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153화 (153/361)

153화. He could do everything - (17)

‘얘들이 이젠 쌍으로 ··· ’

1회에 3점을 냈지만 보스턴의 여유로운 리드는 오래가지 않았다.

2회 초, 후안 위긴스가 우익수 앞에 떨어지는 평범한 타구를 뒤로 빠뜨렸고 뉴욕은 이 실책을 발판 삼아 2점을 따라붙었다.

좌익수 돈론이 형편없는 수비로 자신의 가치를 깎아내고 있는데 이제는 위긴스가 그 뒤를 따르는 분위기, 사실 두 선수뿐만이 아니라 보스턴 선수단 전체가 작년에 비해 나사 빠진 모습을 자주 보여주고 있다.

1회 말, 무사 2-3 루에서 병살이 나오는 게 상식으로 가능한 상황인가. 그런데 보스턴은 그걸 해냈다.

일단 실 쿠퍼의 타구가 1루수의 호수비에 걸린 건 어쩔 수 없던 일, 그런데 주자들은 무리한 대시를 하다 야수진의 몰이사냥에 걸렸다.

뉴욕의 목표는 홈으로 달리던 3루 주자, 그런데 여기서 또 무슨 망령이 들었는지 1루수 조 프리츠가 송구 과정에서 공을 떨어트리는 실책을 저질렀다.

그 사이 3루 주자는 홈인, 2루 주자는 1루수가 공을 떨어트린 사이 3루로 가다 아웃 당했다.

양 팀 모두 초반부터 집중력 부족에 개그남발, 이런 게 메이저리그의 플레이인가. 내가 저런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건 창피한 일, 다카기는 쏟아지는 실책에 인상을 구겼다.

‘이것도 좀 아쉽네.’

3회 초, 보스턴은 다시 한 번 수비에서 아쉬운 모습을 보였다.

일반적으로 더블 플레이를 노릴 땐, 야수 간의 거리를 좁히고 약간 전진 수비를 하는 게 정석처럼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이건 타자의 타구 방향이 데이터화 되지 않았던 시대에서 통했던 전략, 쉬프트가 만연하는 현대야구에선 병살을 잡기 위한 최적의 전략은 없다.

모든 게 정보화 되다보니 야수들도 그걸 다 숙지하는 건 불가능, 결국 코치진이 자리를 잡아주기도 하는데, 선수 재량에 따라 워치를 조정하는 건 허용된다.

문제는 보스턴에 병살 플레이의 축이 될 선수가 없다는 것, 유격수가 그 역할을 하는 편인데, 작년 시즌 맥 리스는 병살 상황에서 48%만 성공시켰다.

무려 74%의 성공률을 기록한 애틀랜타의 골드블럼에 비하면 처참한 수준, 거기다 맥 리스는 올 시슨 갈비뼈 부상 여파로 송구에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더 떨어진 병살 확률 때문에 최근 1루수로 기용되고 있지만, 유격수 자리에서 병살 플레이를 지휘해 줄 선수가 없다는 것도 보스턴의 약점, 물론 그런 슈퍼 플레이어를 보유한 팀이 얼마나 되겠는가.

딱히 두드러지는 약점은 아니지만, 병살로 끝날 이닝이 늘어지자 다카기는 아쉬움을 표했다.

‘내 뒤로 들어와’

2사 주자 1루에서 다카기는 유격수 JJ 핵먼에게 사인을 줬다.

핵먼은 그라운드 볼 처리 능력은 괜찮지만 어깨가 약한 게 흠, 오늘 따라 깊숙한 타구가 많아 수비에 애를 먹고 있다.

거기다 뉴욕 타선은 3루를 노리는 분위기, 내 수비가 형편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본업이 유격수라 수비범위는 자신 있는 편, 핵먼에게 뒤를 맡긴 다카기는 옆으로 지나가는 타구를 빨아들였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3루 송구, 수준 이하의 개그쇼에 눈이 먼 팬들은 안정적인 수비에 환호를 보냈다.

‘저 자식은 도대체 뭐야?’

뉴욕의 개리 페일 감독은 경악했다.

어느 순간부터 내야진의 수비 위치까지 조정하고 있는 3루수, 저 녀석의 본업은 분명 투수다.

그런데 내야진이 저 선수의 지휘를 받다니, 보스턴은 저런 어린애 손에 운전대를 쥐어줄 셈인가.

그런데 놀라울 정도로 맞아떨어지는 수비, 이건 꿈도 영화도 아니다.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 아니 페일 감독의 악몽은 지금부터 시작 됐다.

“자, 5회 말 보스턴의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선두타자는 다카기 하루요시, 오늘 첫 타석은 적시 3루타, 두 번째 타석에선 3루 땅볼로 물러났습니다.”

