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그래도 야구는 계속 된다 - (5)
“자, 이제 세인트루이스의 8회 초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투수가 바뀌었군요. 다카기가 내려가고 스티븐 루카스가 마운드에 올랐습니다. 이번 포스트 시즌 성적은 승패 없이 평균자책점 1.00, 9이닝 동안 볼넷 2개, 탈삼진은 8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글쎄요. 다카기가 오늘 실점을 하긴 했지만 구위가 나쁘지 않았는데 지난 경기에서 완봉을 했기 때문에 무리시키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브라이스 감독은 일과를 마무리한 에이스와 가벼운 악수를 나눴다.
7이닝 5피안타 1실점, 이 정도 활약에 불만을 표할 자가 누가 있을까. 뒷일을 동료들에게 맡긴 다카기는 아이싱을 위해 잠시 클럽하우스로 이동했다.
스코어는 4대 1, 큰 점수 차는 아니지만 이 정도면 불펜이 어떻게든 해 줄 거라 믿었다.
따악 ~ !!
선두타자 스티브 핸콕의 안타로 무사주자 1루, 타석엔 스티브 도허티가 들어섰다.
21살에 포스트시즌 로스터에 포함된 천재야수, 오늘은 안타가 없지만 시즌 102경기에서 타율 0.312, 홈런 19개를 기록한 만큼 배터리도 주의를 기울였다.
따악 ~ !
“바깥쪽 밀어냅니다. 파울, 여전히 공격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네요.”
“철저하게 유인구로 가야합니다. 굳이 승부할 이유가 없어요.”
도허티는 메이저리그 타자들 중에서도 특별한 점이 있었다.
보통 타자들은 앞발로 타이밍을 잡기 마련, 도허티는 뒷발에 마지막까지 체중을 남겨두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자세는 정확한 타격을 중시하는 선수틀의 특징, 체중을 앞발에 싣기 어렵기 때문에 장타를 중시하는 메이저리그에서 권장되는 기술이 아니다.
그런데도 장타를 만들어 내다니, 타고난 힘은 물론 체중을 활용할 줄 아는 센스가 있다는 뜻이다.
본인도 타격에 자신이 있는지 어지간한 공은 공략하는 편, 가끔 의욕이 넘쳐 어이없는 공에 스윙을 하기도 하는데 다카기도 오늘 체인지업을 활용해 헛스윙 삼진을 이끌어 냈다.
크로스 포수도 그 점을 잊지 않고 볼 배합에 적용, 바깥쪽 빠지는 빠른 볼로 카운트를 잡아냈다.
“떨어지는 볼 골라냅니다. 카운트는 원 볼 원 스트라이크”
“지금은 커븐데 예상을 한 것 같습니다. 이 정도면 반응을 할 만한데 말이죠.”
보스턴 배터리는 신중히 사인을 주고받았다.
존에 집어넣으면 분명 따라나올 배트, 정확도가 있는 상대라 승부하긴 까다롭다.
그렇다고 무사에 주자를 쌓아두는 것도 찝찝, 장타는 안 된다는 생각에 바깥쪽 빠른 볼을 택했다. 하지만 반응하지 않는 배트, 카운트가 투수에게 불리해지자 홈팬들은 긴장감에 사로잡혔다.
‘이 자식, 역시 예상하고 치는 게 아니야.’
크로스 포수는 곁눈질로 타자를 살폈다.
150km가 넘는 빠른 볼은 눈으로 보고 치는 게 거의 불가능, 하지만 가끔 그게 가능한 놈들이 보인다.
도허티는 존을 정해두고 기다리는 스타일이 아니라 공을 따라다니는 스타일, 지금도 코스에 맞춰 앞발을 홈플레이트에 붙였다.
스트라이크 존에 붙어 있다 떨어지는 다카기의 체인지업엔 당했지만, 지금은 어떨까.
루카스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여기선 신중한 승부를 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포스트시즌에서 좋은 활약을 하고 있는 루카스는 파트너의 소심한 볼배합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포수가 마운드를 방문하면서 경기가 잠시 중단됐다.
기싸움의 승자는 스티븐 루카스, 도허티는 몸쪽으로 들어오는 빠른 볼을 기다렸다는 듯 받아쳤다.
벡 배이 파크 좌중간 담장을 넘어가는 대형홈런, 순식간에 스코어가 4대 3으로 좁혀지면서 승부는 알 수 없게 됐다.
흥분한 세인트루이스 중계석은 전원 자리에서 기립, 그 사이 홈을 밟은 도허티는 스티브 핸콕과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포효했다.
