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He could do everything - (9)
이어지는 보스턴의 15회 초 공격, 선두 타자 잭 개리슨의 볼넷, 후속타자 팀 베르만의 진루타로 보스턴은 앞서나갈 기회를 잡았다.
문제는 하위타선에 팀 운명이 걸렸다는 것, 하지만 평소 작전이 많지 않은 브라이스 감독은 이렇다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발이 느린 잭 개리슨을 대주자로 교체했을 뿐, 이제 손에 쥐고 있는 교체카드는 다 소모했다. LA도 여기서 마지막 불펜투수를 투입, 뼈와 살을 모두 내건 총력전은 긴장감을 한껏 더 끌어올렸다.
“빠졌다는 판정!! 이제 원 아웃에 주자 1-2루가 됩니다!!”
“글쎄요. 터커 선수가 볼넷이 많은 선수가 아닌데, 역시 상황이 상황이라 심적 부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분위기, LA 현지 중계석은 마른 침을 삼키며 경기에 집중했다.
LA는 올 시즌 홈에서 7할이 넘는 승률을 자랑한 팀, 시즌 100승을 넘겼지만 원정에선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홈에서 2연패를 안고 원정 3연전을 치르는 건 최악의 수, 이 경기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LA 선수단은 피로에 지친 몸을 쥐어짜냈다.
“와아아 ~ !!!”
마이클 터커는 8번 타자 샘 와이즈를 삼진으로 잡아내고 포효했다.
이제 다음 타석은 투수, 한시름 던 홈팬들은 환호성을 질렀지만 이내 분위기는 술렁거렸다.
“자, 다카기 선수가 대기타석에서 몸을 풀고 있는데요. 역시 나옵니다.”
“브라이스 감독이 결단을 내렸네요. 평범한 투수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LA 벤치도 다급해졌다.
여기서 다카기를 거르고 2사 주자 만루에서 폴 돈론을 상대할까.
하지만 아무리 잘 친다고 해도 투수는 투수, 뭣보다 돈론은 장타력은 떨어져도 컨택 능력과 선구안은 수준급이다.
여기선 다카기를 잡아내는 게 최선, LA 배터리는 정면승부로 마음을 굳혔다.
따아악!!
초구부터 힘차게 돌린 스윙, 배트를 던진 다카기는 헬멧을 눌러쓰며 1루로 향했다.
때론 보지 않아도 보이는 게 있는 법, 1루를 밟을 때까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무겁게 가라앉은 관중석, 발칵 뒤집힌 더그아웃, 그것만으로도 타구의 종착지가 보였다.
순식간에 스코어는 4대 1, 공 하나에 이렇게 운명이 갈려도 되는 건가. 역전을 내준 마이클 터커는 마운드에 주저 앉아 한동안 일어서질 못했다.
그만큼 충격이 컸던 한 방, 보스턴 선수단은 암울한 분위기를 배경삼아 승리의 세리머니를 나눴다.
“너는 내꺼야!”
앤디 프론스키는 누구보다 다카기를 격하게 반겼다.
내 고집 때문에 내준 리드가 연장으로 이어졌으니 마음이 편할 리 있겠나. 34년을 살아오면서 남자에게 입술을 허락한 적이 없건만, 자기도 모르게 애정을 표했다.
“그거 저리 치워!!”
다카기는 볼 근처까지 다가온 입술을 밀어냈다.
위협구보다 더 섬뜩했던 순간, 상상 이상의 리액션은 동료들의 장난기를 자극했다.
“저리 안 가?!! 그냥 싸울래?!!”
다가오기만 하면 당장 주먹을 날릴 분위기, 영웅 괴롭히기가 계속되는 중에도 브라이스 감독은 15회 말을 두고 고민을 거듭했다.
경기가 길어진 탓에 쓸 수 있는 불펜은 모두 소모했고 그럼 선발투수를 내보내야 하나. 3점의 리드를 안고 있지만 뒷문을 맡기기엔 하나같이 믿음직스럽지 않은 구위, 그렇다고 어제 6이닝 투구를 한 선수를 마운드에 올리는 것도 찜찜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확실하게 영웅으로 밀어 주자고’
수더랜드 단장의 생각은 달랐다.
메이저리그 역사는 길지만 월드시리즈에서 역전 홈런에 세이브까지 기록한 선수가 몇 명이나 될까.
뭣보다 보스턴은 포스트시즌에 대비해 다카기의 투구 수를 철저히 관리해 왔다.
