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154화 (154/361)

154화. 간헐적 단식 - (1)

[밥은 챙겨 먹고 있니?]

“네, 걱정하지마세요.”

이곳은 오스틴 텍산스의 산하 내슈빌(더블 A)이 원정경기 숙소를 꾸린 곳, 5년 전 메이저리그 도전을 택한 유망주 채근성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반가운 목소리에 떨리는 마음을 겨우 가라앉혔다.

마이너리거는 5 - 6년 안에 콜업을 못 받으면 다른 길을 알아봐야 하는 운명이다.

가능성 있는 선수는 3 - 4년 안에 콜 업을 받지만 채근성은 올해로 벌써 5년 차, 2년 전 더블 a로 승격했을 때만 해도 메이저리그 진출은 눈앞에 있는 것처럼 가까웠다.

그런데 앗 하는 사이 흐른 2년, 남아 있는 시간도 별로 없거니와 길어지는 타지 생활에 몸도 마음도 점 점 지쳐갔다.

[근성아, 엄마가 다른 뜻이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닌데 ··· ]

“뭐가요?”

[이제 그만 한국으로 오지 그러니, 야구는 여기서도 할 수 있잖아.]

어머니의 권유에 채근성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라고 그런 생각을 안 해봤을까. 하지만 지금까지의 노력을 수포로 돌리는 짓이라 감히 입 밖에 내지 않았을 뿐, 조금만 더 해보겠다며 마음을 다잡았다.

‘하아 ~ 되는 놈은 따로 있는 건가.’

마음이 힘든 만큼 타인의 성공을 바라보는 시선도 곱진 않았다.

나는 5년 째 여기서 뒹굴고 있는데, 그 다카기라는 자식은 계약금만 517만 달러를 받고 1년 만에 마이너리그를 졸업, 심지어 루키 시즌에 월드시리즈 반지와 대형계약까지 차지해 버렸다.

나이도 나보다 훨씬 어린데 그렇게 실력 차가 크다는 건가. 한 번 붙어보기 전엔 납득할 수 없었다.

‘이대로는 못 돌아가, 적어도 빅리그 맛은 봐야지.’

무슨 일을 하든 쉽게 포기하지 말라는 뜻으로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 채근성은 메이저리그 콜 업을 목표로 꺼져가는 열정을 불태웠다.

* * *

[다카기, 오늘도 무안타]

한편 다카기는 순조로운 2년 차 시즌을 보냈다.

마운드에서의 활약은 여전하지만 타격은 조금 아쉬운   편, 표본은 적어도 5월 중순까지 괞찮은 활약을 했다.

문제는 그 이후, 뉴욕 전에서 장타 2개를 날린 이후 16타수 3안타에 그치고 있다.

시즌 타율은 0.264까지 하락, 타석에서 이렇다 할 생산력을 보여주지 못하자 여론은 투수에만 집중하는 게 어떻겠냐는 참견을 하기 시작했다.

“밥을 맛있게 먹으려면 가끔은 굶어야죠.”

하지만 다카기는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매일 먹는 밥에 감사함을 느끼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안타도 매일 치면 무덤덤해지기 마련, 가끔 굶어 보는 것도 동기부여에 나쁘지 않다며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잭 개리슨, 올 시즌 아웃]

뭣보다 최근 보스턴은 의외의 악재와 마주했다.

얼마 전 극심한 두통을 호소해 경기에서 빠진 잭 개리슨은 뇌에 종양이 생겼다는 충격적인 진단을 받았다.

악성인지 아닌지는 조직검사를 해봐야겠지만, 현대의학으로 종양의 성질을 완벽히 파악하는 건 불가능, 개리슨은 완치를 위해 시즌 아웃을 택했고 수더랜드 단장은 공백을 채우기 위해 더블 A에서 뛰고 있는 유망주를 콜업 했다.

3루에서 좋은 수비를 보여준 다카기도 가끔 야수로 나서는 상황, 생각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고 있지만 메이저리그에 뿌리를 내린 몸이라 초조해 할 필요는 없었다.

6월 9일 경기는 3루수로 출전, 상대는 아메리칸 리그 서부지구 최하위를 달리는 시애틀이지만 긴장을 풀진 않았다.

본업이 투수니까 야수는 평균만 해줘도 된다? 그런 아마추어다운 생각으로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마침 정면으로 오는 타구, 안정적인 스텝과 송구로 처리했다. 평범한 수비였지만 긴장감을 유지하기엔 때 좋은 애피타이저, 집중력은 타석으로 이어졌다.

“자, 다카기 하루요시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올 시즌 타율 0.264, 홈런 1개, 6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근 10타석에서 안타가 없거든요. 본인은 기술적인 문제라고 답을 했는데 어떻게 수정을 했는지 지켜보겠습니다.”

