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He could do everything - (2)
브라이스 감독은 6회를 마치고 내려온 다카기에게 악수를 권했다.
내 역할은 여기까지, 동료들과 손뼉을 마주친 다카기는 벤치에 앉아 경기가 끝나길 기다렸다.
오늘도 완벽했던 불펜,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삼진으로 처리한 랜돌 보울링은 하늘을 향해 화살을 쏘는 세리머니로 승리를 장식했다.
alcs 진출까지 앞으로 1승, 완벽한 피칭을 보여준 다카기는 기자회견실에서 이런저런 질문을 받았다.
“수더랜드 단장이 3차전이 끝나고 파티를 할 수 있도록 준비를 다해놨다고 들었습니다. 구단의 그런 행동이 부담이 되진 않은 겁니까?”
“전혀요. 굳이 한마디 하자면 조금 진정했으면 좋겠습니다.”
다카기는 구단의 설레발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3년 전, 보스턴은 이미 우승 맛을 봤다. 21세기 들어 월드시리즈 우승만 3회, 그럼 좀 차분하게 준비를 해도 될 텐데 부랴부랴 잔칫상을 준비하는 모습은 몇 십 년 동안 우승 맛을 못 본 팀처럼 보였다.
“당신은 샴페인 파티가 기대되지 않는 겁니까?”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그게 ··· 지금 당신의 표정은 너무 무거워 보이네요. 목소리도 제법 가라앉아 있고요.”
기자는 무서울 정도로 차분한 태도에 약간 한기를 느꼈다.
조금 더 감정을 드러내도 좋을 텐데 오늘 따라 무미건조한 얼굴, 다카기는 방심하지 않을 뿐이라는 답을 내놨다.
“전 유리한 입장에 섰다고 상대를 얕잡아보는 아마추어가 아닙니다. 캔자스시티는 저력이 있는 팀이고 시리즈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않을 뿐이니 그렇게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겨우 하나 끝낸 질문, 다른 기자의 질문을 받았다.
“와일드카드 결정전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게 많은 투구를 한 건 아닌데, 일찍 교체된 게 아쉽진 않습니까?”
“전혀요.”
브라이스 감독은 원래 불펜 활용빈도가 높은 편, 그리고 선수운용은 감독의 권한 아닌가.
졌다면 질타를 받아야겠지만 3연승을 이끈 감독의 권한에 참견하고 싶진 않았다.
“당신은 모두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일을 너무 쉽게 해내는 것 같습니다. 그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세상엔 힘든 일이 많지만 그걸 이뤄내는 사람은 분명 존재합니다. 제가 이런 활약을 한다고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차분한 반격에 기자는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내가 실패의 눈물을 흘릴 때 누군가는 미소를 짓는 게 세상 아닌가. 그게 왜 내가 될 순 없는 건지 원망한 적도 있는데, 저 어린 나이에 성공가도를 달리는 녀석에게 질투와 경의를 동시에 느꼈다.
조금 방심할 법도 한데 찔러도 흠집 하나 안 생기는 쇳덩이 같은 녀석, 한 번 크게 넘어지면 흔들리지 않을까?
그날을 기약하며 더 이상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 * *
“잘했다!!”
한편, TV를 통해 손자의 활약을 지켜본 고영길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착실히 정상의 길로 가고 있는 기특한 녀석, 마음 같아선 직접 응원을 가고 싶었지만 괜히 부담을 줄까봐 일본에 남았다.
‘도와주고 싶지만 나서면 안 되겠지.’
할아버지로서 내가 뭐 도와줄게 없나 라는 생각이 든 게 한두 번인가. 하지만 말없이 지켜봐주는 것도 믿음의 다른 표현이겠지, 쓸데없는 참견은 하지 않았다.
[회장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그래, 그런데 자네가 어쩐 일인가?”
[하하 ~ 누가 들으면 제가 회장님과 남인 줄 알겠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고영길은 잠시 잊고 있던 사람의 전화를 받았다.
일본에서 파칭코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 재일교포, 한성태의 손자 구루지마 쿠니오의 안부전화, 고영길의 할아버지 고명출은 한때 한성태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한성태가 재일출신 야쿠자와 관련이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슬쩍 거리를 두더니, 1970년 대 들어 일본 정부가 파칭코를 대대적으로 탄압하자 슬쩍 거리를 뒀다.
‘그게 뭐 어때서?’
반면 고영길은 할아버지와 달리 한성태를 나쁘게 보지 않았다.
