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그래도 야구는 계속 된다 - (1)
[미국 역사상 최악의 진압작전]
와일드카드 결정전이 한창이던 10월 1일, 미국 일대는 슬픔과 충격에 휩싸였다.
예수재림회의 사이비분파를 진압하던 중, 상상을 초월하는 사상자가 발생한 것.
문제가 된 사이비 단체의 교주 제임스 그레이는 미국 전복을 위해 총기를 대량 구매하고, 각종 독극물로 테러를 일으키는 무서운 범죄를 계획했다.
그러다 미국 대통령 암살까지 꾀하면서 덜미가 잡혔고,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한 미시건 주는 근처의 미네소타, 시카고 경찰까지 동원해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벌였다.
궁지에 몰린 제임스 그레이는 요새화 한 시카고의 저택에서 신도들과 농성을 벌였고, 심지어 인신매매로 잡아들인 인질을 총살하며 포위를 풀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경찰은 특공대를 건물 안으로 진입시켜 광신도를을 사살, 궁지에 몰린 제임스 그레이는 건물에 불을 지르는 최악의 수를 저질렀다.
순식간에 화염에 휰싸인 저택, 인질로 잡혀있던 사람들이 좁은 문으로 몰려들면서 사상자가 늘어났고,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투입된 소방대원, 그리고 작전에 투입된 특공대까지 화염에 휩싸이며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공식확인된 사망자만 무려 76명, 이 사건의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가.
죄를 물어야 할 광신도 집단의 간부들은 모두 사망한 상황, 슬픔에 잠긴 시민들은 무모했던 진압작전을 비판했다.
흥분한 범죄자들을 일단 진정시키고 사람들의 안전을 우선했어야 했다는 것, 하지만 후회해 봤자 죽은 사람들이 돌아올 순 없었다.
미국 일대가 슬픔에 잠기면서 메이저리그 사무국도 그 대열에 합세, 선수노조도 희생자의 가족들을 위해 성금을 모아 전달하기로 입을 맞췄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보스턴 일대는 추모에 동참, 다카기도 집에서 뉴스를 통해 비보를 접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 ”
키리코는 약혼남의 품 안에서 몸을 떨었다.
내게 닥친 일은 아니지만 저런 끔찍한 사건 앞에서 태연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에 비해 tv 앞의 약혼남은 덤덤한 표정, 자기는 아무렇지도 않느냐는 질문에 다카기는 반응을 보였다.
“왜, 내가 겁 먹고 떨길 바라는 거야?”
“그게 아니라 안 무서워?”
“원래 세상은 위험하잖아.”
머리 위로 핵폭탄이 떨어지고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간 전쟁, 여기에 수많은 자연재해에 방사능 사고까지 겪은 나라, 나는 그런 곳에서 태어나지 않았나.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재앙, 다카기는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불행을 걱정하는 것 보다 이를 극복하는 방식에 주목했다.
[슬픔을 잊는 방법은 하루 빨리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야구는 미국인들에게 일상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일도 묵묵히 공을 던지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야구는 앞으로도 계속 돼야 한다.]
SNS에 올린 글은 미국 전역으로 확대 됐다.
슬픔을 잊는 방법이 뭘까. 지금은 다들 슬퍼해도 결국 언젠간 모두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당장 슬픔을 극복하긴 어렵지만 반복되는 일상과 평온함에 조금씩 씻겨 내려가겠지. 다른 스포츠와 달리 거의 1년 동안 계속되는 게 야구 아닌가.
오늘은 어느 팀이 이겼나 누가 또 홈런을 쳤나, 그런 사소한 일이 미국인들의 일상이 된지 어느덧 130년이 지났다.
내가 지금 슬픔에 잠긴 사회를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오늘도 공을 던질 뿐, 몆 몇 선수들도 그 뜻에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자기는 나한테 무슨 일 생겨도 평소처럼 지낼 수 있어?”
키리코는 이번 일로 다시 유명세를 얻은 약혼남을 시험했다.
슬픔을 극복하는 길은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뿐이라니. 정론이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될까, 난 자기 없인 못 사는데 자기는 너무 냉정한 것 같다며 끊임없는 시련을 부여했다.
“살아야지 그럼 어떻게 해. 우리 애기도 있는데”
아들을 앞세운 방어에 키리코는 할 말을 잃었다.
하긴 우리 둘 중. 누군가에게 문제가 생겨도 아기를 위해 꿋꿋이 살아야겠지. 오늘 따라 집 밖의 세상이 무섭게 다가왔다.
