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146화 (146/361)

146화. He could do everything - (10)

‘이젠 내가 할 게 없네.’

1, 2차전을 연달아 잡아낸 보스턴은 분위기를 타고 홈에서 3연승을 내달렸다.

월드시리즈 우승을 앞두고 보스턴은 축제 분위기, 하지만 다카기는 시큰둥한 얼굴로 경기를 지켜봤다.

메이저리그 승격부터 월드시리즈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2년,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갈 필요는 없지만 정상에 너무 일찍 오른 것도 시시했다.

보아하니 시리즈가 5차전까지 가지 않는 이상, 내가 할 일은 없겠지. 할 일이 없다는 것만큼 시시한 것도 없었다.

‘뭔가 새로운 자극이 필요해.’

권태기를 극복하려면 자극이 필요한 법, 야구는 앞으로 내게 어떤 매력을 어필할 수 있을까. 그게 안 된다면 예정보다 일찍 다른 길을 가는 것도 고려했다.

야구를 평생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젠간 다른 길을 가야할 것 아닌가. 흥미가 없는 상대에게 관심을 줄 만큼 다카기는 상냥하지 않았다.

어쨌든 보스턴의 4전 전승으로 끝난 2020 월드시리즈, 팬들은 홈에서 맞이한 10번째 우승에 열광했고 그동안 내우외환에 시달린 수더랜드 단장은 측근들과 포옹을 나누며 승리를 자축했다.

“자네들은 모두 최고야.”

단장은 축하행사가 한창인 그라운드로 나가 선수들과  포옹을 나누거나 덕담을 건넸고, 특히 이번 시리즈에서 결정적인 활약을 한 스타의 귓가엔 특별한 메시지를 전했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기대하게.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으니까.”

다카기는 그게 돈거래라는 걸 바로 알아챘다.

에이전트를 통해 들었지만 구단이 원하는 건 10년 정도의 장기 계약, 1억 달러가 조금 넘는 금액이 오갔다고 하는데 이번 활약으로 몸값은 더 올라가겠지, 살짝 찾아온 권태기를 돈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

돈을 싫어하는 건 아니라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카기 하루요시 오늘 귀국]

월드시리즈가 끝나고 2주 만에 다카기는 일본 땅을 밟았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만 20세 선수가 홈런을 날린 건 3번 밖에 없는 기록, 투수로 범위를 좁히면 다카기가 유일했다.

단일 월드시리즈에서 승리, 결승타점, 세이브를 모두 기록한 것도 전례가 없는 기록, 미국 현지에선 5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선수라는 평가를 내놨다.

입지가 높아지면서 방송출연 제의도 이어졌지만 다카기는 모두 거절하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여기 좀 봐주세요.”

미국에서도 대단했지만 일본현지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 발 디딜 틈 없는 인파속에서 다카기는 사진 기자들의 요구에 맞춰줬다.

“예상보다 빨리 귀국하셨는데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네, 그렇게 됐습니다.”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시죠.”

“그건 에이전트와 협의한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본 여론의 관심사는 다카기의 WBC 출전여부, 일본은 지금 전력만으로도 4강 이상을 노려볼 수 있는 전력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여기에 월드시리즈를 이끈 다카기까지 합류하면 단숨에 우승후보, 보스턴 구단은 절대 안 된다며 선을 그었지만 일본 여론은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걸 알고 있는 다카기는 즉답을 회피, 앞으로의 일정도 공개하지 않았다.

* * *

“오늘은 하자는 거 다 해줄게”

“정말?”

“그럼”

오프 시즌 첫 일정은 데이트로 시작됐다.

미국으로 훌쩍 떠난 애인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겠지, 곁에 있을 때만이라도 잘 해줘야겠다는 생각에 주워 담지 못할 약속을 하고 말았다.

여느 커플처럼 평범하게 보내는 일정, 애인의 눈치를 살피던 키리코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자기야,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뭔데?”

“특별히 좋아하는 타입 있어? 여자 말이야”

다카기는 피식 웃었다. 타입이고 자시고 이미 코가 꿰였는데 속마음을 털어놓는다고 뭐가 달라지나. 솔직하게 말했다간 평화가 깨질 뿐,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거 반칙이야.”

“뭐가 반칙이라는 건데?”

“오늘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준다고 말했잖아. 그렇게 둘러대는 건 계약 위반이야.”

