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그래도 야구는 계속 된다 - (2)
1차전을 잡아낸 보스턴은 별 어려움 없이 ALCS 진출을 확정지었다.
다음 상대는 미네소타, 사이비교 진압 작전에 투입된 경찰특공대 소방관들이 희생된 곳이라 고인을 기리는 꽂다발이나 도시 곳곳에 번진 추모 분위기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조용하군.’
1차전 선발로 확정된 다카기는 선수단보다 하루 먼저 미네소타로 이동, 단장이 잡아준 스위트 룸에서 여유로운 휴식을 즐겼다.
한밤에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집회가 열렸지만 소음을 완벽히 차단한 방벽 덕분에, 울적한 분위기에 휩쓸릴 일은 없었다.
그러라고 잡아준 스위트 룸, 간만에 푹 쉰 다카기는 가벼운 몸으로 출근길에 올랐다.
연고지를 둔 도시에 무슨 일이 일어나면 프로 구단은 그 장단에 맞춰주기 마련, 미네소타 선수단은 오늘 경기에 필요 이상의 의미를 두려했지만 보스턴 클럽하우스 분위기는 덤덤했다.
[Make sure you do]
= 네가 할 일을 확실히 해라
클럽하우스 입구엔 이 말이 적힌 종이가 내걸렸다.
우리가 할일은 무엇인가.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일, 경기 전 희생자를 추모하는 행사가 열렸지만 보스턴 선수단의 마음가짐은 이미 일상생활로 돌아갔다.
“자 오늘 미네소타의 선발은 채드 폴리 입니다. 올 시즌 33경기 등판, 14승 7패, 평균자책점 3.68, 194이닝 동안 볼넷 72개, 탈삼진은 168개를 기록했습니다.”
“미네소타가 올 시즌 98승을 거뒀고 선발진이 모두 10승 이상을 거두지 않았습니까. 다만 확실한 에이스 가 없다는 게 흠인데, 폴리가 다카기를 상대로 얼마나 대등한 투구를 할 수 있을지 지켜보겠습니다.”
1회 초, 보스턴의 선공으로 경기가 시작 됐다.
선두타자는 시즌 막바지에 페이슨를 바짝 끌어올린 폴 돈론, 디비즌 시리즈에선 주춤(11타수 2안타)했지만 경계해야할 타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따아악 ~ !!
“당긴 타구가 우측으로 낮게 날아 담장을 넘어갑니다. 폴 돈론의 솔로 홈런! 보스턴이 선취점을 올립니다.”
“지금은 바깥쪽으로 붙이려고 했는데 가운데로 밀렸거든요. 돈론 선수가 9월에만 홈런 7개를 기록할 정도로 감이 좋았는데, 이 실투는 뼈아프네요.”
경기 전부터 암울한 기운을 뿜어냈던 관중석은 침묵에 휩싸였다.
최근 다카기의 투구를 생각하연 점수를 내기 어려운 게 현실, 겨우 1점이지만 미네소타 팬이나 선수들이 느끼는 체감은 그 이상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미네소타의 1회 말 반격, 관중석에선 야유도 환호도 아닌 미묘한 반응이 흘러나왔다.
팬들을 하루빨리 일상으로 되돌리겠다는 적장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나. 미네소타 팬들이 원하는 건 24년 만의 월드시리즈 진출, 그 앞을 가로막을 선수에게 환호를 보내기는 뭣했다.
그렇다고 야유를 보내기도 애매, 다행히 원정을 온 보스턴 팬들 덕분에 방향이 확실히 잡혔다.
“너희들의 가을은 오늘로 끝이야!!”
“야구는 잊으라고!! 슬픔에 잠긴 너희들이 즐길 일상이 아니야!!”
몇 몇 얼간이들의 추태는 홈팬들의 뚜껑을 열리게 했다.
미국의 200개 주요도시에서 보스턴은 친절이나 배려가 없는 도시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래퍼 앨런 시어러가 가사에서 보스턴을 역겨운 도시로 칭한 이유가 바로 이것, 다카기 덕분에 보스턴 팬으로 살아가는 게 행복하다며 노래를 마무리했지만 불친절하고 개념없는 팬들은 지금도 건재하다.
개념을 상실한 도발에 여기저기서 야유와 항의가 쏟아져 나왔지만 그러건 말건 한덩이로 똘똘 뭉친 극성팬들은 시어러의 랩을 열창, 덕분에 미네소타 팬들도 슬픔을 잊고 야유에 동참했다.
딱!
“타격, 하지만 멀리가지 못하고 우익수 글러브에 들어갑니다.”
“지금도 코스를 활용한 피칭이 돋보였죠. 보통 타이밍을 뺏기 위해 구속에 변화를 주는데, 다카기는 좌우를 흔들어 타이밍을 뺏어냅니다.”
