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그래도 야구는 계속 된다 - (7)
격렬하게 진행되던 경기는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1, 2회에 점수를 낸 보스턴은 이후 매 이닝 주자를 내보냈지만 점수로 연결 되지 앉으면서 불안한 리드를 유지, 세인트루이스도 다카기의 호투에 막혀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한 점만 더 내면 끝이다.’
그냥저냥 흘러가던 경기는 5회 들어 전환점을 맞이했다.
선두 타자 j.j. 핵먼이 안타를 때려냈고 타석에는 데이비드 크로스, 도망갈 한 점이 급한 브라이스 감독은 다시 한 번 번트를 지시했다.
작전이 성공하면서 득점 기회, 궁지에 몰렸지만 세인트루이스는 선발 마이크 스랜스버리를 밀고 갔다.
“자 이제 타석에는 다카기 하루요시가 들어섭니다. 오늘 첫 타석은 몸에 맞는 볼 출루, 두 번째 타석은 좌익수 플라이로 물러났습니다.”
“아웃은 됐지만 나쁘지 않은 타구였거든요. 그래도 투수교체 없이 가고 있습니다.”
스탠스버리는 각오를 다졌다.
이번 승부가 내가 책임질 마지막 임무, 초구부터 변화구를 택했다.
상대는 투수지만 올 시즌 31경기를 야수로 뛰며 11홈런을 때린 선수, 초구부터 빠른 볼을 던지는 건 위험했다.
1루를 채우더라도 어렵게 끌고 갈 승부, 초구가 볼이 되자 다카기도 급할 것 없이 다음 공을 맞이했다.
‘채우고 병살로 가겠다는 거냐?’
2구를 지켜본 다카기는 생각을 정리했다.
그렇게 된다면 사양하지 않겠지만 역시 타자는 공을 치는 게 임무, 1루가 비었으니 병살 위험도 적겠다, 과감하게 돌려봤다.
따악!!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 2루 주자는 3루를 돌아 홈으로 들어! 옵니다! 다시 한 점 추가! 보스턴이 3대 0으로 앞서나갑니다!!”
“지금은 낮은 공이었는데 걷어냈거든요. 1루를 채울 생각이었다면 확실하게 바깥쪽으로 뺐어야 됐는데 이건 치명적이네요.”
적시타가 나오는 순간 양 팀 분위기는 극명하게 갈렸다.
승리를 확신한 브라이스 감독은 주먹을 불끈 쥐며 포효, 반면 어정쩡한 승부구로 화를 자초한 스탠스버리는 고개를 떨궜다.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갔다고 해도 변화구였는데 이게 공략 당하다니, 감독이 내민 손에 공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4와 1/3이닝 동안 6피안타 3실점, 실망스러운 결과에 머리를 움켜잡고 괴로워했다.
“한 점 더 내고 끝내자!!”
그에 비해 다카기는 목소리를 높이며 동료들을 독려, 추가 득점은 나오지 않았지만 스스로 추격을 따돌렸다.
6회까지 4피안타 무실점,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브라이스 감독은 교체를 고려했다.
다카기는 지금까지 235이닝을 던졌다.
정규시즌에 투구수를 관리 해줬지만 그게 진짜 관리였는가. 야수로 출전한 경기수를 고려하면 쉴 새 없이 달려온 1년, 올해만 쓰고 이별할 사이도 아니지 않은가.
뭣보다 선발을 길게 끌고 가지 않는 게 브라이스 감독의 스타일, 교체는 신속하게 이뤄졌다.
하버스태드, 루카스로 이어지는 필승조는 8회까지 정상적으로 가동, 9회 말 스캇 포데스와가 마운드에 오르자 레드 루프 스타디움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
“자, 스캇 포데스와가 5차전을 마무리하기 위해 올라왔습니다. 이번 포스트 시즌은 9경기 등판, 승리 없이 평균자책점 제로, 9와 1/3 이닝 동안 볼넷 1개, 탈잠진은 16개를 잡아내고 있습니다.”
“기록만 봐도 이 선수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죠. 세인트루이스는 비행기 티켓이나 끊어 놔야겠네요.”
보스턴 중계석은 승리를 확신했다.
정규시즌에서 2승 무패 평균자책점 1.90, 44세이브, 세이브 성공률 97%를 기록한 클로저, 역전 따윈 생각도 하지 않았다.
‘빠른데’
초구부터 101마일 빠른 볼, 대타로 투입된 에디 호스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앞서 등판한 하버스태드, 루카스도 96마일은 가볍게 넘는 구속을 보여줬지만 포데스와의 구위는 그보다 명백히 한 수 위였다.