거듭된 공세에 다카기는 백기를 들었다.

하긴, 키리코는 고교시절부터 이랬다. 몸이 건강한 사람이 좋다고 했더니 운동장 트랙을 돌며 체력 단련에 열중했던 아이, 보아하니 애인의 이상형에 좀 더 가까워지고 싶은 모양인데, 다카기는 그건 무리라고 판단했다.

“왜 무리라는 건데?”

“너하고는 이미지가 너무 안 맞아.”

시간은 무려 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다카기는 우연히 영화 한 편을 봤는데, 몸매가 드러나는 검은 가죽옷을 입고 오토바이를 모는 여배우의 카리스마에 마음을 빼앗겼다.

담배를 피우는 모습도 어쩜 그리 섹시한지, 여자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절대 말 못해. 내 이미지가 있지.”

물론 속마음을 드러낸 적은 없다.

모범적인 아들이자 우수생으로 살아왔는데, 그런 야한 복장에 오토바이를 몰고 담배까지 피우는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다니, 뭔가 큰 죄를 짓고 있는 것 같아 스스로 부정해 버렸다.

또래 여자들에게 별 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한 것도 그 때문, 별로 유명한 여배우도 아닌데 왜 그렇게 가슴에 꽂힌 걸까. 어린 시절에 접한 신선한 충격은 지금도 잊혀 지질 않았다.

“그게 뭐야. 나랑 전혀 이미지가 맞잖아.”

“그러니까 내가 말 안 한다고 했잖아.”

“칫 ~ ”

안 삐친다고 약속까지 했는데 삐치는 건 뭔가. 솔직히 말한 게 죄라면 죄,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애인 눈치를 살폈다.

“그 영화 제목이 뭐야?”

“갑자기 왜?”

“그 여자가 얼마나 섹시한지 한 번 봐야겠어.”

키리코의 반란에 다카기는 식은땀을 흘렸다. 이러다 가죽옷 입고 오토바이 타고 다니는 건 아닌지, 별로 잘못한 건 없지만 미안하다며 사과까지 했다.

‘그래도 봐야겠어.’

그래도 키리코는 인터넷을 뒤적거려 문제의 여배우를 찾아냈다. 처음엔 네가 얼마나 섹시한가 보자라며 질투심을 불태웠는데, 보면 볼수록 신비한 매력을 느꼈다.

‘우와 ~ 멋있다. 나도 바이크 타볼까?’

지금까지 모범적인 인생을 살아온 소녀의 생각에 경종을 울린 장면, 내친 김에 구경 한번 해보자며 남자친구를 일으켜 세웠다.

‘망했다.’

다카기는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겉보기엔 얌전해도 한다면 하는 키리코, 아니나 다를까 바이크 가게를 둘러보자마자 얼른 면허부터 따야겠다며 의욕을 불태웠다.

“자기도 나랑 같이 면허 따자.”

“나는 됐어.”

다카기는 격렬히 손을 저었다.

운동선수는 몸이 재산, 바이크를 타고 다니는 건 별로 현명하지 못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몸을 사린다는 건 야구에 대한 열정이 아직 남아 있다는 뜻이겠지, 잠깐 권태기가 왔지만 애인의 반란 덕분에 내가 야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깨달았다.

“으음 ~ 자기 의외로 겁이 많구나?”

“겁이 많은 게 아니라 현명한 거야. 위험하니까 너도 그만 둬, 그러다 다치면 거들떠도 안 볼 거야.”

“진짜 거들떠도 안 볼 거야?”

“당연하지. 난 아픈 사람한테 정 주기 싫어, 전에도 말했잖아.”

다카기는 예전부터 키리코에게 건강을 강조했다.

여성적인 매력도 좋지만 정말 중요한 건 건강, 소중한 사람이 아프면 무슨 일을 해도 손에 잡힐 리가 없지 않은가.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건강한 여자, 다카기에겐 그것도 이상형의 중요한 조건 중 하나였다.

하지만 키리코는 학창시절에도 그리 건강하지 않았던 소녀, 최근엔 좀 나아졌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 엄청 건강해졌어. 자기가 뭘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건데?”

