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163화 (163/361)

163화. 간헐적 폭식 - (6)

[다카기 또 벤치]

다카기가 이틀 연속 벤치를 지키자 여론은 불만을 쏟아냈다.

한 경기가 아쉬운데 20홈런 도전을 선언한 선수를 벤치에 앉히다니, 하지만 보스턴 구단은 밀려오는 파도에 휩쓸리지 않았다.

보스턴은 홈 2연전에서 평균 8점이 넘는 공격력을 과시하며 8연승을 달렸다. 굳이 에이스를 야수로 투입할 이유가 없던 흐름, 포스트 시즌 진출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다카기의 체력을 관리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제 남은 경기는 20게임도 안 되고 이 기간에 10홈런을 몰아치는 건 사실상 불가능, 뭣보다 도전도 기회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20홈런 도전은 팬들의 관심 속에서 천천히 잊혀졌다.

그에 비해 최근 무서운 상승세를 타고 있는 데이브 셰퍼드는 9년 연속 30홈런 달성에 1개차로 접근, 이제 됐다고 생각했는지 셰퍼드는 한동안 멀리 했던 담배를 입에 물었다.

입안 구석구석에 스며드는 짜릿한 느낌,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 눈에 들어온 녀석에게 담배를 권했다.

“너도 하나 해볼래?”

“애한테 그런 거 가르치는 거 아니야.”

다카기의 말대답에 주변에 있던 선수들은 빵 터지는 반응을 보였다.

그야 다카기는 클럽하우스에서 최연소 선수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애라는 표현은 너무 극단적, 진짜 애까지 있는 녀석이 이런 말을 한다는 게 너무 웃겼다.

“앞으로 클럽하우스에서 그거 하지 마.”

“꼭 그래야 돼? 별로 연기 피우는 것도 아니잖아?”

“애들 교육에 안 좋다고, 어른이면 어른답게 행동해야지”

쏟아지는 잔소리에 셰퍼드는 씹는담배를 뱉어냈다.

하긴 보스턴은 로스터에 어린 선수들이 많다. 메이저리그 사무국도 담배를 추방하는 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중, 셰퍼드도 간만에 담배를 입에 물었지만 어린 선수들 보기에 안 좋다는 충고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다카기는 하루를 마무리하고 귀가, 자석처럼 들러붙던 동생은 얼마 전 일본으로 돌아갔고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을 나눴다.

“우리 아들 한 번 안아보자.”

아직 배냇머리도 안 빠진 녀석, 처음엔 아빠를 어색해하더니 이제는 빤히 바라봐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얼굴에서 특히 넓은 지분을 차지한 반짝이는 눈동자, 배를 슬쩍 간질여주자 눈을 찡긋하는 게 어찌나 귀엽던지, 다카기는 그렇게 한동안 어린 아들과 시선을 교환했다.

“이 녀석, 언제 아빠라고 불러줄까?”

“당분간은 무리겠지.”

키리코는 아들 바보가 된 약혼남을 향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저게 아들보다 딸이 좋다고 했던 사람이 할 행동인가, 하지만 가정적인 분위기가 아직 익숙하지 않은 키리코는 그런 모습도 사랑스럽게 보였다.

“참, 자기한테 할 말 있어.”

“뭔데?”

다카기는 할아버지가 미국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입수했다.

때가 되면 손주 녀석이 증손자를 품에 안고 귀국하겠지만, 나이가 나이라 마음이 급한 게 사실, 고영길은 손주의 경기도 직관할 겸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미국 여론도 분명 반응을 보이겠지, 물론 그만한 배경이 있었다.

미국은 2000년 대 들어 부동산 가치가 대폭락 했고, 2008년에 들어 다시 한 번 대 타격을 받으면서 금융기관이 도산하고 금융시스템이 마비되는 타격을 입었다.

이때 미국 시장에 손을 뻗친 게 고영길, 원래 부동산으로 이득을 봤던 경력이 있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늙은 여우는 다시 한 번 기지를 발휘했다.

금리가 떨어지면 부동산 가격이 치고 올라가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 남들이 뭐라 하든 공격적인 투자로 땅을 사들였다.

결과는 충격적, 예상대로 미국 부동산은 다시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고, 올해는 무려 5.6%나 값이 뛰었다.

부동산 발 경기 침체는 없다는 게 다시 한 번 증명된 셈, 얼마 전 세계 30대 부자에 선정된 고영길의 행보에 미국 여론이 무관심으로 대응할 수 있을까.