‘일이 이렇게 꼬이네.’
클럽하우스에서 이 장면을 지켜본 다카기는 침묵을 지켰다.
도허티는 배트 그립이 다른 타자들에 비해 뒤에 있는 편이다. 백 넘버가 투수 쪽에서 보일 정도, 빠른 공에 대응하기 위해 그립을 약간 앞으로 옮기는 타자들과는 분명 다르다.
그만큼 퍼지는 스윙이 될 위험도 크지만 도허티는 마지막까지 오른 팔을 굽히며 벼락같은 스윙을 만들어 낸다.
나이는 어리지만 타격 센스나 기술은 세련 된 선수, 이런 타자를 상대로 불리한 카운트에서 몸 쪽 승부가 웬 말인가.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타자가 잘 친 공, 더 이상 클럽하우스에 머물 수 없다는 생각에 서둘러 벤치에 복귀했다.
급격히 어두워진 분위기 때문에 하이파이브를 권하는 손길은 드물었고, 다카기는 굳은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응시할 뿐,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따악 ~ !!
“아 ··· 다시 안타를 내주는군요. 루카스는 올라와서 안타만 세 개를 내주고 있습니다.”
“홈런 이후 약간 흥분한 것 같은데요. 당장 바꿔줘야 할 것 같습니다.”
브라이스 감독은 서둘러 마운드로 달려갔다.
전혀 예상 못했던 흐름, 그동안 좋은 활약을 펼친 루카스의 부진에 홈 팬들도 패닉에 빠졌다.
다카기가 내려가자마자 이 꼴이라니, 오늘 루카스의 구속은 평소와 다를 게 없다.
홈런을 내준 공은 94마일, 타자 몸쪽으로 흘러가는 투심 성 빠른 볼, 그런데도 맞았다.
다카기는 저런 괴물 같은 놈을 어떻게 3번이나 잡아낸 건지, 급격히 흔들리는 불펜 덕분에 7이닝 1실점 투구가 유독 빛나 보였다.
“자네 구위는 나쁘지 않아. 아직 앞서고 있으니까 위축되지 말라고”
루카스를 다독인 브라이스 감독은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세인트루이스는 한 점을 쥐어짜내는 번트작전으로 1사 주자 2루 기회를 만들었고, 후속타자의 안타가 나오면서 경기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역전은 내주지 않고 끝난 이닝, 더그아웃에 입성하자마자 크로스는 불만을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몸 쪽은 안 된다고 했는데, 멍청한 자식”
누가 들어도 동료의 고집을 원망하는 불만, 다행히 루카스의 귀에 닿지는 않았지만 선수들이 동요하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이어지는 불펜 싸움의 승자는 세인트루이스로 막을 내렸다.
다 잡은 경기를 놓친(10회, 5대 4) 보스턴의 분위기는 급격히 가라앉았고, 반면 원정에서 1승 1패를 거둔 세인트루이스는 홈에서 3연전을 치르는 기회를 잡았다.
프론스키가 부상으로 빠지면서 얄팍해진 선발진, 거기다 불펜까지 소모하며 패배한 보스턴의 손실은 생각보다 큰 편, 뭣보다 필승카드인 다카기를 내고도 패배를 했다는 게 무엇보다 뼈아팠다.
누군가는 패배에 대한 해명을 내놔야 할 상황, 브라이스 감독은 도허티가 잘 쳤을 뿐 루카스의 투구엔 잘못이 없었다며 변호에 나섰다.
“그 상황에서 꼭 정면승부를 했어야 했을지 의문인데요.”
“본인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기자들은 책임을 크로스와 루카스에게 떠넘겼다.
회견장에 나와서 해명을 할 것이지 감독 뒤에 숨은 주범들, 하지만 방패막이를 자처한 브라이스 감독은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다.
“루카스의 구위라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 공은 실투가 아니었습니다. 도허티가 잘 쳤다고 몇 번이나 말씀을 드렸으니, 더는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군요.”
브라이스 감독은 집요한 기자들을 뒤로 하고 회견장을 떠났다.
뭐든 결과론적으로 생각하는 인간들, 본인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뭔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최선의 선택이 언제나 결과로 이어지진 않는 법, 그게 야구인데 이해를 못하는 것들을 납득시키려니 짜증이 몰려 왔다.
클럽하우스도 마음을 다스릴 공간이 못 되는 곳, 괜히 서로 얼굴 붉히기 전에 해산령을 내렸다.
“프론스키는 좀 어때? 소식 있어?”
