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간헐적 단식 - (4)
‘안 갔어?’
경기가 끝난 후 기자회견실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주고 받았다.
오늘 5연패를 당한 보스턴, 그리고 패배를 막지 못하고 격분한 에이스, 다카기가 인터뷰에 응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감독 옆에 떡 하니 자리를 잡고 있는 익숙한 얼굴, 다카기가 공식 인터뷰에 응할거라고는 예상 못한 기자들은 서둘러 질문 내용을 작성했다.
그래도 급조하기엔 부족한 시간, 눈치 있는 기자가 브라이스 감독에게 먼저 질문을 던졌다.
“오늘 에이스를 내고도 연패를 막지 못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경기를 풀어갈 생각이십니까?”
마이크를 잡았지만 브라이스 감독은 입을 떼지 못했다.
5연패를 당한 것도 쓰라리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게 더 암울, 특히 보스턴은 돈론의 실책으로 9경기 연속 실책을 기록했다.
이쯤되면 선수단의 집중력이나 실력이 의심 될 정도, 이 팀이 정말 작년시즌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보스턴인가.
브라이스 감독은 팬들의 질책에 해명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고 이 자리에 섰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마땅한 대안이 없습니다.”
“납득하기 어려운 답이군요. 그게 감독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답변입니까?”
“당신의 뜻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닙니다. 뭔가 제가 그럴듯한 답을 제시하길 바라겠죠. 다만 이것만큼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와 선수들은 오늘도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도 졌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그동안 그랬던 것처럼 내일을 준비할 뿐입니다. 다른 계획은 없습니다.”
암울하지만 현실적인 대안, 그리고 원래 시간 끌기용 질문이라 기자도 더는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이제는 다카기를 상대할 시간, 패배를 당하고도 이 자리에 나온 건 기자들 입장에선 좋은 일이지만,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과 날이 선 표정 때문에 가자들도 수위를 최대한 낮췄다.
“오늘 마운드에서 내려간 후 상당히 격한 모습을 보이셨는데, 역시 패배를 막지 못한 책임감의 다른 표현입니까?”
“아닙니다. 그건 제가 100% 잘못한 짓입니다.”
다카기는 공식으로 사죄를 표했다.
힘 좀 있다고 학급 분위기를 쥐락펴락 하려는 철없는 애송이들이 있지 않은가. 일본에선 그런 놈들을 반쵸(番長)라고 부르는데 설마 내가 소년만화에 나오는 3류 양아치 같은 짓을 저지를 줄이야.
그렇잖아도 안 좋은 분위기를 악화시킨 짓, 다른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는 선수가 되고 싶다고 나 자신과 약속하지 않았나.
지금까지 자신과의 약속을 어겨본 적이 없는 다카기는 패배보다 프로답지 못 한 자신의 행동에 실망했다.
잘못을 했으면 조금이라도 빨리 사과하는 게 최선, 브라이스 감독은 그 옆에서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7이닝 1실점 투구를 한 선수가 받아야 할 대우라니, 하지만 이게 팀의 현실이라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고 역시 사람은 입을 조심해야 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얼마 전 제가 승리에 대한 의욕을 유지하려면 가끔 굶는 것도 필요하다는 말을 한 것 같은데요. 그건 제 실수였습니다. 역시 굶는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네요. 반성합니다.”
자폭에 기자들은 폭소했다.
몇 번 졌다고 체념해버린 건가. 하지만 다카기는 그런 게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지는 만큼 승리를 위한 욕구는 커지는 법, 다음 경기는 반드시 잡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오늘 꽤 무리를 하셨는데 역시 소문대로 올스타전 출장은 포기하시는 겁니까?”
“네, 경기에 나서지도 않을 선수가 자리만 차지하는 건 아니죠. 며칠 전 사무국에 대체 선수를 정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어린 선수가 올스타전 불참까지 고사하며 등판을 했는데 패배라니, 이 책임을 누가 짊어져야 하나.
하지만 다카기가 스스로 책임을 짊어진 상황, 기자들은 수비의 실책이나 빈약한 타선에게 책임을 넘기지 못했다.
말은 안 해도 양심이 있다면 책임을 느꼈겠지, 기자들을 살펴보던 다카기는 인터뷰 시간종료를 알리는 구단직원의 사인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속상해.’
집에서 경기를 지켜본 키리코는 옅은 한숨을 뱉어냈다.
스포츠에서 늘 이기는 경기를 할 수는 없지만 키리코는 늘 이기는 약혼남의 모습에 익숙해졌다.
그런 사람이 한 달 넘게 승리없이 2패만 당하다니, 보는 입장도 안타까운데 본인은 얼마나 속이 상할까.
