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그래도 야구는 계속 된다 - (9)
따아악 ~ !
“멀리 가는 타구 중견수가 펜스 앞에서 처리합니다! 그 사이 3루 주자는 홈으로, 1루 주자는 움직이지 못합니다. 다시 동점! 다시 시작되는 월드시리즈 6차전입니다.”
“양 팀 모두 수비 실책이 실점으로 이어졌거든요. 보스턴은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됩니다.”
타석엔 이제 감이 좋은 데이브 셰퍼드, 흥이 오른 홈팬들은 내친 김에 역전을 연호했다.
하지만 세인트루이스는 세퍼드를 거르고 맥 리스와 승부, 사방에서 야유가 쏟아졌지만 교체투입 된 칼 메이스가 맥 리스를 삼진 처리하며 분위기는 잠잠해졌다.
후속 타자는 오늘 대형실책을 저지른 알 디즌, 앞 선 타석에서도 범타로 물러났으니, 어떻게든 만회하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틀렸어.’
하지만 다카기는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큰 경기에서 좋은 활약을 펼친 선수라 실책이 나와도 잘 수습할거라 믿었는데, 한 번 못햇다고 정신적으로 무너진 느낌
아니나 다를까 결과는 유격수 땅볼, 무사 주자 1-3루에서 한 점 밖에 내지 못한 보스턴은 승부를 연장까지 끌고갔다.
‘어떻게 해야 하나.’
브라이스 감독은 스캇 포데스와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현재 가장 믿을 수 있는 불펜이자 최후의 보루, 그러나 지금이 투입할 적기인가 묻는다면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어 없다.
월드시리즈 1-3-4-5차전에 등판한 포데스와, 일정을 고려하면 멀티 이닝 소화는 어렵다. 앞서고 있는 상황도 아닌데 여기서 소모하는 게 최선인지, 고심 끝에 내일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따악 ~ !
“아 ··· 빠졌다는 판정입니다. 볼넷, 다시 묘한 분위가 흐르고 있습니다.”
“이번 시리즈 들어 브라이스 감독의 불펜 기용이 계속 어긋나고 있거든요. 작년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펜 운용은 브라이스 감독의 특징이자 가장 뚜렷한 장점, 그게 흔들리면서 팬들의 믿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난 경기에 비해 눈에 띄게 흔들리는 제구, 완급조절이 없는 투구를 거듭해온 포데스와는 여기서 무너져내렸다.
세인트루이스는 보내기 번트와 적시타로 다시 도망, 또 볼넷이 나오면서 보스턴은 1사 주자 1, 2루 위기에 몰렸다.
타이밍 안 좋게 등장한 공포의 푸들머리, 오늘 역전 홈런을 날린 도허티는 포데스와까지 무너뜨리며 벡 배이 파크를 침묵 속으로 밀어넣었다.
6차전을 내 준 보스턴 선수단은 침통한 얼굴로 클럽하우스로 퇴장, 뼈 아픈 실책을 저지른 알 디즌은 눈물까지 훔쳤다.
“아직 끝난 것도 아니잖아. 왜 그래?”
“그냥 내 자신이 창피해서 ··· ”
다카기의 관심에 디즌은 서둘러 눈물을 훔쳤다.
루키 시즌에 맞이한 월드시리즈, 얼마나 잘 하고 싶었을까. 4차전의 영웅이 되면서 살아난 자존심이 걸레가 된 6차전, 평소 누굴 위로하는 성격이 아니지만 다카기는 나직한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갔다.
“너 그동안 충분히 잘 했어, 못한 것만 생각하지 마.”
“악당이 그런 말 해봤자 안 어울려”
이 때 눈치를 밥 말아먹은 실 쿠퍼가 한소리를 던졌다. 분위기 전환을 위해 농담을 한 것 같은데 바로 악담이 날아들었다.
“야, 악당 노릇도 부하가 있어야 되는 거야. 몰라?”
최종보스는 마지막까지 부하를 앞세우는 법, 그리고 진짜 강한 악당은 주위 사람들을 잘 부릴 줄 안다.
나 잘났다고 부하들을 홀대하다 뒤통수를 맞고 죽는 건 3류 악당들이나 하는 짓, 날 위해 죽어 줄 수 있는 부하를 만들겠다는데 저 자식은 왜 초를 치는 건가.
너에겐 요만큼의 기대도 없으니 잠자코 있으라며 면박을 줬다.
“내가 너한테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존재야?”
“그래 넌 부하 10 이야. 부하 1은 커녕 2도 아까워”
정색한 표정이 왜 이렇게 웃긴 건지, 분위기 전환에 성공한 다카기는 필승을 다짐했다. 내일은 부하들은 물론 나도 전장에 참여하는 최종전, 인터뷰도 물리고 7차전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 * *
“역시 그 푸들머리를 잡아야 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데이비드 크로스는 다카기 귀에 은밀한 제안을 속삭였다.
