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기대에 응하는 방법 - (14)
“자네 의견은 어던가?”
“프론스키를 보내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즌 최종 3연전에서 싹쓸이 승을 거둔 보스턴은 AL 동부지구 2위로 시즌을 마무리 했다.
뉴욕에 딱 한 경기 뒤진(98승) 아쉬운 결과, 포스트시즌 직행의 꿈이 와일드카드 결정전으로 바뀌자 수더랜드 단장은 측근들과 의견을 주고받았다.
다카기는 올 시즌 12승, 평균자책점 1.57이라는 믿기지 않는 투구를 펼쳤다.
규정 이닝만 채웠다면 라이브볼 시대 기록을 뒤집었을 성적, 최종 3연전에 나와 5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다면 메이저리그에 새로운 역사가 쓰였을 거다.
실제로 다카기는 불펜에 대기했지만, 팀이 여유 있게 3연승을 쓸어 담으면서 기록을 위해 등판할 이유가 없어졌다.
정말 중요한 건 포스트시즌, 이 날을 위해 등판 일정을 조정한 거 아닌가. 하지만 뒷북을 치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역사가 긴 만큼 메이저리그엔 어린 나이에 오른 선수들이 많다. 문제는 그 활약이 포스트 시즌까지 반드시 이어지진 않는다는 것, 첫 단추를 잘못 꿰고 커리어 내내 가을야구 징크스에 시달리다 우승반지 하나 없이 유니폼을 벗은 선수가 수두룩하다.
와일드카드 결정전은 한 번만 패해도 시즌을 접는 단두대 매치, 이 중압감을 어린 선수가 감당할 수 있을까?
다카기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프론스키라는 대안이 있으니 고민이 깊어지는 건 당연했다.
프론스키는 보스턴 이적 후 7승을 쓸어 담으며 15승 6패, 평균자책점 3.11로 시즌을 마무리 했다.
전반기도 훌륭했지만 특히 빛났던 후반기 피칭, 거기다 필라델피아 시절 쌓은 포스트 시즌 경험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그건 전성기 시절의 얘기, 구위가 떨어진 지금도 그때와 비슷한 활약을 해줄 수 있을까. 단장이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다카기를 정말 아낀다면 과잉보호를 해선 안 된다는 의견이 들고 일어났다.
“언젠가는 경험해야 할 일입니다. 단장님이 다카기를 진정한 에이스로 생각하신다면 이런 때일수록 험한 곳으로 밀어내야 합니다.”
가을야구에 부담이 안 되는 경기가 따로 있나.
있다고 쳐도 다카기는 그런 경기에 내보낼 선수가 아니다. 큰 경기에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장기계약 논의도 진지하게 고려를 해봐야겠지, 뭣보다 와일드카드로 디비전 시리즈에 진출한 팀은 아무리 승률이 좋아도 홈 어드벤티지를 적용받지 못한다.
보스턴이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프론스키를 소모하고 ALDS에 진출한다고 쳐도, 다카기는 원정에서 첫 경기를 치러야 한다는 뜻, 결국 어느 경기든 쉽지 않았다.
[다카기 하루요시 와일드카드 결정전 등판]
수더랜드 단장의 최종선택은 다카기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정이지만 포스트시즌에 강했던 프론스키도 있었기에 여론은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드러냈다.
와일드카드가 도입된 건 1994년, 이후 17년 동안 만 18세 선수가 팀의 운명을 짊어진 경우는 없다.
이런저런 참견이 오가는 건 당연, 그래도 다카기는 크로스 포수와 의견을 주고받으며 차분히 전략을 세웠다.
“나한테 뭐 물어볼 건 없냐?”
이때 프론스키가 한 수 거들고 나섰다. 이 녀석의 재능은 인정했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하니 필요하다면 조언을 해줄 생각도 있었다.
“무슨 조언을 해 줄 수 있는데?”
“네가 원한다면 뭐든지 말해 줄 수 있어.”
“ ··· 그럼 됐어”
예상 못한 퇴짜에 프론스키는 당황했다. 왠지 내가 한 방 먹은 느낌, 프론스키에게 매일 구박을 받는 크로스는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나중에 후회해도 난 모른다?”
“알았으니까 너 볼 일이나 봐.”
그렇게 끝난 밀당, 프론스키가 자리를 뜨자 크로스는 왜 거부했냐며 파트너의 속마음을 들춰봤다.
