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144화 (144/361)

144화. He could do everything - (8)

“아 ~ 오늘 왜 이러냐!!”

월드시리즈 2차전을 앞둔 보스턴은 클럽하우스에서 차분히 경기를 준비했다.

이 와중에도 한가한 인간은 있는 법, 어제 6이닝 2실점 투구로 팀의 승리를 안겨준 다카기는 할 일 없는 동료들과 탁구대 앞에서 여흥을 즐겼다.

학창 시절 탁구를 즐겨했던 건 아니지만, 반년 넘게 이어지는 클럽하우스 생활에서 취미 생활을 하는 건 당연한 일, 스매싱이 탁구대를 살짝 비켜가자 아쉬움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담장은 못 넘기면서 탁구대는 잘만 넘기네.”

이때, 구경꾼 노릇을 하던 후안 위긴스가 다카기의 심기를 건드렸다.

어제 1회 초, 다카기는 좌측 펜스 상단을 때리는 큰 타구를 날렸지만 홈런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하지만 그건 후안 위긴스도 마찬가지, 뭐 잘났다고 그런 소리하냐는 질타에 위긴스는 피식 웃고 말았다.

어쨌든 역전 위기를 넘긴 돈론은 상대 실책을 틈타 승리를 거뒀고, 바로 탁구채를 놔버렸다.

“진짜 한 번만 다시하자.”

“됐어. 이게 끝”

다카기는 재경기를 요구했지만 승자는 받아주지 않았다.

한번 시작하면 이길 때까지 탁구채를 놓지 않는 자식, 그 끈기에 또 붙들리기 전에 피해버렸다.

“누구 나랑 한 판 붙을 사람 없어?”

“아니”

방금 전까지 구경을 즐겼던 시선은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이 찝찝한 패배감을 어떻게든 씻어내야 할 텐데, 다카기는 죄 없는 탁구대에 괜한 화풀이를 했다.

“이건 왜 이렇게 작게 만드는 거야? 좁아 터져가지고 풀스윙을 못 하겠네”

야구장에선 얼마든지 멀리 날려도 되는데 탁구대는 너무 좁은 게 흠, 다카기의 불만에 귀를 기울이던 실 쿠퍼가 한소리 거들었다.

“너 어제 홈런 못 쳤잖아? 탁구대에서라도 실컷 풀스윙 하라고”

“됐어. 난 이렇게 좁아터진 탁구대에 얽매일 놈이 아니라고, 남자는 있는 힘껏 풀스윙을 해야지. 도대체 이건 누가 여기에 가져다 놓은 거야?”

방금 전까지 그렇게 즐겨놓고 이제 와서 이게 무슨 말인가. 애송이의 정신승리에 동료들은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앞으로 정말 탁구 안 칠 거야? 그럼 치워도 괜찮겠지?”

“치워버려”

클럽하우스 매니저가 슬쩍 본심을 찔러봤지만 다카기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클러비들을 동원해 탁구대를 철거하는 시늉을 했지만 요지부동,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다카기는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 * *

“자, 어제 1패를 당한 LA가 마이클 헤이즈를 선발로 내세웁니다. 올 시즌 23경기 등판, 13승 4패, 평균자책점 3.49, 134이닝 동안 볼넷 62개, 탈삼진은 157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고 99마일 포심, 슬라이더가 주무기죠. 다만 기록으로도 알 수 있듯이 안정감이 좋다고 할 순 없습니다.”

보스턴의 선공으로 2차전의 막이 올랐다.

초구부터 달려드는 적극성을 보였지만 타구는 내야를 넘기지 못했다.

마이너리그에선 제법 괜찮은 화력을 보였지만 본무대에선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장타력, 2년 연속 10홈런 이상은 홈런은 쳐주고 있지만 보스턴 구단이 기대하는 건 이 정도가 아니다.

거기다 수비가 좋은 것도 아니라 공격에서 좀 더 활약을 해줘야하는데, 한때 유망주 랭킹 3위까지 오른 선수치고는 임팩트가 부족했다.

‘하나만 걸려라’

다음 타자 후안 위긴스는 장타를 노리고 풀스윙, 하지만 이번 포스트 시즌 7홈런에 빛나는 영웅도 우익수 플라이로 물러났다.

머린스 파크는 홈런이 안 나오기로 유명한 구장, 3년 전 펜스를 앞당기는 공사를 했지만 근처 해안가에서 날아드는 강풍, 고도 0m의 지형, 소금기를 머금은 탁한 공기, 공격력이 다소 떨어지는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특성 때문에 지금도 홈런 구경하기 어려운 곳으로 악명이 높다.

보스턴은 홈런에 의존하지 않는 구단, 브라이스 감독은 이 정도 조건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포스트 시즌에서 홈런으로 재미를 본 탓에 펜스 근처에 머무는 타구가 나올 때 마다 아쉬움을 삼켰다.

공격이 안 풀리는 건 la도 마찬가지, 특히 타선의 허리를 책임지는 버쳐더는 오늘도 첫 타석에서 반전을 이뤄내지 못했다.

