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162화 (162/361)

162화. 간헐적 폭식 - (5)

‘오늘은 다를 거다.’

토론토와의 시리즈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브라이스 감독은 편안한 마음을 유지했다.

양 팀은 지난 2경기에서 무려 29점을 주고 받는 난타전을 벌였다.

하지만 오늘은 다카기가 마운드에 오르는 날, 무실점 은 아니더라도 6이닝 이상을 3점 이내로 막아내줄 거라 기대했다.

‘두 번은 안 당한다.’

한편 데이비드 크로스 포수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각오를 다졌다.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토론토 타자들이 사인을 훔치고 있다는 의혹을 떨쳐내기 어려운 장면이 어제에도 몇 번 있었다.

타임을 요청하고 주심을 보는 척 하면서 포수가 어디에 앉아 있는지 체크하는 얌체족도 그 일부, 반칙과 기교의 경계선을 달리는 플레이라 배터리가 슬기롭게 극복하는 수밖에 없다.

다카기도 그 점을 충분히 인지, 원래 인터벌이 짧은 편이지만 대비는 해뒀다.

1회 초 보스턴의 공격은 득점 없이 종료, 선두타자 크레이그 먼로는 마운드를 향해 배트를 뻗는 특유의 준비 동작으로 설욕을 다짐했다.

지금까지 다카기를 상대로 8타수 무안타에 삼진만 5번, 특히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에 3번이나 삼진을 당했다.

일반적으로 투수들은 유리한 볼카운트를 잡으면 타자 몸에서 멀어지는 공을 던진다.

우완이 우타자에게 결정구로 슬라이더를 던지는 건 정석, 다카기도 수준급의 슬라이더를 갖췄지만 올해는 체인지업을 좀 더 활용하고 있다.

아무래도 스트라이크 존에서 멀어지는 슬라이더는 눈에 띄기 쉽기 마련, 이걸 노리고 느린 슬라이더를 던져 타자를 유혹하는 투수도 있지만 구속이 받쳐주지 않으면 생각보다 헛스윙을 끌어내기 어렵다.

그에 비해 체인지업은 스트라이크 존에 붙어서 날아오는 공, 불리한 카운트에서 체인지업을 마주한 타자는 스윙을 해야한다는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물론 제구가 안 되면 안타를 맞을 가능성은 급격히 높아지지만 제대로 떨어트릴 수 있다면 체인지업도 삼진을 쓸어담는 무기가 될 수 있다.

다카기는 미국 생활 3년 만에 그 사실을 간파, 맞더라도 헛스윙을 끌어낼 확률이 높은 공을 택했다.

“스윙, 헛칩니다. 지금은 체인지업이죠.”

“다카기 선수가 올 시즌 체인지업 헛스윙율이 무려 28%나 되거든요. 요즘은 결정구 뿐만 아니라 카운트를 잡는 역할도 겸하고 있습니다.”

2구만에 투 스트라이크를 헌납한 먼로는 씁쓸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설마 이 타이밍에 체인지업을 쓸 줄이야. 카운트가 불리해지자 홈플레이트 쪽으로 바짝 붙었다.

아무리 배짱이 좋아도 이번에는 바깥쪽으로 빼겠지, 눈치를 살피다 투구 타이밍에 타임을 요청했다.

‘몸 쪽이라고?’

곁눈질로 확인한 포수 위치, 놀랍게도 크로스는 홈플레이트 안 쪽에 미트를 대고 있었다. 전혀 예상 못 했던 패턴, 먼로가 홈플레이트에서 약간 멀어지자 크로스는 바깥쪽 높은 빠른 볼로 응수했다.

결과는 헛스윙 삼진, 사기꾼을 검거한 크로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10년 넘게 이 자리에서 쌓은 노하우에 다카기의 구위를 더하면 무적, 상대는 메이저리그 최강의 화력 군단이지만 두려움 따윈 없었다.

“다시 떨어집니다. 오늘 경기 8번 째 삼진, 시즌 250번 째 탈삼진을 돌파하는 군요.”

“제가볼 땐 20홈런보다 300탈삼진이 그나마 현실적인 목표입니다. 앞으로 최소 4경기는 더 등판 할 테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죠.”

경기는 어느덧 7회 초, 데이브 셰퍼드가 시즌 25호 홈런을 쏘아 올리며 스코어는 5대 0으로 벌어졌다.

이번 시리즈에서 벌써 4번 째 홈런, 시즌 내내 부진하다고 욕을 먹었지만 9년 연속 30홈런, 통산 400홈런에 2개차로 접근했다.