“뭐든 말해 주겠다는 건 말이 길어진다는 뜻이잖아. 넌 저 자식 잘난 체 하는 거 듣고 싶어?”
“푸하하 ~ 그건 그렇지.”
프론스키는 실력으로 나무랄 게 없지만 너무 나대고 잘난 체가 심하다는 게 문제, 뭣보다 월드시리즈를 경험한 건 크로스도 마찬가지라 굳이 프론스키 한 명에게 매달릴 이유가 없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데 포스트시즌 중압감이 그렇게 대단해?”
“나는 잘 모르겠는데, 마운드에 오른 녀석들은 그게 아니더라고”
크로스는 그동안 무너지는 동료들을 수도 없이 지켜봤다.
제 실력만 발휘했다면 절대 무너질 리 없는데, 갈팡질팡하는 파트너를 보며 안타까움을 삼킨 적이 몇 번인가.
2017년에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지만 그 전에 ALDS 탈락 2회라는 아픔을 겪은 베테랑은 포스트 시즌은 정규 시즌과 분명 다르다는 의견을 내놨다.
“그러니까 내 공만 던지면 문제없다는 거네?”
“뭐라고?”
“내 원래 실력만 발휘하면 문제없다는 거 아냐. 별 것도 아니네.”
반면 다카기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요약하면 자기 공을 못 던져서 무너졌다는 뜻 아닌가. 내가 할 일만 하면 걱정할 게 없는 게 걱정은 뭐 하러하나, 볼 배합을 무리하게 바꾸거나 쓸데없이 머리를 굴리는 짓도 그만두기로 했다.
그리고 운명의 9월 30일, 백 베이 파크에 집결한 5만 관중은 열렬한 함성으로 경기 시작을 알렸다.
“초구, 들어옵니다. 다카기는 오늘도 스트라이크 존을 적극적으로 공략하는 군요.”
“다카기 선수가 올 시즌 초구 스트라이크 비율이 60%나 되는데요. 오스틴 타자들도 이걸 알고 있을 텐데, 배트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보스턴 중계진은 경기 전, 다카기 - 크로스 배터리가 오늘 투심을 적극 활용할 거라고 예상했다.
다카기는 공격적인 투구로 타자를 몰아세우고 슬라이더로 삼진을 잡아내는 선수, 하지만 이런 단순한 투구가 포스트 시즌에서도 통할까? 투심 비율을 높일 거라고 예상했는데 예상이 빗나가자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쳐 봐라. 칠 수 있다면 말이지.’
크로스 포수는 다음 공도 빠른 볼을 요구했다.
다카기의 빠른 볼은 올 시즌 구종가치 3위를 찍을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이런 공을 아끼고 볼 배합을 바꾸는 게 말이 되나. 야구도 모르는 인간들이 지껄이는 헛소리, 참견과 달리 정규시즌보다 빠른 볼과 스트라이크 비율을 높였다.
[세상에서 가장 위력적인 공은 빠른 볼이다. 그보다 더 위력적인 건 더 빠른 볼 밖에 없다.
메이저리그에서 4334 탈삼진 금자탑을 쌓아올린 밥 래니의 격언, 다카기는 그 격언을 실력으로 증명했다.
“스윙!! 삼진입니다!! 래리 라킨을 4구만에 돌려세우는 군요.”
“지금은 바깥쪽 높은 공인데, 다카기 선수가 가장 컨디션이 좋을 때 나오는 패턴이거든요. 아무래도 저희가 쓸데없는 걱정을 한 것 같습니다.”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모두 100마일을 칠 수 있다는 말이 사실처럼 떠돌고 있지만 그건 착각이다.
실제로 93마일을 밑도는 빠른 볼은 피안타율이 높지만 임계점을 돌파할수록 피안타율은 급격히 낮아진다.
다카기의 빠른 볼 구속은 평균 97마일, 필요하면 더 끌어올릴 수 있다. 빠른 볼에 익숙한 메이저리그 타자들이라도 선뜻 배트를 내긴 어려운 수준, 거기다 제구까지 되는 수준이다.
컨트롤이 되는 날은 스트라이크 존을 3등분(좌 - 우, 상단)하는 게 가능할 정도, 여기에 떨어지는 체인지업을 섞어주면 타자들은 정신을 못 차린다.
무더기 삼진이 쏟아질 조짐, 오늘도 예고는 빗나가지 않았다.
