라며 후배를 협박했다.
“그건 안 되죠. 제가 먼저라고요.”
“야, 난 저 녀석 직계 선배야. 얌전히 양보해라.”
“전 직계 후계자거든요?”
유치한 기싸움은 여기서도 반복, 어쨌든 별 다른 소란 없이 1부 결혼식이 끝났다.
다카기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타키야마는 신부의 부케를 받기 위해 앞으로 뛰쳐나갔고, 그 속마음을 알고 있는 다카기는 신부 뒤에 선 하객들에게 알아서 좀 비켜달라는 농담을 던졌다.
“그거 내가 받아도 되지?”
이때 의외의 인물이 앞으로 나섰다.
한때 다카기를 두고 키리코와 쟁탈전을 벌였던 스즈에, 하지만 이미 승부가 난 싸움이다. 미련도 없거니와 이미 새 출발을 한 몸, 다음 결혼식 주인공은 나라고 공식 선포하기로 했다.
“잘 던져 줘.”
“알았어.”
키리코는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백패스는 생전 처음인데 잘 할 수 있을지, 최대한 신경을 썼지만 방향이 틀어진 부케는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그걸 번개처럼 낚아챈 사람이 타키야마, 누가 프로야구 선수 아니랄까봐 멋들어진 캐치를 선보였고, 수컷의 애절한 구애는 하객들의 폭소를 이끌어냈다.
그렇게도 결혼이 하고 싶을까, 결혼식 내내 별다른 표정이 없던 스즈에도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조만간 잘 될 것 같은 분위기, 이어지는 피로연에서 다카기는 반가운 손님들과 얼굴을 마주했다.
“너 신혼여행은 어디로 갈 거냐?”
“가까운 데로 가려고요. 멀리 가 봤자 의미가 없어요.”
이시다 선배의 질문, 미국에서 1년 동안 동거까지 했는데 뭐 하러 장거리를 가나, 아들까지 뒀으니 첫날밤이라고 해봤자 의미도 없고, 여행을 즐기는데 초점을 맞추겠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야, 나 2년 안에 메이저리그 진출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 하냐?”
“글쎄요. 조금 더 실력을 가다듬고 오시는 게 나을 것 같기도 ··· ”
이시다는 올해 18승 6패, 평균자책점 2.17을 기록하며 프로 이후 최고의 한해를 보냈다. 연봉도 3억 엔으로 수직 상승, 덕분에 메이저리그에서 통할 거라는 자신감을 얻었다.
하지만 다카기의 눈은 냉정했다.
이시다 선배는 분명 좋은 투수, 메이저리그에 와도 어느 정도 성적은 거둘 수 있을 거다.
하지만 투심이나 커터처럼 변형된 빠른 볼이 없다보니 빠른 볼과 체인지업, 커브 조합으로 승부를 봐야하는 입장, 커브는 보여주기 용이고 실질적인 무기는 포심과 체인지업이다.
다카기처럼 수준급의 투심을 던지는 것도 아니고 구속도 메이저리그 평균에 겨우 걸치는 정도, 일본에선 승승장구 했지만 메이저리그 타자들 상대로는 어떨까?
2년 전, 1억 2천만 달러를 받고 뉴욕에 진출한 쿠사나기 하루타와 비교하면 살짝 떨어지는 레벨, 조금 더 성장이 필요하다는 조언에 이시다는 얼굴을 붉혔다.
“넌 여전히 배려라는 게 없구나?”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게 배려죠. 선배는 투심을 좀 더 연마할 필요가 있어요.”
“그럼 네가 가르쳐주면 되겠네. 신혼여행 다녀오면 얼굴 좀 보자.”
방심한 사이 새치기를 당한 타키야마는 그건 안 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앞으로 결혼하고 애도 키우려면 돈이 필요하다. 계약금으로 제법 많은 돈을 받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 성공이 절실한 만큼 새치기는 용납하지 않았다.
