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간헐적 폭식 - (8)
[Right Fielder!! Takagi Haruyoshi!!]
1회 말 보스턴의 공격, 리드오프로 배정된 다카기는 홈팬들의 박수를 받으며 그라운드에 입성했다.
잔뼈가 굵은 슈퍼스타는 그동안 보여준 게 있으니 팬들이 기대하는 성적도 어느 정도 기준이 정해져 있다.
하지만 다카기는 아직도 물음표가 달린 2년 차 선수, 앞으로는 어떻게 얼마나 더 우리를 즐겁게 해줄까. 기대치가 정해져 있지 않았다는 것도 팬들의 흥미를 유발했다.
‘효과 없으면 바로 폐기 처분하겠어.’
타석에 서기 전, 다카기는 목에 걸린 액세서리를 어루만졌다.
일본의 제약회사에서 개발한 건강목걸이, 한번 차보라며 끈질기게 매달려서 일단 착용하고 나왔지만 뭔가 영 어색했다.
[목에 차보세요. 혈액순환이 좋아집니다.]
[배트 스피드가 올라갑니다]
누가 들으면 약장수로 오해하기 쉬운 말,
목걸이 하나 찬다고 배트스피드가 올라가면 어느 선수가 빠른 볼에 적응을 못하겠나. 어쨌든 많은 NPB 선수들과 몇 몇 메이저리그 선수들도 목에 걸고 있는 건강 목걸이, 속는 셈 치고 착용해봤다.
“자, 오늘 오스틴 텍산스의 선발 투수는 마이클 맥카피입니다. 올 시즌 30경기 등판, 12승 9패 평균자책점 3.40, 190이닝 동안 볼넷 71개, 탈삼진은 161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선수의 주무기는 빠른 볼입니다. 최고 97마일까지 나오는 포심에 싱커를 던지죠. 가끔 커브를 던지지만 그렇게 뛰어나진 않습니다.”
배터리는 신중하게 사인을 주고받았다.
상대는 최근 일주일 동안 타석에 들어선 적이 없는 선수지만 최근 11타수에서 홈런 4방을 때려냈다.
특히 바깥쪽 공을 밀어내서 홈런을 만들고 있다는 게 인상적, 일단 변화구로 유인해봤다.
따악 ~ !!
“당긴 타구가 좌익수 앞에 떨어집니다!! 다카기는 오늘 첫 타석부터 안타를 만들어 내는 군요.”
“지금은 바깥쪽 커브인데 잡아당겨서 안타를 만들어 냈어요. 오늘도 기행(奇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글쎄요. 기행이라기보다는 배터리의 마음을 잘 읽어낸 게 아닐까요.”
다카기는 올 시즌 바깥쪽 공을 철저히 골라 치고 몸 쪽 공을 적극 공략하는 타격으로 재미를 보고 있다.
몸 쪽으로 잘못 붙였다간 얻어맞기 딱 좋으니 배터리 입장에선 바깥 쪽 유인구를 생각할 만도 하겠지, 피트 오어는 다카기가 초구부터 변화구를 노리고 있었다고 판단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타격, 하지만 그건 본인에게 물어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일 아닌가. 그 궁금증은 다음에 풀기로 했다.
‘왜 나는 안 되냐?’
후속 타자 폴 돈론도 떨어지는 커브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파울 라인을 벗어나는 타구, 바깥 쪽 변화구를 잡아당기는 건 이 세계에서 딱히 나쁜 게 아니다.
그저 그런 20홈런 타자에서 거포로 대각성을 이뤄낸 레이포드도 그런 접근법으로 40홈런 경지에 이르지 않았나.
후반기 들어 적극적인 타격으로 재미를 보고 있는 폴 돈론은 강한 타구를 양산하기 위해 노력했다. 수비가 안 좋으니 공격이라도 좋아야 롱런 하겠지, 하지만 생각만큼 나오지 않는 장타에 고민은 깊어졌다.
‘넌 그렇게 해라. 그게 맞을 거야.’
1루에 안착한 다카기는 돈론의 타격을 지켜봤다.
시즌 초, 다카기는 부진에 빠진 돈론에게 넌 오프 스탠스 자세가 맞다는 충고를 한 적이 있다.
오프 스탠스는 바깥쪽 공에 약점이 있다고 말이 많은 편, 돈론이 시즌 초 크로스 스탠스를 밀고 나간 것도 좀 더 나은 타자가 되고자 하는 의욕에서 시작된 일이다.
하지만 오프 스탠스가 반드시 바깥쪽 공에 약하다는 보장은 없다.
사실 바깥쪽 공을 잘 치냐 못 치느냐는 뒷발과 관련이 있다. 우타자 기준으로 뒷발이 홈 플레이트와 가깝다면 앞발을 홈 플레이트 쪽으로 당기면서 바깥쪽 공을 밀어내는 타격이 가능하다.
그런데 돈론은 뒷발이 홈에서 멀리 떨어진 편, 이런 자세에서 바깥 쪽 볼을 치기 위해 앞발을 움직이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앞발을 홈 플레이트 쪽으로 당겨봤자 스윙 각이 나오질 않는다.
