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160화 (160/361)

160화. 간헐적 폭식 - (3)

“저 오늘 리드오프로 나서는 거죠?”

경기를 앞두고 다카기는 브라이스 감독에게 리드오프 출전을 요구했다.

주자들이 빠릿빠릿해야 안타를 날릴 맛이 나는데 요즘 뛰는 걸 보면 속이 터질 지경, 나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선수가 없다면 1번으로 넣어달라고 요구했다.

“그럼 담장을 넘기면 될 거 아닌가?”

브라이스 감독은 재치 있는 답으로 응수했다.

오늘 다카기는 5번으로 출장할 예정, 앞선 타자들은 주력은 몰라도 출루라면 일가견이 있다.

일단 폴 돈론은 올 시즌 출루율 부문 아메리칸 리그 공동 10위에 이름을 올린 선수, 리드오프 치고 발이 빠른 건 아니지만 출루율만 보면 이 보다 좋은 리드오프는 없다.

2번 후안 위긴스는 디즌스의 콜 업에 자극을 받았는지 전반기에 3할도 안 됐던 출루율을 0.313으로 끌어올렸다.

후반기 출루율만 따지면 0.337, 이 정도면 메이저리그 평균은 된다. 여기에 데이브 셰퍼드, 맥 리스 모두 볼넷이 많은 유형, 쓸어담을 빗자루만 있다면 아쉬울 게 없다.

선행주자들이 발이 느린 게 불만이면 담장을 넘기면 그만, 뭐가 불만이냐는 지적에 다키기는 협박으로 응수했다.

“저 초구 좋아하고 땅볼 많은 거 아시잖아요. 병살 나와도 괜찮다면 받아들일 게요.”

“으음”

듣고 보니 일리 있는지 브라이스 감독은 고심을 거듭했다.

다카기는 드라이브 타구 비율이 높은 편이지만 그에 못지 않게 땅볼도 많다. 중심타선보다 1-2번에 세우는 게 좋은 유형, 그래도 최근 타격감이 좋은 편이라 주자들을 쓸어담는 빗자루 역할을 해주길 바랐다.

그런데 대놓고 초구부터 친다니 약간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 고민 끝에 2번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 원정 팀 보스턴의 공격으로 경기가 시작됩니다. 선두타자는 폴 돈론, 어제 활약으로 보스턴의 유일한 3할 타자가 됐습니다.”

“수비는 여전히 아쉽지만 공격은 서서히 눈을 뜨고 있죠. 좌타자임에도 좌투 상대 성적이 타율 0.285 출루율도 0.357이나 됩니다.”

돈론은 앤드류 하버를 상대로 볼넷을 얻어냈다.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슬라이더를 두개나 던졌지만 반응이 없는 배트, 선구안 뿐만 아니라 90%가 넘는 컨택률이 뒤를 받쳐주고 있다.

홈런은 많지 않지만(9개) 올 시즌 2루타를 26개나 기록할 정도로 갭 파워가 좋은 편, 투수 입장에선 꽤나 껄끄러웠다.

‘이 자식을 어찌한다.’

볼티모어 배터리의 고민은 다카기 쪽으로 옮겨갔다.

돈론은 도루를 거의 하지 않으니 루상에 있을 땐 무시해도 괞찮다.

문제는 타자, 다카기는 긴 팔을 이용해 바깥쪽 공도 곧잘 걷어낸다. 땅볼이 많이 나오는 이유가 이거지만 배트에 걸리면 위험, 확실하게 도망쳐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먼 곳에 미끼를 던지다 당하는 경우도 제법 많다.

그럼 몸 쪽으로 붙여야 하나. 도루를 내줄 위험도 적겠다. 볼티모어 배터리는 모험을 택했다.

따아악!!

“높이 가는 타구!! 좌익수는 그저 바라 볼 뿐입니다!! 다카기 하루요시의 시즌 8호 홈런!! 팀에 2점의 리드를 안겨줍니다!!”

“지금은 몸쪽으로 붙이려고 한 것 같은데 가운데로 몰렸죠. 이래서 투수들이 몸쪽 승부를 두려워하는 법니다.”

모험이 최악의 결과로 바뀌는 순간, 안드류 하버가 실투를 씁쓸한 미소로 달래는 동안, 다카기는 홈에서 폴 돈론과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이제 10홈런 고지는 눈 앞, 남은 경기에서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다카기는 끝까지 가보자는 의지를 눈빛으로 드러냈다.

‘아니 ··· 이게 말이 돼?’

다카기는 3회 초, 2번 째 타석에서도 투런 홈런(시즌 9호)을 쏘아 올렸다.

돈론이 볼넷으로 나가고 다카기가 불러들이는 패턴, 얼핏 보면 1회의 반복이지만 두 번째 타석에선 밀어 쳐서 홈런을 만들어 냈다.

도망치는 볼을 따라가서 두들겨 패다니, 볼티모어의 감독 존 해리스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볼티모어의 홈 구장 코팰리스 파크는 타자들에게 유리하다.