규정이닝도 못 채울 정도로 과잉보호를 받은 선수, 포스트시즌에 들어서도 투구수는 80 - 90개 정도로 제한했다.
조금 무리한다고 해도 큰 이상은 없겠지, 브라이스 감독이 지시를 받아들이면서 다카기는 뒷문까지 책임지게 됐다.
어제 6이닝을 던졌지만 아직 살아있는 구위, 뭣보다 시즌 첫 한 달을 불펜으로 뛰었으니, 이런 상황도 익숙했다.
선두 타자는 오늘 홈런이 있는 베쳐더, 점수 차도 있겠다. 다카기는 빠른 볼로 상대를 억눌렀다.
‘너무 가까운 거 아냐?’
몸 쪽 빠른 볼에 베쳐더는 인상을 구겼다. 하지만 이건 바깥 쪽 공을 던지기 위한 사전 작업일 뿐, 배터 박스 주위를 얼쩡거리며 시간을 끄는 행동에 다카기도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또 뭐야.’
설상가상 이번엔 타임, 하지만 다카기는 공을 던졌고 주심이 타임을 받아주지 않으면서 카운트가 올라갔다.
그렇잖아도 길어진 경기, LA의 카일 험멜 감독이 튀어나와 항의를 표하자 다카기는 손가락으로 손목을 툭툭 치며 불만을 표했다.
‘지금 시간이 몇 신지 알아?’
벌써 12시를 넘긴 시각, 길어지는 경기에 짜증이 난 건 주심도 마찬가지라 항의 따윈 받아주지 않았다.
뭣보다 타임을 받아주고 말고는 주심의 재량, 자리로 돌아가지 않으면 퇴장조치 하겠다는 위협에 험멜 감독은 발걸음을 돌렸다.
베쳐더는 떨어지는 슬라이더에 헛스윙 삼진, 그래도 더그아웃으로 향하면서 주심을 향해 뭔가를 중얼거렸다.
‘불라 ~ 불라 ~ 불라 ~ 그래 떠들어라. 난 이제 쉴 거다.’
주심은 어지간한 공은 스트라이크로 처리했다.
헴멜 감독은 그건 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홈팬들도 불만을 표했지만, 경기장에서만큼은 절대적인 지위를 갖는 주심을 견제할 보조 장치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다카기는 1이닝을 깔끔하게 마무리하며 1차전에 이어 2차전에서도 승리의 주역으로 등극, 경기가 끝난 후에도 험멜 감독은 멀어지는 주심을 붙잡고 항의를 거듭했지만,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홈런이라고 믿고 배트 플립을 한 겁니까?”
경기가 끝난 후, 스캇 브래들리는 기자들의 관심에 둘러싸였다.
14회 말, 브래들리가 배트를 내던졌을 때 홈 팬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승리의 함성을 부르짖었다.
그런데 결과는 아웃, 이건 팬들을 기만한 행위나 다름없지 않은가. 아웃이 되는 순간 관중석에선 탄식과 원망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거기다 월드시리즈 무대에서 나온 행동이라는 게 문제, 브래들리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해명을 해야 했다.
“저는 분명 홈런이라고 믿었습니다. 다만 결과가 좋지 않았을 뿐이죠.”
“빗맞았는데 홈런이라고 믿고 싶었던 거 아닙니까?”
배려라곤 전혀 없는 기자들의 공세, 기분이 상한 브래들리는 더 이상 인터뷰를 하고 싶지 않다며 자리를 피했다.
그건 험멜 감독도 마찬가지, LA는 선수단이 쓸데없는 논란에 휩싸이지 않도록 신문사를 산하에 두고 있지만 이건 도저히 변호해주기 어려운 행동, 거기다 경기 막판에 시간을 불필요한 행동으로 끈 감독과 선수들의 행동은 100승을 넘긴 구단답지 않았다.
1차전 선발 등판에 이어 2차전에서 결승 홈런과 세이브까지 기록한 루키와 비교하면 어른스럽지 못한 결과물, 결국 기자 회견실은 보스턴 선수단의 차지가 됐다.
“타구를 보지도 않고 1루로 걸어 나갔는데, 처음부터 홈런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겁니까?”
“네, 어린 시절부터 수도 없이 돌린 스윙입니다. 그 정도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스캇 브래들리를 묘하게 깎아내리는 발언, 이때 할 말 많은 브라이스 감독은 오늘 아침에 있었던 탁구대 사건을 기자들에게 공개했다.
