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간헐적 폭식 - (10)
[포스트 시즌 직행, 다카기의 어깨에 달렸다.]
시즌 종료 이틀을 앞두고 보스턴은 최후의 결전에 대비했다.
토론토를 어렵게 떨쳐낸 보스턴은 한동안 1-2경기 차 이로 1위를 유지했지만 이제는 94승 동률, 다카기를 디비전 시리즈 1차전에 내보내려 했던 보스턴은 고민에 빠졌다.
올 시즌 보스턴은 다카기가 등판한 경기에서 승률 0.800(24승 6패)를 기록, 이런 필승카드를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써야하나. 아니면 아끼고 최근 불이 붙은 타선에 기대를 해 봐야 하나.
최악의 경우의 수는 다카기를 내보내고도 와일드카드로 굴러떨어지는 것, 최고의 경우의 수는 다카기를 아끼고 정규시즌 1위를 확정짓는 거다.
이래저래 고민 되는 일, 일단 오늘 경기가 없는 보스턴은 토론토의 시즌 최종전에 집중했다.
‘됐어’
결과는 토론토의 패배, 에이스를 아껴도 되겠다고 판단한 수뇌부는 디트로이트와의 최종전에서 다카기를 벤치에 앉혔다.
디트로이트는 올 시즌 113패를 기록한 최약체, 닭잡는데 작두 쓸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다카는 구단의 결정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최악의 경우는 생각 안하지?’
패배하면 토론토와 타이브레이크를 치러야 하는 부담을 안고 가는 경기, 더 큰 문제는 와일드카드다.
타이브레이크에서 패배한 팀이라도 와일드카드 레이스에서 탈락하는 건 아니다.
만약 와일드카드 2위 팀이 두 팀이나 된다면 여기서도 타이브레이크를 치르는데 이건 최악의 경우 정규시즌 164경기를 치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유통기한이 있는 법, 언젠간 목구멍으로 넘겨야 한다. 아낀다고 뒤로 미루다 제 맛도 못 보고 후회하는 건 아닌지, 그리고 그렇게 자신있으면 날 왜 원정경기에 동행시킨 건가.
여차하면 내보낼 생각? 그럴거면 처음부터 선발로 내보낼 것이지, 어느 쪽이든 납득하기 어려웠다.
‘역시 잘 풀리고 있군.’
원정게임에 동행한 수더랜드 단장은 선취점에 안도했다.
9월 들어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는 타선, 폴 돈론은 타율 0.319에 출루율 4할 대를 바라보는 정상급 리드오프로 각성했다.
더 고무적인 건 장타력, 작년 시즌 0.435에 그쳤던 장타율은 올해 0.481까지 상승, 내년은 20홈런도 노려볼 수 있슴거란 장밋빛 전망에 물들었다.
전반기에 부진했던 데이브 셰퍼드도 완벽 부활, 후반기에만 홈런 19개를 몰아치며 9년 연속 30홈런(33홈런)을 달성했다.
맥 리스가 은퇴를 고려하고 있으니 셰퍼드에게 3-4년 짜리 계약을 안겨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투수진만 보강하면 내년도 문제 없을 거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따악!!
경기는 어느덧 3회, 잘 버티던 로버트 클레이튼은 선두 타자 볼넷에 연속 3안타를 내주며 흔들렸다.
타선이 5점을 내줬지만 방심할 수 없는 흐름, 마운드를 방문한 투수코치가 시간을 끌며 분위기 전환에 나섰지만 효과는 없었다.
2사 주자 만루에서 클레이튼은 다시 2루수 머리 위를 넘어가는 안타를 허용, 체공 시간이 길었던 탓에 2-3루 주자는 여유있게 홈을 밟았다.
1루 주자도 내친 김에 홈으로 돌진, 2아웃이라 스타트를 일찍 끊은 덕도 있지만 중견수 다즌스의 송구가 옆으로 쏠리면서 최악의 결과가 나왔다.
순식간에 까먹은 5점의 리드, 다리를 꼬고 앉은 다카기는 발을 덜덜 떨며 불변한 심기를 드러냈다.
한 눈에 봐도 떨어져 있는 구위, 평소 흔들리는 선발은 두고 보지 않는 감독이 오늘 따라 왜 이리 교체가 늦은 걸까.
브라이스 감독의 장점은 불펜 운용, 하지만 전문가들의 분석대로 올 시즌 불펜 효율성은 전체적으로 떨어져 있다.
본인이 원하는 투수운용이 안 되고 선발진도 시원치 않으니 망설임이라는 놈이 발목을 잡고 있는 거겠지, 당장이라도 마운드로 향하고 싶었지만 내 관할이 아니라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보스턴도 지지 않고 난타전에 합류, 데이브 셰퍼드가 시즌 34호 홈런을 터뜨리면서 경기는 다시 보스턴의 리드로 흘러갔다.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클리블랜드와 오클랜드의 경기는 ··· 산호세가 9회 초에 경기를 뒤집었군요!! 이렇게 되면 아메리칸 리그는 더욱 혼란에 빠집니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 아닐까요. 보스턴은 오늘 지면 타격이 정말 큽니다.”
