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171화 (171/361)

171화. 그래도 야구는 계속 된다 - (4)

[보스턴, 세인트루이스와 격돌]

2021 월드시리즈, 그 대권을 가리는 주인공들이 드디어 결정됐다.

세인트루이스는 내셔널리그 전통의 강호지만 강팀의 명성을 얻은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문제는 팜, 21세기에 접어든 세인트루이스는 야구 명가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마이너리그 팜을 초토화시키며 전력보강에만 열을 올렸다.

물론 성과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내일을 보지 않고 오늘만 생각하는 팀 운영으로 구단 구조가 기형적으로 바뀌면서 암흑기가 시작됐다.

2003년부터 2008년까지 100패를 찍은 것만 2번, 결국 팜을 초토화 시킨 단장은 성적 부진을 이유로 해고 되고 막장 팀 시애틀을 포스트시즌에 보낸  '빌리 나우'가 모든 권력을 위임 받았다.

빌리 나우는 FA에 돈을 안 쓰기로 유명한 단장, 심지어 드래프트로 뽑아 키운 스타도 트레이드 카드로 써먹는 방식으로 팬들에게 원성을 들었다.

대신 쓸만한 선수를 사 와 팀 컬러를 입히는 방식으로 전력을 보강, 그렇게 온갖 욕을 먹어가며 팀을 월드시리즈로 이끌었다.

최근 돈을 풀기 시작한 보스턴과 대척점을 이루는 구단, 전문가들은 거의 다 보스턴의 승리를 점쳤다.

양 팀의 선발진은 비슷한 수준이지만 다카기를 품에 안은 보스턴은 일단 2승을 먹고 들어가는 분위기, 타선의 무게감도 보스턴이 앞선다는 평가를 받았다.

보스턴 여론은 일찌감치 승리 무드에 심취, 하지만 실력없는 팀이 여기까지 운으로만 올라왔을까.

운도 반복되면 실력, 세인트루이스는 와일드카드로 시작해 무수한 고난을 거듭하며 윌드시리즈에 안착했다.

방심은 절대금물, 다카기는 기자들 앞에서 전력을 다하겠다는 각오를 드러냈다.

ALCS 6차전에 등판했지만, NLCS가 7차전까지 진행된 덕분에 하루를 더 벌었고, 브라이스 감독은 다카기를 2차전에 올릴 거라 공식 예고했다.

1차전은 앤디 프론스키가 등판할 예정, 그렇게 결전을 눈 앞에 둔 선수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각오를 다졌다.

“불편하니?”

간만에 집으로 돌아온 다카기는 태어난지 몇 달 안 된 아들을 품에 안았다.

신생아는 골격이 온전치 않아 머리를 한 쪽으로 돌리고 자면 좋지 않다. 훗날 얼굴이 비대칭이 되거나  지능발달에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일, 걱정이 많은 엄마는 아들 머리에 보호구를 씌웠다.

귀찮은지 계속 벗겨내려는 녀석, 다카기는 그런 아들을 잘 다독였다.

“안 돼, 엄마 아빠가 예쁘게 낳아줬는데 얼굴 찌그러뜨리면 안 되지.”

초보 아빠는 온갖 재롱으로 아들의 관심을 끌었다. 다행히 아빠 쪽으로 돌아선 관심, 그렇게 한동안 아빠와 스킨십을 나눈 아기는 젖을 먹고 깊은 잠에 빠졌다.

“나중에 야구 시켜야겠네.”

“그게 무슨 소리야.”

“타자하려고 폼 잡고 있잖아.”

태어난지 몇 달 밖에 안 된 녀석이 벌써부터 헬멧을 차고 있으니 이것도 나름 운명 아닐까. 물론 키리코는 막 가져다 붙이는 아빠를 향해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 말이 나와서 말인데 투수는 왜 헬멧 안 써?”

키리코는 약혼남에게 뼈 있는 질문을 던졌다.

타자는 헬멧을 쓰는 게 당연한데 왜 투수는 그렇지 않은 걸까. 지금까진 별 일 없었지만 키리코는 자기도 보호구 차고 경기하라며 잔소리를 퍼부었다.

“이젠 나까지 애기 취급하는 거야?”

“안전을 위해서야. 앞으로 등판하기 전에 나한테 사진 찍어서 보내”

보호구 안 차면 쫓아가서 채우겠다는 협박이 이어졌다. 하긴, 투수를 위한 보호구가 없는 건 아니다.