뭣보다 일이 안 풀리면 집에서 화풀이를 했던 아버지에게 당한 트라우마 때문에, 연패를 당하고 돌아온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동거를 몇 달 해봤지만 그때는 서로 즐기기 바빴고 분위기가 어색해 질 일도 없었다. 그래도 평생을 함께하다보면 이보다 더한 일도 일어나겠지, 그 때마다 약혼남 눈치보며 전전긍긍할 건가?
키리코는 약혼남이 화 좀 났다고 역변할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고, 기대는 비껴가지 않았다.
“자기야, 피곤하지?”
“아니야. 몸은 좀 어때?”
다카기는 약혼녀 건강부터 살폈다.
어느덧 임신 29주 차, 처음엔 별 티가 안 나던 배는 이제 제법 부풀어올랐다. 배만 부풀어 오르면 다행인데 손발도 자주 붓고 잠도 잘 못자는 예비엄마, 볼 때마다 안쓰러웠다.
‘나도 이런 과정을 거치고 이 세상에 태어났겠지.’
다카기는 학창시절 엄마에게 조금 무뚝뚝하게 굴었던 게 마음에 걸렸다.
그때는 엄마의 관심이 날 어린애로 보는 것 같아서 애써 외면했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건 부모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책임감이었다. 자식이 뭘 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부모로서 알아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다카기는 이제 나 다 컸다며 모든 진로를 스스로 결정해버렸다. 부모가 된다는 건 책임감을 가져야 감당할 수 있는 일, 엄마는 그걸 실천하려 했던 것 뿐 아닐까?
부풀어 오른 배를 볼 때마다 좋은 아빠가 돼야겠다는 책임감은 더욱 굳건해졌다.
“참, 오늘 코하루 짱(ちゃん)한테 전화 왔어.”
그것도 잠시, 약혼녀의 역공에 다카기는 뜨끔했다.
올 시즌도 올스타에 뽑히면 카퍼레이드에 데려다주기로 약속했는데 그걸 일방적으로 깨버렸으니, 독촉전화가 날아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그걸 일방적으로 깨버렸으니 이래저래 못난 오라버니, 하지만 코하루의 미국행은 올스타 퍼레이드 참가가 목적이 아니었다.
“애기 손 발 다 있는지 검사하러 온다는데”
“손발? 그게 무슨 소리야?”
“할아버지가 그렇게 하라고 했나봐.”
고영길은 곧 태어날 증손자가 건강하게 태어나길 바랐다.
손발이 다 있는지 확인하는 건 필수 절차, 그렇다고 이 나이에 아기를 검수하는 건 모양새가 좀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어린 손녀에게 그 중책을 맡겼다.
[가서 손발 다 있는지 꼭 확인하고 할아버지한테 전화 줘라.]
“네에 ~ 아!! 사진도 찍어 보낼까요?”
[허허허 ~ 그럼 더 좋지]
마침 오빠가 보고 싶었던 코하루는 엄마를 졸라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예약했다. 유치원 스케줄이 바빠 당장은 못가겠지만 시간이 생기면 바로 출발할 예정, 다카기는 아직 뱃속에 있는 자식에게 고급 정보를 전했다.
“너 큰일 났다. 손발 다 있는지 검사하러 온데, 없으면 얼른 지금 만들어 내.”
때맞춰 꿈틀하는 뱃속, 이 녀석도 뭔가 눈치를 챈 걸까. 가족들 덕분에 패배의 쓰라림을 이겨낸 다카기는 진심으로 웃을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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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대책이 필요해.’
올스타전을 지나고 수더랜드 단장은 측근들과 머리를 맞댔다.
아차 하는 사이 2위로 밀려난 순위, 이대로라면 와일드카드 경쟁도 어렵다. 선발진은 다카기가 중심을 책임지고 있지만 그것 뿐, 선발진도 문제지만 야수진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먼저 오프 시즌에 야심차게 영입한 데이브 셰퍼드는 전반기만 놓고 보면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8년 연속 30홈런을 넘긴 선수가 13홈런이라니, 지금 페이스면 24홈런으로 시즌을 마무리한다. 홈런도 홈런이지만 더 큰 문제는 정확도, 셰퍼드는 통산 타율이 0.294이나 될 정도로 정확도와 힘을 갖춘 타자다.
하지만 올 시즌 타율은 0.264, 역시 세월의 힘은 거스를 수 없는 건가. 셰퍼드는 작년 시즌 부상을 당하고도 30홈런을 때려냈지만 30대 중반에 접어든 선수의 기량이 급락하는 건 메이저리그에서 흔한 일, 1년 2000만 달러 계약을 맺었으니 팀에 큰 타격은 없다.