5회 초, 보스턴 더그아웃은 심상치 않은 기류에 휩싸였다.
산호세가 7회까지 7대 2으로 뒤지고 있던 경기를 뒤집어 버린 것, 와일드카드 1위를 달리고 있던 토론토는 이제 2위로 내려앉았다.
오늘 보스턴이 패배하면 토론토와 타이브레이크를 치르게 되는데 거기서도 패배하면 토론토가 AL 동부지구 1위에 올라가고 보스턴은 산호세와 2차 타이브레이크를 치를 수도 있다.
산호세는 작년까지 오클랜드를 연고지로 했던 구단, 하지만 올해 연고지를 옮기면서 분위기 쇄신에 성공했다.
올 시즌 보스턴과 산호세의 상대 전적은 6승 3패, 산호세가 명백히 앞서고 있다. 보스턴 입장에선 만나기 껄끄러운 존재, 누가 봐도 오늘 경기를 잡고 지구 1위를 확정짓는 게 최선 아닌가.
하지만 보스턴 불펜은 6회에도 실점을 하면서 리드를 내줬고, 수더랜드 단장은 만지작거리던 필승패를 꺼내들었다.
“와아아 ~ !!”
“처음부터 이렇게 할 것이지 멍청한 놈들!!”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보스턴 팬들은 불펜에서 몸을 푸는 에이스의 등장에 환호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할 것이지, 윗놈들은 왜 이렇게 멍청한 짓만 골라서 하는 걸까. 일부 팬들은 맥주를 벌컥거리며 불만을 늘어놨다.
‘지금부터는 내가 상대다.’
7회 말, 스코어는 7대 7, 한 걸음도 물러설 수 없는 외나무다리 승부, 캡을 깊게 눌러쓴 다카기는 크로스 포수와 신중히 사인을 주고받았다.
2이닝만 더 채우면 시즌 200이닝 달성이지만 지금은 팀 승리가 우선, 기록 따위는 잠시 잊었다.
“초구는 들어옵니다!! 97마일, 초구부터 힘차게 달리고 있습니다.”
“역시 선발과 불펜을 겸할 수 있는 선수죠. 급하게 올라왔지만 흔들림이 없습니다.”
초구를 지켜본 샘 라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쪽에 초점을 맞추고 들어왔는데 가운데로 치고 들어온 속구, 그렇다고 같은 공을 또 던지진 않겠지, 체인지업에 초점을 맞췄다.
따악 ~ !!
“잡아당긴 타구가 내야를 빠져나갑니다. 음 ··· 지금은 투심으로 보이는데요.”
“바깥 쪽 약간 높게 들어갔는데 지금은 실투였습니다. 출발이 좋지 않네요.”
다카기는 발을 풀며 1루 주자를 견제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야유, 다카기는 인터벌이 짧은 편이라 공이 좋을 땐 타자들을 정신없이 몰아붙이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가끔은 재정비 겸 타자의 흐름을 끊어주는 것도 필요, 이번엔 진짜 견제구로 1루 주자를 베이스에 붙였다.
딱 ~ !
“떨어지는 볼 잡아당깁니다. 파울, 이번에도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아냅니다.”
“주자는 움직일 수 없죠. 묶어두고 변화구, 역시 센스가 있습니다.”
다카기는 3구를 바깥 쪽 꽉 찬 곳으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판정은 볼, 경기 내내 불만이 쌓인 보스턴 더그아웃은 주심에게 불만을 퍼부었다. 로버트 클레이튼에게도 저런 판정을 하더니 이젠 다카기인가.
하지만 다카기는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투구를 이어갔다.
“스트라이크!!”
다음 공은 99마일 빠른 볼, 위기 상황이 되면 언제든지 구속을 끌어올리는 게 내 장점 아닌가. 다 알면서 뭘 그렇게 불만이 많은지, 바로 승부수를 던졌다.
“낮은 공!! 배트 돌았다는 판정입니다!! 삼진!! 철벽의 에이스는 역시 건재합니다!!”
“지금은 커브로 보이는데 돌아갔죠. 계속 바깥쪽으로 던지다 이번에는 몸 쪽, 완전히 중심이 무너졌습니다.”
주심이 한 번 도와줬는데도 공략에 실패하다니, 선두 타자 안타에 한껏 고무됐던 홈팬들이 침묵 모드로 전환됐다.
