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간헐적 폭식 - (1)
‘나도 이제 자리를 잡는구나.’
어느덧 8월에 접어든 시즌, 두 달 전 메이저리그 콜업을 받은 채근성은 순조롭게 입지를 굳혀갔다.
첫 15경기에서 타율 0.249, 1홈런 3타점에 그쳤지만 최근 7경기에서 거둔 성적은 0.285, 홈런 3개 5타점, 감독의 신뢰를 얻으면서 출장기회는 점차 늘고 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유턴 행 소문이 돌았지만 이젠 엄연한 메이저리거, 이제는 로스터에 드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을 바라보게 됐다.
‘뭐야, 이 자식은 또 쳤어?’
이 와중에도 다카기에 관한 기사는 꾸준히 챙겨봤다.
야구 좀 한다고 잘난 척 하더니 6월 들어 페이스가 조금씩 떨어진 녀석, 그런데 8월 들어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다카기는 최근 8번 선발 등판 경기에서 2승 2패에 그치고 있지만, 타격 페이스만큼은 가파른 상승세를 탔다.
시즌 성적은 타율 0.303, 홈런 6개, 전반기 홈런이 3개(19경기)에 불과했는데 후반기 들어 3개(9경기)를 뿜어내고 있다.
이러다간 홈런(6개)이 승수(9승)를 추월할 기세, 최근 암울한 보스턴 타선을 고려하면 그렇게 될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단일 시즌에서 10승과 10홈런을 동시에 달성한 건 월터 클라센이 유일, 채근성 뿐만 아니라 야구팬들도 다카기의 행보에 관심을 기울였다.
* * *
“자, 다카기 하루요시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올 시즌 타율 0.303, 홈런 6개, 21타점, 최근 9경기에서 홈런 4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이너리그 시절부터 타격에 재능을 보였고, 작년에도 3홈런을 기록했는데, 올해 완전히 눈을 뜬 것 같습니다.”
“로스너는 초구를 조심해야겠죠. 지금 정면에서 달려드는 건 조금 무모합니다.”
8월 8일, 보스턴은 홈에서 캔자스시티를 맞이했다.
최근 시원치 않은 팀 성적을 생각하면 한숨만 나오지만, 다카기의 활약이 팬들을 야구장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건 사실, 특별석에 앉은 수더랜드 단장은 착잡한 얼굴로 경기를 지켜봤다.
‘빠른 볼은 위험해’
캔자스시티 배터리는 철저하게 변화구 위주의 승부를 택했다.
투타의 모든 게 데이터화 되는 메이저리그, 다카기는 올 시즌 빠른 볼 상대로 0.404 / .456 / 1.035라는 정신 나간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이 정도면 빠른 볼을 안 던지는 게 상책, 전반기 까지만해도 투수들이 다카기를 상대로 던진 패스트볼 비율은 60%나 됐다.
하지만 최근 5경기에서 수치는 40%까지 폭락, 올 시즌 유독 피홈런이 많은 제이슨 로스너는 초구부터 슬라이더를 던졌다.
‘역시 안 주네’
다카기는 초구를 어렵지 않게 골라냈다.
쳐 봤자 좋은 결과 나오기 어려운 변화구는 철저히 회피, 몇 타석 손해는 보겠지만 카운트를 유리하게 끌고가며 배터리가 빠른 볼을 던지도록 유도했다.
아직까지는 잘 먹히는 작전, 카운트가 불리해지자 캔자스시티 배터리의 고민은 깊어졌다.
이 녀석은 분명 빠른 볼을 노리고 있겠지, 알고도 던질 수 밖에 없는 건가. 포수가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로스너는 체인지업으로 카운트를 잡겠다는 사인을 보냈다.
“이번엔 들어옵니다. 카운트는 투 볼 노 스트라이크”
“빠른 볼을 골라 치는 건 좋은데, 이건 조금 아쉽네요.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보스턴 현지 중계진은 아쉬움을 표했다.
변화구를 아예 안 칠 정도면 선구안이 그만큼 좋다는 건데, 카운트를 잡으러 들어오는 공은 때려내야 하지 않겠나.
변화구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면 투수는 그 점을 역이용하기 마련, 하지만 다카기는 다음 공도 차분하게 골라냈다.
아무리 좋은 투수라도 변화구로 카운트를 잡아내는 건 한계가 있기 마련, 다음 공은 분명 빠른 볼이라며 자기최면을 걸었다.
따아악 ~ !!
“우와아!!”
탄성과 함께 하늘 높이 솟아 오른 타구, 시즌 7호 홈런을 뽑아낸 다카기는 천천히 베이스를 돌아 홈에 입성했다.
이제 시즌 홈런과 승수 격차는 2, 혼자 북치고 장구 치는 다카기의 활약에 캔자스시티의 조 웨스트 감독은 쓴 웃음을 지었다.
