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그래도 야구는 계속 된다 - (8)
보스턴은 2회에도 한 점을 추가하며 3대 0으로 앞서나갔다.
내일이 없는 세인트루이는 일찌감치 불펜싸움에 돌입했지만 보스턴은 선발을 그대로 밀고 나갔고, 로버트 클레이튼은 3회까지 무실점 투구를 하며 게임을 이끌었다.
클레이튼의 약점은 몸쪽 승부를 잘 못한다는 것
제구를 논할 땐 바깥쪽 제구가 가장 중시되지만 메이저리그, 그것도 선발투수가 코너웍 만으로 살아남는 건 어렵다.
NPB 출신 투수들이 고전하는 이유도 이 때문, 제구는 분명 뛰어나지만 흘러가는 변화구에 속는 것도 한 두 번이다.
홈런이 두려우니 확실하게 도망치는 공을 던지는 건데, 이런 투구는 금세 타자들에게 들통난다.
로버트 클레이튼은 최고 96마일 빠른 볼을 지녔지만 평균 구속은 92마일 정도, 어정쩡한 몸쪽 승부는 위험하다.
하지만 몸쪽을 던지지 못하면 투구 패턴은 단조로워 지기 마련, 프레이밍에 자신 있는 크로스 포수는 과감한 승부를 요구했다.
5차전에서 주심의 눈을 두 번이나 속인 기술, 12년 차 베테랑이 안방을 지킨 효과는 분명했다.
딱 ~ !
“다시 땅볼입니다. 유격수가 잡아 1루에 던져 투 아웃, 클레이튼은 네 타자를 연속 범타 처리하고 있습니다.”
“클레이튼은 앞으로 이 공을 결정구로 쓰는 게 좋겠습니다. 땅볼 유도에 아주 효과적이네요.”
현지 해설위원은 클레이튼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일반적으로 싱커는 투심처럼 스트라이크 존을 대각선으로 가로 지르는 움직임을 보인다.
그에 비해 클레이튼의 싱커는 스플리터처럼 떨어지는 궤적, 구속이 아주 빠르지 앉아 헛스윙을 끌어내긴 어렵지만, 바깥쪽을 주로 공략하는 피칭 스타일을 보완해 줄 수 있는 구종이다.
아직 루키라 자신만의 피칭 스타일을 확립하지 못했지만, 선발진의 한 축을 이룰 가능성을 보여준 활약, 특히 프론스키를 잃은 보스턴은 클레이튼의 성장이 절실했다.
‘빠른 볼을 너무 아끼는 것 아닌가.’
한편, 벤치에 앉은 다카기는 크로스 포수의 볼배합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극단적인 싱커볼러는 100개를 던지면 90개 정도가 싱커다. 그라운드 볼을 유도할 수 있다면 상관없지만 문제는 클레이튼의 싱커가 그만한 완성도를 갖췄냐는 거겠지.
빠른 볼을 보여주기 용으로 활용하는데, 오늘 클레이튼의 포심 위력은 나쁘지 않게 보인다.
싱커 위주의 투구는 어떤 결과를 맞이할 것인지, 표정없는 얼굴로 결과를 받아들였다.
따악 ~ !
아니나 다를까, 세인트루이스 타선은 4회부터 싱커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아직 미완성이라 빠른 볼을 적절히 섞어줬어야 했는데, 크로스 포수는 바로 볼배합을 수정했다.
따악 ~ !
다시 외야로 날아오는 타구, 좌익수 돈론은 낙구지점으로 이동했지만 내가 잡는다는 신호를 보낸 디즌에게 처리를 양보했다.
펜스에서 2m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잡힌 타구, 펜스 플레이에 약점이 있는 돈론은 뒷처리를 해준 디즌을 향해 글러브를 높이 들었다.
자존심 상하지만 이게 현실, 방망이는 이제 메이저리그에서 기반이 잡혔으니 오프 시즌 동안 수비훈련에 좀 더 집중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시즌 종료는 눈 앞까지 다가왔지만 내년을 위해 하나 둘 가슴에 새겨두는 목표, 어린 선수들이 많은 팀이라 팬들도 좀 더 나은 내년을 기대했다.
로버트 클레이튼은 5회 초 1사 주자 1, 2루에서 마운드를 넘겨주고 퇴장(81구), 홈팬들은 아쉬움을 뒤로한 루키에게 열렬한 환대를 표했다.
잘 던졌지만 아쉬운 결과, 클레이튼은 아이싱도 미루고 경기를 지켜봤다.
3대 0으로 앞서고 있지만 여기서 점수가 나면 추격은 가시권, 루상의 주자들은 모두 본인 책임이라 한구 한구에 식은땀을 흘렸다.
따악 ~ !
