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148화 (148/361)

148화. He could do everything - (12)

‘내년에도 투수 확정이군.’

일본에서 2021 시즌을 준비하던 다카기는 바쁘게 움직이는 스토브 리그를 관망했다.

쓸 만한 투수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왔지만 패트릭 브린을 제외하면 눈에 띄는 투수는 없는 편, 그에 비해 대홈런 시대답게 야수는 공급과잉 현상을 보였다.

[데이브 셰퍼드, FA 재수 택했다]

클리블랜드의 주포 데이브 셰퍼드도 이런 흐름에 막대한 손해를 봤다.

셰퍼드는 8년 연속 30홈런을 때려낸 거포, 작년 시즌도 잔부상에 시달리며 30경기를 결장했지만 마지막 경기에서 극적으로 30홈런을 때려냈다.

문제는 클리블랜드가 희망이 보이지 않는 팀이라는 것, 지난 2018시즌, 클리블랜드는 에이스 패트릭 브린과 주포 데이브 셰퍼드를 앞세워 월드시리즈 우승에 도전했다.

하지만 ALCS에도 좌절된 야망, 개혁에 착수한 클리블랜드 구단은 2020시즌 중반에 유망주를 받고 패트릭 브린을 캔자스시티에 넘겼다.

‘나에겐 시간이 없다고’

하지만 데이브 셰퍼드는 구단의 정책에 동의하지 못했다.

나도 이제 32살,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월드시리즈 우승을 해야 하는데, 30대 선수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리빌딩을 감수해야 하는 건가. 셰퍼드는 지난 2016년, 클리블랜드와 7년 1억 2천만 달러 계약을 맺었지만 이런 팀에선 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옵트 아웃을 실행하고 FA 시장에 나왔지만 예상 외로 싸늘한 분위기, 그래서 보스턴과 1년 2000만 달러 계약을 맺고 FA 재수를 택했다.

투수 몸값이 뛸 수밖에 없는 분위기, 투구보다 타격을 더 좋아하지만 몸값을 올리려면 역시 투수를 하는 게 나았다.

“자기야, 뭐봐?”

“응 기사”

눈치를 살피던 키리코는 스포츠 기사를 들춰보는 약혼남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이젠 동거하는 사이, 고개만 돌려도 얼굴이 보이지만 역시 옆에 붙어 있는 편이 더 좋았다. 틈만 나면 찰싹 달라붙는 강아지, 장난기가 발동한 다카기는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늘 양치질 했어?”

“나한테서 냄새나?”

진심으로 당황한 얼굴,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입 냄새를 풍기다니, 키리코는 도망치듯이 세면대로 달려갔다. 서두르는 뒤태가 어찌나 귀엽던지, 다카기는 장난이었다며 토라진 강아지를 끌어안았다.

사귀는데 불편함이 있다면 키스 할 때 허리를 숙여야 한다는 것 정도, 하지만 침대 위에선 그런 제약도 없었다.

‘이러다 사고 치면 안 되는데’

그래도 다카기는 임신만은 안 되도록 신경을 썼다.

약혼녀는 앞길이 창창한 의대생, 지금 임신하면 학업에 지장을 받을 것 아닌가. 하지만 키리코는 그까짓 거 휴학하면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애기 낳으면 누가 키워?”

“괜찮아, 우리 엄마가 낳기만 하라고 하셨어.”

다카기는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물론 결혼은 할 거지만 자녀계획은 신중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잔말말고 낳기만 하라니, 농담으로 한 말이겠지만 그걸 실천하려는 약혼녀가 부담스러웠다.

“우리 그건 천천히 가자. 급할 거 없잖아?”

“알았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키리코는 틈만 나면 신체접촉으로 약혼남을 유혹했다. 해가 바뀌면 미국으로 훌쩍 떠나갈 사람, 아기로 발목에 족쇄를 채울 생각은 없지만 이 남자를 품에 안아야 안심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카기는 유혹공세를 피해 훈련장으로 피신, 훈련을 마치고 고교시절 야구부 코치로 활동한 다나카 선생님과 얼굴을 마주했다.

살만 닿으면 대형사고가 일어나는데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결혼한 지 2년 밖에 안 된 코치님에게 조언을 구했다.

“너 왜 동거 한 거냐? 남들 눈치 안 보고 이런 짓 저런 짓 하려고 그런 거 아니냐?”

다나카 코치는 한방에 고민을 정리했다.