“자기만 운동 열심히 한 거 아니야. 나도 그동안 열심히 했다고”

키리코는 못 믿겠으면 지금 당장 운동하러 가자며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2년 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한 트레이닝, 영화 속의 섹시한 여배우는 못 되도 어지간한 여자들보다는 훨씬 건강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게 데이트 최종 목적지로 정해진 헬스 클럽, 마침 운동할 시간이라 다카기는 애인을 따라나섰다.

유명인의 등장에 소란스러워진 분위기, 애인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다카기는 손님들의 말상대를 해주며 시간을 보냈다.

‘오 ~ 얘도 제법 ···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민소매에 레깅스를 입은 키리코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교시절 수영복 차림도 봤는데 이건 왠지 더 민망한 느낌, 그래도 몰라볼 정도로 탄탄해진 굴곡을 외면하지 않았다.

“어때? 이 정도면 나도 건강미인지?”

“그건 두고 봐야 할 일이지.”

다카기는 코치가 된 것처럼 애인을 지도했다.

요즘 사람들은 운동에 많은 신경을 기울이지만 정말 중요한 건 근력 운동이다. 근력이 안 갖춰지면 어떤 운동을 해도 효율성이 따라오질 않는 법, 특히 여자들은 근육이 커진다며 근력 운동을 기피하는데 다카기는 핑계라며 선을 그었다.

힘이 드니까 안 하는 것 뿐, 그래서 애인에게도 건강해지고 싶다면 근력 운동을 해야 한다며 평소에도 잔소리를 했다.

오늘은 그 결과를 시험하는 날, 애인 앞이라 약간 긴장했지만 키리코는 평소 하던 대로 몸을 움직였다.

3대 근력 운동이라 불리는 스쿼트, 데드리프트, 벤치프레스도 문제없이 소화, 건강미가 넘치는 매력에 다카기도 살짝 마음이 흔들렸다.

“어때? 자기는 이거 할 수 있어?”

“비켜 봐.”

키리코는 마무리 운동으로 의자에 앞발을 올리고 다리를 찢는 묘기까지 선보였다. 이젠 내가 너보다 낫다고 할 기세, 자존심이라면 누구보다 강한 다카기는 호기 있게 앞발을 의자에 올렸다.

“아!! 잠깐만!!”

생각만큼 잘 안 되는 자세, 천하의 야구 천재가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일 줄이야. 주위를 둘러싼 구경꾼들은 재미있다며 깔깔거렸고, 망신을 당한 다카기는 얼굴에 부채질을 하며 민망함을 다스렸다.

“자기 왜 이렇게 유연성이 없어? 오늘부터 나한테 좀 배워야겠다.”

등 뒤에서 날아오는 얄미운 목소리는 덤, 2년 만에 입장이 이렇게 뒤바뀔 줄이야. 결국 이날 다카기는 여자 친구에게 유연성 훈련을 지도 받는 굴욕을 감수해야 했다.

학창시절부터 이어진 패배의 굴레, 난 언제까지 이 아이한테 끌려 다녀야 하는 건가.

분명한 건 져줘도 기분이 나쁘진 않다는 것, 이것도 사랑이라면 사랑 아니겠나. 키리코를 선택한 건 정답이었다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제 그만 가자. 바래다줄게.”

“싫어.”

순식간에 지나간 하루, 다카기는 평소처럼 애인을 집까지 에스코트 했지만 키리코는 집에 가기 싫다며 투정을 부렸다.

“집에 안 가면 어디 갈 건데?”

“저기 ··· 우리 여행이라도 갈까? 자기도 요즘은 한가하잖아?”

“얘가 이젠 가출까지 하려고 하네. 대학생 됐다고 너무 막나가는 거 아냐?”

키리코는 왜 이렇게 눈치가 없냐며 애인의 등을 한대 쳤다. 운동을 많이 해서 그런지 제법 매운 손, 다카기는 약간 원망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원하는 게 있으면 확실하게 말 해. 남자는 확실하게 말해주지 않으면 못 알아듣는 생물이라고”

“ ··· 내일 아침까지 나랑 같이 있어줘.”

다카기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아침까지 같이 있어달라니, 뭔가 눈치는 챘는데 입에 담기엔 조금 민망했다.

‘뭐 ··· 괜찮겠지.’

이젠 둘 다 애도 아닌데 부끄러울 게 뭐가 있나.

오늘 하루는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는 말도 했고, 오늘 따라 여성적인 매력을 발산한 애인 때문에 정해진 경로를 이탈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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