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간헐적 폭식 - (9)
[선발 투수의 가치는 다시 폭등하고 있다.]
시즌 종료를 열흘 남짓 앞두고 미국 현지여론은 의미 있는 기사를 내놨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잦은 불펜활용은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다.
2010년부터 2016년까지의 기록을 살펴보면 선발투수의 FIP은 평균 4.54, 불펜은 3.84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 기록은 조금씩 좁혀지더니 올 시즌 들어 선발과 불펜의 FIP은 거의 차이가 없어졌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다양한 의견이 오고 갔지만 전문가들은 익숙함을 근거로 앞세웠다.
불펜 투수는 빠른 인터벌과 강력한 구위로 타자를 억누른다. 그리고 이런 투구가 한동안 효과를 본 게 사실, 하지만 타자들도 그에 맞춰진화하기 마련이고 뭣보다 지나친 불펜기용이 오히려 그 가치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아무리 좋은 공이라도 계속 상대하다보면 눈에 띄기 마련, 멀티 이닝을 소화하는 특급불펜이 늘어나면서 불펜 FIP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최근 특급불펜이 받는 연봉을 생각하면 다소 충격적인 전개, 다양한 구질과 완급조절로 많은 이닝을 소화하는 선발투수의 가치는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 중 정점을 찍고 있는 선수가 다카기, 몇몇 기자들은 그 과거를 파헤치기 위해 일본까지 날아가는 수고도 감수했다.
“What kind of player were he in school?”
다카기는 학창시절 어떤 선수였나요?
이곳은 다카기의 모교 다이이치, 다카기를 3년 동안 지도한 후루타 감독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영어 홍수에 식은 땀을 흘렸다.
다행인건 영어선생님인 다나카 코치가 옆에 있었다는 것, 코치의 통역 덕분에 후루타 감독은 차분히 인터뷰에 응할 수 있었다.
“그 녀석은 1학년 때부터 특별했어요.”
“어떤 점이 말입니까?”
“1학년 주제에 체인지업을 던진 녀석입니다. 그것도 자유자재로 말이죠.”
일본 뿐만 아니라 미국을 살펴봐도 고교시절부터 체인지업을 구사하는 학생은 거의 없다.
배운다고 해도 대학이나 프로에서 익히는 게 당연, 하지만 다카기는 누구의 가르침이나 조언 없이 그 짓을 해버렸다.
여기에 2학년 때 슬라이더까지 레퍼토리에 추가하면서 삼진기계로 각성, 몸집이 커진 3학년 시절엔 구속까지 증가하면서 상식을 벗어난 선수가 됐다.
프로에서 통할 선수라는 건 예상했지만 미국 진출 2년 만에 메이저리그 로스터, 월드시리스 우승을 차지할 줄이야. 후루타 감독은 녀석의 재능을 과소 평가한 것 같다는 평을 내놨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었군.’
기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22살 밖에 안 된 선수가 그런 체인지업을 던지다니, 무슨 마법이라도 부린 줄 알았는데 6년 전부터 꾸준하게 던졌다는 거 아닌가.
다카기는 고교 1학년부터 스카우터 눈에 뜨었지만 그땐 투구보다 타격 재능을 인정받던 시절이다.
3학년 때 투수 완성도가 높아지면서 관심이 그쪽으로 기운 것 뿐, 기자들은 다카기의 과거를 계속 추적했다.
“당신이 지금 가르치고 있는 선수들 중에도 다카기 선수 못지않은 재능을 지닌 선수가 있습니까?”
“그건 답할 의미가 없는 것 같군요.”
후루타 감독은 말을 아꼈다.
지금 가르치는 제자들도 이 인터뷰를 듣고 있는데 대선배와 비교질해서 뮐 어쩐건가.
뭣보다 그런 재능을 지닌 선수가 몇 년 사이 또 나온다는 게 말이 되나. 드넓은 미국에도 없는 선수를 이 좁은 학교에서 찾고 있으니, 그저 기가 막혔다.
“감독님”
“왜 그러냐?”
“선배님은 모교에 애정이 없는 건가요?”
기자들이 돌아간 후, 다이이치 야구부원들은 섭섭함을 드러냈다.
그렇게 성공했으면 한 번 쯤 와서 우리들을 격려해쥐도 될 텐데 2년 동안 기별도 없는 전설 속의 대선배, 역시 성공하면 뒤는 돌아보지 않는 건가.
후루타 감독은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라며 맞받아쳤다.
다카기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 계약금 일부를 야구부에 기부했다. 후배들에게 애정이 없다면 그렇게 했겠나.
