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간헐적 폭식 - (7)
‘또 못 쳤다.’
재대결에서 복수를 노렸던 채근성은 3번 째 승부에서 마저 범타로 물러났다.
5회까지 스트라이크 존을 적극 공략하던 다카기는 크로스의 조언대로 투구 스타일에 변화를 줬고, 무더기 땅볼이 쏟아지며 손쉽게 6회를 마쳤다.
한 번 더 붙어보면 그 다음은 이길 수 있을까. 하지만 그 기대는 곧 깨졌다.
‘여기까지군.’
브라이스 감독은 7회부터 마운드를 하버스태드에게 넘겼다.
시즌 막바지가 되면 여론은 이런저런 대기록에 포커스를 맞추기 마련, 하지만 기록에 연연하는 건 fa를 앞둔 선수들이나 하는 짓이다.
완봉, 퍼펙트가 에이스를 무리시킬 만큼 가치가 있는 기록인가.
선발투수의 1승은 6이닝을 던지든 9이닝을 던지든 그 가치는 동일하다. 일부 여론은 올 시즌도 220이닝을 훌쩍 넘긴 패트릭 브린을 예를 들어 다카기의 이닝 소화 능력을 깎아내리고 있지만, 브라이스 감독은 철저히 무시했다.
지금이 저놈들의 숨통을 물어뜯을 때인가?
커리어 3번 째 우승을 노리는 야심가는 여론의 흔들기에 콧방귀를 뀌었다.
‘이게 아닌데’
한편, 특별석에 앉은 수더랜드 단장은 특별 손님의 눈치를 살폈다. 손자의 투구를 보기 위해 먼 길을 날아온 노인, 이른 교체가 혹시 못마땅하진 않을까.
이게 브라이스 감독의 스타일이라 단장은 이제 그러려니 했지만, 완투와 완봉을 미덕으로 여기는 일본야구의 시선에선 다소 못마땅해 보일 수도 있겠지.
특히 고영길은 일본 교토 야구협회 회장까지 지냈던 인물 아닌가. 괜히 신경이 쓰였다.
혹시 손자가 경기를 끝내지 못한 게 아쉬우십니까?
통역의 말을 전해들은 고영길은 단장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진짜 아쉬워하는 건 따로 있네.”
“그게 뭡니까?”
고영길은 답 대신 스윙 자세를 잡았다.
야구를 좋아하지만 굳이 취향을 따진다면 타자 쪽, 야구의 꽃은 누가 뭐래도 홈런 아닌가. 한창 잘 치다 갑자기 멈춰버린 손자의 진격, 한 번 볼 수 없을까라는 기대를 안고 왔지만, 이 노인의 바람 때문에 구단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는 건 원치 않았다.
“그럼 이번 시리즈 마지막 경기는 야수로 출전시킬 테니 한 게임 더 보고 가시죠.”
단장의 답에 고영길은 말이 통하는 친구라며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손자가 6회 만에 마운드를 내려간 것도 못마땅하지만 내가 무슨 자격으로 이래라저래라 하겠나. 여기가 스기토모 그룹 본사도 아니고 지켜야 할 선은 넘지 않았다.
이 날 다카기는 6이닝 10탈삼진 게임을 펼치며 시즌 15승을 수확, 아시아 출신 투수가 단일 시즌 15승을 거둔 건 지난 2009년 npb를 거쳐 메이저리그에 입성한 첸즈웨이 이후 무려 13년 만의 기록이다.
기자들의 관심이 집중된 건 당연, 하지만 다카기는 자기자랑보다 투구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봐야겠다는 소감을 내놨다.
“스포츠 계엔 이런 말이 있죠.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 팀을 위해 존재하는 게 선수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카기는 선수를 위한 팀도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농구를 예로 들어 3점 성공률이 통산 40%가 넘는 선수가 있다고 치자. 그럼 그 선수는 팀을 위해 자기 색깔을 버려야 하나?
아니면 팀이 그 선수의 능력을 살려주기 위한 전술을 만들어야 하나. 당연히 동료들이 적극적으로 스크린을 걸어주며 기회를 만들어 줘야한다.
다카기는 올 시즌 9이닝 당 탈삼진율이 12가 넘는 선수, 이 정도면 안타가 나올 확률이 높은 맞춰 잡는 투구를 해야 하나.
