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143화 (143/361)

143화. He could do everything - (7)

‘왜 이러실까. 김 빠지게.’

비더만이 1회부터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자 불펜에서 몸을 풀던 다카기는 보호대를 갖추고 타석에 설 준비를 했다.

명예의 전당 확정이라는 평가를 받는 선수가 월드시리즈에서 이런 투구를 하다니, 상대가 약한 게 아니라 우리가 너무 강한 걸까. 남자란 주먹을 서로 주고받아야 달아오르는 생물, 일방적으로 치는 경기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도 쳐야지. 상대가 완전히 쓰러질 때까지’

멈추지 않고 공세를 이어가는 보스턴, LA 더그아웃 분위기는 급박해졌다.

비더만은 LA에서만 커리어를 보낸 선수, LA는 그 명예를 빛내주기 위해 1선발로 내세운 게 아니다.

여기가 무슨 올스타전도 아니고 경로우대가 어디있나. 실력이 되니 중책을 맡긴 것 뿐, 하지만 이런 식이라면 언제까지 마운드를 맡길 순 없었다.

“아 ··· 여기서 비더만 선수가 마운드를 내려가는 군요. 5피안타 3실점, 아웃카운트를 하나도 잡지 못하고 마운드를 내려갑니다.”

“이건 좀 충격적이네요. 비더만 선수가 정규시즌 433경기, 포스트 시즌까지 합하면 466경기나 등판한 베테랑인데 아웃카운트를 하나도 못 잡고 내려가는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LA의 정신적 지주가 무너자 팬들은 할 말을 잃었다.

방송카메라는 더그아웃에서 얼굴을 감싸쥐고 괴로워하는 비더만을 비췄지만, 그 곁엔 아무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위로는 아무 도움도 안된다는 걸 알고 있는 선수들, 경기를 뒤집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승계주자들이 연이어 홈을 밟으면서 스코어는 5대 0, 2아웃 주자 2루 상황에서 다카기가 타석에 들어섰다.

30만 달러만 더 썼어도 지금쯤 LA 유니폼을 입었을 선수, 메이저리그를 폭격한 괴물의 등장은 LA 수뇌부의 쓰라린 기억을 끄집어냈다.

“자, 다카기 하루요시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올 시즌 타율 0.294, 홈런 3개, 11타점, 타석에서도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줬습니다.”

“후반기엔 보스턴 외야진이 정리되면서 타석에 설 기회가 없었거든요. 그래도 일반적인 투수를 생각해선 안 됩니다. 분명 타격에 재능이 있어요.”

현지해설위원의 염려와 달리 LA 배터리는 정면 승부를 택했다.

여기서 승부를 못내면 타선 일순, 폴 돈론에게 득점권 기회를 주느니 다카기를 잡아내는 쪽을 택했다.

따아악!!

“어?!!”

“가라! 계속 가!!”

초구 타격, 보스턴 선수단은 쭉 쭉 뻗어나가는 타구를 향해 돌아오지 말라는 협박을 넣었다.

하지만 타구는 펜스 상단을 맞고 바운드, 잡는 것만 생각한 좌익수 거스 브라운이 공과 숨바꼭질을 벌이는 사이 다카기는 천천히 2루에 입성했다.

스코어는 이제 6대 0, 홈팬들의 안타까움은 원성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이딴 경기를 보겠다고 수십 달러를 지불한 건가, 거기다 홈에서 벌이는 1차전, 이렇게 유리한 조건에서도 리드를 잡지 못하다니, 30년 넘게 월드시리즈 우승을 기다려온 팬들이 분노한 건 당연했다.

“다시 한 번 보시죠. 지금은 몸 쪽 높은 공이었는데 제대로 잡아당겼네요.”

“실투라기보다는 타자가 잘 친 거죠. 역시 이 선수는 야구장에서 못 하는 게 없습니다. 마운드에선 어떤 활약을 보여줄지 기대가 되네요.”

30분 만에 끝난 보스턴의 1회 초 공격, 마운드에 오른 다카기는 천천히 몸을 풀었다.

긴장한 기색 없이 공을 던지는 애송이, 이 무대가 얼굴에 수염자국도 없는 녀석에게 성공을 허락할 만큼 만만한 곳인가.

LA 선수단은 작심하고 달려들었다.

따악!

선두타자에게 허용한 안타, 스코어에 여유가 있으니 신경쓸 일은 아니지만, 다카기가 연속안타를 내주자 브라이스 감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그동안 너무 잘 던지긴 했지.’

9월 평균자책점 0.94, 포스트시즌 들어서도 무실점 활약, 이 정도면 한 번 흔들려도 이상할 게 없지 않은가.

2 - 3점 정도는 내줘도 그냥 지켜보기로 했다.

따악!

“이번에는 우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 2루 주자는 일단 3루에서 멈춰섭니다. 자 ··· 다카기 선수가 연속 3안타를 내주고 있는데요. 뭐가 문제라고 보십니까?”

“글쎄요. 확신은 못하겠지만 빠른 볼이 계속 맞아나가고 있거든요. 빠른 볼이 주무기인 선수에게 좋은 징조는 아닙니다.”