뭣보다 손자가 메이저리그를 주름 잡는 대스타,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 카메라에 잡힐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직 할아버지의 손자인가.’

아니나 다를까, 고영길의 미국 입성은 여론을 발칵 뒤집어 놨다. 혹시 또 뭔가 거한 투자를 준비하고 온 건 아닌지, 다카기는 이번 일로 내 명성이 할아버지에 미치지 못한다는 걸 실감했다.

메이저리그 스타라고 해봤자 미국 전체를 흔드는 건 무리, 그에 비해 할아버지는 행보만으로도 세계 시장을 긴장하게 할 정도의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다.

아직도 갈 길이 먼 입장, 고영길의 손자가 아니라 다카기 하루요시라는 이름으로 명성을 떨치겠다는 의지는 확고해졌다.

* * *

[채근성, 다카기 상대로 시즌 10홈런 도전]

그 사이, 또 다른 아시아 선수가 한국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올 시즌 중반에 콜 업 된 채근성은 순조롭게 메이저리그에 적응 중, 하지만 8윌 6일 시즌 9호 홈런을 날린 이후 20경기 동안 장타가뭄에 시달렸다.

타율과 출루율은 괜찮지만 와야수로 기용하기엔 부족한 장타력, 내년을 위해서라도 뭔가 보여줘야 할 텐데 하필이면 가장 성가신 상대를 만났다.

거기다 지난 경기 다카기를 상대한 전적은 3타수 무안타에 삼진 3번, 기자들이 시즌 10홈런 달성을 기원하는 기사를 냈지만 팬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제목 바꿔라. 다카기 15승 도전기로]

[이게 현실이지, 미국 현지에서도 채근성은 관심 밖이다]

복수의 칼날을 갈아온 채근성 입장에선 다소 굴욕적인 대우, 하지만 이게 현실이다.

내가 저 녀석을 상대로 홈런을 날리면 그만큼 내가 받을 관심도 높아지겠지, 나름대로 각오를 세우고 복수에 나섰다.

‘이건 진짜 못 치겠는데’

하지만 오스틴 텍산스 선수단이 마주한건 절망뿐이었다.

일반적으로 보더라인에 걸치는 투구는 스트라이크 존 안쪽에 비해 BABIP가 낮은 것으로 드러났다.

즉, 바깥쪽을 집중적으로 공략한다는 건 피안타율을 그만큼 억제할 수 있다는 뜻, 물론 이런 정교한 제구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투수는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볼넷을 내줄 위험이 높아 투구수 관리가 어려워진다는 것도 단점, 하지만 후반기의 다카기는 그런 상식마저 파괴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95마일 빠른 볼이 바깥쪽에 걸치는데 이걸 무슨 수로 공략하나, 성급하게 배트를 내다 아웃 당하는 게 부지기수, 여기에 필요하다면 스트라이크 안쪽으로 찔러 넣는 구위까지 갖췄으니, 공략이 쉽지 않았다.

‘어떻게 하나 안 되겠냐?’

첫 타석에서 초구를 건드렸다가 땅볼로 물러난 채근성은 이제 칠 만한 공을 구걸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제법 많은 투수들과 자웅을 겨뤘지만 이 정도로 틈이 없는 상대는 처음, 몰린 카운트를 극복하는 것보다 찾아오지 않을 기회를 기다리는 게 더 힘들었다.

“높은 공!! 따라 나옵니다!! 삼진!! 다카기는 오늘도 위력적인 투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미국이 다시 한 번 일본의 침공을 받고 있군요. 기분이 묘합니다.”

보스턴 현지 중계석은 마침 카메라에 잡힌 고영길을 두고 대화를 이어갔다.

다카기가 메이저리그 마운드를 폭격하고 있는 건 그러려니 넘어가 줄 일이지만, 고영길은 아예 미국 시장을 흔들고 있다.

정확한 수치는 가늠할 수 없지만, 일단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큰딸 이름으로 된 부동산만 해도 약 7억 달러 규모, 다카기의 미국 침공도 대단하지만 역시 고영길의 존재감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잘 보여서 나쁠 건 없지’

수더랜드 단장도 특별석에 앉은 거물의 눈치를 살폈다.

평소 보스턴의 왕처럼 군림하던 입장이지만 지금은 한 수 접어야 하는 신세, 다카기가 좋은 활약을 할 때마다 입에 기름을 칠하고 아부를 쏟아냈다.