“떨어집니다!! 낫 아웃, 크로스가 잡아서 1루에 송구합니다. 3회도 끝나지 않았는데 삼진 6개를 잡아내고 있군요.”
“빠른 볼, 체인지업 두 가지 밖에 없거든요. 슬라이더는 쓰지도 않는데 이런 결과가 나오고 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삼진이 쌓여갈수록 타자들은 적극적으로 달려들기 시작, 이때 다카기는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나는 슬라이더를 추가해 돌파구를 열었다.
구종도 다양하니 조합할 수 있는 패턴은 무궁무진, 쓰리 피치 투수라면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상대 타자에게 구종이 간파될 위험이 있지만 다카기는 그런 약점도 보이지 않았다.
자기 공만 던지면 절대 무너질 리 없는 기량, 4회까지 안타 하나만 내준 루키는 하루아침 사이 보스턴 팬들의 연인으로 지위가 격상됐다.
[그동안 너 없이 어떻게 가을을 보냈을까]
한 팬은 이런 문구가 적힌 팻말을 흔들었다.
올 시즌 첫 풀타임을 보낸 루키인데 오래 전 헤어진 연인이 곁으로 돌아온 느낌, 중계석도 왜 이제야 왔냐며 닭살 돋는 멘트를 쏟아냈다.
따악 ~ !!
돌아온 연인은 다카기 뿐만이 아니었다.
2017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끈 맥 리스는 4회 말 싹쓸이 2루타를 날리며 스코어를 4대 0으로 벌렸고, 경기가 순조롭게 흘러가자 특별석에 앉은 수더랜드 단장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5회까지만 던지게 할까. 아니, 지금 내릴까?’
여기서 끊고 ALDS 1차전은 프론스키, 2차전을 다카기에게 책임지게 하는 것도 좋은 전략 아닐까. 거기다 보스턴은 불펜이 튼튼한 팀, 여기서 내려도 별 일은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아니 이게 뭐야?!!”
“도대체 왜?!!”
5회 초, 하버스태드가 마운드에 오르자 홈팬들은 격분했다.
4회까지 다카기의 투구 수는 겨우 51개, 경기도 안 끝났는데 벌써 ALDS를 생각하는 건가.
4대 0으로 앞서고 있지만 안심할 수 없는 격차, 팬들의 야유만큼 중계석의 걱정도 짙어졌다.
하지만 보스턴은 6회 말, 2점을 더 추가하며 스코어를 6대 0으로 벌렸고, 불펜진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면서 보스턴은 와일드카드 결정전 최종승자로 등극했다.
이 날의 히어로는 싹쓸이 2루타 포함 5타점을 기록한 맥 리스, 그리고 생각보다 일찍 마운드를 떠난 모두의 연인도 기자들의 관심을 받았다.
“팬들이 이제 당신 없인 못 산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웃긴 소리죠. 그럼 저 없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온 겁니까?”
다카기는 바로 팬들의 애정표현에 퇴짜를 놨다.
너 없이는 못 산다니, 그럼 내가 태어나서 여기 오기 전까지 어떻게 살아온 건가? 지금이야 좋은 분위기에서 서로 즐기고 있으니 이런 말이 나오는 거겠지, 나중에 험한 꼴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올까?
내가 떠나도 잘 먹고 잘 사람들이라며 웃음을 유발했다.
“오늘 등판을 두고 여론에서 많은 걱정을 표했는데, 어떻게 경기를 준비하셨습니까?”
“별 다른 건 없었습니다. 제가 평소 던지던 공을 던진다면 결과는 따라 올 거라고 생각했죠.”
“그만큼 본인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저 정도면 자신감을 가질 만 하죠.”
끝을 모르는 자신감, 이게 바로 에이스의 위용이라는 건가.
어쨌든 이후에도 기자들의 질문은 계속 됐다.
“당신은 팬들의 기대에 응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뭔가 비결이라도 있는 겁니까?”
“글쎄요. 제가 해야 할 일을 한다면 그게 팬들이 만족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그것 외엔 특별할 게 없습니다.”
와일드카드 결정전이 끝난 후, 장기계약을 요구하는 보스턴 팬들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아직 더 지켜봐야겠지만 가을에도 통했던 다카기의 실력, 특히 보스턴은 연봉 조정 때문에 선수들과 충돌이 잦았던 팀이라 팬들은 수더랜드 단장이 불화의 씨앗을 원천 차단해 주길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