억지로 앞발을 당겨봤자 중심이 흐트러질 뿐, 이런 사소한 차이가 타자의 운명을 바꾼다.
발 위치만 바꾸면 되는데 일부러 타격 자세를 바꿀 필요는 없지 않은가. 사실 이건 심리적인 문제가 컸다.
작년 시즌, 폴 돈론은 올스타 출전을 앞두고 토론토와의 경기에서 사구를 맞고 한 달 가까이 결장한 경험이 있다.
몸 쪽 공에 대한 공포 때문에 뒷발이 홈 플레이트에서 멀어진 게 아닐까. 다카기는 얼마 전 그건 네가 이겨내야 한다며 2차 충고를 했다.
‘바깥쪽으로 또 온다.’
다카기는 다음 공도 분명 같은 코스로 올 거라고 판단했다.
그건 폴 돈론도 마찬가지, 절친의 충고를 떠올리며 과감한 한 발을 내디뎠다.
따아악 ~ !!
“잡아당긴 타구가!! 우측 높게!! 담장을 넘어갑니다!! 폴 돈론의 시즌 13호 홈런!! 무려 21경기 만에 홈런을 추가합니다!! 스코어 2대 0!! 보스턴의 리드를 안겨주는 한 방입니다!!”
“정말 시원한 스윙이 나왔네요. 돈론이 이런 타격을 보여주는 건 정말 오랜만 아닌가요?”
먼저 홈을 밟은 다카기는 양손을 높이 들고 돈론을 맞이했다.
평소 수비 못한다고 구박을 하지만 그건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짓, 간만에 한건 한 돈론은 더그아웃에서 절친과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눴다.
“네 말이 맞아. 문제는 폼이 아니었어.”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는 게 더 놀랍다. 코치한테 안 물어 봤어?”
“물어는 봤지, 그런데 너처럼 충고를 해주진 않았어.”
“그 인간 잘라야겠네. 자르고 그 돈 내가 받는 게 낫겠다.”
내 단점은 내가 모르는 법, 메이저리거는 개인사업자라 서로에 대해 참견을 안 하는 게 당연한 일처럼 자리를 잡았다.
친구니까 솔직한 대화를 나누는 거지 베테랑들에게 이런 충고를 하면 먹힐까. 다 서로 잘해보자고 하는 짓, 보스턴의 미래를 책임질 두 선수는 그렇게 10분 넘게 토론을 이어갔다.
돈론은 컨택 능력과 선구안은 이미 인정받은 선수, 여기에 지금과 같은 스윙을 유지할 수 있다면 어느 위치까지 오를 수 있을까.
분명한 건 돈론은 마이너리거 때부터 세 손가락 안에 든 유망주, 이제 2년 차 시즌에 접어들었으니 잠재력이 폭발할 때도 됐다.
이제 시작일 뿐, 다카기도 내 전성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2번 째 타석을 맞이했다.
‘뭘 던지지’
오스틴 텍산스 배터리는 신중하게 사인을 주고받았다.
상대는 바깥쪽 변화구도 잡아당겨서 안타를 만들어 내는 괴물, 그렇다고 몸 쪽으로 붙이자니 두렵다. 스트라이크 존이 좁아질 일은 없는데 던질 곳이 없다니, 사인 교환이 길어지자 다카기는 주심에게 타임을 요청했다.
“공부 못하는 것들이 생각 오래하지, 야구도 마찬가지네.”
다카기는 포수가 들을 수 있도록 도발을 중얼거렸다.
야구 좀 한다고 우릴 깔아뭉개다니, 도발에 낚인 포수는 몸 쪽 빠른 볼을 요구했지만 마이클 맥카피는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싱커 사인을 냈다.
‘잠깐 면담 좀 하자.’
결국 마운드에서 상봉한 배터리, 질질 끄는 진행에 보스턴 팬들은 야유를 퍼부었다. 그 사이 다카기는 타석에서 생각을 정리, 차분하게 초구를 기다렸다.
“바깥쪽, 떨어집니다.”
“역시 정면 승부는 어렵겠죠. 하지만 최근 보스턴 타선이 감이 나쁜 편이 아니라 도망가는 피칭을 계속하긴 어려울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카운트를 잡기 위해 들어온 공, 다카기는 놓치지 않고 걷어 올렸다.
좌측 펜스 너머로 까마득하게 멀어지는 타구, 홈런을 확신한 팬들은 괴성에 가까운 환호를 내질렀고 특별석에 앉은 고영길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즌 11호 홈런, 이게 일주일 동안 배트를 놓은 선수가 할 짓인가. 깜짝 놀란 건 수더랜드 단장도 마찬가지, 좋아서 펄쩍 뛰는 노인 옆에서 연신 박수만 쳤다.
“야, 그거 이리 줘 봐.”
한편, 실 쿠퍼는 홈런을 치고 돌아온 다카기 앞에 손을 내밀었다.