다카기는 타격코치와 함께 문제점을 분석했다.

스윙이 출발할 때 배트가 너무 눕혀져 있으면 스피드가 떨어지지만 그렇다고 너무 세워도 곤란하다.

다카기의 스윙은 다운에서 어퍼로 끝나는 궤적, 적당한 타이밍에 스윙이 바뀌어야 하는데 그대로 다운스윙이 되면서 공을 찍어치고 말았다.

원래 땅볼 비율이 높은 편이지만 요즘은 쳤다하면 땅볼, 문제가 뭔지 알았으니 나름대로 수정은 했다.

‘나쁘지 않았어.’

첫 타석은 좌익수 플라이, 아웃은 됐지만 간만에 나온 플라이에 의미를 뒀다.

그리고 이어지는 3회 말 두번째 타석, 시애틀 배터리는 초구부터 변화구를 던졌다.

다카기의 타격방식은 겉보기엔 대단하지만 이런 고난이도 기술을 시즌 내내 유지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특히 마지막에 공을 들어 치는 건 투구 궤적을 완벽히 꿰뚫어야 가능한 일, 당연히 빠른 볼보다 변화구에 약점을 보일 수밖에 없다.

타자는 분명 빠른 볼을 노리고 있겠지. 시애틀의 선발 제이슨 그림슨은 2구도 커브를 택했다.

따아악 ~

“걷어 올린 타구가!! 좌측 담장 너머로 사라집니다! 몬스터 홈런!! 그림슨의 커브를 그라운드에서 추방시켜버립니다!”

“이건 시애틀 배터리의 실수네요. 다카기가 변화구에 약점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같은 공을 연속해서 택한 건 치명적입니다.”

맞는 순간, 다카기는 헬멧을 꾹 눌러 쓰며 1루로 향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결과, 보스턴 선수단은 간만에 한 건 한 에이스를 격하게 환대했다.

“이제는 만족하냐?”

“아니, 아직 부족해”

폴 돈론이 이제 만족하냐고 물었지만 다카기는 고개를 저었다.

며칠 굶은 놈이 밥 한 술 떴다고 만족하나, 5회 말 공격에서도 허기를 채우기 위해 집중력을 발휘했다.

메이저리그에서 명예는 절대 나눠가질 수 없는 가치다. 내가 홈런을 친다는 건 누군가가 피눈물을 흘린다는 뜻, 상대의 명예를 뺏어야 살아남는 야생의 세계 아닌가. 내 명예는 내 것, 네 명예도 내 것, 철저한 이기주의 정신으로 그림슨을 몰아세웠다.

“바깥쪽, 지켜봅니다. 카운트는 투 볼 노 스트라이크”

“이번에는 빠른 볼 위주로 가고 있는데, 다카기의 선구안은 이 정도로 흔들릴 수준이 아닙니다.”

변화구에 약점이 있지만 선구안으로 어느 정도 커버하는 수준, 주자가 1루에 있는 상황이라 시애틀 배터리는 빠른 볼로 유인하는 작전은 포기했다.

“볼 ~ ”

커브를 던져 카운트를 잡아내려 했지만 결과는 볼, 이 상황에서 굳이 한가운데 스트라이크를 던져야 하나? 여기서 다카기를 고의 사구로 거르면 하위 타순, 위험부담은 있지만 시애틀은 주자를 채우는 작전을 택했다.

따악 ~ !!

“우와아 ~ !!”

결과는 처참했다.

후속 타자 앤서니 클락의 적시타가 나오면서 2루 주자는 홈인, 다카기는 중견수가 머뭇거리는 틈을 타 3루까지 전진했다(무사 주자 1, 3루).

타격도 타격이지만 아차 하면 빈틈을 파고드는 주루 플레이도 수준급, 이렇게 좋은 장기 말을 어떻게 투수로만 활용하겠나.

수더랜드 단장은 다카기를 6일 간격으로 등판 시키고 야수 출전을 늘리는 방식도 고려했지만, 한 경기라도 더 마운드로 올리는 게 효율적이라는 측근들의 의견에 뜻을 접었다.

‘나도 솔직히 투수만 해줬으면 좋겠어.’

다카기는 올 시즌 투수로서 역대 급 시즌을 보내고 있다.

지금까지 성적은 7승 1패(10경기) 평균자책점 1.89,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Whip 1.03에 조정평균자책점은 267이나 된다.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라이볼 시대 역사상 조정평균자책점 250을 넘긴 투수는 열 명도 안 된다.

보스턴으로 범위를 좁히면 제로, 1917년, 호너스 그레이브가 271을 찍은 적은 있지만 그땐 투수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데드볼 시대였다.

다카기가 250대를 유지하고 시즌을 마무리하면 팀 역사에 기록 될 일, 지금까지 성적만 놓고 보면 1패를 당한 게 신기할 정도다.