6회부터 크로스의 지시대로 맞춰 잡는 투구를 했고 결과는 나쁘지 않았지만, 다카기는 삼진에 집중하는 내 스타일도 틀리진 않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까지 대체로 이타적인 모습을 보였던 다카기의 반란, 그 옆에 앉아 있던 브라이스 감독도 식은땀을 흘렸다.
선수를 위한 팀도 있다니, 이건 앞으로 내 방식에 맞춰달라는 뜻 아닌가. 하지만 다카기는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
크로스의 조언에 내가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나 라는 의문도 들었지만,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너희들이 내게 맞춰라. 이거였다.
그리고 그만한 실력을 갖춘 선수, 기자들은 누구도 네가 틀렸다는 말을 입에 담지 못했다.
“그럼 앞으로 크로스의 볼배합에 따르지 않겠다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 제 능력을 최대한 살려달라는 뜻입니다. 그게 무리한 요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마디하면 알아들어야지 자꾸 엉뚱한 길로 새는 기자들, 그렇게 여러 사람을 놀라게 한 다카기는 구단관계자들이 주최한 저녁식사 자리에 얼굴을 드러냈다.
‘역시 내 핏줄이다.’
실력뿐만 이니라 말 한마디로 구단을 쥐락펴락하는 녀석, 고영길은 손자의 넓은 어깨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 총기에 만인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를 지녔으니, 기업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면 어땠을까 라는 아쉬움이 들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저희가 요즘 광고 수입이 시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투자에 일가견이 있는 당신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에디슨 헨리 구단주는 고영길에게 직구를 던졌다.
세계광고 시장은 이미 TV와 라디오에서 디지털로 옮겨가고 있다.
전문가들도 2023년에는 디지털 광고가 전체 미디어의 2/3이상을 차지할 거라고 평가했지만 결과는 충격적, 디지털 광고에 집중한 보스턴은 기대 이하의 실적에 충격을 받았다.
‘이것 밖에 안 돼?’
월드시리즈 우승도 했고, 걸출한 스타 선수들도 있는데 보스턴 구단의 광고 실적은 작년 이맘때와 비교해 오히려 더 떨어졌다.
이번에 보스턴 구단 지분을 매각한 마크 핼릭슨도 형편없는 분기 수익에 실망, 앞으로도 가망이 없다는 생각에 미련 없이 손을 뗐다.
우리는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건가. 구단주의 물음에 고영길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당신들은 너무 부지런한 게 탈이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도 우리 기업이 얼마를 버는지 모르는데, 자네들은 그걸 일일이 보고를 받나?”
주주들은 기업의 주인이지만 기업이 실제로 얼마나 벌고 있는지는 시시각각 파악하긴 어렵다.
당장 확인할 수 있는 자료라고 해봤자 과거의 회계자료 뿐, 시장이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데 그걸 어떻게 읽어내겠나. 분기 별로 보고를 받지만 그게 시장의 흐름을 정확히 표시했다고 장담할 순 없다.
그래서 고영길은 지금까지 분기별로 올라오는 보고를 받아본 적이 없다. 투자란 묻어둔 돈이라고 생각하고 느긋하게 해야 하는 법, 잠깐 변동이 있다고 마음이 흔들리면 이도저도 아니게 끝난다.
물론 기업의 자금 유동성을 위해 주식을 매각하는 건 권장 돼야 할 일이다. 하지만 어닝 쇼크(기대했던 것 보다 수익이 적게 벌린 경우)가 왔다고 허둥지둥 한다? 고영길은 그건 아니라고 손을 저었다.
“돈이 조금 덜 벌린다고 조급해해선 안 돼. 그런데 자네들은 너무 성급하군, 그동안 얼마나 벌었기에 이런 푸념을 하는 건가?”
늙은 여우의 조언에 에디슨 헨리는 얼굴을 붉혔다.
지난 2002년, 에디슨 헨리는 4억 3천만 달러에 보스턴 구단을 사들였다. 그리고 지금은 15억 달러까지 뛴 구단 가치, 이 기간에 월드시리즈 우승이 4번이나 겹치면서 구단 수익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래서 투자를 더 확대했는데 생각보다 시원치 않은 수익, 그렇다고 쳐도 어지간한 구단들 뺌을 때릴 수준이다.
