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He could do everything - (11)
“자기야, 전화 온다.”
“응”
꿈틀거리는 이불 속에서 다카기는 휴대폰을 움켜쥐었다. 발신 번호는 해외, 뭔가 감이 왔지만 통화버튼을 누르진 않았다.
지금 상보다 중요한 게 이불 속에 있는데 그게 무슨 대수랴, 그렇게 대낮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낸 두 남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민망한 건지, 문제의 장소에서 한참이나 멀어지고나서야 뛰는 가슴이 조금은 진정됐다.
“자기야. 우리 동거하는 거 어떻게 생각해?”
뛰는 가슴도 그때 뿐, 키리코는 쐐기를 박는 승부수를 던졌다. 요즘 결혼은 안 해도 동거하는 커플은 많은 편, 다카기도 별 다른 고민없이 승낙했다.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사는 게 그렇게 고민할 인인가. 우리도 이젠 성인, 부모님들께는 통보를 했지만 별도로 허락을 구하진 않았다.
“얘는 기록 깨는 취미 있나 봐요.”
“얘가 못하는 말이 없네.”
“틀린 말 한 거 아니잖아요. 와 ~ 걔가 동거?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다카기의 누나 미사키는 엄마의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장연설을 늘어놨다.
2년 만에 메이저리그에 승격하더니 월드시리즈 우승, 역대 최연소 mvp 수상, 거기에 신인왕까지 차지한 동생, 그런데 이제는 결혼인가.
우리 집안에서 가장 빨리 결혼한 사람은 아빠(23살), 하지만 그 기록도 이젠 갱신을 눈앞에 뒀다. 여자에겐 관심 없다는 얼굴로 살아온 동생이 설마 동거까지 할 줄이야, 세상이 뒤집힐 일이라며 엄마 속을 긁어댔다.
“언니야, 동거가 뭐야?”
“좋아하는 사람이랑 같이 사는 거야.”
“그럼 나도 오빠랑 그거 할래”
아무것도 모르는 젖먹이는 오늘도 천하태평, 미사키는 의욕에 불타는 막내 동생을 품에 안고 그것만은 참아달라며 다독였다.
“후우 ~ 역시 피는 못 속이네.”
체념했는지 다카기의 어머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그 핏줄이 어디 가겠는가. 평소 얌전한 아들이었지만 여자를 품으면서 리미터가 해제된 거겠지. 다 큰 자식 일에 이래저래 간섭하기도 그렇고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럴 거면 약혼을 하는 게 어떠냐?’
한편, 고영길은 이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 기뻐했다. 동거는 결혼으로 가는 중간 과정, 거기까지 갔다면 약혼식은 해도 되지 않을까.
집안 최고 어른이 불타오르는 장작불에 기름을 끼얹으면서 양가의 주요 인물들도 약혼을 진지하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허허 그래, 만나서 반갑구나.”
고영길은 손자며느리가 될지도 모르는 키리코를 격하게 환대했다. 듣던 것보다 훨씬 단정하고 아리따운 아가씨, 역시 우리 손자가 보는 눈이 있다며 분위기를 띄웠다.
“그래서, 식은 언제 올릴 거냐?”
“아버지, 오늘은 그냥 논의만 하기로 ··· ”
“그게 그거지, 자네 결혼할 때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다카기의 아버지는 친부의 핀잔에 얼굴을 붉혔다. 남의 집 딸을 임신시키고 결혼하겠다며 집안 식구들을 들볶은 게 누구인가.
그거에 비하면 잠만 잔 손자는 양반, 다카기의 아버지는 나는 새도 떨어트리는 그룹의 총수지만 과거에 지은 죄 때문에 이 자리에선 발언권이 인정되질 않았다.
“두 사람이 좋다면 뒤로 미룰 필요는 없죠.”
키리코의 아버지도 약혼을 서둘렀다. 다카기는 예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던 사윗감, 약혼이 성사 된다면 그것만큼 기쁜 일도 없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일사천리로 진행된 논의, 특별한 일이 없는 한 11월에 식을 올리기로 입을 모았다.
“진짜 결혼하나?”
일본 기자들은 이 수상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모텔에서 나오는 두 사람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힌게 불과 며칠 전, 애가 생겨서 결혼을 서두르는 게 아니냐는 소문까지 돌자 다카기는 진화에 나섰다.
“같이 잔 건 맞는데 아이가 생긴 건 아닙니다.”
해명에 기자들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틀린 말은 아닌데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안했다는 궤변처럼 들리는 건 왜일까.