뭣보다 훈련할 때는 호랑이보다 무섭게 부원들을 휘어잡은 녀석, 다카기가 지금 여기로 돌아오면 피의 향연이 펼쳐질 게 뻔했다.
“너희들은 지금 그 녀석이 여기에 없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된다.”
“그렇게 무서웠나요?”
“그래, 타키야마도 그 녀석 앞에선 하룻강아지였으니까.”
부원들은 감독의 말에 몸을 떨었다.
타키야마는 다카기의 뒤를 이은 다이이치의 캡틴, 한 때 가벼운 행동과 언행을 일삼았지만 다카기가 떠난 야구부가 봄 고시엔에서 참패를 당하자 사람이 달라졌다.
본인도 열심히 했지만 후배들을 다그치는 것도 수준급, 3년 전 야구부를 떠난 다카기를 기억하는 건 감독과 코치 뿐이지만, 3학년들은 작년 이 맘때까지 야구부에 있던 타키야마는 지금도 기억했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타키야마는 학교에서 수업을 듣다가 드래프트 1지명을 받고 야구부원실에서 입단 인터뷰를 했다.
이시다 토모카츠 이후 다이이치 야구부가 4년 만에 배출한 1라운더 선수, 그런 유명인도 전설 속의 선배 앞에선 하룻강아지였다니, 후배들은 그 위용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 * *
[선배님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나한테 연락하지 말라고 했냐 안 했냐?”
[또 왜 그러세요. 사람 무안하게]
시즌 30번째 등판을 앞두고 다카기는 반가운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타키야마 요이치, 이제 프로 무대에 진출한 녀석이 뭐가 아쉽다고 나한테 연락을 하는 건지, 마음과 다르게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내놨다.
[선배님한테 혼나면서 야구 배운 보람이 있네요.”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오늘 코치님한테 칭찬 받았거든요.]
다카기가 커진 몸집 때문에 3루로 전향하면서, 다이이치의 주전 유격수 자리는 타키야마에게 돌아간 일이 있다.
유격수에게 가장 중요한 건 좌우 스텝이지만 땅볼 처리를 위한 전진스텝도 그에 못지않다.
프로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 중에도 전진스텝이 좋지 않아 평범한 땅볼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그 정도로 어려운 일, 타키야마도 고교 시절 전진스텝이 좋지 않아 캡틴의 뚜껑을 몇 번이나 열리게 만들었다.
그래도 눈물 찔끔 날 정도로 혼나며 배운 보람은 있었는지, 타키야마는 평가가 까다로운 일본 코치들 사이에서도 인정받는 수비 능력을 보여줬다.
1라운더로 지명된 선수가 기대를 받는 건 당연,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법인데 타키야마는 그 이상이라 도쿄 자이언츠 구단 관계자들은 만족감을 드러냈다.
[시즌 끝나면 결혼식 하실 거죠? 저도 초대장 하나 보내주세요.]
“그래, 맨 뒷자리 하나 마련해 줄게”
마지막까지 장난이 심한 캡틴, 타키야마는 수줍은 목소리로 자리 두 개 마련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나면 됐지 두 개는 왜?”
[제 반쪽도 생각해주셔야죠]
“괜찮겠냐? 걔 아직도 나한테 미련 있으면 곤란한데”
하룻강아지는 얼굴을 붉혔다.
한때 대선배를 좋아했던 애인, 그걸 왜 이 자리에서 끄집어내는 건가. 그냥 혼자 오라는 말에 괜한 오기가 발동했다.
기어이 받아낸 좌석 2개, 이 이상 후배를 괴롭힐 마음은 없었는지 다카기는 진지한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갔다.
“운동 열심히 해라. 지금 수준으로는 그저 그런 유격수 밖에 안 돼”
[여전히 냉정하시네요.]
“너 잘 되라고 하는 소리니까 새겨들어.”
타키야마는 고교 3학년 시즌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뤄냈다.
빠른 배트 스피드와 타격 기술로 장타를 생산해 내는 모습은 인상적이지만, 타고난 파워가 부족해 나무 배트에 적응할지는 미지수였다.
홈런을 치려면 기술만으로는 부족, 아니나 다를까 타키야마는 올 시즌 217타석에서 홈런 4개를 때려내는데 그쳤다.
타율은 0.284로 괜찮은 수준이고 BB/K도 1.14에 이를 정도로 선구안도 수준급, 수비도 좋으니 이만한 유격수가 어디에 있나.
하지만 다카기는 그 정도론 만족해선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역시 야수는 장타력이 있어야 하는 법, 타키야마는 장타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바탕은 갖췄다. 문제는 빈약한 몸, 다카기는 오프 시즌 동안 죽을 각오로 근력 운동에 힘쓰라는 조언을 건넸다.