놀라운 건 그 경기에서도 6이닝을 버텨줬고(4실점), 삼진을 11개나 쓸어 담았다는 것. 올 시즌 64이닝 동안 92삼진을 잡아낼 만큼 압도적인 구위를 뽐내고 있다.

그런데도 꾸준히 야수로 뛰는 중, 본인이 원하는 일이라 말릴 수도 없고 그저 다치지 않기만을 바랐다.

‘무안? 그까짓 거 당하면 어때?’

얼마 전, 보스턴 여론은 다카기가 단장을 클럽하우스에서 쫓아냈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수더랜드 단장은 그 기사를 별로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정쩡한 선수가 말을 끊고 대들었다면 화가 났겠지만, 상대는 지금 리그를 주름 잡는 슈퍼 에이스다.

선수가 튀어야 유니폼도 많이 팔리고 구단에도 좋은 일, 실제로 다카기의 유니폼 판매량은 1년 전에 비해 2배 이상 늘었다.

야구는 지역을 중심으로 활성화된 스포츠라 미국 전역에 미치는 파급 효과는 미미하지만 보스턴 내에서의 입지는 절대적, 특히 일본에선 전국구적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내년 시즌 개막전은 일본에서 치러도 되겠지, 구단 입장에선 황금 알을 낳는 거위라 자존심이 강한 수더랜드 단장도 지난 일은 아무렇지 않게 웃어 넘겼다.

좀 더 튀어주면 오히려 감사한 일, 오늘은 타석에서 존재감을 발휘하길 기대했다.

따아악 ~ !!

“높게 가는 타구!!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하겠군요!! 모두들 손을 들어 환호해주시길 바랍니다!! 다카기 하루요시의 시즌 3호 홈런!! 오늘 멀티 홈런 게임을 장식합니다!!”

“잠깐 굶었다고 오늘 폭식 제대로 하는군요.”

7회 말에 터진 시즌 3호 홈런,

캐스터의 말대로 홈팬들은 유유히 베이스를 도는 다카기에게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이렇게 잘하는데 투수에만 집중하라고 참견했던 게 미안할 정도, 뒤늦은 박수로 격려했지만 돌아온 반응은 덤덤했다.

‘겨우 이 정도 가지고 뭘 ··· ’

시애틀은 팀 평균자책점이 5.44나 된다. 메이저리그 전체 28위, 이런 팀 투수들을 상대로 홈런을 쳐 봤자 완전히 살아났다고 할 수 있을까.

팀 승리에 결정적인 활약을 펼쳤지만 기자들 앞에선 아직 부족하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6월 12일, 오스틴 텍산스와의 경기를 앞두고 다카기는 한국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얼마 전 채근성 선수가 메이저리그 콜업을 받았는데요. 한국인 선수와 맞대결을 하는 건 처음이신데, 어떤 마음가짐으로 경기에 임하실 생각입니까?”

“채? ··· 뭐라고요?”

시큰둥한 반응에 한국기자들은 당황했다.

그야 다카기에 비하면 이제 막 콜업이 된 채근성의 존재감은 미미한 수준이다. 그래도 곧 마주할 상대 팀 선수인데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건가? 기자들은 이어지는 발언에 귀를 기울였다.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분석은 메이저리그에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선수를 대상으로 하는 겁니다. 이제 막 콜 업이 된 선수까지 일일이 기억하고 파고드는 건 비효율적인 짓이죠. 채 ··· 뭐라고 했죠?”

“채근성 선수입니다.”

“아 ··· 그랬죠. 발음하기 좀 어려워서 계속 까먹네요. 그 선수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부딪쳐 볼 생각입니다. 분석을 할 만한 상대인지는 그 다음에 결정해도 늦지 않겠죠.”

이 인터뷰는 한국 팬덤을 발칵 뒤집었다.

혹시 일부러 채근성을 도발한 건가? 하지만 다카기 앞에서 한일 대결을 운운한 기자들도 문제라는 의견도 적지 않았고, 팬들은 이 사건을 두고 격한 논쟁을 주고받았다.

[30년 발언의 연장인가?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 의도는 무슨 의도, 메이저리거가 얼마 전까지 마이너리그에서 머문 상대 팀 선수까지 기억해야 되냐?

-> 솔직히 다카기한테 비비는 게 웃기지, 이건 기자들이 괜한 짓해서 채근성 망신 준 거다.

-> 한국 말 할 줄 아는 왜구들이 왜 이렇게 많아. 한국에서 좀 꺼져줄래?

-> 너나 꺼져라. 모르는 거 모른다고 하는 게 죄냐? 채근성도 이번 일로 뭔가 자극을 받았겠지. 닥치고 지켜보기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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