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155화 (155/361)

155화. 간헐적 단식 - (2)

“who are you?!!”

다음 날 경기에서 채근성은 보스턴 팬들의 거친 환영을 받았다.

야유를 받을 행동을 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초대 손님은 그냥 돌려보내지 않는 게 이곳 사람들의 정, 이제 막 빅리그 무대를 밟은 선수에겐 감당하기 조금 버거운 야유가 쏟아졌다.

[채근성은 NPB를 노리는 게 현실적]

다카기의 발언은 한국 여론이 채근성의 미래를 점치는 계기가 됐다.

KBO 규정 상, 채근성은 국내에 복귀하려면 2년을 쉬고 드래프트를 받아야한다. 그것도 최저연봉 선수로 밑바닥부터 올라가야 하는데 27 - 28살에 프로 데뷔를 하는 게 선수에게 무슨 동기부여가 될까.

그에 비해 NPB는 외국인 유망주를 위한 육성군이 따로 존재한다.

MLB 도전이 여의치 않으면 일본으로 방향을 트는 게 현실적, 하지만 채근성은 일본행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도 제로, 겨우 잡은 콜업 기회인데 누가 실패부터 생각할까.

메이저리거가 될 수만 있다면 한국 국적도 포기할 생각, 병역을 이행하고 한국인으로 사느니 메이저리거이자 미국인으로 사는 게 더 행복하지 않겠나.

최근 병역문제 때문에 뜨거웠던 한국, 야구선수가 혜택을 받을 길은 확 줄어들었다. 거기다 지도자들도 기왕이면 국내 선수들을 밀어주는 분위기, 여론도 해외파는 병역문제가 목적이라며 국대 출전을 곱게 보지 않는다.

그럼 성공해서 미국인으로 살면 그만, 난 뭣 때문에 5년 동안 마이너리그에서 온갖 고생을 했는가. 성공만 보고 달려 온 앞길, 그렇게 생각하면 이깟 야유 쯤은 참을 수 있었다.

“먹을래?”

“아니”

채근성이 전의를 불태우는 동안, 다카기는 벤치에서 평온한 하루를 시작했다.

휴가를 얻은 데이비드 크로스가 해바라기 씨를 건넸지만 거절, 곤죠 씨의 활약에 신경을 기울였다.

근성이라는 이름은 발음하기 어색하고 그냥 일본 식으로 부르기로 결정, 채근성은 보란듯이 첫타석부터 안타를 뽑아냈다.

“빠른 볼은 제법 치는 것 같은데?”

“응, 그런 것 같네”

크로스의 말에 다카기는 덤덤한 답을 내놨다.

빠른 볼을 잘 치는 건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소조건, 이 정도는 놀랄 일도 아니었다.

이어지는 3회 초 오스틴의 공격, 채근성에게 안타를 허용한 보스턴 배터리는 신중한 투구를 이어갔다.

“바깥쪽, 볼입니다. 초구는 잘 지켜봤네요.”

“채근성 선수가 마이너리그에서 플라이볼 대비 땅볼 비율이 0.9밖에 안 됐거든요. 그만큼 양질의 타구를 만들어낸다는 뜻인데, 이건 선구안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한국 중계석은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지만 그 기대는 바로 박살이 났다.

채근성이 빠른 볼에 강점이 있는 건 사실, 하지만 메이저리그 수준의 변화구 앞에 한계를 드러냈다.

이런 타자는 빠른 공은 좋은데 구종이 단순한 선수에겐 확실한 강점을 보인다.

지금 마운드에 선 로버트 클레이튼이 딱 그런 유형, 첫 타석에서 안타를 허용한 클레이튼은 커브만 3개를 던져 채근성을 유격수 앞 땅볼로 처리했다.

저런 타격을 하는데 선구안이 좋다고 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만 놓고 보면 그저 그런 선수, 그래도 다카기는 좀 더 지켜보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걸 잡아줘?’

이어지는 5회 초

몸 쪽 빠른 볼이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진 채근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클레이튼이 몸 쪽 승부를 즐긴다는 건 알고 나왔지만 이번 공은 제법 깊었던 편, 아니, 정확히 말하면 칠 수 없을 정도로 절묘하게 들어왔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선수라도 이런 제구를 유지하는 건 어렵겠지. 차분하게 다음 공을 기다렸다.

“스트라이크!!”

이번에는 바깥쪽을 찌르는 빠른 볼, 자기만의 존이 확실한 선수가 공 두개를 흘려보냈다? 별로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높은 공, 따라 나옵니다. 아 ··· 조금 아쉬운 결과인데요. 채근성 선수의 세 번 째 타석은 삼진입니다.”