‘내가 선배와 함께 야구할 수 있는 날이 또 올까.’
타키야마는 문득 고교 시절이 그리워졌다.
힘들었지만 지나고 나니 좋은 추억, 생각해보니 머리털 나고 그때만큼 야구에 집중해 본 적이 없다.
뭣보다 그 시절이 없었다면 내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을까. 대선배와 다시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는데, 지금 내 실력으로는 불가능한 일, 슬쩍 선배의 속마음을 캐물었다.
[혹시 다음 WBC는 나올 생각 있으세요?]
“아니, 왜?”
[그게 ··· 간만에 선배랑 같이 야구하는 것도 재미있겠다 싶어서요.”
“절대 안 나가.”
다음 WBC는 2025년에 열린다.
앞으로 4년 후, 그때 되면 다카기는 옵트 아웃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런데 내가 뭐 하러 대표 팀 유니폼을 입나, 그렇게 나랑 같이 야구 하고 싶다면 네가 여기로 오라며 잘라 말했다.
[제가 메이저리그에 갈 수 있을까요?]
“올 자신 없으면 나랑 같이 뛸 생각은 꿈도 꾸지 마.”
[왜 그렇게 애국심이 없으세요? 한 번 쯤은 나가도 될 텐데 ··· ]
“애국?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냐?”
강력한 한방에 타키야마는 입을 다물었다.
다카기는 고교시절 대표 팀 유니폼을 2번 입고 우승과 준우승을 이끌었다. 그런데 타키야마는 나라를 위해 한 게 뭐가 있나, 역시 배려가 없는 사람, 더 상대했다간 정신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아 서둘러 통화를 마쳤다.
‘애국은 무슨, 나는 용병이다. 이득에 따라 움직이지’
다카기는 지금도 일장기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고교시절 대표 팀 유니폼을 입은 건 내 실력이 세계에서 얼마나 통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을 뿐, 지금도 그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불펜의 가치에 전문가들이 회의를 느끼면서 자연스럽게 올라간 선발 투수의 가치, 훗날 발동할 옵트 아웃을 위해 이를 악 물었다.
“자, 다카기 하루요시 선수가 시즌 30번째 등판을 치릅니다. 올 시즌 17승 3패, 평균자책점 2.03, 191이닝 동안 볼넷 47개, 탈삼진은 264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 보스턴이 2경기 차로 지구 1위를 달리고 있는데, 작년처럼 다카기 선수를 아낄 상황은 아니거든요. 순위 경쟁에 따라 한 경기 더 등판할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200이닝은 채웠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완투를 하면 깨끗이 해결 될 일이지만, 나눠서 기록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죠.”
데이비드 크로스 포수는 철저하게 삼진 위주의 볼 배합을 짰다.
내가 팀에 맞추는 게 아니라 팀이 내게 맞춰야 한다고 하는 녀석, 그리고 그만한 실력을 갖춘 녀석이라 12년 차 베테랑 포수도 그 입맛에 맞춰줘야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군.’
타자들은 오늘도 빠른 볼과 체인지업 조합에 정신을 못 차렸다.
빠른 볼로 카운트를 잡는 패턴은 여전하지만 바깥쪽과 몸 쪽을 자유자재로 찌르며 타자의 타이밍을 뺏어내고 있으니, 같은 빠른 볼이라도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여기에 방점을 찍는 체인지업, 스윙을 하고 나서야 그 정체를 파악할 정도다.
간간히 찔러주는 슬라이더는 약간 변형해서 커브처럼 활용, 한 때 주무기로 활용했던 구질이지만 체인지업과 슬라이더는 회전을 주는 방향이 달라 함께 가긴 어려웠고, 손목 회전을 최대한 줄여 커브처럼 떨어지는 각에 초점을 맞췄다.
너무 떨어지는 공에만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닌가.
하지만 다카기는 투구 폼이 로우 쓰리 쿼터라 빠른 볼 횡 움직임이 뛰어난 편, 뭣보다 스트라이크 존에 바짝 붙어 날아오다 떨어지는 체인지업은 그 약점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초구, 지켜봅니다.”
“지금은 커븐데 이걸 카운트를 잡는데 쓰네요. 타자 입장에선 정말 악몽같은 선수입니다.”
다카기는 이 날도 7이닝을 3안타 1실점으로 틀어막았다.
옥에 티는 솔로 홈런 하나 뿐, 하지만 대가로 삼진 11개를 받아갔으니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