“두 번째 타석은 변화구만 3개를 던져서 잡아냈거든요. 뉴욕 배터리가 이번에는 어떤 선택을 할지 지켜보겠습니다.”

초구는 바깥쪽 체인지업, 예상했던 패턴이라 다카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배터리가 이번에도 변화구 위주의 볼 배합을 짠다면 이번엔 카운트를 잡으러 들어오겠지. 그래도 빠른 볼에 초점을 맞췄다.

‘변화구네’

카운트를 잡으러 오는 공, 마지막까지 앞발을 닫아두고 최소한의 스윙으로 걷어 올렸다.

따아악!!

“좌측 높게 가는 타구가! 그대로 담장 밖으로 사라집니다! 다카기 하루요시의 올 시즌 첫 홈런! 스코어 4대 2! 뉴욕의 추격을 뿌리치는 한 방입니다.”

“참고로 이 선수는 이틀 뒤 마운드에 오를 예정입니다. 뉴욕의 악몽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라는 거죠.”

보스턴 중계진은 노골적으로 뉴욕을 조롱했다.

다카기는 뉴욕을 상대로 통산 2승, 평균자책점 0.73이라는 강세를 보였다. 그렇잖아도 신경 쓰이는 자식인데 이틀 일찍 나와 깽판을 치고 있으니 뉴욕 입장에선 속이 쓰리는 광경, 개리 패일 감독은 그렇게 시리즈 1차전 패배를 지켜봐야 했다.

눈치 없는 보스턴 지역기자들은 원정팀 클럽하우스로 몰려가 인터뷰를 요청, 무례한 질문에 개리 패일 감독도 감정적으로 맞대응했다.

“나한테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건데? 어? 우리는 오늘 졌다고, 그런데 기분이 어땠냐고? XX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기자들의 속셈은 훤히 보였다. 다른 선수도 아니고 투수가 본업인 선수에게 끌려 다녔으니 그걸 콕 집어내고 싶었겠지, 하지만 페일 감독은 보스턴을 사정없이 깎아내렸다.

“세상에 어떤 멍청이가 에이스를 3루수로 기용하겠어? 오늘 보스턴은 선수진이 얇다는 걸 스스로 증명했을 뿐이야. 한 경기 이겼다고 잘난 척 하지 말라고, 보스턴은 올 시즌 우승 못해. 너희들이 우리를 조롱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리고 질문을 안 받을 테니까 다들 여기서 꺼져.”

되로 주려다 말로 받은 상황, 승자 인터뷰에서 다카기도 개리 페일 감독과 비슷한 입장을 표했다.

“이기긴 했지만, 오늘 선수들의 집중력은 실망스러운 편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실망스러웠습니까?”

직접 뛴 경기라 다카기는 모든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무사 주자 2 - 3루에서 나온 병살, 후안 위긴스의 어처구니없는 실책, 그리고 생각보다 유연하지 못했던 내야진, 뉴욕이 워낙 형편없는 경기를 한 덕분에 이기긴 했지만 다카기는 이런 식이라면 올 시즌 우승은 어렵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건 동료들을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문제점을 고쳐서 앞으로 더 잘해보자는 취지에서 하는 말이죠. 그리고 함께하다보면 언제나 좋은 말을 해주고 웃는 모습만 보일 순 없습니다.”

보스턴은 4월 내내 부진에 시달리다 5월 들어 반등에 성공, 얼마 전 AL 동부지구 1위를 탈환했다.

그럼 더 집중해야 되는데, 작년의 우승에 이어 올해도 잘 풀리는 흐름에 선수들이 자만한 건 아닐까.

다들 분위기가 깨질 까봐 쉬쉬 했지만 누군가가 총대를 짊어져야 했던 일, 아니나 다를까 인터뷰가 끝나고 수더랜드 단장이 클럽하우스에 들이닥쳤다.

제법 심각한 분위기에 선수들은 서로 눈치만 살필 뿐, 꾹 닫혀있던 단장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 팀에 3루를 볼 선수가 이 친구뿐이야?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자네들은 어때?”

에이스가 3루를 봤다는 것 자체가 뭔가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거기다 듣자하니 후안 위긴스는 3루를 보라는 감독의 지시를 무시했다. 무시한 건 좋은데, 그럼 선수들이 협의해서 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

서로 책임을 떠넘기다 결국 다카기가 맨 총대, 에이스가 3루를 보겠다면 말려야 되는 게 정상인데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 선수들의 이기심에 화가 났다.

이건 다 클럽하우스에 제대로 된 리더가 없는 게 문제, 하지만 마땅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라 누구 한 명을 콕 집어내기도 껄끄러웠다.