무사 만루 위기에 몰렸지만 다카기의 표정은 의외로 차분했다.

나는 내 공을 던졌고 타자가 잘 쳤을 뿐, 4번 타자 벤 베쳐더(Batchelder)와 마주했다.

올 시즌 47홈런을 때려낸 강타자, 하지만 화려했던 전반기에 비해 별 볼일 없던 후반기, 포스트 시즌만 되면 하위타선만도 못한 포스는 여전하다.

이번 nlcs에서도 14타수 무안타에 삼진만 10개를 당할 정도, 그래도 LA 수뇌부슨 베쳐더를 신뢰했다.

‘그런 스윙으론 내 공 못 쳐’

초구를 잡아낸 다카기는 높은 빠른 볼로 헛스윙을 끌어냈다.

어떻게든 외야로 타구를 보내고 싶은 게 타자의 본심, 최근 타격감이 좋지 않은 베쳐더는 병살타는 막겠다는 생각으로 어퍼스윙에 집중했다.

하지만 빠른 볼을 높은 코스에 집어넣을 수 있는 투수에게 이런 방식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다카기의 빠른 볼 평균구속은 97마일, 퍼져 나오는 스윙으로 공략하는 건 어려웠다.

“다시 높은 볼!! 삼진입니다!! 첫 아웃카운트를 삼진으로 잡아내는군요.

“베쳐더는 이번 포스트 시즌에서 삼진만 17개네요. 물론 LA 입장에선 이 선수를 기용하지 않을 순 없겠지만, 계속해서 4번으로 가는 건 이해가 안 됩니다.”

다카기는 후속 타자 윌린 콜린스에게 외야 플라이를 허용하며 1실점, 하지만 남은 아웃카운트를 땅볼로 처리하고 1회를 넘겠다.

연속 3안타를 내줬지만 피해는 경미한 편, 브라이스 감독은 박수와 가벼운 신체 접촉으로 변함없는 신뢰를 표했다.

다카기는 이날 6이닝 2실점, 제 몫을 다하고 마운드를 넘겼고, 보스턴은 1회 이후 공격 침체에 시달렸지만 리드를 잘 지키며 6대 4승리를 거뒀다.

비더만이 초반에 무너지지만 않았어도 어떻게든 됐을 경기, LA 기자들은 대역죄인 앞에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초반에 급격히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비더만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로 얄밉고 분하지만 이게 기자들이 할 일 아닌가. 차분하지만 힘없는 목소리로 나름 해명을 나놨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부담을 이겨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오늘 패배는 전적으로 제 책임입니다. 동료와 팬들에게 미안할 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고개를 숙이지는 않겠습니다. 아직 경기는 남았고, 다음에는 팀 승리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비더만은 이번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한 입장,

이번 월드시리즈가 마지막이니 초반에 안타가 나오자 당황했을 수도 있다. 그래도 통산 250승을 넘긴 투수의 입에서 나온 말 치고는 조금 실망스러운 답변, 이어지는 승자들의 인터뷰에서 다카기는 실망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 떨렸다는 건 좀 이해하기 어려운 반응이네요. 저는 이제 막 프로 생활을 시작한 루키지만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각오로 경기에 임하고 있습니다. 올 시즌 보스턴이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지만 내년에도 다음에도 기회가 있을 지는 장담할 수 없죠. 저뿐만 아니라 우리 선수들 모두가 그런 마음가짐으로 경기를 치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팀의 에이스라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다니, 솔직히 맥이 빠지네요.”

월드시리즈 진출이 아무에게나 오는 기회인가?

남들은 평생 한번 얻기도 힘든 기회를 얻고도 부담을 이겨내지 못해 무너졌다니, 기회가 와도 못 잡는 건 본인의 능력이 부족한 거 아닌가.

그런 선수와 경쟁해서 이겨봤자 기쁘지 않다며 도발을 이어갔다.

250승을 거둔 전설이 통산 12승을 거둔 루키에게 자존심이 짓밟히는 순간, 자극적인 내용을 좋아하는 기자들은 이 발언을 놓치지 않고 받아 적었다.

그리고 계속되는 인터뷰, 한 기자가 손을 높이 들었다.

“오늘 중계석에서 당신은 야구장에서 뭐든 할 수 있는 선수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 의견에 동의하십니까?”

“저는 야구 선수입니다. 할 수 있는 건 공을 던지고 치고 달리는 것뿐이죠. 그게 전부입니다.”

“그게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뜻 아닌가요?”

“뭐 ···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네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웃음, 야구선수가 그라운드에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나. 뭐든 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와 비교되는 건 조금 쑥스러운 일, 필요 이상의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이건 좀 민감한 질문일 수도 있는데요. 얼마 전 일본에서 다카기 선수가 파칭코 회사와 이런 저런 말이 오갔다는 기사가 오지 않았습니까?”

질문을 던져놓고 눈치를 살피는 기자, 대화가 끊기자 다카기는 할 말 있으면 얼른 하시라며 다그쳤다.