“그냥 우리 셋이 여기서 계속 살았으면 좋겠다. 집 밖은 너무 위험해.”
오늘따라 애교를 가장한 엄살이 심한 편, 다카기는 여기도 그렇게 안전한 게 아니라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뭐가 위험하다는 건데?”
“내가 여기 있잖아”
마음 같아선 둘째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하고 싶지만 출산한지 얼마 안 됐고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도 해야 하는 약혼녀, 소중한 사람이라 무리시키고 싶진 않았다.
* * *
오클랜드와 토론토의 AL 와일드카드 결정전은 토론토의 승리로 종료, 10월 3일 보스턴의 홈 구장 백 베이 파크에서 ALDS 1차전의 막이 올랐다.
경기 전에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렸지만 그것 외엔 평소와 다를 게 없는 분위기, 보스턴 팬들은 mvp를 연호하며 철벽의 에이스를 지원했다.
“자, 다카기 하루요시가 보스턴의 ALDS 1차전 선발로 나섭니다. 올 시즌 31경기 등판 19승 3패 평균자책점 2.02, 200이닝 동안 볼넷 48개, 탈삼진은 283개를 기록했습니다.”
“올 시즌 내 내 위력적인 투구를 보여줬죠. 평소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합니다.”
초구는 납작하게 바깥쪽으로 휘어져나가는 투심, 기대와 달리 불같은 강속구는 아니었지만 초구를 잡아내는 모습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오늘은 다를 거다.’
물론 토론토 선수단은 평소와 다른 하루를 기대했다.
같은 지구에 있으니 두 팀이 자주 맞붙은 건 당연한 일, 토론토는 올 시즌 보스턴을 상대로 약세를 보였다(4승 8패).
그 중 다카기에게 헌납한 2패, 일상이 반복된다면 패배 밖에 더 있겠나.
거기다 지난 경기에서 가벼운 벤치 클리어링까지 일어났으니, 선수단의 사기는 충만했다.
물론 세상일이란 의지만으론 안 되는 법, 후반기 평균자책점 1.92를 기록한 선수를 공략하는 건 쉽지 않았다.
‘아니야, 뭔가 방법이 있을 거다.’
토론토는 다카기의 초구 스트라이크 비율이 높은 점을 근거로 적극적인 배팅을 앞세웠다.
메이저리그 최강의 장타력은 토론토의 강점, 다카기를 상대로 연속안타를 때리긴 어렵겠지. 철저한 홈런 스윙으로 기선제압에 나섰다.
‘체인지업을 잊으셨나.’
다카기는 타자들의 공격적인 성향을 역이용했다.
체인지업은 대홈런 시대에서 홈런을 억제하는 최종병기, 다카기는 올 시즌 경기 당 0.7개의 홈런을 허용했다.
24점을 홈런으로 내줬지만 공격적인 투구를 한 것 치고는 적은 피해, 특히 후반기엔 체인지업 비율을 23%까지 끌어올려 재미를 봤다.
그 다음으로 자주 활용하는 투심은 체인지업과 무브먼트가 일정 부분 겹치는 편, 두 구종이 서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며 투구 효율성도 높아졌다.
전문가들에게 투구 능력이 한 단계 더 발전했다는 평가를 받는 건 당연, 철벽의 에이스라는 칭호가 그냥 얻어졌을까.
토론토 타선은 오늘도 파훼법을 찾지 못했다.
농구나 축구는 머릿수로 에워싸거나 반칙으로 끓을 수 있지만 투구를 그런 식으로 저지할 수 있나.
심판이 경기를 지배하겠다며 날뛰지 않는 한, 홈플레이트는 움직이지 않는 법. 타자를 쥐락펴락하는 투구는 계속됐다.
‘이렇게 당할 순 없지.’
토론토의 주포 버나드 길키는 꺼져가는 희망을 살리기 위해 맹렬히 달렸다.
하지만 초구부터 허공을 가르는 배트, 지난 경기에서 홈런을 치고 베이스를 도는 셰퍼드의 앞길을 막았던 선수라 보스턴 팬들은 다카기를 향한 환호와 길키를 향한 비난을 동시에 쏟아냈다.
바로 이게 보스턴의 평온한 하루 아니겠는가. 일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몸부림은 계속됐다.
“체크 스윙, 돌아갔다는 판정입니다. 원 볼 투 스트라이크, 버나드 길키는 오늘도 다카기를 상대로 고전하고 있습니다.”
“뭐 ··· 예전부터 그랬으니까요. 특별한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여기서 도 다른 사건이 일어날 필요는 없죠.”