다만 아직 활성화가 안 됐고 폼이 안 나는 우스꽝스러운 디자인 때문에 투수들이 착용을 꺼리는 게 문제, 하지만 안전보다 중요한 게 없다는 조언을 받아칠 명분이 없었다.

“이거 차고 나가는 게 어때?”

다음 날, 다카기는 등판을 앞둔 프론스키에게 보호구 착용을 권했다.

하지만 베테랑은 폼이 안 살고 불편하다는 착용을 거부, 상대가 어린이도 아니고 이 이상 강요하는 건 무리였다.

그렇게 막이 오른 월드시리즈 1차전, 여느 때처럼 보스턴 홈팬들은 열정적인 응원을 보내줬다.

그 기대에 응하듯 프론스키는 첫 타자를 유격수 땅볼로 처리, 2회까지 안정적인 투구를 선보였다.

이제 경기는 3회, 기세를 탄 프론스키는 좀 더 적극적으로 스트라이크 존을 공략했다.

따악!!

사고는 여기서 일어났다.

선두 타자 J.D 아사로의 초구가 투수를 직격, 타구는 다시 관중석 그물망으로 튈 정도로 강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 보스턴 벤치는 물론, 아사로도 1루로 가던 길을 멈추고 입을 가리며 당혹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더 끔찍한 건 프론스키의 가족들이 근처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 의식의 없는 얼굴과 축 늘어진 팔다리는 축제 분위기를 절망으로 바꿔버렸다.

의료진은 응급치료를 마친 환자를 병원으로 후송, 1루에 자리를 잡은 J.D 아사로도 충격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실려 나가는 아빠를 향해 울부짖는 아들을 보고 어떻게 맨 정신으로 서 있을 수 있겠나. 본인도 가족이 있는 몸이라 배가 된 충격, 세인트루이스의 감독 존 미드키프는 아사로를 벤치로 불러들였다.

놔둬봤자 제대로 된 플레이는 불가능, 다카기는 벤치에서 이 광경을 모두 지켜봤다.

스포츠를 하다보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사고, 하지만 지금까지 이 정도의 대형사건은 겪어본 적이 없다. 멘탈이라면 누구보다 강하고 필요에 따라 위협구도 던지는 타입이지만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 뒤늦은 후회에 사로잡혔다.

‘억지로라도 씌웠어야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무섭게 맞아떨어진 약혼녀의 직감, 처음엔 과잉보호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후회한들 뭐가 달라지겠나, 일단 이 경기를 잡아내는 게 우선, 전장에 쓰러진 동료를 밟고 전진하는 각오로 응원의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 지면 끝이라고 생각해!!”

보스턴 선수단도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 잡았다.

우리가 프론스키를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언제든 헤어질 수 있는 비즈니스 관계, 그렇다고 쳐도 지난 2년 동안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이다.

남의 일이라고 생각할 순 없는 일, 100번 양보해서 가족의 정은 없다고 쳐도 선발진의 한 축을 잃은 건 사실이다.

비즈니스로 따져도 심각한 일, 오늘 지면 타격이 크다는 건 모두가 공감했다.

[번트]

브라이스 감독도 평소와 달리 적극적인 작전을 구사했다.

대량 득점보다 확실하게 득점을 올리는 방식으로 리드를 잡았고, 불펜을 총 동원해 3대 1의 리드를 지켜냈다. 1차전 승리치고 너무 조용한 분위기, 세인트루이스는 물론 승리를 거둔 보스턴도 마치 죄인이 된 듯 서둘러 그라운드를 빠져나갔다.

“프론스키의 몸 상태는 어떤가요?”

“지금은 아무 것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브라이스 감독은 승자 인터뷰도 마다하고 클럽하우스로 이동했다.

예상대로 무거운 분위기, 선수들은 클럽하우스를 가로 질러 사무실로 향하는 감독을 멍하니 바라볼 뿐, 숨소리도 크게 내지 않았다.

“우리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

폴 돈론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프론스키는 평소 돈론에게 ‘네 수비는 끔찍하다.’, ‘내가 단장이면 너 안 쓴다.’라는 거침없는 비난을 쏟아냈다.

불만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제는 그런 폭언도 그리울 정도, 평소 프론스키와 자주 다퉜던 후안 위긴스는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없으니까 괜히 아쉬운 전력, 앞으로 시리즈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내일 선발 등판이 잡힌 에이스 쪽으로 자연스럽게 눈이 갔다.

하지만 경기 내내 응원의 목소리를 높인 다카기는 별 말 없이 클럽하우스를 등졌다. 평소 누구보다 친하게 지냈던 선수의 부상, 팀은 그 아픔을 밟고 앞으로 나아가 승리를 쟁취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왔어?”