“넌 돈을 얼마나 벌고 싶은 거냐?”
“연봉 6억 엔은 받아야죠.”
이시다는 기가 차다는 반응을 보였다.
6억 엔이 그렇게 쉽게 입에 담을 돈인가. 타키야마가 몸담고 있는 도쿄 자이언츠는 한때 용병에게 그만한 돈을 지불한 적 있다. 하지만 바로 먹튀로 전락한 투자, 이후 NPB에선 5억 엔이 넘는 연봉은 보기 어려워졌다.
올해 18승을 거둔 나도 겨우 3억 엔에 도달했는데 이 꼬맹이가 그 2배 되는 액수를 부르고 있으니, 이시다 입장에선 기가 막혔다.
“네가 진짜 6억 엔 받을 수 있다고 생각 하냐?”
“못할 것도 없죠. 적어도 선배님보다는 더 받을 자신 있어요.”
이시다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다카기는 그렇다고 쳐도 이 녀석한테까지 만만한 취급을 받다니,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라며 콧대를 세웠다.
“저기요. 다들 제 앞에서 그런 말 해봤자 의미 없을 텐데요.”
이때 다카기가 소란을 한방에 정리했다.
올해는 65만 달러만 받았지만 내년부터 연봉은 10배 이상 급상승 한다. 이건 시작일 뿐, 앞으로 받을 돈이 산처럼 쌓여 있다.
아무리 뛰어봤자 하늘은 그 위에서 코웃음을 칠 뿐, 연봉 끝판왕의 중재에 이시다와 타키야마는 입을 다물었다.
“하아 ~ 나도 조만간 메이저리그 가야지 안 되겠다. 어린 것들한테 무시나 당하고 ··· ”
해외진출을 바라는 이시다의 마음은 더욱 끓어올랐다.
가능하다면 지금이라도 구단에 포스팅을 신청하고 싶은데, 연봉협상까지 마쳤으니 되돌릴 수 없는 일, 내년엔 반드시라는 각오를 술잔에 담아 목구멍에 흘려보냈다.
“선배, 저도 고민이 있어요.”
이때 타키야마가 다카기 귀에 고민을 중얼거렸다.
선배 말대로 떨어지는 파워를 보강하기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에 힘쓰고 있는데, 감독은 그걸 못마땅하게 보고 있다.
원래 NPB는 웨이트 트레이닝에 부정적인 감독들이 많은 편, 거기다 날렵한 움직임을 요구하는 유격수가 그러고 있으니 어느 감독이 좋아하겠나? 하지만 다카기는 정도만 지키면 된다고 선을 그었다.
“너 지금 수비하는데 특별히 문제되는 거 있냐?”
“아니요.”
“그럼 됐어. 네가 성적만 내면 감독도 뭐라고 못할 거 아냐.”
“그게 ··· 문제가 또 있어요.”
애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타키야마는 얼굴 뜨거워지는 고민을 털어놨다.
잠자리를 하는데 몸이 불어난 탓에 애인이 약간 불편해 하는 눈치, 190이 넘는 키에 덩치도 보통이 아닌 다카기 선배는 저 작은 체구의 여성과 어떻게 대업을 이룬 걸까.
말도 안 되는 질문에 다카기는 코웃음을 쳤다.
“야, 애인이 힘들어 하면 네가 밑에 깔리면 되잖아.”
“그건 제 취향이 아니라서 ··· ”
“그럼 나한테 묻지 마, 내가 네 잠자리까지 조언해 줘야 되냐?”
한대 쥐어 박힌 타키야마는 마침 자리로 돌아온 애인의 눈치를 살폈다.
“왜 그래? 또 다카기한테 혼났어?”
“그런 거 아니야.”
“그만 쥐어박아. 애도 아닌데 왜 그래?”
자기 애인이라고 스즈에는 타키야마를 변호했다.
뒷배경을 알고도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다카기는 한 소리 하고 싶었지만 후배의 입장을 생각해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