‘이 놈들은 도저히 용서가 안 돼.’
문제는 폴 돈론과 후안 위긴스, 실책도 한 두 번이지 이 정도면 집중력 부족 아닌가.
작년 시즌, 보스턴은 팀 Rdrs(수비 득점 기여도) - 11을 기록했다.
물론 이 보다 더 심한 수치를 찍은 구단도 있었지만(토론토 : - 47)최고 수치(71)를 보여준 애틀랜타에 비하면 절망적인 수준, 선발진이 안정적이지 않고 수비진도 그저 그런데 어떻게 우승을 차지한 건가,
그런데 올 시즌은 더 심각한 수준, 역시 문제는 돈론과 위긴스다.
외야수가 수비율이 97% 대라니, 제일 편한 자리에서 수비는 개판으로 하는데 어떻게 팀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겠나. 수더랜드 단장은 둘에게 자극을 줄 방안을 모색했다.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하지만 누구도 둘을 쳐내야 한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지금 팜에 괜찮은 외야 자원이 없는 건 아니다. 문제는 공격력, 돈론은 타율 0.293, 8홈런, 출루율 0.377을 기록하고 있다.
장타력이 떨어지는 게 문제지만 3할 5푼이 넘는 출루율을 찍어줄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몇 명이나 있을까. 참고로 올 시즌 메이저리그 야수진의 평균 출루율은 0.330, 돈론은 그보다 훨씬 나은 성적을 찍고 있다.
수비가 절망적이라도 공격은 나무랄 곳이 없는 선수, 아직 포스트 시즌 진출의 희망을 놓을 상황이 아니라 돈론을 제외하고 유망주를 시험하는 건 위험했다.
후안 위긴스도 마찬가지, 올 시즌 타율은 0.233에 그치고 있지만 19홈런은 팀 내 1위, 45타점은 팀 내 2위다.
이런 선수를 라인업에서 뺀다는 건 미친 짓, 공격 기여도를 수비에서 다 까먹고 있지만 지금은 다른 대안이 없었다.
‘왜 안 돼? 하면 됨’
하지만 수더랜드 단장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다.
팀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5000만 달러 계약이 남아있는 선수를 방출한 전력도 있는데, 그깟 야수진 몇 명 벤치에 앉히는 게 대수인가.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 법, 연패 기간이 길어지면서 수더랜드 단장은 눈에 뵈는 게 없는 정책을 펼쳤다.
일단 트리플 A에서 활약하고 있는 알 디즌(Deason)을 승격 조치, 후반기 첫 경기부터 디즌을 우익수 선발로 내보냈다.
1루는 맥 리스, 지명타자는 셰퍼드가 보고 있으니 후안 위긴스는 자연스럽게 벤치 행, 후반기 첫 경기부터 벤치라니, 충격을 받은 위긴스는 이 상황을 자기 입맛대로 받아들였다.
‘나한테 자극 좀 주겠다는 속셈이겠지.’
팀 내 최다 홈런 타자를 얼마나 오랫동안 벤치에 앉히겠나, 얼마 후 바로 주전으로 복귀하겠지, 하지만 그 기대는 첫 날부터 박살이 났다.
따아악 ~ !!
1회 초, 디즌은 메이저리그 데뷔 첫 타석에서 우측 담장을 넘어가는 솔로 홈런을 날렸다.
마이너리그에서 보낸 5년의 세월을 보상받기엔 부족하지만 어쨌든 본인에겐 나름 의미가 있는 홈런, 후반기 첫 등판을 앞두고 불펜에서 몸을 풀던 다카기도 모니터를 통해 디즌의 홈런을 확인했다.
루키의 절실함이 묻어 있는 얼굴, 위긴스의 외야 수비에 실망한 다카기도 디즌에게 내심 기대를 걸었다.
따악 ~ !!
“초구 타격! 하지만 우익수가 잡아냅니다. 공 하나로 첫 타자를 잡아내는 군요.”
“다카기 선수는 투구 스타일 상, 플라이 볼이 많을 수밖에 없거든요. 그동안 위긴스가 조금 안일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디즌은 그렇지 않은 것 같네요.”
디즌은 2번째 타석에서도 우중간을 가르는 2루타를 뽑아내며 득점권 기회를 만들어 냈다.
보스턴 현지 중계진의 반응도 긍정적, 벤치에 앉은 위긴스는 물론이고 좌익수로 출전한 돈론도 디즌의 활약에 적지 않은 자극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