“파울입니다. 카운트는 원 볼 원 스트라이크”
“오늘 앙글레아의 빠른 볼은 힘이 있네요. 지난 3차전에서 2실점을 한 불명예를 여기서 만회했으면 좋겠습니다.”
에릭 앙글레아는 최고 98마일을 오르내리는 빠른 볼을 앞세웠다.
보스턴 불펜은 어지간한 구속으론 명함도 못 내미는 강견의 소굴, 앙글레아는 올 시즌 27과 2/3이닝 동안 삼진 36개를 잡아내며 가능성을 보여줬다.
다만 2이닝 당 하나 꼴로 볼넷을 내주는 제구는 개선할 사항, 평균자책점도 4.22로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지옥에서 데려온다는 좌완 파이어볼러라 구단관계자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선발 교체가 빠른 감독 스타일 때문에 보스턴 불펜은 다소 피로가 쌓인 상황, 팬들의 관심은 앙글레아의 투구에 집중됐다.
따악 ~ !
“다시 센터 쪽! 맙소사!! 이게 무슨 일인가요?!!”
“아 ~ 이건 아니죠!! 재앙입니다!!”
보스턴 중계석에서 탄식이 터져나왔다.
그냥 한 점을 주는 수비를 할 것이지, 디즌이 지나친 의욕을 부리면서 타구가 뒤로 빠지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당황한 디즌은 서둘러 몸을 일으켰지만 다리가 풀리면서 다시 주저 앉고 말았다.
백업을 들어온 우익수 후안 위긴스는 급히 2루를 향해 송구, 하지만 주자들이 모두 들어오면서 스코어는 3대 2로 좁혀졌다.
설상가상 1사에 주자는 3루, 경기 내내 끌려 다니던 세인트루이스가 분위기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평소 안정적인 수비를 보여줬던 디즌의 실책이라 홈 팬들이 받은 충격은 상상 이상, 해설위원 피트 오어도 디즌의 무모한 수비를 강하게 비판했다.
“지난 4차전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있었거든요. 디즌은 어떤 타구든 잡아내는 게 야수의 본분이라고 말했지만, 이건 아닙니다.”
“젊은 선수가 과욕을 부린 거죠. 디즌이 4차전에서 팀의 승리를 이끄는 결정적인 활약을 했지만, 오늘 만약 경기가 패배로 끝난다면 그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후속주자가 홈을 밟으면서 디즌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수비가 뛰어나다고 해도 정규 시즌에 실책을 저지른 경험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월드시리즈, 그것도 나 때문에 경기가 뒤집혔다고 생각을 하니 정신이 멍해지고 아무 것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역전은 내주지 않았지만 우승 무드에 젖어있던 관중석은 싸늘하게 식었고, 브라이스 감독은 고개를 숙인 디즌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잘못은 했지만 본인도 그럴 줄 알았겠는가.
짐 브라이스는 올스타 선정 7회, 골드 글러브 4회 수상에 빛나는 스타 출신 감독, 저 그라운드는 한번 맛을 들이면 빠져나올 수 없는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젊은 선수들이 문제, 뭔가 활약을 하면 그때부턴 내가 주인공인 것처럼 오해하고 뭐든 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솟아난다.
지난 4차전에서 멋들어진 다이빙 캐치와 만루 홈런 포함, 7타점 게임을 펼친 디즌은 자신감이 최고조로 오른 상황, 냉정하게 타구를 원 바운드로 처리할 수 있었을까.
분명 또 영웅이 되고 싶었겠지, 영웅의 활약이 때론 민간인에게 민폐가 되는 건 영화에서도 자주 보이는 패턴 아닌가. 뭣보다 젊은 선수가 자신감을 잃어버리는 건 치명적, 신경 쓰지 말라며 다독였다.
‘만회해야 돼’
하지만 감독의 충고는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다.
이어지는 5회 말 보스턴의 반격, 실수를 만회해야 되는 압박감에 사로잡힌 디즌은 공을 쫓아다니다 1사 주자 1루에서 병살타를 치고 말았다.
4차전의 영웅이 역적으로 바뀌는 순간, 팬들의 원성이 높아지면서 디즌의 어깨는 더욱 위축됐다.
‘해 줄 게 없네.’
다카기도 침묵을 지켰다.
평소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자처했지만,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먹힐 리가 없다.
어설픈 동정은 상대의 자존심을 짓밟기 마련, 디즌은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다른 선수들은 아직 건재하지 않은가. 스코어는 3대 3 동점,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경기를 지켜봤다.
‘너와 무리하게 승부할 이유 없지’
이어지는 세인트루이스의 6회 초 공격,
도허티가 타석에 들어서자 보스턴 배터리는 철저한 유인구를 택했다. 안타를 맞더라도 홈런은 주지 않겠다는 패턴, 하지만 바깥쪽에 초점을 맞추고 있던 도허티는 기다렸다는 듯이 배트를 휘둘렀다.