투타가 완벽히 구분된 현대야구에서 이런 플레이가 나오다니, 메이저리그 수준이 그만큼 퇴보된 건가. 아니면 저 녀석이 상상 이상의 재능을 갖춘 것 뿐일까. 생각이 깊어질수록 머릿속만 복잡해졌다.
이날 다카기는 선제 홈런 포함 4타수 2안타 2타점을 기록하며 팀 승리를 견인, 접견실에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오늘 의미 있는 기록을 세우셨는데 혹시 알고 있습니까?”
“그게 뭡니까?”
다카기는 오늘 홈런으로 통산 23승 10홈런을 달성했다. 월터 클라센도 커리어 초반 다카기와 비슷한 성적을 거뒀지만 클라센은 평생을 내셔널리그에서 뛰었다.
즉, 아메리칸 리그 역사상 만 22살 이전에 20승과 10홈런을 달성한 선수는 다카기가 유일, 하지만 본인은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기념일도 정도껏 챙겨야 의미가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런 사소한 일까지 축하하는 건 피곤한 일이죠.”
“피곤하다고요?”
“네, 그런 사소한 기록은 앞으로 못 본 척 지나가줬으면 좋겠습니다.”
기자들은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지금까지 보여준 활약도 대단한데 이게 사소한 일이라니, 한 기자가 축하받을 일의 기준이 뭐냐며 따지고 들었다.
“최소 200승이나 300홈런은 쳐야 호들갑 떨 정도는 되죠.”
“그 이외엔 사소한 일이라는 겁니까?”
“네, 그 정도는 해야 메이저리그에서 이름 좀 날렸다고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저는 아직 목표까지 갈 길이 멉니다. 이 정도로 축하를 받는 건 조금 부끄럽네요.”
기자들은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파티를 열어주면 이런 건 왜 했냐고 하는 사람들이 꼭 있는데, 다카기는 빈말이 아니라 정말 민망해 하는 눈치, 본인이 싫다는데 어쩌겠나.
축하인사는 접고 보스턴의 앞날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팀이 후반기 들어서도 좀처럼 치고 올라가지 못하고 있는데, 왕으로 불리는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기지 못하면 왕이 아니라 용병일 뿐이죠. 팬들의 돈을 받고 뛰는 입장에서 책임감을 느낍니다.”
다카기는 최근 보스턴 팬들에게 King이라고 불리고 있다.
스포츠 분야의 정상에 오른 선수에게만 허용되는 최고 칭호, 하지만 다카기는 그것도 과분한 대우로 받아들였다.
지금 내가 왕이라 불릴 자격이 있을까. 냉정히 말하면 팬들이 내는 입장료를 받고 팀 승리를 위해 뛰는 용병일 뿐, 작년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거뒀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이기지 못하면 king이라는 칭호는 놀림감일 뿐, 그것도 사양하겠다며 손사래를 쳤다.
[용병은 이 놈들이지]
[당장 치워버려야 돼]
하지만 보스턴 팬들은 다카기를 신성불가침한 존재로 떠받들었다.
용병이야 언제든지 교체할 수 있는 존재지만 왕은 그게 아니지 않은가. 지금 보스턴에서 다카기를 뺀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그에 비해 많은 연봉을 받고도 제 역할을 못하는 선수들은 비난의 타깃이 됐다.
일단 데이브 셰퍼드는 올 시즌이 끝나면 보스턴을 떠날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다.
연봉은 2000만 달러나 받는 선수가 2할 5푼을 치고 있으니, 장타라도 많이 쳐준다면 모를까 전문가들은 9년 연속 30홈런은 글렀다는 전망을 내놨다.
FA 재수와 월드시리즈 우승반지를 위해 택한 보스턴, 그런데 장밋빛 미래는커녕 구단을 떠도는 저니 맨 신세로 전락할 위기에 몰렸다. 이럴 줄 알았다면 옵트 아웃을 포기하는 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내가 어쩌다 이런 꼴이 됐나.’
맥 리스도 비난의 화살을 피하지 못했다.
작년 시즌 30홈런을 넘기며 화려하게 부활했고 월드시리즈에서 부상을 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팬들에게 영웅으로 떠받들어졌다. 그런데 한 시즌 만에 매몰차게 돌아선 팬들, 평소라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하나 둘 떠나는 옛 동료들이 늘어날수록 선수생활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는 약해졌다.
2017 시즌 우승을 이끌었던 선수단 중 팀에 남은 건 실 쿠퍼와 잭 개리슨 뿐, 심지어 개리슨은 뇌종양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이다.
월드시리지 우승 반지도 2개나 꼈고, 돈도 벌 만큼 벌었는데 난 뭣 때문에 욕을 먹어가며 야구를 계속하고 있는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작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마지막으로 은퇴하는 거였는데, 부진을 만회해야겠다는 의지마저 상실해 버렸다.