“역시 클레이튼 선수의 빠른 볼 스터프는 보통이 아니네요. 구속은 그렇게 빠르지 않지만 빠른 볼만 4개를 던졌는데 전부 다른 코스로 들어갔고, 몰리는 공도 없었습니다.”

브라이스 감독은 5회를 채운 클레이튼을 마운드에서 내렸다.

아무리 스터프가 좋아도 단순한 구종으로 긴 이닝을 소화하는 건 무리, 특급 불펜진이 하나 둘 투입됐다.

여기서부터는 평균 95마일 이상을 던지는 파이어볼러들의 향연, 7회 초 4번 째 타석을 맞이한 채근성은 앞 선 타석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집중력을 끌어 올렸다.

따악!!

“잡아당긴 타구! 계속 멀리!! 담장! 잡지 못합니다!! 1루 주자는 홈으로!! 채근성은 1루를 지나 2루까지!! 데뷔전에서 멀티히트 포함 타점까지 신고합니다!!”

“지금은 96마일 빠른 볼이었는데 놓치질 않았어요. 이렇게 되면 댈러스 감독도 채근성 선수를 눈여겨 볼 수밖에 없습니다.”

2루에 안착한 채근성은 하늘을 향해 세리머니를 날렸다.

이 날을 위해 지금까지 얼마나 모진 고생을 했는가. 이제부터 시작되는 장밋빛 미래를 향한 축배, 다카기는 벤치에서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다.

‘根性 ある(근성 있네)’

이름답게 근성 있는 선수, 내일 맞대결을 기대하며 하루를 마무리 했다.

* * *

“오늘 컨디션은 어떤가?”

다음 날, 오스틴 텍산스의 댈러스 감독은 채근성을 붙잡고 이런 저런 말을 건넸다. 승격이 좀 늦긴 했지만 가능성이 있는 선수, 거기다 어제 좋은 활약을 보여줬으니 관심이 가는 건 당연했다.

“당연히 좋죠. 설마 오늘은 벤치에 앉아있으라고 말 할 생각은 아니겠죠?”

채근성은 선발 출장 의욕을 드러냈다.

오늘 보스턴의 마운드를 책임질 선수는 다카기 하루요시, 얼마나 대단한 놈이기에 날 공기 취급했는지 한 번 붙어보고 싶었다.

“정말 출장하길 원하나?”

댈러스 감독은 무리하지 말라며 다독였다.

다카기는 이제 2년차에 접어든 애송이지만 그 실력은 모든 선수들이 인정하고 있다. 그 자식을 만나는 날은 타율을 까먹기 일쑤, 뭣보다 채근성은 어제 활약으로 이제 막 기세를 타기 시작했다.

최종보스를 상대하려면 중간 보스를 해치워가며 레벨을 올려놔야 하는 법, 이제 막 발걸음을 뗀 루키가 상대하긴 조금 벅차지 않을까.

하지만 채근성은 도망치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는다며 목소리를 높였고, 기어이 우익수로 선발 출장기회를 잡았다.

who are you!!

다음 날 경기에서도 보스턴 팬들의 도발은 계속됐다.

하지만 어제 경기에서 자신감을 얻은 루키는 귀를 틀어막고, 메이저리그를 주름 잡는 투수와 얼굴을 마주했다.

“초구, 들어왔다는 판정입니다.”

“역시 빠르네요. 놀라운 건 이게 최고 구속이 아니라는 겁니다.”

초구는 96마일, 원하면 100마일까지 구속을 끌어올릴 수 있다. 그렇게 해도 제구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게 더 놀라운 일, 빠른 볼로 카운트를 잡은 다카기는 90마일 슬라이더로 헛스윙을 끌어냈다.

종으로 떨어지는 궤적이라 순간 공이 사라지는 착각이 들 정도, 그렇게 두 선수의 첫 대면은 다카기의 완승으로 끝났다.

변화구를 던졌다는 건 상대를 인정했다는 것, 어정쩡한 타자에겐 변화구를 안 던진다.

나름 경의를 표했지만 다카기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보스턴 팬들은 who are you를 연호, 조롱을 뒤로한 채근성은 벤치에서 동료들의 활약을 지켜봤다.

‘저 자식은 괴물인가.’

2번 째 타자에게 안타를 허용한 다카기는 바로 구속을 끌어 올렸다.

빠른 볼을 3개 모두 다른 코스로 던지는데 이미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스터프, 결정구로 던지는 슬라이더의 위력은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에 97마일까지 나오는 투심과 간간히 던지는 체인지업 커브까지, 경력 있는 베테랑들이 나서봤자 다를 건 없었다.