젊은 남녀가 뭘 위해 동거를 하겠나. 결혼하기 전에 같이 살아보며 상대를 염탐하는 게 목적인가.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서로의 욕망에 충실해지기 위한 목적도 있다.

다카기가 키리코와 동거를 시작한 이유는 솔직히 말하면 후자의 경우, 어쩌다보니 약혼식까지 해버렸지만 결국 본능에 충실한 행동이 일을 여기까지 끌고 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신체적 접촉이 부담스럽다? 난 정말 약혼녀의 장래가 걱정 돼 그런 말을 한 걸까? 아니면 벌써 싫증을 느끼고 그럴 듯한 변명을 앞세운 걸까? 진지하게 고민해 봤다.

“그래, 쓸데없는 친절이었어.”

고민이 길어졌지만 답은 나왔다.

키리코는 왜 내 앞에서 아기니 뭐니 하는 말을 꺼낸 걸까. 남들은 장래가 촉망되는 의대생이니 뭐니 하며 사회적 지위를 강조하는데, 정작 키리코에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급할 게 없다며 슬쩍 발을 뺐으니 내색은 안 해도 서운했겠지. 피할 게 아니라 정면으로 마주하고 진지하게 논의 할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 마음 가는대로 하자.’

다카기는 그날부터 본능대로 움직였다.

처음부터 이러려고 시작한 동거 아닌가. 애정표현이 뜸한 날엔 한 발 더 치고 나갔고 덕분에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 * *

“그게 지금 무슨 소리니?”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어요]

시간은 흘러 12월 중순, 아들의 전화를 받은 다카기 어머니는 폭탄선언에 할 말을 잃었다.

약혼녀가 임신을 했다는 전화, 며칠 전부터 심상치 않은 조짐이 있어서 병원에 갔는데 확정 판결을 받아냈다.

아직 여론에 알리진 않았지만 집안 어른들에겐 알려야겠지, 기뻐할 일이지만 브레이크도 없이 달려버린 아들 때문에 다카기 어머니는 꽤 큰 충격을 받았다.

“역시 당신 아들이네요.”

“흐음 ··· ”

아내의 핀잔에 다카기의 아버지는 헛기침으로 무안함을 달랬다.

지은 죄가 있으니 딱히 할 말은 없는 입장, 40대 중반에 할아버지가 된다는 건 조금 쑥스러웠지만 손자가 태어난다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하하 ~ 그 녀석 능력 좋네.”

“뭐가 능력이 좋아요?”

“그 나이에 아빠 되는 거 쉽지 않잖아요.”

만 20세 밖에 안 된 녀석이 가정을 이루는 게 쉬운 일인가.

거기다 이미 메이저리그에서 한자리를 차지한 스타, 경제적 능력까지 갖췄는데 아이 아버지가 된다고 누가 뭐라고 하겠나. 다만 페이스가 너무 빨랐을 뿐, 다카기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할아버지한테는 전화 드렸데요?”

“그건 ··· 미처 못 물어봤네요.”

“그럼 그건 내가 해야겠네.”

다카기 아버지는 바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설마 내가 증손자까지 보게 될 줄이야. 5년 전,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고영길은 그 자리에서 펄쩍 펄쩍 뛰며 기쁨을 표했다.

날개가 달렸다면 그대로 천장을 뚫고 하늘로 날아갈 것만 같은 느낌, 집안의 대를 이어준 손자며느리에게 그만한 성의를 표했다.

“앞으로 그건 네 명의로 돌릴 거다.”

[아니 ··· 이러지 않으셔도 돼요.]

“이러지 않기는!! 이 정도는 당연히 해줘야지!!”

고영길은 본인 명의로 가지고 있던 건물을 키리코 이름으로 돌렸다.

나이가 나이라 재산을 자손들에게 물려줘야 하는 입장, 거기다 상대는 손자며느리라 증여세는 물지 않아도 됐다.

임신 했다고 건물을 물려받다니, 시기 많은 여론은 키리코에게 질투의 눈길을 보냈지만 다카기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세금을 피해 손자나 며느리에게 증여를 하는 건 흔한 일 아닌가, 거기다 그동안 사회를 위해 기부도 많이 했으니 꿀린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이제는 아빠가 됐다. 역시 뭐든 할 수 있는 남자]

보스턴 여론도 큰 관심을 보였다.