단, 우중간에 일자형 펜스가 늘어서 있는데 이게 워낙 높다보니 좌타자가 홈런을 노리기엔 적합하지 않다.

홈 플레이트에서 우측 펜스까지 최단 거리는 335피트 정도지만 우중간이 380피트나 되는 크리스탈 팰리스(필라델피아 홈) 구장과 파크 팩터는 거의 비슷한 수준, 이런 구장에서 우타자, 그것도 본업이 투수인 선수가 밀어 쳐서 우측 담장을 넘겼다.

전문적으로 타격을 하는 선수들도 하기 어려운 짓을 해냈으니 그저 기가 막힐 뿐, 그래도 볼티모어 배터리는 3번 째 대결에서도 바깥 쪽 승부를 택했다.

“다시 벗어납니다. 음 ··· 승부를 할 생각이 없는 건가요?”

“글쎄요. 표본은 적지만 올 시즌 다카기 선수의 타구는 48%가 센터에서 우측 방향에 밀집 됐습니다. 어떤 코스든 적극적으로 치는 스타일이라 유인구로 땅볼을 유도할 생각인 것 같은데, 이 선수도 이제 2년 차에 접어들었으니 이 정도는 눈치 챘겠죠.”

해설위원의 예상대로 다카기는 3번 째 타석에서 볼 카운트를 유리하게 끌고 갔다.

몸 쪽은 적극적으로 공략하고 바깥 쪽 공은 철저히 골라 치면서 상승세를 타고 있는 중, 투구뿐만 아니라 타석에서도 비약적인 성장세를 보여줬으니 팬들의 기대치가 높아지는 건 당연, 다카기 본인도 이 정도라면 내년 시즌에도 10홈런은 도전해 볼만하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카운트가 불리해지자 볼티모어 배터리는 승부를 회피, 다카기가 3번 째 타석에서 볼넷을 얻어내자 브라이스 감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체가 뭔지 모르겠어.’

전반기에 3홈런에 그쳤던 선수가 후반기에 6홈런이라니, 작년에도 타격에서 나름 잘해줬지만 올 시즌은 후반기에 뭔가 눈을 뜬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정말 월터 클라센이 기록한 단일 시즌 20승, 20홈런도 가능하지 않을까. 경기가 끝난 후, 기자들의 질문에 솔직한 소감을 표했다.

“오늘 다카기 선수의 활약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메이저리그 역사를 논할 때, 가장 뛰어난 투수나 타자를 논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가장 뛰어난 야구선수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저는 감히 다카기 선수를 지목하겠습니다.”

투 - 타 - 수비, 다카기가 지금까지 보여준 플레이는 MLB에서도 정상급 수준이다. 이 정도면 최고의 야구선수라고 불러도 누가 감히 토를 달지 않겠지, 기자들도 동의했는지 그러려니 하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 활약에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 한 기자가 다카기에게 다소 민감한 질문을 내놨다.

[동양인이 어떻게 이런 활약을 해?]

[말도 안 돼,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있을 거야]

그 숨기고 있는 게 뭘 의미하겠나, 다카기는 그러려니 하는 반응을 보였다.

“뭐 ··· 이해합니다. 제가 아직 보여준 게 별로 없으니까요.”

50홈런도 아니고 겨우 9홈런으로 어떻게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겠나.

이것도 다 내가 투수가 본업인 게 원인, 지금까지 일본인 투수들은 메이저리그에서 제법 괜찮은 활약을 보여줬다.

하지만 야수로 방향을 돌리면 얘기가 다르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야수들이 메이저리그의 꿈을 안고 도전을 택했는가. 하지만 실패한 경우가 99%, 성공했다는 선수도 어찌어찌 주전자리를 지켜냈을 뿐, 눈에 띄는 활약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투수라는 놈이 벌써 9홈런이라니, 일본에서 30 ~ 40홈런을 때려낸 선수도 메이저리그에서 풀 시즌을 치르면 장타력이 폭락하는 게 현실이다.

한 시즌에 20홈런을 넘긴 선수도 역대 2명 뿐, 선천적으로 힘과 유연성이 떨어지는 동양인이 그런 활약을 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이 일부 팬들의 눈을 흐리게 하고 있다.

그걸 깨는 건 다카기의 몫, 별로 그들을 질책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하면 그런 타격을 할 수 있는 겁니까?”

이때 한 기자가 의미 있는 질문을 던졌다.

밀어치기는 타자에게 분명 필요한 기술이지만, 주무기가 될 순 없다.

올 시즌 메이저리그의 평균 구속은 92.4마일, 이 무대에서 밀어치기를 한다는 건 땅볼이나 만들겠다는 짓이다.

하지만 다카기는 그 반대, 전문가들도 이를 두고 왈가왈부하고 있으니 당사자에게 직접 해답을 구했다.

“저는 상황에 맞는 타격을 하는 것뿐입니다.”