타자 입장에선 눈꺼풀을 깜빡일 여유도 없는 스피드, 호스머는 크게 휘둘러 봤지만 배트는 공 냄새도 못 맡아보고 허공을 갈랐다.
‘길게 끌 것 없지.’
크로스는 몸 쪽 빠른 볼을 요구했다.
슬라이더를 던지기 위한 밑밥, 그런데 이게 얻어 걸리면서 주심의 손이 올라갔다.
화면상으로 봐도 명백한 볼, 잡아주던 공이 아니라 홈 팀 벤치에서 격한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이것도 야구 아니겠어. 북을 치고 풍악을 울려라’
벤치에 앉은 다카기는 나이스를 연발했다. 우리에게 유리한 판정은 춤을 추고 낄낄거리며 넘어가면 그만, 승리를 눈앞에 둔 브라이스 감독도 새어나오는 미소를 겨우 다잡았다.
‘그렇게 쉽겐 안 되나.’
하지만 세인트루이스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후속타자 폴 그로스가 내야 땅볼을 안타로 만들어내는 투지를 발휘, 포데스와는 후속타자를 삼진 처리했지만 성가신 상대와 얼굴을 마주했다.
2차전에서 도허티에게 크게 데인 보스턴은 늘어진 경계심을 바짝 끌어올렸고, 크로스 포수는 과감한 승부를 택했다.
아무리 천재타자라도 포데스와의 구위는 이겨내기 어렵겠지. 예상대로 도허티는 한 박자 늦은 타이밍에 배트를 냈다.
중심을 싣는 과정이 복잡한 건 앞으로 개선해야 할 약점, 하지만 벼락치기가 통할 만큼 이 무대는 만만치 않았다.
2구도 타이밍이 늦으면서 파울, 그래도 홈 팬들은 박수를 치고 응원의 목소리를 높였다.
“몸 쪽, 들어왔다는 판정입니다!! 경기 종료!! 보스턴이 적지에서 2승을 거두면서 2년 연속 월드시리즈 우승에 한 걸음 더 다가섭니다!!”
“도허티는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인데요. 항의가 점 점 격해지고 있습니다.”
흥분한 도허티는 주심의 얼굴에 침을 튀겼다.
앞으로 남은 시리즈를 생각하면 바람직하지 않은 장면, 감독이 바통을 이어받으면서 2차전이 시작됐다.
“Hold down the fort, everyone(다들 수고 하세요) ~ ”
다카기는 그 옆을 지나가며 한마디를 툭 던졌다.
퇴근하는 자가 있으면 잔업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기 마련, 별 것 아닌데 왜 이렇게 약이 오르는지, 기름 테러를 당한 불난 집은 더욱 격하게 타올랐다.
도허티가 뭐라고 떠들어 댄 것 같은데 철저하게 무시, 2차전의 아쉬움을 지워낸 다카기는 한껏 여유로운 얼굴로 기자회견에 임했다.
“이제 월드시리즈 우승은 1승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오늘 투타에서 좋은 활약으로 팀 승리를 이끄셨는데, 지금 소감이 어떠십니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젠 덤덤합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허세가 회견장을 휘몰아 쳤다.
내가 경기를 지배한 게 하루 이틀인가, 그런 질문은 답할 이유가 없다는 반응에 기자들은 당황했다.
그러다 뒤통수 맞는 거 아니냐고 묻고 싶었지만 상대는 오늘 경기를 지배한 히어로, 승자가 부리는 허세는 자신감 아닌가. 세인트루이스 지역기자들도 분한 마음을 곱씹었다.
“경기 막판에 석연치 않은 판정이 몇 개 나왔는데 그게 승패에 영향을 줬다고 생각하십니까?”
“뭐 문제라도 있었습니까?”
스트라이크 콜은 주심의 고유 권한, 비디오 판독으로도 뒤집을 수 없다. 그리고 판정에 이익, 손해를 보는 건 모든 팀들이 동등한데 왜 그걸 걸고넘어지는 건가.
다카기는 판정의 잘잘못을 논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5차전은 이미 끝났습니다. 울부짖는다고 되돌릴 수 없죠. 세인트루이스는 지나간 경기에 매달릴 필요 없습니다. 집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긴 아직 이르니까요.”
6차전 잡고 7차전에서 승부 보면 될 일 아닌가.
마지막까지 얄미웠던 인터뷰, 세인트루이스 팬들은 잠시 잊고 있던 현상금을 떠올렸다.
[누가 저 자식 좀 검거해라.]
[저건 진짜 악당이다.]