오늘 경기가 끝나면 보스턴의 구단주 에디슨 헨리도 특별 손님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할 예정, 얼마 전 뉴캐슬 스포츠 벤처 기업(NCSV)의 일원 마크 핼릭슨은 광고 수입 감소를 이유로 보스턴의 지분을 매각했다.

NCSV는 에디슨 헨리가 보스턴 구단을 인수하기 전에 투자자들과 함께 만든 지주 회사, 구단 지분의 1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투자자가 빠져나가자 에디슨 헨리는 당황했다.

광고 수입이 잠깐 떨어졌다고 2억 6천만 달러나 되는 지분을 팔아버리다니, 11년을 함께한 동업자에게 뒤통수를 맞은 에디슨 헨리는 배신감을 느꼈지만, 지금은 새로운 투자자를 찾는 게 우선이었다.

손자가 보스턴에서 뛰고 있는 고영길은 새로운 주주가 될 유력 후보, 구단에서 공을 들이는 건 당연했다.

‘그까짓 거 투자한다고 손해 보는 건 아니지’

고영길도 투자를 진지하게 고려했다.

구단 지분을 사들이는 건 기업의 손을 빌릴 일도 아니다. 내 재산에서 해결하고도 남을 일, 증손자를 보러 온 게 목적이지만 돈 될 일을 논의해서 나쁠 것 없지 않은가.

뭣보다 구단 지분을 내가 쥐고 있으면 구단 관계자들도 손자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겠지, 혼자서도 잘 해나는 녀석이지만 그만한 뒷배를 둬서 나쁠 건 없다.

문제는 손자의 자존심, 할아버지의 손자가 아니라 다카기 하루요시라는 이름으로 명성을 떨치길 원하는 녀석에게 이 결정은 조금 굴욕적이지 않을까.

그렇게 할아버지의 고민이 거듭되는 사이, 마운드에 선 손자는 미국 침공을 이어갔다.

“체인지업, 따라 나옵니다. 오늘 경기 9번째 삼진이군요.”

“다니엘 맥나잇의 기록을 갈아치우는군요. 오늘부터 보스턴 역사상 우완 투수로 가장 많은 삼진을 잡은 선수는 다카기입니다.”

지난 1951년, 혜성처럼 나타난 다니엘 맥나잇은 18승 7패, 평균자책점 2.94, 235이닝 동안 258삼진을 잡아내는 역투로 보스턴 에이스의 계보를 이었다.

다카기는 오늘 시즌 259번째 탈삼진을 잡아내며 그 기록을 경신, 삼진 위주의 피칭은 계속 됐다.

‘조금 비효율적인데’

데이비드 크로스 포수는 조금 자중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삼진 능력이 원래 뛰어나지만 상황에 따라 땅볼 유도로 투구 수를 아낄 줄 아는 게 저 녀석의 장점 아닌가.

그런데 오늘은 유독 삼진에 집착하는 투구, 승부가 길어지자 땅볼 유도용 투심을 요구했지만 다카기는 고개를 저었다.

딱 ~ !!

“다시 파울입니다. 계속 힘으로 밀어붙이고 있네요.”

“파울은 되고 있지만 타자가 대응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이쯤에서 변화구를 던지는 게 어떨까요.”

다시 투심 사인, 하지만 다카기는 고개를 저었다.

투 스트라이크에서 땅볼을 유도하는 건 취향이 아니라 삼진 외의 시나리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와아아 ~ !!”

몸 쪽을 찌르는 포심으로 기어이 삼진 처리, 팬들은 환호를 질렀지만 크로스는 위험천만한 투구에 난색을 표했다.

“지금은 조금 위험했어.”

“뭐가 위험했는데? 몸 쪽으로 잘 들어갔잖아.”

다카기는 문제 될 게 없었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통계를 신봉하는 크로스는 그게 아니라며 흥분한 에이스를 다독였다.

아무리 좋은 투수라도 스트라이크 존 안에 들어가는 공은 피안타율이 높아지기 마련, 투심으로 땅볼을 유도했어야 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내가 잘못한 건가?’

다카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할아버지가 직관을 온 건 학창시절을 통틀어 이번이 처음, 의식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고집을 피우고 있다.

고집은 자멸로 이어지는 지름길, 그동안 잘 나갔다고 너무 방심한 거 아닐까. 6회부터는 포수 경력 12년에 접어든 크로스의 지시를 어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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