이번 시즌 47홈런을 때린 거포, 홈에서도 25홈런을 때려냈을 정도로 발군의 파워를 보여줬다.

문제는 정확도, 전반기까지 타율 0.315, 홈런 35개를 기록하며 la 역사상 최초로 50홈런을 넘길 페이스를 보여줬지만, 후반기 성적은 타율 0.247, 12홈런으로 곤두박질 쳤다.

특히 시즌 마지막 10경기 성적은 홈런 없이 타율 0.118, 포스트시즌까지 이어지고 있는 극심한 부진, 이런 타자를 4번에 배치하고 월드시리즈에 진출한 게 기적 아닌가.

la 구단 수뇌부는 지금도 버쳐더의 한 방을 믿고 있지만, 결과는 18번 째 삼진으로 끝났다.

1957년, 디트로이트의 주포 벤 액커맨이 포스트시즌에서 19삼진을 당한 기록을 깰 기세, 구단관계자들의 인내심도 조금씩 바닥을 드러냈다.

‘안 풀리네.’

경기는 어느덧 5회, 좀처럼 풀리지 않는 공격에 브라이스 감독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지금까지 양 팀이 주고받은 안타는 9개, 적은 건 아니지만 모두 일발성 단타라 득점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구장 특성 상 홈런을 노리는 건 비효율적, 브라이스 감독은 평소 거의 쓰지 않는 번트작전까지 활용했지만 홈으로 향하는 길은 열리지 않았다.

따아악!!

“어?!!”

그런데 6회 초, 모두를 놀라게 하는 사건이 터졌다.

투수 앤디 프론스키가 좌측 담장을 넘어가는 솔로 홈런을 날린 것, 실버실러거도 수상할 정도로 타격에 재능이 있는 선수지만, 이 상황에서 홈런을 때릴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잘 던지다 불의의 일격을 허용한 la의 선발 마이클 헤이즈는 망연자실, 그에 반해 보스턴 선수단은 일찌감치 연승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봤지? 다들 봤어 못 봤어?!! 내가 이 정도라고!!”

누구보다 흥분한 선수는 앤디 프론스키, 월드시리즈 우승은 이미 한번 겪었지만 벌써 4년이나 지난 일이다.

거기다 전 소속팀, 필라델피아에 안겨준 월드시리즈 우승이라는 게 더 끔찍한 일, 6년 동안 몸을 담은 소속 팀이지만 프론스키는 필라델피아에서 거둔 우승을 우승으로 치지 않았다.

“난 너희들 같은 쓰레기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공을 던진 게 아니야. 착각하지 말라고”

필라델피아 시절, 프론스키는 홈경기에 등판할 때마다 인상을 찌푸렸다.

프론스키도 독설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성격이지만 필라델피아 팬덤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 어느 날 4이닝 동안 6실점을 하고 내려온 프론스키는 관중석을 향해 대놓고 손가락 욕을 날린 적도 있다.

나만 욕하면 상관없는데 결혼을 앞둔 신부를 조롱한 게 원인, 월드시리즈 등판을 앞두고도 난 팬들이 아니라 FA 계약을 위해 공을 던질 뿐이라며 선을 그었다.

필라델피아의 우승이 확정됐을 때도 단상에 오르길 거부했을 정도, 심지어 구단에서 제공한 우승 반지도 처분해 버렸다.

쓰레기 팬들에게 안겨준 월드시리즈의 기쁨 따윈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 그렇게 애리조나를 거쳐 보스턴에서 생애 2번째 월드시리즈를 맞이했다.

이번이 진심으로 즐기는 축제, 그만큼 의욕은 대단했다.

‘여기가 승부처다.’

브라이스 감독은 여기서 승부수를 던졌다.

잘 던지던 프론스키를 내리고 불펜 싸움으로 경기를 끌고 갈 생각, 하지만 프론스키는 격하게 반발했다.

“아직 더 던질 수 있다고요. 설마 날 못 믿는 겁니까?”

“그게 아니야, 나는 승리를 위해 최선의 전략을 짤 뿐이네.”

브라이스 감독은 5회를 넘어가면 프론스키가 공략 당할 거라고 판단했다. 구위가 예전 같지 않아 변화구를 많이 활용하고 있는데, 타순이 도는 만큼 위험해지는 건 당연, 거기다 좋은 불펜이 있는데 굳이 선발 투수를 길게 끌고 갈 이유가 있을까.

하지만 프론스키는 강판을 거부, 6회까지는 내가 막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사실 프론스키는 예전부터 감독의 스타일의 불만이 많았다. 좀 던질 만 하면 바로 내리고 불펜을 기용하다니,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 건가. 그동안 조용히 넘어갔지만 홈런에 분위기가 업 된 베테랑은 반기를 들었다.

그렇게 우겨서 올라간 6회 말, 첫 타자를 범타 처리한 프론스키는 보스턴 더그아웃을 향해 손가락 사인을 날렸다.

내 판단이 옳았다는 시위, 하지만 브라이스 감독은 불펜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으며 만일의 상황에 대비했다.

