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간헐적 폭식 - (4)
“자, 보스턴의 라인업을 살펴보시죠. 좌익수 폴 돈론, 중견수 알 디즌, 우익수에 후안 위긴스, 3루에 ··· (중략) ··· 지명타자에는 데이브 셰퍼드입니다. 다카기는 보이지 않는 군요.”
“제가 경기 전에 만나 봤는데, 최근 많아진 도핑 검사에 다소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더군요. 홈런 많이 친다고 너무 눈치 주는 거 아니냐는 말도 했습니다.”
“하하 ~ 그거 엄살 아닙니까?”
“글쎄요. 하지만 어쨌든 선수 입장에서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니까요.”
예상대로 보스턴 지역방송 중계진은 시작부터 다카기의 입장을 변호했다. 최근 3년 동안 한 시즌에 도핑 테스트를 4번이나 받은 선수는 알렌 레이포드가 유일하다.
지난 2018년, FA를 앞둔 레이포드는 무려 47홈런 시즌을 만들어 냈다.
평소 20홈런 정도는 쳐 주던 선수였지만 갑자기 홈런이 2배 이상 늘어났으니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팬들이 늘어나는 건 당연, 그렇게 레이포드는 투수뿐만 아니라 주변의 편견과도 싸워가며 커리어 하이 시즌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FA 계약을 맺은 지 2년 후, 스테로이드 계 약물 복용이 적발 돼 10경기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
출장정지 기간이 짧았던 이유는 근육 향상을 위한 스테로이드가 아니라 피부 관련 질환 치료를 위해 처방 받은 약을 먹고 사무국에 신고를 못 한 게 원인, 비시즌 기간에 먹었던 약이라 레이포드는 몸에 약물 성분이 남아있을 거라곤 예상 못했다.
하지만 프로 선수라면 이런 것도 철저히 신고해야 하는 게 선수의 본분, 이건 명백한 레이포드의 잘못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기자들 앞에서 후련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차라리 걸려서 후련합니다.”
“후련하다니요?”
“내가 약물 복용을 했다는 소식은 모두 기다렸던 일 아닌가요?”
레이포드는 복귀 후 인터뷰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내가 잘 나갈 때도 색안경을 끼고 봤던 여론이지만 부상을 입어 치료 목적으로 쓴 스테로이드가 적발됐을 땐 ‘그럼 그렇지’ 하면서 다들 욕하기 바빴다.
남이 잘 되는 건 죽어도 못 보는 인간들,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됐으니 이젠 속이 후련하냐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다카기가 레이포드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레이포드는 당시 FA를 앞두고 있던 몸, 레이포드를 잡을 돈이 없던 피츠버그는 선수가 어떤 여론에 휘말리던 그냥 방치했다. 하지만 다카기는 보스턴과 장기계약을 맺은 몸, 수더랜드 단장은 적극적으로 변호에 나서고 있고, 그건 보스턴 팬들도 마찬가지다.
본인이 진짜 약물을 하지 않는 이상 나를 지켜주는 성벽은 굳건, 다카기는 벤치에 앉아 여유로운 표정으로 경기를 관람했다.
‘귀찮은 놈이 걸렸군.’
1아웃 주자 1루에서 토론토의 선발 배리 스톨먼은 긴장감을 바짝 끌어올렸다.
타석에 선 데이브 셰퍼드는 통산 토론토 전에서 타율 0.326, 14홈런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스톨먼에게 7타수 5안타, 홈런 3방을 때려낸 천적, 토론토 배터리는 신중한 승부를 택했다.
딱 ~ !!
“파울입니다.”
“셰퍼드가 작년 시즌 O-swing(볼에 스윙)비율이 21% 밖에 안 됐거든요. 그런데 올 시즌은 33%까지 상승했습니다. 선구안이 그만큼 흐트러졌다는 뜻이죠.”
“그런데 지금은 건드려 볼만 했습니다. 스톨먼에게 강점이 있으니 조금 더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것으로 보이네요.”
다음 공도 바깥 쪽, 초구와 달리 셰퍼드는 인내심을 지켰다.
지난 2014시즌, 셰퍼드는 44홈런에 볼넷을 124개나 골라냈다. 고의사구가 21개나 섞여 있었지만 그렇다고 쳐도 선구안이 좋은 선수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나이가 들어 예전 같진 않지만 올 시즌도 볼넷 72개를 얻어내고 있다.
다카기처럼 적극적인 타격을 하는 것도 좋지만 셰퍼드는 히팅 존이 확실한 유형, 나만의 색깔에 덧칠을 하는 짓은 그만뒀다.
따아악 ~ !!
“잡아당긴 타구!! 좌측 높게!! 담장을 넘어갑니다!! 데이브 셰퍼드의 시즌 22호 홈런!! 보스턴에 선취점을 안깁니다!!”
“역시 이게 셰퍼드의 본 모습이죠. 오랜만에 시원한 타구를 보여줍니다.”