몸쪽을 한 번 쑤셔주고 바로 바깥쪽을 찌르는 투구, 빠른 볼에 부담이 있던 타자는 의도하지 않은 풀스윙을 해버렸다.
최근 다카기는 투심을 잘 활용하는 편, 몇 달 사이 투구 패턴이 바뀌면서 미네소타도 나름 분석을 하고 나왔지만 다시 바뀐 패턴에 당했다.
아무리 좋은 투수라도 주무기는 정해져 있고 위닝샷을 던지기 위한 패턴이라는 게 있다.
하지만 다카기는 포심, 투심, 커브, 체인지업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괴물, 어떤 공이 위닝샷으로 들어올진 아무도 모른다.
타자 입장에선 생각이 많아지는 게 당연, 거기다 좌우를 찌르는 제구로 타이밍을 뺏는 능력도 좋으니 이내저래 대처가 쉽지 않았다.
“스윙, 삼진입니다. 이번엔 커브네요.”
“이건 알고도 칠 수가 없죠. 그리고 다카기만이 가능한 구종입니다.”
다카기는 이날 커브를 주무기로 활용했다.
전문가들이 파워 커브라고 구분짓기도 하는데, 사실 커브와 파워커브를 가르는 기준은 투구 폼이다.
12시에서 6시로 떨어지는 전형적인 커브는 오버핸드 투수들이 던지는 경우가 많다.
그에 비해 다카기의 투구폼은 낮은 쓰리 쿼터, 이 폼에서 나오는 커브는 횡변화가 동반되면서 슬라이더처럼 우타자 기준으로 바깥쪽으로 휘어나간다.
원래 어깨가 좋아 커브 구속도 빠른 편, 최고 100마일 이상을 찍는 투수가 커브, 체인지업을 앞세우는 게 일반적인 흐름은 아니다.
굳이 던진다면 슬라이더를 던지는 게 정석, 그런데 다카기는 그 반대되는 짓만 골라서 하고 있다.
익숙함이라는 것도 승부에서 무시 못 할 요인, 슬라이더 시대를 살아가는 타자들에게 빠른 볼, 커브, 체인지업 조합은 너무 생소했다.
‘누가 내 팔 좀 말려 줘.’
미네소타 타선은 커브에 끌려다니는 행동을 반복했다.
커브는 패스트볼과 반대로 회전을 주는 공, 슬라이더에 비해 눈에 띌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우리는 커브라는 걸 알고도 따라나가는 건지, 알면서도 공략을 못하는 현실은 관객들에게 공포를 주기 위해 조미료를 친 가상의 영화보다 훨씬 끔찍했다.
“우와아 ~ !!”
다카기는 6회를 마치기도 전에 삼진 10개를 채웠다.
팀의 포스트시즌 직행이 걸렸던 구원등판을 제외하면 7경기 연속 두자릿수 탈삼진, 야수진을 배경으로 만들어 버리는 활약에 보스턴 팬들의 환호는 더욱 높아졌다.
6회까지 잡아낸 삼진은 11개, 홈팬들은 7회에도 똑같은 장면을 돌려봐야 했다.
“스윙! 삼진입니다! 이번에는 빠른 볼, 마치 홀로그램이 투구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누가 가서 한 번 만져봐야 합니다. 환영이라고 의심할 수도 있어요.”
타자들이 필사적으로 스윙을 하는데 절대 안 맞는 공, 해설위원의 농담을 들었는지 브라이스 감독은 7회를 마치고 돌아온 환영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현재 투구수는 91개, 100개를 넘기지 않는 브라이스 감독의 철칙은 오늘도 적용됐다.
에이스의 호투를 앞세운 보스턴은 5대 0으로 1차전을 접수, 경기가 끝난 후 다카기는 미네소타 지역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오늘 당신은 이 도시에 또 다른 슬픔을 안겨줬습니다. 인정합니까?”
다카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뭐 어쨌단 말인가, 대답 없는 시위에 몇 몇 기자들은 웃음을 꾹 억눌렀다.
“미네소타 팬들이 겪은 상실감은 저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내년에도 야구는 계속되니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너희는 올해 글렀으니 패배를 받아들이라는 뜻 아닌가, 하지만 다카기는 이에 그치지 않고 가슴에 비수를 꽂는 발언을 반복했다.
“물론 희망을 품기엔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게 문제죠. 미네소타는 포스트시즌에 맞지 않는 팀입니다. 개혁을 한 번 해야 할 것 같네요.”
“어떤 점이 말입니까?”
“미네소타는 올 시즌 선발진 5명이 모두 10승 이상을 거뒀습니다. 하지만 이렇다 할 임팩트를 보여준 선수는 없었죠. 정규 시즌 때는 고만고만한 팀들 상대로 승리를 챙겼겠지만 이 무대는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 않습니다.”