[왕은 혼자서 하나?]
이때 다카기가 SNS를 통해 선수단을 비난하는 팬들을 억눌렀다.
다들 날 왕이라고 떠받들어주는데 왕은 혼자서 하는 건가. 받쳐주는 유능한 인재들이 없으면 모래 위의 성에 불과, 당신들이 하는 짓은 팀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일축했다.
[맥 리스는 의욕을 상실했을 뿐, 기량이 떨어진 건 아니다. 이런 때일수록 팬들의 응원과 관심이 필요하다.]
들끓던 팬덤은 조금 가라앉았지만, 맥 리스는 다카기에게 감사를 표하진 않았다.
말보다 행동으로 표하는 게 나만의 방식, 저 어린 선수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데 베테랑인 내가 이래서야 되겠는가. 선수 생활을 더 끌고 갈 마음은 없지만 이게 내 마지막 불꽃이라는 생각으로 경기에 임했다.
‘나도 아직 안 끝났다.’
데이브 셰퍼드도 생각을 고쳐먹었다.
FA 재수와 9년 연속 30홈런이 걸린 한 해, 잘해야 한다는 욕심 때문에 평정심을 잃은 게 문제 아닐까. 욕심을 버리자 공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맥 리스와 데이브 셰퍼드는 다키기의 시즌 23번째 등판에서 9타수 6안타 2홈런, 5타점을 합작, 2실점을 내주긴 했지만 다카기는 6이닝 동안 삼진 8개를 잡아내며 시즌 10승을 거뒀다.
축하받을 일이지만 본인이 시시한 기념일은 무시해달라고 하지 않았던가. 기자들은 인터뷰를 보이콧하는 귀여운 항의를 계획했지만,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다카기는 오히려 잘 됐다며 집으로 향하는 차에 올랐다.
아차 한 몇 몇 기자들이 서둘러 추격에 나섰지만 이미 백 베이 파크를 한참 벗어난 목표물, 이렇게 시즌 10승 달성 축하 인터뷰는 무산됐다.
“오빠야 ~ ♡ 어서 오세요.”
정신없이 꼬리를 흔들며 반겨주는 강아지, 다카기는 동생을 품에 안아들고 거실에 들어섰다.
장모님이 옆에서 거들어 주고 있지만 이제 만삭이라 움직이는 것도 버거운 약혼녀, 마른 몸에 배만 볼록 나왔는데 그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웃긴 건 어쩔 수 없었다.
“하나 더 먹어라.”
“세 개나 먹었잖아요.”
“너 살 좀 찌워야 돼. 이런 몸으로 어떻게 아기 낳을래?”
키리코의 어머니는 임신한 딸 입에 삶은 밤을 밀어 넣었다.
밤은 소화가 잘 되고 살이 찌는 성분이 많아 임산부에겐 최고의 식품, 의사 남편의 조언대로 딸의 살을 찌우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밤을 받아먹는 약혼녀를 유심히 바라보던 다카기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
“아니, 꼭 저금하는 것 같아서”
배만 볼록 나와 가지고 둥근 밤을 넙죽넙죽 받아먹는 모습은 저금통과 딱 맞아떨어졌다. 코하루도 그 옆에서 재미있다며 낄낄거리는 중, 눈치 없는 남매 때문에 기분이 상한 키리코는 차곡차곡 쌓이는 적립금을 거부했다.
“그럼 내가 먹여줄까?”
“싫어.”
“그러지 말고, 귀여워서 장난 친 거야. 미안해.”
다카기가 뒤늦게 상황 수습에 나섰지만 이미 토라진 마음, 그래도 계속 되는 약혼남의 호의에 키리코는 별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딸랑 ~ 딸랑 ~ ”
눈치 없게 그 옆에서 동전 떨어지는 소리를 흉내 내는 코하루, 역시 나이는 어려도 시동생이라는 건가. 계속되는 장난에 키리코는 원망의 눈빛을 보냈다.
“나 놀리는 게 그렇게 재미있니?”
“놀리는 거 아니에요. 괴롭히는 거지”
오빠는 내 거라고 찜했는데 치사하게 낚아채 간 언니, 이 정도로 참아주는 걸 고맙게 여기라며 오히려 큰 소리를 쳤다.
여기에 아기 손발이 제대로 안 달렸으면 할아버지한테 이를 거라는 협박은 덤, 보다 못한 다카기가 진압에 나섰다.
“너 왜 이렇게 못된 짓만 골라서 하니?”
“흥 ~ 오빠가 잘못한 거야. 애기 태어나도 안 예뻐해 줄 거야.”
얘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까칠한 건지, 그렇게 내가 결혼하는 게 못마땅한 건가. 여동생에게 특히 약한 다카기는 두 여자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