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간헐적 폭식 - (2)
길었던 2021시즌도 슬슬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작년 시즌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보스턴은 여전히 AL 동부지구 2위에 머물고 있는 현실, 시즌 종료는 한 달 앞으로 다가 왔는데 1위 토론토와의 격차는 7경기로 벌어졌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아웃사이더의 반란, 토론토는 지난 2015시즌 통산 6번 째 지구 우승을 마지막으로 5년 연속 AL 동부지구 3위 자리에 머물렀다.
하지만 올해 유망주들이 대거 폭발하면서 전통의 강호들을 모두 밀어내고 있는 상황, 1위 탈환을 포기할 단계는 아니지만 보스턴 구단 수뇌부는 와일드카드를 노리는 게 현실적이라고 판단했다.
[다카기, 올해는 만테냐 어워드 수상하나?]
시즌 종료가 다가오면서 개인 수상도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카기는 지금까지 25경기를 소화하며 12승 3패, 평균자책점 2.19, 164이닝 동안 삼진 217개를 잡아냈다.
야수로 출전한 경기가 제법 있으니 컨디션 조절 차원에서 몇 경기 등판을 걸렀지만 그래도 뛰어난 성적, 앞으로 남은 경기에서 투구에만 집중하면 15승 - 200이닝 - 250탈삼진 달성도 가능하다.
타격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지금은 투구에 집중하는 게 현명, 하지만 일각에선 10홈런을 채울 때까지는 타격을 놓아선 안 된다는 주장도 제기 됐다.
월터 클라센 이후 없었던 10승 - 10홈런 선수, 얼마 전 시즌 7호 홈런을 날렸는데 여기서 포기하긴 조금 아깝지 않은가. 특히 야구는 숫자에 연연하는 종목, 보스턴 팬들은 그까짓 15승 - 200이닝 - 250탈삼진 - 10홈런 다 해버리라며 다카기의 등을 떠밀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투구에 집중해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월터 클라센은 다카기가 투구에 집중하기만을 바랐다.
다카기는 근래 등장한 야구 선수 중 가장 완벽에 가까운 재능을 지녔다. 이런 선수가 투타를 병행한다는 건 본인은 물론 팬들에게도 불행한 일, 지금은 젊으니 문제가 없지만 계속 투타를 병행하다보면 언젠간 문제가 될 거라는 우려를 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월터 클라센은 투타병행을 5년 넘게 하다 부상으로 커리어를 아쉽게 마무리한 전설, 다카기가 자신과 같은 전철을 밟길 원치 않는다며 애정 어린 관심을 표했다.
[투구에만 집중하면 역대 급 시즌이 될 거다]
전문가들도 투구에 전념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까지 다카기가 마운드에서 기록한 bWAR는 8.4, fWAR는 6.5, NL에서 7년 동안 98승, 평균자책점 2.84를 기록한 애틀랜타의 에이스 게리 를로이드의 커리어 하이 시즌과 비교하면 이게 얼마나 충격적인 지표인지 가늠할 수 있다.
■ 개리 를로이드(2018시즌)
= 33경기, 22승 4패, 평균자책점 2.34, 223이닝, 248삼진
= bWAR : 8.1 fWAR : 6.2
■ 다카기 하루요시(2021시즌)
= 25경기, 12승 3패, 평균자책점 2.19, 164이닝, 217삼진
= bWAR : 8.4, fWAR : 6.5
시즌 종료를 한 달이나 앞두고 있는데, 모든 지표에서 개리 를로이드의 커리어 하이 시즌과 비슷한 수준, 심지어 9이닝 당 탈삼진 비율은 무려 12에 근접한다.
지금 당장 투구를 그만 둬도 만테냐 어워드 수상이 가능한 수준, 규정 이닝은 이미 채웠고, 뭣보다 평균자책점 경쟁에서 범접 불가능한 1위를 기록하고 있다.
AL 평균자책점 2위는 뉴욕의 패트릭 브린, 브린의 올 시즌 평균 자책점은 3.14로 괜찮은 편이지만 1위와의 격차는 1가까이나 된다.
올 시즌 아메리칸 리그 선발 투수의 평균 자책점은 4.54이라는 걸 생각하면 다카기의 활약은 경악 그 자체, 하지만 화제의 주인공은 방망이를 놓지 않을 거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200이닝, 250탈삼진, 15승, 10홈런, 모두 놓치지 않을 겁니다.”