그 어린 선수가 메이저리그 로스터를 차지하고 월드시리즈 무대까지 평정한 것도 놀라운데, 몇 달 사이에 아빠가 됐다는 뉴스가 날아들었으니 기가 막힌 일, 역시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는 능력자라며 치켜세웠다.

“다음엔 또 어떤 일로 팬들을 놀라게 하실 생각입니까?”

“당분간은 조용히 지내려고요.”

다카기는 기자들의 관심에 손사래를 쳤다.

야구선수가 유명세를 타는 건 좋은 일이지만 요즘은 그 정도가 너무 과한 편, 당분간 조용히 지내고 싶다며 인터뷰도 거부했다.

‘그건 그렇고 아직도 실감이 안 되네.’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면 약혼녀의 배부터 어루만졌다.

이 안에 정말 내 2세가 들어 있는 건가. 뱃속에 있는 녀석에게 애정을 표할 순 없고, 그 몫은 키리코에게 돌아갔다.

“나 오늘 예뻐?”

“그럼, 당연하지.”

“어디가 그렇게 예쁜데? 구체적으로 설명해 봐”

오늘도 시작된 사랑싸움, 다카기는 진지한 얼굴로 대화를 이어갔다.

“원래 예쁜데 지금은 내 자식도 품고 있잖아. 그러니까 더 예뻐 보여”

“칫 ~ ”

키리코는 살짝 불만을 표했다.

결국 날 향한 관심은 자식에 대한 애정도 포함됐다는 거 아닌가, 하지만 어느 날 찾아온 손님이 반가운 건 엄마도 마찬가지, 두 사람은 아이의 장래를 두고 이런저런 말을 나눴다.

이젠 커플이 아니라 부부, 연애기간이 좀 짧긴 했지만 그런 아쉬움은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딸이었으면 좋겠다.”

“왜?”

“여자가 집에 많아야 분위기가 밝잖아.”

“딱히 그런 것도 아니야. 내가 살아 봤잖아.”

키리코는 집에 여자가 많아도 분위기가 마냥 밝은 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4인 가족 중 여자가 3명이나 있지만 아버지 때문에 분위기는 다소 냉랭했던 편, 물론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여자가 많다고 분위기가 좋아진다는 의견엔 동의 못 했다.

오히려 다카기가 끼어들면서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 아버지, 집안 분위기는 모두가 함께 만들어 가는 것 아닌가.

듬직한 아들이 중심을 잡아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키리코는 첫 아이는 아들이 좋겠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자기는 아들한테 어떤 아빠가 되고 싶어?”

“벌써 아들로 확정된 거야?”

“응, 빨리 말해 봐. 어떤 아빠가 되고 싶어?”

“음 ··· 그냥 너한테 잘해줄래.”

다카기는 한 말 물러선 반응을 보였다.

여자아이면 마음껏 귀여워해주겠는데 남자아이는 왠지 다가가기 어려울 것 같은 느낌, 나랑 똑같은 녀석이 태어나면 어쩌나. 벌써부터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 아내에게 애정을 주면 그게 아들에게 가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왜 그런 생각을 해, 아들도 예뻐해 줘야지.”

“안 예뻐한다는 게 아니잖아. 애정은 전염되는 거라고, 너한테 잘해주면 아들도 애정을 받고 ··· 그럼 문제없는 거 아냐?”

그럴 듯한 논리지만 키리코는 약간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살가운 아버지가 되길 바랐는데 왠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 하지만 겉보기엔 무뚝뚝해도 정이 많은 사람이라 자식이 태어나면 누구보다 아껴줄 거라고 확신했다.

“참, WBC는 어떻게 하기로 했어?”

“안 나갈 거야. 돈도 안 되니까”

다카기는 WBC 불참으로 방향을 잡았다.

다카기 뿐만 아니라 많은 일본 선수들이 불참을 선언한 상황, 시즌 개막에 맞춰 몸을 만들어야 하는 야구선수들에게 국제대회는 별로 달가운 일이 아니다.

이겨봤자 본전, 지면 망신, 누가 이런 대회를 치르려고 하겠나. 뭣보다 앞길이 창창한 다카기는 일본의 우승을 이끈 영웅이라는 그럴듯한 칭호보다 실리를 택했다.

요즘은 투수 몸값이 뛰고 있는 시대, 13년 2억 달러 계약을 걷어찼으니 그보다는 더 받아내야 할 것 아닌가.

뭣보다 조만간 아빠가 될 몸, 돈을 벌어야겠다는 의욕은 더욱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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