따아악!

“우측으로 높게 떠가는 타구!! 우익수가 펜스 앞에서 날아오르지만!! 담장을 넘어갑니다!! 버쳐더의 솔로 홈런, LA 팬들이 기다리던 한방이 여기서 터집니다.”

“이건 보스턴 입장에선 좀 아쉽네요. 버쳐더 선수가 변화구를 골라내고 지금도 변화구를 때려냈거든요. 차라리 힘으로 밀어붙였으면 어땠을까. 크로스 선수의 볼 배합이 조금 아쉬웠습니다.”

홈을 열어준 프론스키는 고개를 떨궜다.

올 시즌, 버쳐더는 불리한 볼카운트에서 들어온 변화구에 유독 약점을 보였다.

오늘도 느린 커브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녀석, 데이비드 크로스 포수도 통계를 믿고 프론스키의 사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게 맞아나갈 줄이야, 어렵게 잡은 리드가 단숨에 날아가면서 보스턴 벤치 분위기는 침울해졌다.

‘내가 잘못 한 건가?’

프론스키는 감독의 교체지시를 어긴 일을 되새겼다.

불펜 기용으로 명성이 자자한 감독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무서울 정도로 예언이 맞아떨어질 줄이야. 같은 팀이지만 그 판단력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론스키는 직접 교체 사인을 보냈고, 이렇게 베테랑의 반란은 3분 천하로 막을 내렸다. 다시는 감독의 교체 지시에 대들면 안 되겠다는 교훈을 얻은 건 덤, 물론 이런다고 리드가 돌아오진 않았다.

‘저 녀석까지 써야 되나.’

경기가 후반으로 접어들수록 브라이스 감독 손에 쥐어진 카드는 얄팍해 졌다.

아메리칸 리그와 달리 투수가 타석에 들어서는 내셔널리그, 불펜 싸움이 길어지면 그 자리에 들어서는 대타 소비도 많아질 수밖에 없다.

어지간한 선수는 다 기용했고, 어제 좋은 타격을 보여준 다카기가 눈에 들었지만 왠지 내키질 않았다.

막말로 대타로 내세웠다가 다치면 어쩔 건가. 뭣보다 지금부터 마운드에 오르는 선수들은 다 구위에 자신이 있는 투수들, 팀의 에이스를 대타로 내세우는 짓은 하지 않았다.

‘날 보라고요. 안 보이는 척 하지 마시고’

다카기는 감독에게 계속 눈치를 줬다.

어차피 쓸 만한 카드도 다 썼는데 뭘 망설이는 건지, 오늘 아침에 있었던 탁구대 사건도 있고, 동료들에게 보란 듯이 한 방 날려주고 싶었다.

그렇게 기약 없는 기다림은 12회까지 이어졌고, 길어지는 경기 속에서 팬들은 물론 양 팀 선수들도 서서히 지쳐갔다.

하지만 긴장을 풀 수 없는 경기, 무승부를 인정하지 않는 메이저리그에서 야근이 하루 이틀인가. 다들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팬들도 함부로 자리를 뜨질 못했다.

“자 ··· 이제 경기는 14회 말, LA의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선두 타자는 스캇 브래들리, 오늘 8타수 무안타, 아직까지 1루를 밟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좀 끝냈으면 좋겠네요. 바람도 힘을 내주길 바랍니다.”

갑자기 우측으로 강하게 불기 시작한 바람, 해안가라 원래 바람이 심하게 부는 곳이지만 오늘은 그 강도가 센 편, 추위를 이기지 못한 팬들은 이불까지 뒤집어썼다.

브래들리는 올 시즌 26홈런을 때린 선수, 특히 우측 담장을 넘어가는 비율이 높은 편이라 LA 팬들은 끝내기 홈런을 기대했다.

하지만 초구는 헛스윙, 잡아당기려는 게 눈에 보이는데 누가 몸 쪽 승부를 하겠나. 보스턴 배터리는 끈질긴 바깥 쪽 승부로 투 스트라이크를 잡아냈다.

‘아뿔싸!!’

하지만 마지막에 가운데에 몰린 결정구, 힘껏 잡아당긴 브래들리는 뻗어나가는 타구를 감상하며 배트를 내던졌다.

그런데 마지막에 힘없이 죽어버리는 포물선, 타구를 잡아낸 후안 위긴스는 더그아웃으로 향하는 브래들리에게 조롱을 퍼부었다.

“깜짝 놀랐네!! 저 자식 뭐하는 거야?!!”

밥 먹고 공만 치는 자식이 홈런도 구별 못하다니, 혹시 배트 플립으로 외야수를 동요시킬 생각이었나.

배트 플립이 나오자 위긴스가 당황했던 건 사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얄팍한 속임수는 프로 레벨에서 통하지 않았다.

“연기력 좋았어!!”

다카기도 브래들리를 향해 조롱을 퍼부었다.

나름 신선한 시도였지만 쓸데없는 짓, 저런 헐리우드 액션이 통할 만큼 메이저리그는 만만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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