그냥 다 해버리겠다는 선포, 보스턴 지역 여론도 그렇게 하라며 등을 떠밀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얼른 10홈런을 달성할 수 있도록 타석기회를 좀 더 주는 게 좋지 않을까.
수더랜드 단장은 브라이스 감독과 논의를 거쳐 9월 3일부터 시작되는 볼티모어와의 원정 3연전에서 다카기를 지명타자로 기용하기로 했다.
“오빠 다녀올게”
“응”
그렇게 잡힌 출장길, 다카기는 볼티모어로 떠나기 전 동생에게 무거운 책임을 맡겼다.
“오빠 없는 동안 언니 괴롭히지 마. 애기 언제 태어나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우웅 ··· ”
누가 들어도 마지못해 하는 답, 그래도 잔소리를 덧붙이진 않았다.
조카, 아니 녀석 입장에선 동생이 태어나는 기분이겠지. 그동안 집안 막내로 귀여움을 독차지했는데 그 입지가 위태로워졌으니 괜히 심술이 나서 그랬던 게 아닐까.
뭣보다 임신한 아내를 저금통에 비유하며 놀린 건 다카기 본인 아닌가. 동생은 그 틈을 타 불만을 표출한 것 뿐, 그런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이 녀석을 혼낼까.
나는 여전히 널 아낀다는 애정을 표했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 주세요.”
“그래, 다녀오게”
임신 9개월에 접어든 아내를 두고 원정 9연전을 떠나야 하다니,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다카기는 먼 길을 날아온 장모님을 믿고 원정길에 올랐다.
매번 겪는 일인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서운한 건지, 키리코는 약혼남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힘겹게 집안으로 들어섰다.
“아야!!”
“왜 그러니?”
엄마의 근심어린 눈빛에 키리코는 괜찮다는 손짓을 보냈다.
요즘 점점 격렬해지는 태동,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제 아기는 배가 아플 정도로 발길질을 하고 있다.
조만간 나가겠다는 신호가 아닐지, 엄마가 곁에 있지만 출산을 앞둔 키리코는 다소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나오나? 오늘 나오면 어쩌지? 오빠도 없는데’
분위기가 조금 무거워지자 코하루는 당황했다.
애기가 태어나도 안 예뻐해 줄 거라고 굳게 다짐했는데 막상 나온다니 패닉 상태, 역시 믿을 건 오빠뿐이었다. 이제는 휴대폰도 척척 다룰 나이, 얼른 집으로 오라며 난리를 쳤다.
‘이게 무슨 일이야.’
집에서 출발한지 세 시간도 안 됐는데 이게 무슨 상황인지, 그런데 놀랍게도 코하루가 전화를 하자마자 진통이 시작됐다.
볼티모어 공항에 도착한 다카기는 바로 보스턴으로 유턴, 비행기로 1시간 30분 거린데 오늘 따라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지는 건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동생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오빠!! 언니 너무 아파하는데 어떻게 해?!!]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오빠 지금 다 왔어.”
이런 때를 대비해 보험까지 들어놓지 않았나.
산모는 이미 보험회사 직원들이 안전하게 예약해둔 병원으로 이송, 대비는 철저히 해뒀지만 다카기는 한껏 긴장한 얼굴로 병원에 발을 들였다.
무안하게도 이미 종료된 상황, 출산할 때 곁을 지켜주고 싶었는데 어쨌든 긴장된 얼굴로 핏덩이를 품에 안았다.
“Congrats, you have a son(축하해요. 아들이네요)”
간호사가 축하 인사를 건넸지만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 꿈틀거리는 생명이 내 자식이라니, 아직도 실감이 되질 않았다.
“오빠야, 나도 보여줘”
“그래”
코하루도 애기에게 슬쩍 얼굴을 비췄다.
쭈글쭈글한 주름에 못생긴 얼굴, 이게 정말 내 동생인가. 좀 당황했지만 손발이 다 있는지 꼭 확인하라는 할아버지의 지령을 잊지 않았다.
“후우 ~ 다 있네.”
없으면 어떻게 하나 불안했는데 다행히 갖출 건 다 갖춘 아기, 긴장이 풀렸는지 코하루는 아기 얼굴을 좀 더 유심히 살펴봤다.
“어 ··· 없어!!”
“뭐가? 뭐가 없다는 건데?”
“머리털이 없어!! 왜 없지?!!”
장난이 아니라 진심으로 당황한 얼굴, 동생의 비명 덕분에 초보 아빠를 옥죄던 긴장감은 느슨해진 줄처럼 풀려버렸다.