일본 제약회사에서 건강 목걸이를 후원받은 건 실 쿠퍼도 마찬가지, 그런데 왜 난 이 모양이고 저 녀석은 장타를 펑펑 때려내는 건가.
같은 일본인이라고 효과가 좋은 물건을 따로 골라 준 건 아닌지, 물론 다카기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네 금목걸이 줘.”
“뭐 ··· 뭐라고?”
“그거 행운의 상징이라며? 약발 다 됐으면 나한테 주고 이거 받아 가면 되겠네.”
실 쿠퍼는 평소 주문 제작한 금목걸이를 차고 다닌다.
이걸 목에 걸면서부터 인생이 펴기 시작했다며 자랑질을 하던데, 그렇게 내 목걸이가 탐이 나면 서로 교환하면 그만 아닌가.
잠시 고민하던 쿠퍼는 교환에 합의했다.
‘훗 ~ 좋은 거래였어.’
다카기는 시선이 없는 곳에서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평범한 건강목걸이를 금덩이로 바꿨으니 완전 남는 장사 아닌가. 지금 바라는 건 실 쿠퍼가 좋은 타격을 하는 것 뿐, 저 녀석은 미신을 잘 믿는 편이라 여기서 좋은 결과가 나오면 금목걸이를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는 사욕을 품었다.
따악 ~ !!
“이번에도 잡아당긴 타구!! 베이스라인을 타고 흐릅니다!! 타자 주자는 1루를 지나 2루!! 내친 김에 3루까지 내달립니다!! 실 쿠퍼의 3루타!! 보스턴은 오늘 장타만 5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쿠퍼까지 살아난다면 보스턴은 앞으로 더 좋은 경기를 할 수 있겠죠. 2년 연속 월드시리즈 우승도 꿈이 아닙니다.”
3루에 안착한 쿠퍼는 더그아웃을 향해 건강목걸이를 손으로 툭툭 치는 세리머니를 날렸다.
역시 효과가 있는 놈은 따로 있었다는 시위, 금목걸이 확보가 목적인 다카기는 쿠퍼에게 마음에도 없는 환호를 보냈다.
‘이제 이 놈 주인은 나다.’
다카기는 다음 이닝부터 쿠퍼의 목걸이를 차고 외야로 나섰다.
건강목걸이에 비해 약간 무겁지만 나쁘지 않은 느낌, 틈이 날 때마다 손때를 묻혀 소유권을 확실히 했다.
“낮은 공, 들어왔다는 판정입니다.”
“채근성 선수는 자기 존이 확고합니다. 다카기 선수처럼 넓은 존을 커버하는 건 아니지만, 일단 컨택이 되면 타구질은 따라오는 유형이죠. 급할 거 없습니다.”
한국 방송국 관계자들은 은근 다카기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다카기는 배트 그립을 뒤에 두고 엄청난 배트 스피드와 컨택 능력으로 안타를 쏟아낸다. 덕분에 삼진, 볼넷이 적지만 내야 뜬공이나 땅볼이 나올 위험도 높다.
그에 비해 채근성은 배트 그립을 앞에 두고 간결한 스윙을 한다.
컨택 범위가 그만큼 좁아지는 건 당연, 원하는 공이 들어오지 않으면 눈 뜬 장님 신세다.
오늘 선발로 나선 프론스키는 그 약점을 집요하게 공략, 정교한 제구로 채근성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스트라이크!!”
눈 깜짝 할 사이 투 스트라이크, 역시 나는 제구가 좋은 투수에게 약점을 보이는 건가. 그래도 당황하지 않고 자기 공을 기다렸다.
딱 ~ !!
“타격!! 아 ~ 하지만 우익수가 내려오면서 처리하는군요.”
“정말 짓궂네요. 또 다카기 선수입니다.”
오늘 두 타석 모두 우익수 플라이, 왜 하필이면 저 자식한테 걸리는 건가. 금목걸이를 손가락으로 튕기며 돌아서는 모습도 어찌나 얄밉던지, 채근성은 이를 갈며 더그아웃으로 물러났다.
언제까지 당하기만 할 순 없는 일, 나도 한 방 보여줘야 하는데 결과가 나오지 않자 조급함만 더해졌다.
결국 이날 경기도 보스턴의 완승으로 종료(9대 2), 타석에서 4타수 3안타(1홈런) 2타점 맹활약을 펼친 다카기는 클럽하우스 앞에서 일본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그 목걸이 멋진데요.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한데 ··· ”
“네, 정확히 보셨습니다.”
다카기는 목걸이가 손에 들어온 경위를 자세히 설명했다.
세상에 이런 불평등한 교환이 어디에 있나, 하지만 다카기는 실 쿠퍼도 만족하고 있으니 문제될 것 없다며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후원받은 목걸이를 그런 식으로 활용하다니, 어이가 없는지 기자들은 너도 나도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시즌 11호 홈런을 기록하셨는데, 아직도 20홈런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직 경기 많이 남았잖아요. 포기하기엔 이르죠.”
아직 17게임이 남았는데 포기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다카기는 기회만 꾸준히 받는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입장을 되풀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