우리 집안은 번듯하게 성공했지만, 다른 교포들은 차별과 가난 속에서 비참한 삶을 살았다. 고명출이 알게 모르게 지원을 해줬지만 나라도 구제 못하는 그들을 어떻게 다 부양하겠나.
취직도 못하는 자이니치가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식당을 차리거나 그 옆에 파칭코를 운영하는 것 뿐, 일본 정부가 파칭코를 규제하자 일본 사업자들은 압박을 느끼고 하나 둘 시장에서 철수했지만, 물러날 곳이 없는 조선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업을 운영했다.
살아남은 결과가 지금에 이른 것 뿐, 할아버지는 기업의 이미지를 위해 한성태와 거리를 뒀지만 고영길이 다른 정책을 취하면서 한때 서먹했던 양 가문은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는 관계를 이어갔다.
“회장님이 건강하시다니 저도 마음이 놓이는 군요.”
“본론부터 말하게, 원하는 게 있으니 전화를 한 거 아닌가?”
“하하 ··· 그게 말입니다.”
고용길의 성격을 알고 있는 쿠니오는 말을 아꼈다.
2017년부터 정부가 파칭코를 다시 규제하면서 인기가 조금씩 식고 있는 것도 사실, 슬롯머신이나 숙박업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지만 예전만큼은 벌이가 시원치 않았다.
‘그래, 다카기를 마케팅으로 삼아보자.’
이때 내부회의에서 다카기를 모델로 한 기계를 생산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다카기는 지금 미국 문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슈퍼 스타, 이런 영향력 있는 스타를 가만놔둘 사업가가 어디에 있나.
특히 파칭코는 인기 만화캐릭터나 유명연예인을 앞세운 적극적인 마케팅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다카기는 메이저리그를 흔드는 초신성, 실현만 되면 수익은 보장되는 사업이라고 생각했지만, 고영길의 불호령이 염려됐다.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늙은 호랑이의 속은 분노로 끌어 올랐다.
만화 캐릭터를 모델로 삼든, 연예인을 끌어들이든 그건 다 사업의 일환 아닌가. 다 이해하는데 왜 하필이면 내 손자를 가지고 장사를 하겠다는 건가.
거기다 파칭코는 일본에서 합법적인 게임이지만 일반인들의 인식은 부정적인 게 현실, 한창 잘 나가는 내 손자를 파칭코 게임 모델로 삼는다?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이런 아이디어를 제시한 건지, 뭣보다 그걸 넙죽 받아먹고 이런 전화를 건 쿠니오의 행동은 이해가 안됐다.
‘일단 진정하자.’
불호령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일단 참았다.
요즘 얼마나 벌이가 시원치 않으면 이런 생각까지 했을까, 나이가 든 탓에 예전처럼 화를 낼 기력도 없었다.
“그걸 왜 나한테 허락을 구하나. 그 녀석도 이젠 성인이야. 볼 일이 있으면 직접 말해보게.”
“그럼 ··· 도련님이 허락만 하신다면 ··· ”
그러니까 그건 내가 끼어들 문제가 아니라 이 말이네.”
“감사합니다 회장님”
고영길은 임무를 다한 휴대폰을 근처에 내던졌다.
생각할수록 괘씸한 제안, 하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염려할 일도 아니다. 바른 생활을 표본 그 자체인 손자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받아들일까.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라며 잊어버렸다.
“어림없는 소리”
아니나 다를까, 다카기의 에이전트 제임스 콜튼은 이 소식을 듣고 코웃음을 쳤다.
다카기는 의류회사와의 전속계약 체결을 거절하고 야구에만 집중하겠다는 뜻을 내비치면서 팬들의 호응을 이끌어 냈다. 그리고 실제로 이뤄낸 결과, 한창 몸값이 오르고 있는데 왜 파칭코 기계의 모델이 돼야 하는 건가?
고객의 몸값을 끌어올려야 하는 에이전트 입장에선 말도 안 되는 제안, 다시는 이런 일로 연락하지 말라며 전화를 끊었다.
[지금 통화 가능하십니까?]
“예, 괜찮습니다.”
때맞춰 걸려온 보스턴 구단 관계자의 전화, 조금까지만 해도 퉁명스러웠던 콜튼의 목소리는 약간 상기됐다.
수더랜드 단장은 최근 다카기와 연장계약을 맺는 방안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
총 금액은 대략 1억 3천만 달러, 계약이 성사되면 다카기는 만 29세까지 보스턴에 남게 된다. 문제는 옵트 아웃과 트레이드 거부권 제한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 계약이 성사되면 마이너리그 내려갈 염려 없이 메이저리그 생활을 할 수 있다.