먼저 홈을 밟은 폴 돈론은 셰퍼드의 헬멧에 스매싱을 날렸다.
그래도 기분은 최고, 간만에 한 건한 베타랑은 이 정도 장난은 가볍게 넘어가줬다.
“아직 부족한 거 알지?”
하지만 다카기는 셰퍼드에게 축하 인사 따윈 건네지 않았다.
보스턴이 20홈런 언저리나 치라고 2천만 달러를 안겨줬겠나. 단기 계약이지만 보스턴이 원한 건 30홈런 이상, 3 ~ 4년 이상의 장기계약을 노리는 셰퍼드는 건방진 루키의 참견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속타자 실 쿠퍼까지 홈런 대열에 가세하면서 스코어는 3대 0, 하지만 메이저리그 최고의 거포 군단 토론토가 화력쇼에 가세하면서 전장은 불바다가 됐다.
‘역시 안 되나.’
4회 말, 브라이스 감독은 마운드로 향했다.
최근 10경기에서 평균 8.8점을 내고 있는 토론토, 클레이튼이 잘못한 게 아니라 요즘 어지간한 투수들은 토론토 타선 앞에서 전혀 힘을 못 쓰고 있다.
데뷔 시즌을 치르고 있는 루키가 버티기엔 너무 버거운 상대, 하지만 클레이튼은 교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조금 흔들린다 싶으면 빼버리는 감독, 브라이스 감독은 루키의 입장을 나름 배려한 거지만 승부욕이 강한 클레이튼은 모자를 푹 눌러쓰며 더그아웃에 발을 들였다.
4이닝도 못 버티고 4실점, 거기다 승계주자는 무려 2명, 머릿속에서 무엇을 상상했던 그 불안은 현실이 됐다.
따악 ~ !!
“아 ··· 이번에도 좌중간에 떨어집니다. 2루 주자는 홈으로, 3루 주자까지 홈으로 들어오는 군요. 스코어 6대 6, 토론토가 경기의 균형을 맞춥니까.”
“글쎄요. 지금 사인이 어긋난 것 같은데, 두 선수가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방금 전 상황은 이랬다.
중견수 디즌스는 내가 잡겠다고 콜을 했지만, 우익수 후안 위긴스도 콜을 하면서 뭔가 상황이 애매해졌다.
디즌스는 위긴스가 잡는 줄 알고 추격을 포기, 그런데 위긴스가 타구를 멀뚱히 바라보면서 타구는 둘 사이에 떨어졌다.
“네가 잡는다고 했잖아?”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냐?”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고 내부분열이나 일으키고 있는 얼라들, 브라이스 감독은 사람이 좋아서 이런 때 버럭 할 수 있는 카리스마가 부족하다.
결국 오늘도 총대를 짊어진 건 베테랑 프론스키, 이닝이 끝나자 거한 잔소리가 쏟아졌다.
“거기에 네가 왜 끼어들어?!!”
프론스키는 위긴스를 질책했다.
보기에 따라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굳이 따지자면 중견수가 처리해야 했던 영역, 실제로 먼저 콜을 한 건 디즌스였다.
이런 경우는 우익수가 알아서 빠져주는 게 당연, 뭣보다 위긴스는 평소 수비 범위가 넓은 편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마가 끼었는지 중견수의 영역까지 침범, 하지만 위긴스는 왜 나만 뭐라고 그러냐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작년엔 나름 잘 뭉쳤는데 올해는 다시 모래알로 돌아간 분위기, 다카기는 또 뭐라고 하려는 프론스키를 말렸다.
“내버려 둬, 지금 저 자식한텐 무슨 말을 해도 안 통해”
씩씩 거리는 놈한테 잔소리해 봤자 먹혀들겠나.
뭣보다 위긴스는 디즌스의 등장으로 입지가 많이 위축됐다. 작년 포스트 시즌에서 7홈런을 때리고, 자신의 실력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얻은 것 같은데 그게 오히려 독이 된 느낌, 주위에서 뭐라고 해도 듣지 않으려는 태도가 더 문제다.
단장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지금까지의 행동만 보면 길게 가긴 어려운 동료, 말이 안 통하는 사람에게 설득이 무슨 소용인가.
그제야 프론스키도 잔소리를 그만뒀다.
‘올해는 힘들 것 같다.’
이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다카기는 꾹 억눌렀다.
팀 내 에이스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게 뭘 의미하겠나, 어렵다는 걸 알아도 할 수 있다는 거짓말을 해야 하는 숙명, 자주 겪었던 일이라 그러려니 받아들였다.
“올해는 힘들 것 같다.”
그런데 이때, 프론스키의 입에서 참았던 말이 터져 나왔다. 팀 사기를 떨어트릴 수도 있는 발언, 다카기는 바로 문제를 제기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거 아냐?”
프론스키는 아차 했는지 입을 꾹 다물었지만, 내심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냐며 묻고 싶었다.
“아빠 되더니 조금은 어른스러워졌는데?”