역시 꾸준한 선수, 마침 원정게임에 동행한 수더랜드 단장은 셰퍼드와의 연장계약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공식 발표는 아직이지만, 얼마 전 맥 리스가 올 시즌이 끝나면 은퇴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

당장 내년 시즌 타선 가동에 비상이 걸린 상황, 30대 중반을 향해 달려가는 선수지만 보스턴 입장에선 셰퍼드를 1년 만 쓰고 내보내기엔 아쉬었다.

셰퍼드 본인도 수비가 안 좋으니 아메리칸 리그에서 뛸 수밖에 없는 입장, 조건만 어느 정도 맞춰준다면  셰퍼드가 보스턴에 남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어쨌든 점수가 벌어지자 다카기는 7회부터 마운드를 넘겼고, 불펜이 7-8회를 무사히 넘기자 다카기의 시즌 14승을 알리기 위한 기자들의 손놀림은 분주해졌다.

따아악!!

“다시 한 번 좌측으로 높게 가는 타구!! 틀림없습니다!! 데이브 셰퍼드의 시즌 26호 홈런!! 이번 시리즈에서만 5번째 홈런입니다!!”

“버나드 길키는 지겹겠네요. 이게 벌써 몇 번째입니까.”

토론토의 프랜차이즈 스타 버나드 길키는 자기 구역을 열어주지 않았다.

지금까지 세퍼드가 홈런을 치고 3루를 도는 장면을 17번이나 봤다. 왕년에 홈런왕을 두고 몇 번 부딪쳤던 사이라 라이벌 의식도 있는 편, 8년 만의 지구 우승을 향해 달려가는 토론토의 발목을 잡은 녀석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얼른 비켜 이 XX야.”

셰퍼드는 3루를 막고 있는 길키에게 욕설을 날렸다.

여기에 길키가 응수하면서 쓸데없는 마찰이 발생, 양 팀 선수들이 동시에 쏟아져 나오면서 분위기는 다소 험악해졌다.

셰버드는 한때 격투기 스파링 역할까지 했던 주먹, 무슨 배짱으로 시비를 건 건가. 토론토 선수단은 캡틴의 행동에 의문을 표했지만 어쨌든 지금은 싸움이 커지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기록만 아니었으면 넌 죽었어 이 XX야”

셰퍼드는 홈으로 향하면서도 길키에게 위협을 가했다.

9년 연속 30홈런 때문에 참았지, 기록을 넘었다면 벌써 한방 날렸을 거다. 하지만 길키는 큰소리만 치지 말고 어디 쳐보라며 응수, 셰버드는 순간 욱했지만 코치의 손에 끌려 홈을 밟고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실력은 있는데 찌질 해서 못 봐주겠네요.”

경기가 끝난 후, 시즌 14승을 거둔 다카기는 기자들 앞에서 버나드 길키를 조롱했다.

예전에도 한 번 부딪친 사이지만, 그 때는 하버스태드에게 빈볼을 맞았다는 그럴 듯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 행동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 다카기는 길키의 행동을 나름대로 분석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토론토는 지난 8년 동안 포스트시즌에 나간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길키는 우승에 목말랐겠죠. 올 시즌 토론토는 AL 동부지구 1위를 달리고 있지만 올해가 아니면 어려울 거라는 두려움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번에 시리즈를 스윕 당했으니 두려움이 열등감으로 폭발한 거겠죠.”

가자들은 하나 둘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그럴듯한 추리, 길키는 지금까지 골드 글러브, 실버슬러거, 올스타, 시즌 mvp까지 못 해본 게 없다.

유일한 빈 구석은 월드시리즈 우승 뿐,지난 2013년, 팀이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지만 ALCS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거기다 본인이 결정적인 순간에 범타로 물러났으니 아쉬움은 더 컸겠지, 간만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이해했지만 오늘 행동은 본인의 이미지만 깎아 먹는 최악의 한 수가 됐다.

이제는 화제를 돌릴 때, 한 기자가 후반기 들어서도 좋은 활약을 할 수 있는 비결에 대해 물었다.

“굳이 말하자면 입에 맞는 밥을 먹은 덕분이겠죠.”

메이저리그 식단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개인 입에 맞는 음식은 따로 있다. 다카기도 현지 음식에 적응해보려 노력했지만 일본에서 나고 자란 식성이 그렇게 쉽게 바뀌겠나.

하지만 딸의 출산을 돕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온 장모님 덕분에 요즘은 제법 그럴싸한 밥상을 받고 있다.

겨우 그게 상승세의 비결이라니, 하지만 다카기는 먹는 것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며 맞받아쳤다.

“마크 트웨인이 이런 말을 했다죠. 인생에서 성공하는 비결은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힘내 싸우는 것이라고 말이죠. 저는 그 격언을 몸소 실천하는 것뿐입니다.”

마크 트웨인은 톰 소여의 모험, 왕자와 거지, 허클베리 핀의 모험 등을 저술한 미국의 소설가로 미국 문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정치풍자로 제국주의와 인종차별, 사회문제 등을 비판한 시대를 앞서간 인물, 그 정도 거물이 한 말이라면 믿어도 되지 않을까.