어쨌든 기자들의 질문은 계속됐다.
“그럼 약혼은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까.”
“아니요. 인생에서 계획대로 되는 게 어디 있습니까.”
다카기는 키리코를 만나기 전만 해도 이렇게 빨리 연애를 시작할 줄은 예상도 못했다. 그런데 이젠 약혼이라는 말까지 오가는 상황, 이번 일로 확실히 깨달은 게 있다.
결혼은 좋은 사람을 만나면 시기와 상관없이 하는 게 정답 아닐까. 나는 인연을 조금 일찍 만났을 뿐, 세상의 주목을 받거나 이상하게 여길 일은 아니라며 못을 박았다.
“다카기 선수의 짝이 될 그 분은 어떤 사람인가요?”
“알려진 것보다 대단한 사람입니다.”
다카기는 예전부터 유명했지만 키리코는 아직 베일에 싸인 존재,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평범한 여자가 남자 하나 잘 만나 팔자를 펴게 됐다는 막말을 늘어놨다.
하지만 그건 오해, 키리코의 아버지는 대학병원 원장이고 집안 형제들도 각 분야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다.
그뿐이랴, 키리코 본인도 일본 최고의 사립명문대에서 의사 수업을 받고 있는 엘리트, 남자 하나 물어서 팔자 고쳤다는 악담은 헛소리에 불과했다.
사회에서 힘깨나 쓰는 집안의 결합, 세기의 약혼이라 칭할 정도는 아니지만 여론의 관심을 끌기엔 충분했다.
* * *
‘때가 됐군.’
다카기의 약혼 소식을 접한 수더랜드 단장은 연장계약을 서둘렀다.
이런 건 시간을 두고 천천히 논의하는 게 정답이지만, 상대가 바쁜 일로 정신을 못 차릴 때 우르르 몰아붙이는 전략도 필요한 법, 다카기가 약혼식 준비로 들뜬 틈을 노렸다.
계약 기간은 연봉조정 신청 자격을 얻는 2023년부터 2033년까지, 총 연봉은 1억 4천 5백만 달러, 처음에 제시했던 계약보다 기간은 줄이고 총액은 늘리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뭐 ··· 나쁜 조건은 아니지만 ··· ’
제임스 콜튼은 결단을 망설였다.
옵트 아웃이 포함된 계약은 아니지만 고작 풀타임 1년을 소화한 루키에게 이만한 계약을 제시한 구단은 없다.
구단 입장에선 나름대로 성의를 표한 것, 하지만 계약이 만료되면 다카기는 33세에 FA 자격을 얻는다.
다시 한 번 대박을 노리기엔 많은 나이, 제임스 콜튼은 총액을 늘려줄 게 아니라면 총액은 1억 달러로 정하고 계약기간을 8년으로 줄이자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 했다.
“그럼 총 13년에 2억 달러는 어떻습니까?”
보스턴은 총액과 기간을 모두 늘리며 본질을 흐렸다.
요즘은 검증된 베테랑 투수에게도 2억 달러를 투자하는 시대가 아니다. 만 20세 선수가 2억 달러 반열에 오른다는 건 그 자체로 대단한 일, 제임스 콜튼도 이 정도면 실리와 명분은 다 챙겼다는 판단을 내렸다.
“인생의 장기계약은 결혼으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다카기는 13년이나 되는 계약에 거부감을 표했다.
말이 좋아 2억 달러지 13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아나, 연봉은 내가 한 만큼 받고 계약기간은 최소화하는 게 서로에게 좋겠지, 이 논의는 연봉조정 자격을 얻는 2023년에 다시 하자며 퇴짜를 놨다.
“아니? 도대체 왜?”
이 소식을 접한 수더랜드 단장은 할 말을 잃었다.
2억 달러도 성에 안 찬다는 건가? 그것보다 인생의 장기계약은 결혼으로 충분하다는 말에 실연 이상의 충격을 받았다.
일이 틀어지면 언제든지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있다는 뜻 아닌가, 뭣보다 보스턴은 프랜차이즈 스타들을 토사구팽하는 정책으로 유명한 구단, 혹시 그런 이미지가 연장계약을 거부로 이어진 건 아닐까.
수더랜드 단장은 트레이드 거부권까지 보장해 주며 다카기의 마음을 붙들기 위해 노력했다.
“저는 아직 FA 자격 얻을 때까지 시간이 있으니까 전력 강화에 신경 써 주세요.”