탁구대는 다카기에게 너무 좁은 무대, 그라운드에서 마음껏 날뛰게 한 건 정답이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거짓말 마세요. 제가 눈빛 보냈을 때 외면하셨잖아요. 그리고 지금은 제가 질문 받는 중이니까 새치기는 좀 자중해주시고요.”
한방 먹은 브라이스 감독은 입을 다물었고, 다카기는 훈훈한 분위기에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마지막에 소란이 조금 있었는데 투구에 지장이 되진 않았습니까?”
“시간 끌기는 야구에서 흔한 일이죠. 별로 신경 쓸 일은 아닌데, 오늘은 경기가 길어진 탓인지 조금 짜증이 났습니다. 주심도 저와 같은 생각이었겠죠.”
중계석에서 지적한 주심의 행동도 자기 입맛대로 해석했다.
다카기는 인터벌이 짧은 선수, 타자 입장에선 굳이 타임을 걸 이유가 없다. 그렇잖아도 늘어지는 경기에 타임이라니, LA는 쓸데없는 짓을 했다며 상대를 자극했다.
“아, 그리고 탁구대는 LA 선수단에 선물하고 싶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신지 ··· ”
“경기를 보면서 느낀 거지만 오늘 LA 타자들은 유독 큰 스윙을 하더군요.”
요즘 타자들은 담장을 넘기는데 집중하고 있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건 인플레이 타구를 만들어내는 거다.
아무리 큰 타구를 날려도 파울 라인을 벗어나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탁구대에 공을 밀어 넣는 것처럼 가끔 정확한 스윙도 필요한 법, 하지만 오늘 LA 타선은 끝내기를 너무 의식했다.
탁구라도 치면서 정신자세를 가다듬으라는 뜻, 2연패를 당한 LA 선수단은 이 소식을 듣고 발끈했다.
“예의를 지켰으면 좋겠다.”
다음 날, 1차전에서 패전을 기록한 울프 비더만은 기자들을 통해 불만을 표했다.
시리즈 전부터 다카기는 이런 저런 말을 늘어놓으며 LA 선수단을 도발했다.
그런데 이제는 탁구대 도발이라니, 보자보자 하니까 이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하지만 다카기는 웃긴 소리라며 받아쳤다.
“야구는 왜 이렇게 지켜야 하는 예의가 많은 건지 모르겠네요. 배트 플립도 하면 안 되고, 점수가 많이 나면 도루도 하면 안 되고, 무슨 제한이 이렇게 많은 겁니까?
그리고 상대를 도발하는 건 어느 스포츠에나 있는 일입니다. 그렇게 억울하면 안타를 치고 경기에서 이기면 될 거 아닙니까? 그리고 예의를 지키라고 하는데 플라이 아웃에 배트 플립 한 스캇 브래들리의 행동은 예의에 맞는 행동입니까? 경기 도중 타임 외치고 시간을 끈 건 예의에 맞는 행동인가요?
패자가 말이 많으면 추해지는 법입니다. 뭣보다 홈에서 2연패를 당한 LA 선수단은 팬들에게 정말 못할 짓을 저지른 거죠. 그것만큼 무례한 행동이 어디에 있습니까? 제게 예의를 운운하기 전에 팬들이 뭘 원하는지 생각해봤으면 좋겠네요.”
팬들은 뭘 위해 수십 달러나 되는 포스트 시즌 티켓을 구매하는가.
그날 LA팬들은 6시간 넘게 자리를 지켰고, 다카기가 역전 홈런을 친 다음에도 3만 명이 넘는 팬들이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시간 끌기와 예의 운운이 그 답례인가.
패배를 당했다면 그 자체가 팬들에게 무례한 짓, 예의를 운운하기 전에 팬들이 뭘 원하는지 생각해 보라는 도발에 비더만은 입을 다물었다.
“와아아 ~ !!”
이어지는 3차전, 보스턴 팬들은 홈으로 돌아온 선수단을 격하게 환영했다.
특히 1 - 2차전 승리를 책임진 다카기는 거의 전쟁영웅 수준의 환대, 그라운드에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방송 카메라가 얼굴을 비출 때마다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You insolent fellow(이런 무례한 놈)!!”
보스턴 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LA 선수단을 향해 도발을 퍼부었다.
홈에서 팬들에게 무례하더니 원정경기에서도 괘씸한 선수들, 너희들이 그러고도 프로냐는 도발은 경기 내내 계속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