그 사이 다카기는 4번 타자 빌리 홀컴에게 초구 스트라이크를 갈취, 구속은 91마일 정도지만 꿈틀 거리며 바깥쪽으로 휘어나가는 궤적에 방망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주자가 1루에 있으니 타자도 병살타를 의식하고 있겠지, 보스턴 배터리는 그 점을 역이용했다.
“좋아!! 잘 하고 있어!!”
2구는 방망이 끝에 걸리면서 파울, 보스턴 더그아웃은 조금씩 달아올랐지만 다카기는 특유의 냉정한 표정을 유지했다.
“배트 돌았고!! 그 사이 1루 주자는 2루에 들어갑니다. 삼진!! 두 타자를 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우고 있습니다.”
“지금은 런 앤 히트 작전이 나온 것 같은데, 보세요. 이게 칠 수 있는 공으로 보이십니까?”
타자의 허리 근처에서 무릎으로 떨어지는 궤적, 거기다 하필이면 런 앤 히트 작전에서 나온 마구라니, 주자가 2루에 갔지만 여기서 득점이 나올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스트라이크!!”
하지만 체인지업은 어디까지나 빠른 볼을 보조하는 역할일 뿐, 보스턴 배터리는 투심으로 유리한 카운트를 선점했다.
이번엔 역회전이 걸리면서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파고드는 궤적, 예측 불가능한 무브먼트라 특정 코스를 노려 치는 건 무의미했다.
“다시 떨어집니다. 카운트는 노 볼 투 스트라이크”
“지금 공은 또 던져도 속을 것 같은데요. 오늘 다카기의 체인지업은 건드리는 것도 힘들 것 같습니다.”
결정구는 체인지업, 가볍게 세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운 다카기는 천천히 마운드를 벗어났다.
선두 타자 안타는 신기루였을까. 디트로이트가 넘을 수 없는 벽에 막힌 사이, 보스턴은 바로 반격에 나섰다.
데이비드 크로스가 시즌 13호 홈런을 날리면서 경기는 다시 보스턴의 리드, 8회에도 올라온 다카기는 투심 - 커브 - 체인지업 조합으로 디트로이트 타선을 완벽히 봉쇄했다.
7타자를 상대하는 동안 안타 하나를 내줬을 뿐, 잡아낸 삼진은 무려 5개, 시즌 280번째 탈삼진을 돌파하면서 2위(오클랜드 : 빅터 오티즈)와의 격차를 41개로 벌렸다
평균자책점은 2.03으로 여전히 1위, 누가 이 앞에서 라이벌을 자칭할 수 있을까.
다카기는 1점 차 리드를 지키기 위해 9회에도 마운드에 올라왔다.
따악 ~ !
“밀립니다. 파울, 8타자를 상대로 모두 초구 스트라이크를 뺏어내고 있습니다.”
“디트로이트 입장에선 1점 차가 이렇게 멀어 보일 수 있을까요. 오늘 겨우 8연패를 끊나 싶었는데, 힘들어 보입니다.”
선두 타자도 체인지업에 시원하게 헛스윙, 디트로이는 연패를 끊기 위해 사력을 다했지만 시즌 마지막을 9연패로 마감했다.
구원 등판한 다카기는 시즌 19승과 1세이브를 수확, 아웃카운트 9개를 삼진 7개로 처리하는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보스턴의 통산 26번째 지구 우승을 책임졌다.
에이스가 뭔지 보여준 활약,
평균자책점(2.02) - 다승(19승) - 삼진(283개) 타이틀을 모두 석권하며 AL 역사상 23년 만에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며 시즌을 마무리 했다.
특히 후반기 활약은 경이로울 정도, 11승을 따내는 동안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만테냐 어워드 수상은 만장일치냐 아니냐가 문제일 뿐, 시즌 MVP 수상론도 고개를 들었다.
“MVP 수상도 가능하다는 말이 있는데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진짜 MVP는 팀을 승리로 이끄는 선수 아닐까요?”
다카기는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하면 그런 건 의미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패배한 팀의 선수가 어떻게 가장 가치 있는 선수가 될 수 있나.
오늘은 가볍게 몸만 푼 수준, 디비전 시리즈에서도 1선발로 나서겠다는 각오를 드러냈다.
“작년에 월드시리즈우승을 했는데도 아직 만족이 안 됩니까?”
“우승은 많이 할수록 좋은 거죠. 해도 해도 안 질리는 게 승리 아닙니까?”
다카기는 보스턴이 선발진만 조금 강화되면 앞으로도 꾸준히 대권에 도전할 수 있는 팀이라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는 아직도 우승에 목마르다]
보스턴 지역 여론은 그런 모습에 열광했다.
젊은 나이에 성공한 선수가 자만하거나 다른 길로 새면서 무너진 예는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그런 틈조차 보이지 않다니, 팀을 승리로 이끈 선수만이 MVP로 불릴 자격이 있다는 말도 팬들의 심장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