앤디 프론스키는 경력이나 실력은 뛰어나지만 보스턴 프랜차이즈 스타가 아니라는 게 문제, 보스턴은 의외로 보수적이라 그런 점을 많이 따진다.

거기다 워낙 독설가라 캡틴의 자리엔 부적절한 성격, 그럼 인덕이 있는 짐 브라이스 감독에게 힘을 실어 줘야 하는데, 이래저래 간섭하길 좋아하는 수더랜드 단장은 감독에게 필요 이상의 권한을 쥐어주진 않았다.

“제가 한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이때 손을 든 문제의 주인공, 다카기는 내가 3루를 본 건 문제가 안 된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투수가 3루 보면 안 된다는 규정이라도 있습니까? 하기 싫은 거 억지로 시키면 동기부여도 안 되고 결과도 안 좋다는 거 아시잖아요? 저는 오늘 3루 본 거 기분 나쁘지 않아요. 오히려 즐거웠다고요.”

진짜 문제는 선수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나사 빠진 모습을 보여줬다는 것, 그것만 지적하면 되는데 왜 내가 3루를 본 걸 가지고 트집을 잡는 건가?

다카기는 논점을 벗어났다며 훈수를 뒀다.

“저는 앞으로도 기회 있으면 3루 보고 싶어요.”

“아니 ··· 자네는 그럴 필요 ··· ”

“3루 본다고 돈 더 달라고 안 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

무슨 말을 해도 칼처럼 커트, 호기 있게 쳐들어 왔다가 기세가 꺾인 단장은 주도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난 오늘 간만에 3루 봐서 즐거웠어. 딱히 동료들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그런데 오늘 너희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보여준 모습은 진짜 아니었어. 그건 인정하잖아?”

다들 인정하는 분위기, 특히 오늘 뭐 하나 제대로 한 게 없는 후안 위긴스는 고개를 못 들었다.

보아하니 3루수 출전을 거부한 일로 감독은 물론 단장에게도 찍힌 것 같은데, 아직 2년차 선수라 윗사람의 눈치를 봐야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3루 출전이 즐거웠다는 다카기의 말도 큰 위로는 되지 않았다.

오히려 자존심만 상했을 뿐, 치욕스럽지만 뭐가 문제인지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그래, 인정했으면 고치면 되지. 그만 해산”

다카기는 단장이 주도한 집합을 자기 뜻대로 해산시켜버렸다.

다들 머리가 컸는데 위에서 뭐라고 해봤자 얼마나 먹히겠나. 반감을 안 품으면 다행, 뭣보다 단장이 클럽하우스까지 쳐들어와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도 보기 좋은 일은 아니다.

그리고 다들 잘못을 인정했는데 잔소리해서 뭘 어쩔 건가. 앞으로도 잘해보자며 좋게 마무리 했다.

[단장까지 돌려세웠다]

이 사건은 기자들의 좋은 기삿거리가 됐다.

수더랜드 단장이 클럽하우스에 쳐들어온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거기다 구단주가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입장이라 선수들도 그 앞에선 꼬리를 내려야 하는 입장, 그런 단장도 다카기 앞에서 격퇴 당했다.

상대타자들을 더그아웃으로 돌려세우는 것도 대단한데 이젠 날뛰는 단장까지 진압, 하지만 다카기는 쏟아지는 기사에 씁쓸한 반응을 보였다.

‘날 매장 시키시겠다?’

다카기는 단장이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단장을 삼진으로 돌려세운 것처럼 자극적인 말을 쏟아내고 있는 여론, 다카기는 단장을 이겨먹겠다는 뜻으로 그런 짓을 벌인 게 아니다.

그저 단장이 클럽하우스에 쳐들어 와 이래저래 하는 모습이 보기 안 좋아서 좋게 마무리 하려고 했던 것 뿐, 막말로 단장을 그냥 놔뒀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수더랜드는 상대를 배려하는 성격이 아니다.

분명 선수들의 자존심을 깎아내리는 발언을 했을 테고 언성이 높아지면 서로 얼굴 붉힐 일도 일어났을 텐데, 그게 기자들이 바라는 일인가.

지금이야 실력이 받쳐주니 별 일이 없지만, 문제가 생기면 날 바라보는 단장의 시선도 달라지겠지, 다카기는 이번 일로 단장과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틈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내렸다.

‘뭐, 그땐 나도 옵트 아웃 실행하고 나가면 그만이지’

그렇다고 단장 눈치를 보진 않았다.

우리를 맺어주고 있는 건 얄팍한 계약서 한 장 뿐, 서로 잘 해보자고 한 일인데 그 정도로 앙심을 품는다면 헤어지면 그만 아닌가.

인생의 장기계약은 결혼이면 충분, 보스턴과 13년 계약을 맺었지만 이 관계가 끝까지 갈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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