해설위원의 바람대로 일상을 흔드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버나드 길키는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에 체크 스윙 삼진, 돌지 않았다는 항의가 이어졌지만 주심은 고개를 저었다.
“You are just as dumb as ever(넌 여전히 멍청하구나)!!”
“Thank you for being so stupid as it is(평소처럼 멍청해서 고맙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보스턴 팬들의 야유, 버나드 길키에겐 경기가 뜻대로 안 풀리면 스스로 무너지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벤치 클리어링 때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거나, 잘 가던 주자의 앞길을 가로 막는 것도 그런 이유, 그런데 이젠 주심과 싸우며 화를 자초하고 있지 않은가.
감독이 나와 뜯어말렸지만 전혀 먹히질 않는 상황, 결국 길키는 퇴장이라는 최악의 결말을 맞이했다.
디비전 시리즈에서 이런 추태를 보였으니 잘못하면 출장정지까지 받을 수 있는 입장, 토론토는 무려 8년 만에 포스트 시즌 무대를 밟았다. 그런 팀의 주포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게 현명한 짓인가.
다카기는 한때 버나드 길키를 같은 시대를 이끌어 나갈 라이벌이라고 평가한 적이 있지만, 이젠 완전히 무시했다.
저런 놈이 같은 시대를 이끌어가는 동업자라니, 솔직히 실망했다.
토론토의 캡틴이 퇴장당하면서 분위기는 완전히 보스턴에게 넘어왔고, 다카기는 추격의 의지를 상실한 타선을 하나 하나 넘어섰다.
“스윙!! 삼진입니다!! 오늘 경기 13번째 탈삼진!! 지금 이 선수를 넘어설 타자가 있을까요?”
“그것보다 앞으로 삼진 2개만 더 잡으면 ALDS 단일 경기 최다 탈삼진 타이를 이루거든요. 브라이스 감독이 언제까지 놔둘지 모르겠지만 조금 더 지켜봐주는 게 어떨까 ··· 하는 생각이 드네요.”
아니나 다를까, 브라이스 감독은 천천히 마운드로 향했다.
한창 즐기고 있는데 이게 무슨 만행인가, 사방에서 야유가 쏟아졌지만 이미 마음을 정한 브라이스 감독은 오른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할 일이 많은 선수, 며칠 전 3이닝 구원 등판을 했으니 더 이상 무리시켜 봤자 의미가 없었다.
예상했던 일이라 다카기는 공을 넘겨주고 후퇴, 삼진 13개를 곁들이며 6과 1/3이닝을 막아낸 철벽의 에이스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박수를 받으며 더그아웃에 입성했다.
그래도 끊이지 않는 박수갈채, 한참을 망설이던 다카기는 다시 더그아웃 밖으로 나가 팬들의 환호에 답례했다.
이날 보스턴은 다카기의 호투에 힘입어 ALDS 1차전을 5대 0으로 접수, 브라이스 감독은 승자 인터뷰에서 대기록을 앞둔 에이스를 끌어내린 걸 후회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다카기는 앞으로도 보여줄 게 많은 선수입니다. 그의 투구를 즐기고 열광하는 건 이제 보스턴 팬들에게 일상이 되었죠. 뭣보다 디비전 시리즈는 이제 막 시작됐을 뿐입니다. 투구 수를 제한하는 건 당연한 조치였죠. 다른 설명이 필요합니까?”
논쟁의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 답변,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긴 게임이라 팬들도 그러려니 하는 반응을 보였다.
뭣보다 다카기는 이제 보스턴의 일상과도 같은 존재로 격상, 보스턴 출신의 래퍼 ‘앨런 시어드’는 SNS에 즉석으로 작곡한 노래를 올려 팬들의 호응을 이끌어 냈다.
“난 보스턴, 이 도시가 역겨워
눈이 마주쳐도 미소 짓지 않는 사람들
막되 먹은 드라이버, X같은 날씨, 촌구석 같은 디자인
너희들과 같은 공기를 마신다는 게 끔찍해
(중략)
내일은 비가 왔으면 좋겠어. 내일도 그 다음 날도,
그리고 그 녀석이 다시 마운드에 오르겠지?
그 다음 날은 눈이 올 거야. 앞으로도 눈이 오면 좋겠어.
그리고 오늘도 그 녀석이 모두를 열광시킬 거야.”
다카기가 시리즈 전체를 마무리하길 바라는 마음이 담긴 가사,
이 날을 기점으로 보스턴 팬들은 다카기가 마운드에 오를 때마다 ‘내일은 비가 오기를, 내일은 눈이 오기를’이라는 가사를 외치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