도허티는 이번 월드시리즈에서 3홈런 포함 9타점이라는 대활약을 펼치고 있다. 다카기에게 당한 6타수 무안타를 제외하면 타율은 무려 0.524, 7차전에서 또 무슨 짓을 벌이기 전에 밟아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완전히 보내버리는 것도 방법, 하지만 다카기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보내버리는 건 그렇고 위협만 주자.”
“왜?”
“놀아줄 상대가 없어지잖아.”
나하고 놀아줄 상대가 없으면 악당이 무슨 소용인가.
진짜 야비한 악당은 충분히 죽일 수 있는 주인공을 살려주고 즐기는 행동을 보인다. 쥐를 잡아먹기 전 이리저리 굴려보는 고양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다 물릴 수도 있지만 그 전에 잡아먹으면 되겠지.
뭣보다 다카기는 도허티를 잡아낼 자신이 있었다.
보스턴 투수들이 도허티에게 고전하는 이유는 스트라이크 존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는 것,
90마일 후반대를 던지는 불펜들이 수두룩한데 왜 정면 승부를 피한 건지, 다카기는 그 이유를 나름대로 분석해 봤다.
도허티는 스트라이크가 하나 올라 갈 때까지 방망이를 잘 내지 않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통계를 살펴보면 노 볼 원 스트라이크에서 타자는 평균 OPS 0.859를 기록, 노 볼 투 스트라이크에서는 OPS가 0.398로 급격히 떨어졌다.
반면 초구를 공략했을 때 OPS는 무려 0.973, 초구 공략이 절대 나쁜 게 아니라는 게 증명됐다.
그런데도 도허티는 초구를 버리는 편, 대신 바깥쪽으로 들어오는 공을 적극적으로 밀어내는 타격으로 재미를 보고 있다.
존안으로 들어온 공을 타격했을 때 평균 타율은 0.277, 장타율은 0.460까지 증가한다. 그에 비해 벗어나는 공을 때리면 타율은 0.125로 폭락, 장타율도 0.150으로 떨어졌다.
도허티는 그 반대, 초구를 버리고 스트라이크 존에서 벗어나는 공을 때려도 타율 0.283을 기록했다. 상식과 전혀 벗어난 타격을 하는 선수, 그렇다면 스트라이크 존을 적극적으로 공략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하지만 보스턴 배터리는 지금까지 철저한 바깥쪽 승부를 고집했다.
도허티가 빠른 공 공략에 기술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분석을 믿은 것, 빠른 볼을 던지는 투수들이 많으니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에 비해 다카기는 적극적인 몸 쪽 승부와 떨어지는 체인지업으로 도허티를 억눌렀다. 바깥쪽 승부를 즐기고 스트라이크 확실히 존에서 도망치는 슬라이더를 던진 다른 투수들과는 다른 패턴, 물론 타자도 바보는 아니니 똑같은 패턴에 계속 당하진 않을 거다.
그렇다 해도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공략 법, 도허티에게 거듭 당한 브라이스 감독도 나름대로 머리를 굴렸다.
7차전 선발은 에드 벌처, 올 시즌 8승 8패, 평균자책점 4.64를 거둔 평범한 투수다. 빠른 볼과 슬라이더를 앞세우는 요즘 투수들과 달리 정교한 제구와 체인지업이 장점, 많은 이닝을 책임지긴 어렵겠지만, 도허티는 확실히 막을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스트라이크!!”
그렇게 철저한 대비를 하고 나선 7차전, 첫 두 타자를 땅볼로 잡아낸 벌처는 도허티를 상대로 초구 스트라이크를 밀어 넣었다.
역시 잘 나오지 않는 방망이, 2구는 체인지업을 낮게 던져 파울을 유도했다. 하지만 최근 감이 좋은 도허티는 볼 2개를 골라내며 투수를 압박, 머릿속을 정리한 크로스 포수는 바깥 쪽 높은 공을 요구했다.
내가 95마일을 던지는 강속구 투수도 아닌데 이게 정말 통할지, 에드 벌처는 고개를 저었지만 계속 되는 요구에 고집을 접었다.
딱 ~ !
“당긴 타구가 관중석으로 넘어갑니다. 계속 체인지업으로 가다 이번엔 빠른 볼이네요.”
“도허티는 마지막까지 중심을 뒷발에 남겨두는 편이거든요. 덕분에 다른 슬러거들과 달리 체인지업이나 커브에 대응을 잘 하는 편입니다. 계속 체인지업으로 가는 건 위험하죠.”