‘어림없다.’

3회 초, 다카기는 8번 타자 조시 캐닉의 기습번트 타구를 신속하게 처리했다.

타구의 우측으로 스텝을 밟아 송구하기 편한 자세를 잡는데, 수비의 기본과 운동신경이 절묘하게 조합된 플레이에 보스턴 해설위원들은 찬사를 보냈다.

“자, 다시 한 번 보시죠. 이건 유격수가 깊숙한 타구를 처리할 때 밟는 스텝과 비슷한데요.”

“당연하죠. 다카기는 일본에서 유격수로 활약한 선수입니다. 캐닉이 그걸 잘 모르고 있었나보군요.”

투구 뿐만 아니라 마운드에서 보여주는 수비까지 완벽, 여기에 삼진 페이스에 불이 붙으면서 보스턴 내야진은 손을 놔버렸다.

“스윙! 삼진입니다! 채근성은 오늘 두 타석 모두 삼진, 오늘은 상대를 잘못 만났군요.”

“이것도 루키가 겪어야 할 성장통 아니겠습니까. mlb에 승격한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채근성은 6회에도 삼진을 당하고 물러났다.

마이너리그 시절 때도 삼진이 적은 건 아니었지만 한 경기에 세번이나 당한 건 손에 꼽을 정도, 도저히 못 치겠다는 절망을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이라 당혹스러웠다.

“어이, 너무 풀 죽지 마. 너만 못 치는 거 아니라고”

동료가 위로를 건넸지만 그게 무슨 위안이 되겠나.

한 번 더 붙어보길 바랐지만 다카기가 7회를 마치고 마운드를 내려가면서 복수는 다음 기회로 미뤄야했다.

이날 다카는 7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내고 시즌 8승을 수확, 탈삼진도 11개를 추가하며 메이저리그 선두자리를 굳혔다.

3주 앞으로 다가온 올스타 게임의 아메리칸 리그 선발투수로 낙점된 자격을 보여준 경기, 기자회견실에서 이런 저런 질문을 받아냈다.

“오늘 채근성 선수를 삼진 3개로 돌려세우셨는데, 역시 분석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셨나요?”

한국 기자의 질문에 다카기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결과는 났는데 확인사살까지 하겠다는 거 아닌가. 잠시 고민하다 머릿속에서 정리한 말을 풀어냈다.

“분석은 어제 경기에서 그럭저럭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선수에 대한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왜죠?”

“이 자리의 주인공은 저니까요. 다른 선수에 대한 질문은 받고 싶지 않습니다.”

아예 관심 외로 분류하는 분위기, 질문을 넘긴 다카기는 다른 기자의 질문을 받았다.

“첫 패전 이후 4연승을 달리고 있는데, 역시 그 날의 아픔이 상승세의 계기가 된 겁니까?”

“아니라고 할 순 없겠죠.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언제나 야구를 잘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패배도 알아야 더 간절해지는 법이죠.”

지금이야 이기는 일에 익숙해져 있지만, 다카기는 중학교 시절만 해도 패배로 얼룩진 야구 인생을 살았다.

그렇다고 좌절하진 않았다. 실패를 거듭할수록 다음 경기는 반드시 이기겠다는 의욕은 더 강해졌고, 그 노력은 고등학교 때부터 서서히 빛을 발했다.

무대가 메이저리그로 옮겨졌지만 그 마음가짐은 지금도 여전, 가끔 겪는 패배와 실패도 의미 있게 받아들였다.

“저뿐만 아니라 모든 선수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한 번 주저앉았다고 좌절했다면 이 자리에 있지 못했겠죠. 좌절하고 울어도 상관없습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거죠. 오늘 삼진 세 번을 당한 그 선수도 지금쯤 좌절하고 있겠지만 야구를 하다보면 이런 날도 저런 날도 있는 겁니다. 너무 풀죽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선수에 대한 건 언급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나요?”

허를 찌르는 발언에 다카기는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지금 한 말은 편집해 달라고 요청, 하지만 짓궂은 기자들은 글자 하나 빠트리지 않고 인터뷰 내용을 기사에 실었다.

‘그래, 어디 다음에 두고 보자.’

기사를 접한 채근성은 이를 갈았다.

한번 이겼다고 잘난 척을 하다니, 아니, 그것보다 삼진 세 번 당하고 잠시 풀이 죽었던 자신에게 더 화가 났다.

사람의 속마음을 그렇게 훤히 꿰뚫어 보다니, 어지간히 분했는지 꿈속에서도 ‘who are you’라는 보스턴 팬들의 조롱이 들려올 지경, 다음 만남을 위해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