지난 ALCS에서 다카기는 미네소타를 도발했다가 목에 현상금이 걸렸다. 지역 사업가 홉우드가 200만 달러를 걸었지만 조롱만 당하고 끝난 검거 작전, 잡는 게 정말 불가능한 악당인가.
이대로 끝내기엔 너무 억울, 5차전에서 이렇다 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도허티는 SNS를 통해 복수를 다짐했다.
[다카기는 본인의 실력도 대단하지만 적절한 도발로 상대의 집중력을 무너뜨리는 심리전도 탁월하다. 지금까지 많은 선수들이 그 작전에 당했고, 나도 잠시 흥분했다.]
주인공이 비열한 악당의 농간에 흥분해 당하는 패턴은 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패턴, 도허티는 귀를 막고 경기에 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다카기는 콧방귀를 뀌었다.
[너 나 상대로 6타수 무안타잖아? 악당한테 여섯 번이나 당한 주인공도 있냐? 네 배역을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넌 주인공이 아니야. 그리고 요즘은 악당이 주인공인 영화도 제법 있어. 극적으로 승리하는 슈퍼히어로는 이제 식상해]
또 시작된 도발, 도허티는 철저하게 무관심으로 대응했다.
흥분해 봤자 나만 손해, 이 이상 도발해 봤자 효과도 없고 내 이미지만 가벼워질 뿐, 다카기가 여론전에 제동을 걸면서 분위기는 잠잠해졌지만 이게 폭풍전야의 고요함이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었다.
“Now, It's an age of bad guys!!”
= 이제부터는 악당들의 시대다.
하루 쉬고 열린 6차전, 보스턴 팬들은 응원의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에서도 밉상으로 소문난 도시 보스턴, 우리가 언제부터 주인공 역할을 했나. 철저한 악역으로 인기를 끄는 캐릭터도 있는 법, 초반부터 세인트루이스는 격한 야유에 시달렸다.
“너흰 주인공이 아니야!!”
“주제를 알라고!! 얼른 죽어 버려!!”
1 ~ 2차전보다 더 심해진 야유, 정도를 모르는 폭언에 초대 손님들은 살기까지 느꼈다.
여론을 쥐락펴락하며 팬들의 전투력을 끌어올리는 것도 다카기의 능력, 오늘은 벤치에 앉았지만 존재감만큼은 뚜렷했다.
“내가 7차전에 나가야겠냐? 그럴 필요 없지?”
“물론이지.”
“오늘 끝낼 테니까 넌 그냥 쉬고 있어”
동료들은 다카기가 7차전에 등판하는 건 원치 않았다.
와일드카드에서 시작해 여기까지 올라온 세인트루이스의 모험, 여론의 관심을 받기 충분한 여정이었지만 이제 막을 내릴 때가 왔다.
마지막까지 최종보스의 힘을 빌릴 필요는 없겠지, 브라이스 감독도 모든 전력을 총동원해 여기서 시리즈를 끝내겠다는 각오로 경기에 임했다.
세인트루이스의 1회 초 공격은 성과 없이 종료, 삼자 범퇴로 이닝을 끝낸 로버트 클레이튼은 박수를 치며 마운드를 내려왔다.
작년 월드시리즈 우승 땐 얼굴을 비추지 못한 입장, 루키 시즌에 이렇게 빨리 기회가 올 줄 몰랐지만 기왕 잡은 기회라면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오늘 끝낸다.’
그건 데이브 셰퍼드도 마찬가지, 이 무대는 커리어 12년 만에 찾아온 행운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기회, 적지 않은 나이에 옵트 아웃을 선언하고 보스턴과 1년 계약을 맺은 이유가 뭔가.
더는 희망이 없는 클리블랜드를 떠나 우승과 연봉대박을 동시에 잡겠다는 야망은 이제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까지 왔다.
여기서 미끄러질 순 없는 일, 초구부터 자비 없는 스윙을 선보였다.
따아악 ~ !!
“잡아당긴 타구!! 안녕이라는 말을 할 틈도 없이 멀어집니다!! 데이브 셰퍼드의 선제 투런 홈런!! 보스턴이 오늘도 선취점을 가져갑니다!!”
“이번 시리즈에서 2번 째 홈런이죠. 이 정도면 내년에도 보스턴에 남을 자격은 충분한 것 같습니다.”
오늘도 이어지는 악당들의 대약진, 홈을 밟은 셰퍼드는 열광에 빠진 관중석을 향해 내가 누군지 말해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돌아온 답은 ‘나쁜 녀석’, 예전부터 화끈한 벤치 클리어링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선수라 이런 반응은 당연했다.
초반 기싸움에서 밀린 세인트루이스는 침묵, 복수를 다짐했던 도허티도 약간 초조한 반응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