“그런데 이번 시리즈에선 다카기의 체인지업엔 무력한 모습을 보여줬거든요.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다카기의 체인지업은 일반적이지 않으니까요. 빠르고 낙차가 크기 때문에 땅볼보다 헛스윙 유도에 더 적합합니다. 여기에 100마일에 가까운 포심까지 있으니 도허티도 공략하긴 쉽지 않겠죠.”
해설위원이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중계카메라가 불펜에 앉아 있는 다카기의 얼굴을 집중 조명했다.
언젠간 나올 수밖에 없는 등장인물, 불펜 경험도 있는 선수라 여차하면 바로 투입될 수도 있다.
오늘 경기 전에도 사진 기자들이 불펜 피칭을 하는 모습을 지켜봤지만 구위는 5차전과 다를 게 없는 수준, 보스턴이 리드를 잡으면 7차전은 의외로 쉽게 끝날 수도 있다고 입을 모았다.
“됐어!!”
에드 벌처는 7구까지 가는 승부 끝에 도허티를 땅볼로 처리했다.
이번 시리즈에서 빠른 볼에 놀라운 적응력을 보여준 공포의 신인, 강속구 투수들도 잡아내지 못한 푸들머리를 벌처가 잡아낼 줄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선수 각자만의 특성이 있으니 물고 물리는 관계도 가지각색, 이런 것도 야구의 묘미 아니겠는가.
거기다 벌처는 4회까지 무실점 호투를 펼치며 2대 0리드를 지켜냈다.
어제 작두를 타다 미끄러진 브라이스 감독은 아웃카운트가 늘어날 때마다 격한 반응을 보였고, 보스턴 팬들도 예상 밖의 활약에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저게 정말 157이닝 동안 홈런 28개를 내준 홈런 공장장인가. 올 시즌 특히 홈에서 약했던 선수(2승 3패 평균자책점 5.74), 호투가 5회까지 계속되는 동안 보스턴의 불펜은 한산했다.
‘아직이다. 아직은 아니야’
브라이스 감독은 마지막까지 다카기를 아꼈다.
이때다 싶을 때 내보내야 하는 선수, 6회 초 에드 벌처가 선두타자 볼넷을 내주자 조용했던 불펜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기 전 충분히 몸을 풀어둔 다카기는 마운드를 방문한 감독이 시간을 끄는 동안 불펜 투구 20개를 끝냈고, 아웃 카운트 하나가 올라가자 마운드를 향해 내달렸다.
“와아아 ~ !!”
관중석은 이미 우승 분위기, 다카기는 이번 포스트 시즌에서 36이닝 동안 1실점 밖에 내주지 않은 철벽 아닌가.
2대 0으로 끌려가는 세인트루이스 입장에선 절대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상대, 경기 재개를 알리는 주심의 콜이 너희는 끝났다는 사형선고처럼 들렸다.
“들어옵니다!! 97마일, 오늘도 최고조의 컨디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계투 경험이 있는 선수라 이 상황이 어색하진 않을 겁니다. 다만 작년과 달리 올 시즌은 선발투수로만 뛰었기 때문에, 구위를 완전히 끌어올리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수도 있거든요. 그걸 잊어선 안 됩니다.”
해설위원의 염려와 달리 크로스는 공격적인 볼 배합을 요구했다.
세인트루이스는 짧게 치는 타자들이 많은 편, 카운트를 잡고도 어설픈 유인구를 던지다 얻어맞은 경우가 꽤 있었다.
그럴 바엔 빨리 승부를 내는 게 현명, 투 스트라이크를 잡은 다카기는 투심을 던져 3루 땅볼을 유도했다.
도허티가 이번 포스트 시즌에서 빠른 볼에 적응했듯이, 다카기도 맞춰 잡는 투구 패턴을 추가하며 한 단계 성장, 원래 생태계라는 게 포식자가 강해지면 먹히는 자도 강해지는 법 아닌가.
정확한 타격에 특화된 세인트루이스 타선은 다카기에게 성장의 계기를 마련해 줬을 뿐, 환경에 맞춰 진화하는 모습에 전문가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죽일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라고’
드디어 마주한 숙적, 다카기는 도허티의 몸 쪽에 빠른 공을 박아 넣었다.
크로스는 완전히 보내버려야 한다고 부추겼지만 그건 재미없는 일,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는 푸들머리를 향해 미소까지 짓는 여유를 부렸다.
‘이젠 나도 못 참겠다.’
도허티는 전투력을 바짝 끌어올렸다.
지금까지 받은 조롱은 그럭저럭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대놓고 위협구를 던지는 상대를 앞두고 냉정을 유지하는 건 어려운 일, 일곱 번째 승부만큼은 반드시 이기겠다며 이를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