“걱정하지 마. 조금씩 날 거야.”
“저 ··· 정말?”
“그래, 너무 걱정하지 마.”
오빠가 한 말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신경 쓰이는 게 사실, 코하루는 인큐베이터 안에 들어간 아기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내가 할아버지한테 이른다고 해서 그런 건가.’
손발 없으면 할아버지한테 이른다고 협박을 했는데 손발을 만드느라 미처 머리카락은 못 만든 게 아닐까. 괜히 아기에게 죄 지은 기분,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할아버지에게 보고를 올렸다.
“허허 ~ 괜찮다. 그거 너 때문에 그런 거 아니다.”
“정말이요?”
“그래, 우리 코하루 그동안 고생 많았다. 일본에 오면 할아버지가 선물 하나 해주마.”
고영길은 손녀의 걱정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신생아를 처음 봤으니 당황할 만도 하겠지, 뭣보다 머리카락이 없다고 훌쩍거리는 손녀가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무사하게 태어나 준 증손자도 대견, 손녀가 보내준 사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 *
[다카기 하루요시, 3일 동안 출산 휴가]
[대기록 달성에 영향은 없나?]
출산이라는 변수가 개입하면서 여론은 대기록 달성을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메이저리그는 최대 3일 동안 육아휴직을 쓸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최대치일 뿐, 대기록을 앞둔 선수가 출산 휴가 3일을 꽉 채워야만 했을까. 여론이 뭐라고 하든 말든 다카기는 3일 동안 가족 곁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눈 떴다.”
“정말?”
아이의 사소한 행동에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 이제 막 아빠가 된 다카기는 담요 속에서 꿈틀거리는 아들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아기의 이름은 다카기 타다요시(忠吉), 요시(吉)를 돌림자로 쓰는 집안이라 일단 그렇게 정했지만, 미국에서 태어난 아기라 훗날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본인이 미국 국적을 원한다면 그 뜻을 존중해야겠지, 먼 훗날의 일이라 지금은 신경 쓰지 않았다.
“자기야, 계속 여기 있어도 돼?”
“뭐가?”
“기록 세워야지. 여기 계속 있으면 손해잖아.”
약혼녀의 참견에 다카기는 얼굴을 구겼다.
아빠가 내 아들 곁에 있겠다는데 왜 이렇게 말이 많은 건지, 뭣보다 가지 말라고 붙잡아야 할 약혼녀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조금 씁쓸했다.
“내가 여기 있는 게 그렇게 불편해?”
“대기록 세워야 옵트 아웃 실행할 때 유리할 거 아냐.”
“하아 ~ 그래, 돈 벌어 오라 이거지?”
학창 시절 때만해도 내 옆에 찰싹 붙어 다녔던 여자가 이런 소리를 하다니, 아들 태어났다고 이제 난 2순위로 밀려난 건가.
하지만 키리코는 장난이었다며 혀를 비쭉 내밀었다.
“자기도 얼마 전에 나 저금통이라고 놀렸잖아.”
“장난이었다니까. 그 정도도 못 받아줄 만큼 속이 좁은 줄은 몰랐네.”
예나 지금이나 사소한 부부싸움은 여전, 이때 코하루가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오빠, 남자는 돈을 벌어야 돼. 그러니까 얼른 가”
“너 그런 말 어디서 배웠어?”
“아빠한테”
평소 일 때문에 집을 비우는 날이 많은 아빠, 코하루는 그런 아빠가 불만이었지만 남자는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설득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도 이젠 어엿한 아빠, 얼른 가서 아빠 노릇하라며 등을 떠밀었다.
‘그래, 이제 볼일 다 봤다 이거지?’
얼른 오라며 찾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가라니, 조금 서운했지만 다카기는 휴가 2일차에 팀에 복귀했다.
3일 꽉 채운다고 했던 사람이 이렇게 빨리 복귀할 줄이야, 팀 관계자들과 팬들은 환대를 보냈지만 초보아빠는 심드렁한 얼굴로 출전을 준비했다.
‘그래, 난 거리로 나온 황태자일 뿐이지.’
한때 스기토모 그룹의 유력한 후계자로 불렸지만, 이제 그 지위는 갓 태어난 아들에게 넘어갔다.
그런 내가 집안에서 무슨 대접을 받길 바라겠는가.
내가 환호를 받을 곳은 그라운드 뿐, 서운한 감정을 마음껏 뿜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