“다행히 정신을 차렸다는군.”
퇴근하기 전, 다카기는 클럽하우스 매니저에게 고급 정보를 입수했다.
정신을 차렸다는 건 다행이지만 뇌진탕이 아니라는 게 문제, 프론스키는 뇌좌상 진단을 받았다. 뇌진탕이 뇌조직에 영향을 주는 수준의 충격이 아니라면, 뇌좌상은 직접적인 출혈을 동반한다.
선수생활은 끝났다고 봐도 좋을 정도, 아니,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수준으로 회복하는 게 기적이다.
앞으로 남은 일정도 문제지만, 프론스키는 내년에도 보스턴과 1년 2100만 달러 계약이 남아 있다.
이래저래 악운이 겹친 시리즈, 다음 경기를 놓친다면 이번 시리즈는 어렵겠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아니,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나.’
내셔널리그엔 지명타자 제도가 없다.
1 ~ 2차전은 수비가 나쁜 돈론을 지명타자로 돌려 수비와 공격의 약점을 최소화했지만 이젠 그것도 불가능, 브라이스 감독은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라 일단 머릿속에서 치워냈다.
* * *
[보스턴 3차전도 패배]
아니나 다를까 보스턴은 3차전에서 8대 2로 패하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투구 - 타격 - 수비 모두 엇박자, 경기가 끝난 후 수더랜드 단장은 호텔에서 브라이스 감독과 레이스 토론을 벌였다.
일단 다카기를 내세울 수 있도록 시리즈를 5 ~ 6차전까지 끌고 가는 게 최선, 하지만 지명타자 제도가 없는 이번 3연전에서 공격과 수비를 만회하는 묘안이 떠오르질 않았다.
위긴스와 돈론은 모두 수비에서 구멍을 드러낸 문제아, 데이브 셰퍼드도 올 시즌 34홈런을 때린 거포지만, 약한 수비 때문에 아메리칸 리그로 이적하고 나서야 공격에서 재능을 꽃피운 선수다.
최근 1루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듯 했지만, WS 3차전에서 송구를 뒤로 빠트리는 대형 사고를 치면서 무너져 내린 신뢰, 보스턴의 내야 수비는 그나마 탄탄한 편이지만, 외야 뜬 공이 나오면 다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시즌 중반에 콜 업 된 디즌스(중견수)가 그동안 넓은 범위를 커버해줬지만 수비 부담이 커지면서 하락하기 시작한 방망이, 2할 중후반을 오르내리던 타율은 0.243로 막을 내렸다.
장타력에서 어느 정도 가능성을 보여줬지만(12홈런), 포스트 시즌 들어서도 전혀 살아나지 않는 방망이, 복잡하게 꼬인 문제를 정리하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그래도 이건 말이 안 돼’
다카기는 올 시즌 간간히 야수로 출전해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수비는 물론 방망이 실력도 일품, 하지만 여기서 다카기를 야수로 쓰면 다음 등판 때 지장이 있을 것 아닌가.
생각은 있는데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못하는 상황, 이때 잠자코 있던 브라이스 감독의 휴대폰이 신호를 보냈다.
[혹시 저 두고 고민하는 건 아니죠?]
무섭게 맞아 떨어진 직감, 브라이스 감독은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다카기는 거짓말 하지 말라며 일축했다.
[저 내일 야수로 나갈 수 있어요.]
“다음 등판은 어쩌려고 이러나?”
[하루 이틀도 아닌데 이제 와서 다른 소리 하지 마시고요.]
투타겸업이 하루 이틀인가.
정규시즌 때도 문제였지만 포스트 시즌 들어 유독 두드러진 팀의 문제점, 다카기는 1루든 외야든 상관없으니 내보내 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현대야구에서 이게 무슨 코미디인지, 수더랜드 단장은 작년에 팔아치운 빈센트 맥킬립을 떠올렸다.
앤디 프론스키를 받아오고 애리조나에 내준 유망주, 보스턴에서 출장이 뜸했던 맥킬립은 애리조나에서 주전을 보장받더니 올 시즌 타율 0.282, 홈런 22개, 84타점을 기록하며 각성했다.
여기에 안정적인 수비는 덤, 외야 자원이 넘친다고 여유를 부린 결과가 이건가.
트레이드 카드로 써먹으려다 마지막까지 끌어안은 돈론의 수비를 생각하면 기가 막힌 일, 그래도 수더랜드는 에이스의 야수 출전을 허락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웃기는 짓, 시리즈를 5차전까지 끌고 가야 한다는 막연한 목표만 앞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