“그리고 그 다음 날, 파칭코 회사를 두둔하는 뉘앙스의 발언을 하셨는데, 혹시 나중에 계약을 고려하고 한 발언입니까?”

“훗 ~ 웃기는 질문이네요. 저는 그 회사를 두둔한 게 아닙니다. 기부도 안 하면서 기부를 운운하는 사람들의 행동이 우스웠을 뿐이죠. 그리고 제가 막말로 파칭코 기계 모델이 됐다고 쳐도 그게 비난 받을 일입니까?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지금 메이저리그 사무국과 선수협은 도박 수입 배분을 두고 충돌하고 있습니다. 제가 파칭코 회사와 손을 잡는 게 죄라면 도박 수익에 눈독을 들이는 사무국과 선수협도 범죄자입니까?”

일본 정부가 파칭코 사업을 규제하는 이유가 뭘까.

개인 사업으로 이뤄지는 사행성 게임을 억누르고 카지노를 육성해 그  수입을 정부 자금으로 쓰겠다는 거 아닌가.

네가 하면 불륜이지만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이중 잣대, 파칭코 회사를 두둔할 마음은 없지만 넓게 보면 일본 정부도 똑같은 수준이다.

결국 돈 때문에 이 난리를 치는 건데, 미국도 지금 도박 수익 분배 때문에 여론에서 말이 많다.

잘못하면 메이저리그 최악의 사건으로 남은 승부조작이 재현될 수도 있는 문제, 선수 본인이 개입하지 않더라도 가족을 동원해 도박에 배팅하는 편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몇 몇 선수들은 사무국이 도박 사업에 손을 대는 것에 반대하고 있지만, 구단 이익은 곧 선수들의 연봉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는가.

그래서 선수협은 일단 찬성 쪽으로 기우는 분위기, 돈 앞에선 결국 인간은 탐욕스러운 존재라는 게 다시 한 번 증명됐다.

그런데 파칭코 회사와 논의가 오고간 걸 가지고 일본 여론은 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건가. 그래서 누가 더 더러운지 따져보고 싶다면 너 자신부터 돌아보라며 소리쳤을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계약을 맺는다면 나중에 맺을 수도 있겠죠. 인연이란 필요에 따라 맺어지는 거고 저는 돈을 좋아하는 평범한 인간이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야구에 집중하고 싶을 뿐입니다. 더 설명이 필요하십니까?”

질문을 던진 기자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이 소식을 접한 구루지마 쿠니오는 환희의 박수를 쳤다.

잘 하면 계약이 될 수도 있는 분위기, 하지만 내부회의에서 지금은 타이밍이 좋지 않다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이번 사건으로 다카기가 논란에 휩싸인 건 사실, 눈치 없게 지금 계약서를 들이밀면 퇴짜를 맞을 것 아닌가. 뭣보다 다카기의 전속 에이전트 제임스 콜튼은 구루지마 미치오를 좋게 보지 않고 있는 상황, 일단 여론의 분위기를 살피고 그 다음에 움직이기로 뜻을 모았다.

* * *

[그건 안 했으면 좋겠구나.]

월드시리즈 1차전이 끝난 다음 날, 고영길은 손자에게 전화를 걸어 파칭코 회사와 계약을 맺는 건 참아달라는 조언을 건넸다.

4천억 엔이나 되는 상속자금을 누나에게 넘겨주고 야구를 택한 녀석, 돈이 좋다면 지금이라도 야구를 그만두고 돌아와도 된다.

그런데 뭐가 아쉽다고 파칭코 회사와 엮인 건지, 할아버지 입장에선 귀한 손자가 이미지에 타격을 입는 건 원치 않았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따를 게요.”

[정말이냐?]

“네, 저도 솔직히 계약할 생각은 없었어요. 여론에서 계속 뭐라고 하기에 욱한 것뿐이죠.”

다카기는 할아버지 뜻에 순순히 따랐다.

청개구리 기질이 있어서 하지 말라고 하면 더 욱하는 성격, 그래도 할아버지 심기에 거슬리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거기 말고도 광고제의 받은 회사 많아요. 앞으로 야구만 잘하면 수입은 꽤 괜찮아지겠죠.”

[쯧 ~ 이 녀석아, 그렇게 돈이 벌고 싶었으면 사업을 했어야지 ··· 야구 선수가 몇 푼이나 번다고 ··· ]

“하하 ~ 그건 할아버지 기준이죠.”

다카기가 올해 받는 연봉은 60만 달러, 최저 연봉이긴 한데 이게 적은 돈인가.

개인 재산이 미국 기준으로 100억 달러가 넘는 할아버지 입장에선 코흘리개 푼돈도 안 되겠지만, 다카기는 자기 힘으로 돈을 번다는 그 자체에 자부심을 느꼈다.

이제 진짜 어른이 된 기분이랄까. 남들은 돈도 많은 도련님이 왜 그렇게 돈에 집착하느냐고 참견을 하지만, 다카기는 그런 질문에 답하는 것도 이젠 귀찮았다.

돈이란 내가 직접 벌어야 의미가 있는 법, 주위에서 뭐라고 해도 그 생각은 굳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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