돈이 막 쌓이기 시작하니 눈에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사람들, 고영길은 그 앞에서 여유 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조급해 할 거 없네. 위에서 닦달하면 아랫사람들이 정확한 보고를 올릴 것 같나? 느긋하게 지켜봐. 가끔은 그런 것도 필요하다고”
“알겠습니다.”
그렇게 정리된 대화, 화제는 이제 야구 쪽으로 흘러갔다.
에디슨은 훌륭한 선수 덕분에 구단관계자들은 물론 팬들도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있다며 감사를 표했고, 고영길은 어깨를 들썩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고마워해야지. 내 손자지만 야구시키기엔 아까운 녀석이니까.”
할아버지의 반응에 다카기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손자가 인터뷰에서 거하게 한 건 했는데 본인까지 자랑을 하면 팔불출 아닌가, 하지만 손자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마음에 태클을 걸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너 그거 진심으로 한 말이냐?”
“뭐가요?”
“선수를 위한 팀도 있다면서? 이 사람들은 일본어 못 알아들으니까 나한텐 솔직히 말해 봐라.”
고영길은 손자의 속마음을 슬쩍 찔러봤다.
얼핏 들으면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던 발언, 팀이 일개 선수에게 맞춰 주는 게 쉬운 일인가. 하지만 다카기는 그게 팀을 위하는 길이라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제가 활약을 해야 팀 승률이 올라가는 거 아닌가요? 그렇게 따지면 동료들이 제게 맞춰주는 것도 팀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하하 ~ 그래, 그것도 맞는 얘기구나.”
늙은 여우는 손자의 반격에 너털웃음을 지었다.
어렸을 때부터 총기가 보통이 아니라고는 생각했지만 역시 대단한 녀석, 말 뿐만 아니라 실력으로 증명하고 있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겠나.
구단관계자들도 오고가는 일본어에 관심을 보였다. 에디슨 헨리 구단주는 통역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수더랜드 단장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확실히, 다카기 정도라면 팀이 맞춰줄만한 자격이 있죠.”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네, 저도 이번에 많은 걸 깨달았습니다.”
수더랜드는 지금까지 누구보다 팀을 강조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래서 팀에 문제가 되는 선수는 누구라도 가차 없이 쳐냈고, 그 결과 프랜차이즈 스타들을 홀대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다카기의 등장은 그 고정관념을 단숨에 깨부쉈다.
선수 개인의 능력을 살려내는 것도 팀의 역할, 우리는 그동안 그 점을 소홀하게 생각했던 게 아닐까. 어떻게 하면 다카기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을까, 제법 진지한 논의가 오고가기 시작했다.
“나는 이 녀석이 50홈런도 칠 수 있는 재목이라고 생각하네.”
고영길은 구단 관계자들에게 당혹스러운 제안을 내놨다.
지금 마운드에서 다카기를 빼면 뭐가 남나. 프론스키가 최근 살아나고 있지만 에이스라고 하기엔 신뢰가 부족하다.
거기다 나이도 있고 오랫동안 마운드를 책임지기엔 어려운 선수, 구단 관계자들도 다카기의 수비 능력과 타격 재능은 인정했지만, 에이스의 자리를 포기하면서까지 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이미 정리된 일, 이제 와서 논란을 재점화시키고 싶진 않았다.
“내 의견을 말 했을 뿐이니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말게.”
늙은 여우의 넉살에 구단 관계자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사람을 쥐락펴락하는 다카기의 능력은 역시 이 사람에게 물려받은 건가, 일단 이 문제는 논의를 거듭하면서 답을 찾기로 합의를 봤다.
‘네 능력을 보여줘라.’
이틀 후, 다카기는 단장이 예고한대로 우익수로 선발 출장했다.
고영길은 이번에도 특별석에 앉아 경기를 관람, 손자가 50홈런도 칠 수 있는 재목이라는 발언은 농담이 아니었다.
올 시즌 102타석을 소화하면서 무려 10홈런, 그렇다고 홈런만 치는 공갈포도 아니다(0.310, 0.394, 0.592).
야구협회 회장을 지내면서 수많은 유망주들을 지켜봤지만, 지금까지 손자 정도의 재능을 발휘한 학생이 있었던가.
평생 옆에 두고 싶었지만 그라운드에 내보내면 어떨지 궁금했던 것도 사실, 어디까지 날뛸 수 있는지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