문제는 얼마나 뛸지 모르는 값어치가 한정돼 버린다는 것, 제임스 콜튼은 트레이드 거부권은 몰라도 옵트 아웃은 계약서 조항에 넣어달라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29세면 FA 시장에 나가도 좋은 금액 받을 수 있는 나이 아닙니까. 굳이 옵트 아웃을 넣을 이유가 ··· ]
“옵트 아웃이 안 된다면 계약금을 더 늘려주시죠.”
지금과 같은 활약이 계속된다면 다카기는 만 24세에 FA 자격을 얻는다.
워낙 이른 나이에 콜 업이 됐으니 FA 획득도 빠른 편, 그 나이에 시장에 나가면 연 평균 3000만 달러에 10년이 넘는 대형계약을 맺는 것도 가능하다.
장래가 촉망되는 선수가 뭣 때문에 1억이 조금 넘는 계약금에 29세까지 묶여있어야 하나,
제임스 콜튼이 생각하는 마지노선은 2억 달러, 물론 3억이 넘는 계약금은 다카기가 FA 자격을 얻으려면 앞으로도 건강하고 활약이 계속 돼야 가능한 장밋빛 미래다.
안전을 택한다면 1억 달러 계약을 받아들였겠지, 하지만 다카기는 자신의 가치를 그렇게 일찍 한정 짓진 않았다.
벌써부터 부상을 걱정하면 어떻게 대성하겠나. 아직 나이도 어리고 한 번 걸어볼만한 도박, 그 뜻을 잘 알고 있는 콜튼은 구단이 던진 미끼를 물지 않았다.
* * *
“와아아 ~ !!”
이곳은 보스턴의 홈구장 백 베이 파크,
보스턴은 3차전에서도 7회까지 5대 2 리드를 유지했다. ALCS 진출은 이제 코 앞, 승리를 연호하는 팬들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구단 직원들도 바쁘게 움직였다.
3년 만에 치르는 샴페인 파티, 특별석에 앉은 수더랜드 단장도 약간 들뜬 얼굴로 경기를 지켜봤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다카기와 연장 계약을 맺는 일이 잘 안 풀리고 있다는 것 정도, 옵트 아웃 조항을 넣어줄까 생각하고 있지만 조금 더 지켜보자는 측근들의 제안에 일단 덮어뒀다.
지금은 이 떠들썩한 분위기를 즐길 뿐, 더그아웃 보호펜스에 몸을 기댄 다카기도 잠시 마음을 풀었다.
하지만 잘 흘러가던 경기는 8회 들어 꼬이기 시작했다.
ALDS 1차전에서 2이닝을 소화했지만 홈런을 허용한 스티븐 루카스는 오늘도 첫 타자에게 2루타를 내주며 불안하게 출발했다.
샴페인 파티도 다 준비해 놨는데 여기서 지면 망신, 평소 불펜 운영에 냉정했던 브라이스 감독의 마음도 조금은 다급해졌다.
따악 ~ !!
“아 ··· 이 타구가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군요. 2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오면서 스코어는 5대 3이 됩니다.”
“지금 불펜에서 라이언 루드윅 선수가 몸을 풀고 있거든요. 루카스 선수가 정규시즌에 등판이 잦았기 때문에 체력적으로 부담이 되는 것 같습니다.”
브라이스 감독은 교체를 머뭇거렸다.
선수 몸 상태를 체크하는 것도 감독의 의무, 루카스의 구속은 오늘 93마일에 그치고 있다. 신경을 더 써야 했는데 오늘도 괜찮을 거라고 믿었던 게 오산, 어느 녀석의 말대로 마지막까지 방심해선 안 됐는데, 자기도 모르게 자만해 버렸다.
아웃카운트 하나도 못 잡고 내려가는 것만큼 불펜에게 굴욕적인 일이 또 있을까. 하지만 지금은 냉정해야 할 때, 머뭇거리던 발걸음을 겨우 움직였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
브라이스 감독은 말없이 루카스의 엉덩이를 두들겼다.
컨디션이 별로였다면 말을 할 것이지 왜 아무 말도 안 했을까, 한때 스타 플레이어였던 브라이스는 그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프로시절 달고 살았던 피로와 크고 작은 부상, 그래도 내색 없이 경기를 치렀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동료들이나 팀 분위기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책임감 때문, 루카스는 이제 보스턴에 없어선 안 될 불펜 요원이다.
23살 밖에 안 된 어린 선수지만 본인도 책임감을 안고 경기에 임하고 있겠지, 실점 했다고 눈치를 주는 건 감독이 할 짓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