“너보다는 훨씬 어른스러웠어. 예전부터 말이지”
무슨 말을 해도 건방지게 받아치는 녀석, 프론스키는 그런 다카기가 싫지 않았다. 어쨌든 지금은 이 위기 상황을 넘기는 게 중요, 그렇게 경기는 흘러 7회 초, 다카기는 위긴스의 자리에 대타로 들어섰다.
후반기 들어 살아나나 싶더니 다시 수직하락하고 있는 위긴스의 성적, 오늘 수비에서 보여준 아쉬운 모습도 있고, 브라이스 감독은 문제가 있는 선수는 정면에서 다그치는 성격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문제아의 행동을 질책했다.
‘감독관? 오라고 해, 안 무서워’
피트 오어 해설위원 앞에서 약한 척 연기를 했지만, 다카기는 약물 검사 따윈 두렵지 않았다.
어차피 의심 받을 성적이라면 더 날 뛰어 눈에 띄는 게 낫겠지, 초구부터 눈을 부라렸다.
따아악 ~ !!
“밀어 낸 타구가!! 외야로!! 멀리 날아가 2층 덱에 떨어집니다!! 다카기 하루요시의 시즌 10호 홈런!! 월터 클라센 이후 무려 57년 만에 10승, 10홈런을 동시에 달성합니다!! 스코어 9대 9!! 보스턴이 다시 경기를 원점으로 돌려놓습니다!!”
“브라이스 감독이 맞는 말 했네요. 저도 앞으로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수를 지목하라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동점 홈런을 날린 다카기는 관중석을 향해 팔을 높게 들어 올리는 세리머니를 날렸다.
경기가 뒤집혔다고 이긴 것처럼 좋아하던 홈 팬들,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린 거 아니냐며 항의의 뜻을 표했다.
동점 홈런으로 승기를 잡은 보스턴은 9회 초, 데이브 셰퍼드의 시즌 23호 홈런(투런)으로 스코어를 11대 9로 벌렸고, 스캇 포데스와가 시즌 33번째 세이브를 올리면서 시리즈 첫 경기는 보스턴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날 경기의 주인공은 5타수 4안타(2홈런), 5타점을 기록한 데이브 셰퍼드였지만 기자들은 다카기의 기록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무려 57년 만의 10승, 10홈런 달성자, 여기저기서 축하가 날아들었지만 다카기는 아직 멀었다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기왕 여기까지 온 거 20홈런까지 가겠습니다.”
시즌 종료까지 남은 게임은 겨우 24경기, 본업이 투수인 선수가 이 짧은 시간에 10홈런을 채울 수 있을까.
타자만 해도 어려운 일, 하지만 다카기는 10홈런 치고 의심 받느니 20홈런 치고 의심받는 게 낫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남은 경기는 모두 야수로 뛰겠다는 뜻입니까?”
이때, 한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
다카기는 올 시즌 규정이닝을 이미 채웠다(179이닝).
이대로 투구를 마친다면 이닝이 다소 아쉽지만 평균자책점(2.20)이나 탈삼진(232개), 조정평균자책점(275)을 고려하면 만테냐 어워드 수상은 거의 확실, 정말 20홈런까지 달성해버리면 리그 MVP 수상도 가능하다.
물론 그러기는 쉽지 않은 게 현실, 투수에 집중해 역사에 남을 시즌을 만드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다카기는 해보겠다며 20홈런 도전을 선언했다.
[말도 안 돼. 아무리 최근 페이스가 좋다고 해도 절대 무리야]
-> 최근 11타석에서 4홈런이다. 진짜 달성할지 누가 알아?
-> 그걸 진짜 믿는 녀석이 있네. 많이 쳐줘봤자 12 ~ 14개 사이에서 끝나, 20홈런은 말도 안 돼.
[그런데 왠지 진짜 할 것 같다. 오늘도 밀어 쳐서 넘겼잖아, 제대로 맞기만 하면 넘어갈 듯]
-> 그냥 관심 끌려고 저런 말 하는 거야. 본인도 어렵다는 거 알고 있을 걸?
-> 네가 뭔데 다카기 속마음을 두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냐?
인터뷰는 미국뿐만 아니라 일본 열도를 뒤흔들었다.
일단 미국 현지 분위기는 보스턴 여론을 제외하면 절대 불가능하다는 입장, 아시아에서 넘어온 유망주에게 메이저리그가 폭격당하고 있으니, 보수 팬들 입장에선 딱히 기분 좋은 흐름은 아니다.
메이저리그의 쓴 맛을 보여줘야 하는데 어쩌다 저 새파란 놈에게 이런 말을 듣는 지경이 된 건가.
정말 메이저리그의 수준이 떨어진 건가, 다카기가 앞으로 홈런 3 ~ 4개만 더 추가해도 그건 메이저리그의 체면이 떨어지는 일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그에 비해 일본 여론은 긍정적인 분위기, 다른 나라의 야구팬들도 슈퍼 루키의 행보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다카기는 예전보다 더 많은 인기를 누리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