어지간한 미국인들도 잘 모르는 격언을 일본에서 넘어온 선수가 알고 있다니, 기자들은 놀라움을 표했다.

“평소에 책을 많이 읽으십니까?”

“클럽하우스에 있으면 할 일이 없거든요. 그래서 좋습니다. NPB를 거쳤다면 그런 여유는 상상도 못했겠죠.”

다카기는 미국으로 넘어온 이후, 시즌 기간에 훈련을 해 본 기억이 거의 없다.

NPB는 매년 143경기, MLB는 162경기를 치른다. 이동 거리나 경기 수를 고려하면 NPB가 체력적으로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 그래서 일부 감독들은 시즌 기간에도 혹독한 훈련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건 NPB에 입성한 고교 선배 이시다 토모카츠의 입에서 나온 증언, 몸을 그렇게 혹사시켜놓고 실전에서 무슨 실력을 발휘하겠나.

미요시 호크스가 매년 후반기에 죽을 쑤는 이유가 정말 선수들의 실력 부족일까. 아니면 감독의 구시대적인 발상 때문일까.

그에 비해 여유가 넘치는 보스턴 클럽하우스, 브라이스 감독은 경기 시작 2시간을 앞두고 어떤 훈련도 하지 않는다.

고교 시절 매일 훈련에 열중했던 다카기에겐 너무도 충격적이었던 문화, 하지만 이제는 익숙해졌다.

여기 있는 선수들은 모두 세계에서 가장 야구를 잘 하는 사람들 아닌가. 그런데 훈련은 무슨 훈련, 그런 건 오프 시즌 때 죽어라고 했다.

실력이 떨어지는 선수들이나 훈련을 하는 거지 여기서는 불필요한 짓, 다카기는 남는 시간에 책을 읽은 것뿐이다. 학창 시절엔 공부만 하느라 세계 문학을 접할 기회가 없었는데 이제는 남아도는 시간, 역시 메이저리그 직행을 택하길 잘했다는 소감을 남겼다.

그렇게 보람 있게 마무리한 하루, 원정 6연전에서 싹쓸이를 거둔 보스턴 선수단은 기분 좋게 홈으로 돌아왔다.

이제 AL리그 동부지구 1위와의 격차는 단 2게임, 어제 선발 등판을 치렀지만 다카기는 감독에게 원한다면 야수로 나가 줄 수 있다며 홍보에 나섰다.

“자네는 지치지도 않나?”

“지치긴요, 너무 쉬어서 문제죠.”

브라이스 감독은 다카기의 체력에 혀를 내둘렀다.

평소 체력 관리를 잘 해주는 편이지만 이쯤 되면 많은 선수들이 피로를 호소하기 마련, 그런데 이 녀석은 그런 기색이 전혀 없다.

하지만 선발 등판한 다음 날은 절대 내보내지 말라는 게 단장의 엄명, 꿈도 꾸지 말라며 벤치로 돌려보냈다.

“마음 바뀌면 연락해요.”

다카기는 손으로 만든 핸드폰을 흔들었다.

다들 무리라고 하지만 20홈런에 도전해 보겠다는 건 진심, 일단 철수했지만 감독의 연락이 날아들길 기다렸다.

따아악 ~ !!

“설마 이번에도 가는 겁니까?!! 좌측 높게 가는 타구가 담장을 넘어가는 군요!! 데이브 셰퍼드의 통산 400호 홈런!! 이번 주에만 홈런 6개를 몰아치고 있습니다!!”

“이 주의 선수는 거의 확정적이네요. 한물갔다는 평가는 당장 취소해야겠습니다.”

1회 말, 셰퍼드는 첫 타석부터 역사를 만들어 냈다.

아홉수 따윈 무시해 버린 한 방, 500홈런 청신호를 밝힌 예비 전설은 더그아웃에서 동료들과 감격의 포옹을 나눴다.

여기까지 오면서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는지, 겉보기엔 여론의 간섭과 야유에 대범한 척 하지만 은근 마음이 여린 편이라, 홈팬들의 커튼콜에 눈시울이 잠깐 붉어졌다.

“500홈런도 여기서 쳐야하지 않겠어?”

다카기는 그런 셰퍼드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가능하면 그렇게 하고 싶지만 단장이 어떻게 나올지, 다카기는 내가 한 번 말해보겠다며 큰소리를 쳤다.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

“내가 그분하고 친분이 좀 있거든, 내가 말하면 어떻게든 될 거야.”

밑도 끝도 없는 허언에 코웃음을 쳤다.

자기가 뭐라고 단장한테 선수 영입 압력을 넣겠다는 건지, 분위기를 띄워주려는 노력으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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