말이 좋아 전원 10승이지, 10승에 턱걸이한 5선발 에릭 위어는 평균자책점 5.32를 기록했다. 가장 좋은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채드 폴리가 3.68이니 말 다한 거 아닌가.
그에 비해 보스턴은 올 시즌 10승 이상을 거둔 선발이 2명 뿐, 다카기가 19승, 그리고 앤드 프론스키가 13승을 거뒀다.
프론스키는 시즌 초반에 부진했지만 후반기에 성적을 끌어올리면서 평균자책점 3.57로 시즌을 마쳤다.
여기에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부진했지만 9승 10패, 평균자책점 3.84를 기록한 로버트 클레이튼까지, 단기전으로 따져보면 탄탄한 건 오히려 보스턴 쪽이다.
그리고 미네소타가 속한 AL 중부지구는 고만고만한 팀들이 몰려 있어 수준이 하향평준화 돼 있다.
한때 캔자스시티가 막강한 위용을 떨치긴 했지만, 불펜이 퍼져버리고 월드시리즈 우승을 위해 영입한 패트릭 브린이 뉴욕으로 떠나면서 선발진은 붕괴, 브린을 업어오기 위해 유망주를 대거 내준 것도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그런 지구에서 승리를 챙기며 98승을 거뒀다고 해 봤자 막판까지 치열한 선두 경쟁을 벌인 지옥의 동부지구에서 95승을 거둔 보스턴에게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뭣보다 여론은 ALCS가 시작되기 전, 미네소타가 공격력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평가했지만, 타력의 강함은 보스턴도 만만치 않은 수준, 오늘 증명하지 않았는가.
계속 되는 도발에 한 기자는 불만을 표했다.
“당신은 팬들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왜 이렇게 도발하는 겁니까?”
“당신도 잘 알겠지만 보스턴은 원래 밉상인 도시입니다. 저는 그 이미지대로 행동하는 것뿐이고요. 뭣보다 패배한 팀을 위로하는 건 제 적성에 맞지 않습니다. 본심도 아니고요. 그리고 미네소타가 예전부터 강팀은 아니었지 않습니까? ALCS에서 떨어진다고 해도 아쉬울 건 없겠죠.”
미네소타는 2002년 이후 무려 20년 동안 ALCS 문턱을 넘지 못했다.
매번 디비전 시리즈에서 탈락하는 게 패턴, 그러다 올해 드디어 1991년 이후 근 30여년 만에 대권에 도전할 기회를 잡았다.
최근 4번이나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보스턴에 비하면 우승권과 다소 거리가 있는 팀, 그렇다고 해도 이런 도발을 당하는 건 모욕이었다.
슬픔에 잠겼던 미네소타 일대는 들끓었고 다카기는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슬픔을 분노로 위로 받을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렇게 따지면 악역도 나쁘지 않았다.
[6차전까지 가면 보스턴의 승리]
보스턴 지역 여론도 타들어 가는 불길에 부채질을 더했다.
1차전 패배 이후, 미네소타는 반격에 성공했지만 연속 2연패를 당하며 1승 3패에 몰렸다.
전문가들은 보스턴이 다카기를 5차전에 등판 시킬 거라고 예상했지만 결과는 정반대, 보스턴 수뇌부는 아직 여유가 있으니 에이스에게 휴식을 더 줘도 된다고 판단했다.
시리즈가 6차전까지 간다면 다카기가 나오겠지, 그리고 보스턴의 승리로 시리즈가 끝날 거 아닌가.
무슨 짓을 해도 너희들은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놀림의 연속, 차라리 5차전에서 깔끔하게 패하라며 보스턴 팬들도 조롱에 합세했다.
“나 너무 밉상이냐?”
5차전을 앞두고 다카기는 더그아웃에서 동료들과 대화를 나눴다.
극적 효과를 위해 악역을 자처하긴 했는데 너무 밉상으로 행동한 건 아닌지, 하지만 동료들은 넌 원래 그랬다는 답을 내놨다.
“내가 원래 그랬다고?”
“그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
못하면 못한다고 구박하고, 안 뛰면 안 뛴다고 구박하고, 야구 좀 잘 한다고 평소에 잔소리가 얼마나 심했나. 물론 다카기는 그건 다 너희들 책임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야, 못하니까 못한다고 하지 그럼 잘 한다고 하냐? 그리고 너 풀타임으로 뛰면서 나보다 홈런 못 쳤잖아. 안 그래? 그리고 무슨 조깅 하냐? 왜 안 뛰어?”
“어휴 ~ 또 시작이네.”
“귀를 막아버려야지”
동료들은 이날 다카기와 의도적으로 거리를 뒀지만, 잔소리 대마왕은 오늘도 벤치에서 애정 어린 잔소리를 퍼부었다.
다 잘 해보자고 하는 짓, 밉상이든 진상이든 이길 수만 있다면 악역쯤은 감당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