하지만 다카기는 구단에 전력 강화를 요청했다.
보스턴은 올해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지만, 시즌 내내 선발투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만큼 불펜의 부담이 심했던 것도 사실, 내년에도 기분 좋게 시즌을 마무리 할 수 있을까.
월드시리즈에서 갈비뼈가 골절되는 부상을 입은 맥 리스가 건강하게 돌아와 줄지도 의문, 팀의 주축 야수들도 나이 때문에 활약을 장담하기 어렵다.
폴 돈론과 후안 위긴스가 가능성을 보여줬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 만약 2억 달러 제안을 받아들이고 2021시즌이 순탄치 않게 흘러간다면 여론은 누구에게 책임을 묻겠는가.
고액연봉자가 된 이상 다카기도 책임을 져야겠지, 내가 어린 나이에 그만한 짐을 짊어져야 하나. 돈도 좋지만 다카기는 팀에 문제가 생겼을 때 나와 같이 총대를 짊어질 선수가 몇 명은 있길 바랐다.
‘튀어나온 말뚝은 처박히기 마련이지. 난 바보가 아니라고, 지금은 때가 아니야.’
그렇게 다카기는 2억 달러를 걷어차고 공식 활동을 재개했다.
첫 활동은 봉사, 올해도 일일 산타가 된 동생 뒤를 따라다니며 착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줬다.
“저희도 후원하고 싶습니다.”
이때, 일본 내 파칭코 사업으로 1 ~ 2위를 다투는 구루지마 미치오가 손을 뻗어 왔다.
세상이 썩었는데 돈의 깨끗함 더러움이 어디에 있나, 예전부터 내게 관심을 보였던 사람이라 다카기는 내민 손을 외면하지 않았다.
“요즘 봉사활동 자주하신다면서요?”
“하하 ~ 먹고 살려면 그렇게 해야죠. 도련님과 달리 저희는 이미지가 별로 좋질 않으니까요.”
구루지마는 자존심까지 굽히며 친분을 표했지만, 다카기는 먹고 살려고 봉사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라며 속마음을 드러냈다.
“솔직히 저는 지금 삶에 만족하거든요. 하지만 이 삶을 유지하려면 세상이 평화로워야 하잖아요.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사람들도 불만이 쌓일 테고 ··· 결국 그 화는 언젠간 내게 돌아오겠죠. 그래서 봉사활동 하는 거예요.”
“하하 ~ 그런 거였습니까?”
“네, 그러니까 봉사활동도 결국 나 자신을 위해 하는 거죠. 그것도 모르는 놈들이 암처럼 사회의 피와 살을 빨아먹고 사는데, 결국 언젠간 대가를 치르지 않을까요?”
구루지마는 다카기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하긴, 출세 좀 했다며 으스대는 놈들의 공통점은 나 자신 밖에 모른다는 거다. 암덩이는 숙주의 양분을 쪽쪽 빨아가며 성장하는데 숙주가 죽으면 결국 본인도 사멸할 수밖에 없는 신세다.
그것도 모르고 사회에 기생해 암덩이처럼 살아가는 놈들, 그게 자신의 목을 죄는 짓이라는 것도 모른다는 게 더 기가 찬 일이다.
그에 비해 이 어린 친구는 어떤가? 사회에 베푸는 것도 나 자신을 위한 행동이라는 걸 알고 있지 않은가. 처음엔 사업상대로만 생각했는데 생긴 것만큼 성격도 시원시원, 앞으로 형 동생 사이로 지내고 싶다는 뜻을 표했고 다카기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아, 그러고 보니 다음 달에 약혼 하신다고 들었는데 ··· ”
“형 동생 하기로 한 거 아니었나요?”
구루지마는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내가 19살이나 더 많은데 왜 이렇게 말을 놓는 게 어려운 건지, 그래도 용기를 냈다.
“이번에 약혼한다고 들었는데 내가 선물 하나 해도 되겠나?”
“선물 주실 돈 있으면 제 이름으로 기부하세요. 그게 저한테 더 이득이에요.”
“하하 ~ 그게 자네가 원하는 일이라면 그렇게 해주겠네.”
구루지마는 다카기 이름으로 1천 만 엔을 기부했다.
남의 돈으로 생색을 내다니, 하지만 이건 정치인들도 하는 짓 아닌가.
그놈들도 세금으로 생색내는데 나라고 못할 것도 없겠지, 다카기는 그렇게 차근차근 자신의 입지와 명성을 넓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