메이저리그라도 투수들이 던지는 유인구나 결정구는 거의 바깥쪽에 집중된다. 아무리 당겨 치는 타격이 생산력이 좋아도 밀어 치는 기술은 있어야 하는 법, 통계를 봐도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시즌 전체 안타의 20% 이상은 밀어 쳐서 만들어 낸다.

어쨌든 중요한건 공을 강하게 쳐야 생산력이 높아진다는 것, 밀어 쳐서 강한 타구를 만들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게 맞다.

답이 없는 타격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사람들이 이상한 것 뿐, 다카기도 다른 타자들처럼 풀 히팅을 추구한다.

밀어치기는 어디까지나 이를 보조하는 기술일 뿐, 다카기는 밀어치기가  만능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난 시대를 역행하는 타자가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저도 강하게 칠 수 있는 방법을 늘 연구하고 고민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해왔고, 앞으로도 그래야겠죠. 그것뿐입니다. 특별한 비결은 없습니다.”

이후 전문가들은 다카기를 두고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이 넓은 세상에 기이한 일은 한 두 가지 일어나는 법, 우연이니 뭐니 따져봤자 무슨 의미인가.

그냥 지켜보면 될 일, 다카기가 이런 스타일로 앞으로도 메이저리그를 호령한다면 그 방식도 인정해줘야 했다.

* * *

볼티모어와의 원정 3연전을 마친 보스턴은 토론토로 이동했다.

토론토는 올 시즌 231홈런을 때려내고 있는 대포 군단, 올 시즌 유독 피홈런이 많은 보스턴 입장에선 좋지 않은 상대다.

볼티모어와의 3연전 마지막 경기에서 시즌 13승을 거둔 다카기는 이번 시리즈에서는 마운드에 오르지 않을 예정, 홈경기를 대비해 먼저 보스턴으로 이동해도 상관없지만 선수단과 동행했다.

“오늘도 방망이 잡는 건가?”

훈련을 앞두고 다카기는 보스턴 지역방송 해설위원 피트 오어와 얼굴을 마주했다.

다카기의 활약은 보스턴 팬들이 눈과 귀를 열어둔 관심사, 해설위원들도 이번 원정게임에 동행해 그 활약을 눈으로 보고 팬들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홈런 많이 치면 눈치 주잖아요.”

“누가 눈치를 준다고 그러나?”

“저 어제도 도핑 테스트 받았어요.”

메이저리그는 2년 전 노사협약을 거쳐 한 해에 실시할 수 있는 도핑검사를 11600회(오프 시즌포함)로 늘렸다.

검사를 받는 선수는 각 팀에서 무작위로 선정, 혈액검사가 두 배 이상 늘어나면서 모든 선수들이 시즌 중 적어도 한 번 이상은 혈액검사를 받게 됐다.

몇 년 사이 놀라울 정도로 강화된 규정, 그렇다 쳐도 다카기는 지난 2달 동안 약물검사를 3번이나 받았다. 사무국은 표적수사가 아니라는 입장을 내놨지만, 수더랜드 단장은 격한 불만을 표출했다.

“다카기는 올 시즌 약물 검사를 4번이나 받았다. 일단은 지켜보겠지만 계속 이런 식이라면 도핑테스트에 협조하지 않겠다.”

검사관은 통보 없이 클럽하우스에 들이닥치는 법, 그래도 구단 관계자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검사를 할 수가 없다.

실제로 이런 식으로 검사를 피했다가 며칠 후 다른 곳에서 검사를 받는 선수들도 있었는데, 지금은 어림도 없는 소리다.

검사관의 출입을 거부하거나 고의적으로 지연시키면 구단에 벌금을 물리고 검사를 거부한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최대 10경기의 출장정지 처분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수더랜드 단장이 그 법률에 반기를 든 것, 하지만 보스턴 팬들도 다카기에게 너무 엄격한 거 아니냐며 눈에 쌍심지를 키는 건 마찬가지다.

한 번만 더 불쑥 찾아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분위기, 사무국도 한 시즌에 4번은 조금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수더랜드 단장의 불만에 이렇다 할 입장 표명은 하지 않았다.

‘나는 검사라도 받았으면 좋겠다 인마’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기 마련, 데이브 셰퍼드는 다카기 옆에서 불만을 중얼거렸다.

최근 페이스가 좀 올라왔지만 9년 연속 30홈런을 달성하기엔 턱 없이 부족하다.

한창 잘 나갈 땐 수시로 찾아오는 검사관들이 눈에 곱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리울 정도, 그 마음을 아는지 피트 오어 위원은 셰퍼드에게도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잘 해 보게. 우리가 언제나 응원하고 있어.”

“늘 욕하는 거 다 듣고 있습니다.”

찔리는 게 있는지 피트 오어는 서둘러 퇴장, 자극을 받은 셰퍼드는 마지막 프리 배팅에서 좌측 담장을 넘기는 대형 홈런으로 타격감을 조율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