“응”

집에 돌아왔지만 여전히 찝찝한 기분, 키리코는 침실로 향하는 약혼남의 뒤를 밟았다. 어제 괜히 그런 말을 한 건가.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예전의 소심한 성격이 재발했다.

“내일 사진 찍어서 보낼게.”

“응? 뭐라고 했어?”

“사진 찍어서 보낸다고, 내일부터는 보호구 차고 나갈 거야.”

다음 날, 다카기는 보호구를 쓴 셀카 사진을 약혼녀에게 전송했다.

평소라면 그게 뭐하는 짓이냐고 웃고 떠들 광경이지만, 보스턴 선수단  누구도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짓지 않았다.

지난 5년 동안 사무국이 꾸준하게 추진해 온 투수의 보호구 착용, 그걸 무시하고 뒤로 미룬 건 선수들이다. 지금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타자의 헬멧 착용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나. 사고를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는 인간의 어리석음, 다카기도 뒤늦게 안전에 신경을 썼다.

마이너리그에서 뛸 땐 안전을 위해 검투사 헬멧까지 착용했는데 어느덧 느슨해진 정신 상태, 캡 위에 보호구를 덧씌우는 타입이라 착용해보니 그렇게 불편하지도 않았다.

따악 ~ !

“우측! 하지만 멀리 가지 못합니다. 투 아웃, 다카기는 오늘도 좋은 투구를 하고 있군요.”

“어제 프론스키가 불의의 사고를 당하지 않았습니까. 동료를 걱정하는 마음도 있겠지만, 일단 이 시리즈를 잡아야겠다는 책임감도 그에 못지않을 겁니다.”

다카기는 첫 9타자를 모두 범타로 잡아내며 산뜻하게 출발했다.

지난 경기에서 완봉승을 거둔 투수라곤 믿을 수 없는 활약, 포스트 시즌 무실점 기록은 27과 2/3이닝으로 연장됐다.

믿음직한 투구는 어제의 악몽에 더렵혀진 팬들의 우울함을 조금씩 씻어냈고, 선수들도 선봉에 선 에이스의 뒤를 따라 경기를 유리하게 끌고 갔다.

따악 ~ !!

“칫!!”

경기는 어느덧 6회 초, 연속 안타를 내준 다카기는 불쾌함을 드러냈다.

투 스트라이크를 잡고 막판에 흐트러진 제구, 언제나 원하는 공을 던질 순 없지만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기분이 상하는 게 인간의 본성 아닌가.

아닌 척 하고 넘어가는 연기도 이젠 지긋지긋, 차라리 여기서 풀고 가자며 글러브 안에 욕을 한 사발 쏟아냈다.

“초구!! 들어옵니다. 97마일, 구위는 아직 건재합니다.”

“화를 낼 때만 해도 심리적으로 흔들리는 게 아닌 가 했는데, 오히려 후련해 보이네요. 저런 것도 괜찮습니다.”

“이것저것 짊어진 게 많은 선수니 이렇게 표현하는 것도 나쁘지 않죠. 너무 가슴에 담아두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다카기는 1사 주자 1, 3루에서 중견수 플라이를 허용했다.

28과 2/3이닝 만에 깨진 무실점 행진, 다카기가 아랫입술을 깨무는 동안 홈 팬들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실점을 했지만 지금까지 누구보다 빛났던 활약, 전광판에도 대기록을 축하하는 문구가 새겨졌다.

‘뒤를 봐. 뒤를 보라고’

크로스 포수는 다카기에게 뒤를 돌아보라는 손짓을 했다.

모두가 너의 기록을 축하하고 있는데 조금은 반응을 해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주인공은 오늘따라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얼른 공이나 줘!!”

불호령에 놀란 크로스는 서둘러 공을 전달, 허공에 어깨를 몇 번 돌린 철벽의 에이스는 98마일, 99마일 빠른 볼을 연달아 박아 넣었다.

건드리면 당장 목을 물어뜯을 것 같은 살기, 타자를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운 다카기는 천천히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다시 한 번 박수갈채가 쏟아졌지만 여전히 반응 없는 얼굴, 중계카메라가 근접 촬영을 시도했지만 다카기는 그쪽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다음 이닝은 완벽히 틀어막겠다는 의지를 드러낼 뿐, 한껏 불타오른 에이스 덕분에 선수들도 어제의 악몽을 조금씩 떨쳐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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