따아악 ~ !!
“멀리 가는 타구가 ··· 우측 담장을 넘어가는 군요. 보스턴이 이렇게 역전을 허용합니다. 도허티는 이번 월드시리즈에서 3번 째 홈런, 양 팀 모두 양보 없는 혈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지금은 크로스가 바깥쪽으로 빠져 앉았는데 몰렸어요. 앙글레아는 역시 이게 문제입니다.”
참을성 없는 팬들은 어서 투수를 교체하라는 원성을 쏟아냈다.
마침 불펜에서 몸을 풀고 있던 하버스태드가 서둘러 등판, 후속 타자들을 처리하면서 급한 불을 껐지만 야유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 중요한 상황에서 꼭 앙글레아를 올렸어야 했을까. 하지만 브라이스 감독은 상대 타자가 좌완에 약점이 있다는 데이터를 근거로 앙글레아를 위기 상황에 기용했다.
그리고 도허티는 기술적으로 광속구에 약점이 있는 선수, 그래서 빠른 볼을 던지는 앙글레아를 좀 더 마운드에 뒀을 뿐이다. 오산이라면 도허티의 빠른 볼 적응력이 예상 이상이었다는 것, 그리고 데이터를 너무 신봉했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실패한 결과도 받아들여야 하는 게 감독, 야유를 받는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그러려니 하는 반응을 보였다.
‘내일 한 번 더 봐야겠군.’
다카기는 마음속으로 7차전을 준비했다.
벌써 경기를 포기하는 건 이르지만, 경기를 거듭 치르다 보면 느낌이라는 게 온다.
스코어는 1점차지만 뒤집긴 어려운 분위기, 5차전에 선발등판 했으니 또 선봉을 서는 건 무리지만 구원등판은 가능하다.
일단 떨어진 선수단의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게 우선, 저 X같은 얼굴들을 내일 또 보고 싶은 거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세인트루이스는 개성이 넘치는 선수들이 많은 편, 염소수염은 기본이고 파인애플처럼 머리를 틀어 올린 선수도 있다.
도허티는 푸들 머리를 녹색으로 염색하는 최악의 헤어스타일로 여론의 입에 오르내렸을 정도, 대부분 단정한 머리를 하고 있는 보스턴에 비하면 중구난방이다.
저 X같은 얼굴을 또 봐야 하는 거냐는 푸념에 분위기는 어느 정도 풀렸고, 데이브 셰퍼드는 그런 일 없을 거라며 에이스를 안심시켰다.
“괜찮아, 내일 다시 볼 일 없을 거야.”
“말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 봐.”
“알았어.”
이어지는 보스턴의 7회 말 공격,
세인트루이스 배터리는 선두 타자 J.J. 핵먼을 상대로 공격적인 투구를 택했다.
여기서 주자를 보내면 폴 돈론 - 후안 위긴스 - 데이브 셰퍼드로 이어지는 보스턴의 핵심 라인, 위긴스는 최근 타격감이 좋지 않지만 돈론과 셰퍼드 앞에 주자를 쌓아 둘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따악 ~ !!
“우중간으로 향하는 타구!! 뒤로 빠져 나갑니다!! 주자는 1루를 지나 2루!! 3루까지!! 들어갑니다!! 무사 주자 3루!! 보스턴이 다시 경기를 원점으로 돌려놓으려 합니다!!”
“이번엔 도허티의 실책이네요!! 역시 수비는 아직 미숙합니다!!”
올 시즌 우익수 부문 실책 2위, 보살 1위를 동시에 달성한 도허티의 이중적인 매력에 보스턴 팬들은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바운드를 잘못 잡으면서 글러브 아래로 빠져나간 타구, 자기가 치우고 다시 싸는 패턴에 도허티는 얼굴을 붉혔다.
“머리 멋진데?!! 다시 봤어!!”
보스턴 팬들의 조롱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바운드 타구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머리에서 이탈한 캡, 세상 구경을 나온 녹색 푸들머리는 관중들의 폭소를 자아냈다.
덕분에 한결 가벼워진 분위기, 절호의 기회가 왔지만 선구안과 컨택 모두 메이저리그 정상급 기량을 갖춘 돈론은 차분히 볼을 골라냈다(볼넷 출루).
이제 상황은 무사 주자 1 - 3루, 브라이스 감독은 감이 좋지 않은 위긴스를 빼고 대타 조이 보이트를 내보냈다.
세인트루이스도 여기서 투수를 교체,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승부에 가벼워진 분위기는 다시 무게가 잡혔다.
오늘 경기를 끝내려는 보스턴, 그걸 저지하려는 세인트루이스, 두 의지가 충돌하면서 그라운드는 한껏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