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기대에 응하는 방법 - (13)
“더 봤자 눈만 버리겠군.”
한편, 다카기의 활약을 TV를 통해 지켜보던 노인은 리모컨을 내려놨다.
그 정체는 오카다 노부카츠, 일본 프로야구에서 617홈런을 기록한 슈퍼스타이자 미츠이 유사쿠에게 11완투를 강요한 바로 그 인물이다.
오카다는 MLB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타자들은 밀어 칠 줄 모르고 삼진 아니면 홈런, 저런 허접한 리그에서 삼진을 쓸어 담는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뭣보다 일본에서 야구를 배웠으면 일본 프로야구를 위해 뛰어야지 미국으로 휙 날아가 버린 애송이가 곱게 보이지 않았다.
“MLB는 수준이 낮아졌다. 저런 리그에서 활약해 봤자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
다카기의 시즌 12승 소식이 들려온 그날, 오카다는 어린 선수의 활약을 은근 깎아내렸다.
홈런 아니면 삼진이 난무하는 무대, 이게 무슨 야구인가. 심지어 MLB 선수들은 야구가 아니라 쇼를 하고 있는 거라며 비꼬았다.
‘그 버릇 아직도 못 고쳤군.’
이 소식을 접한 미츠이는 경악했다.
다카기는 일본의 3번 째 WBC 우승을 위해 반드시 차출해야 하는 선수, 하필이면 최악의 타이밍에 심기를 건드렸다.
오카다 밑에서 선수 생활을 해본 미츠이는 그 시커먼 속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FA 자격을 얻자마자 미국으로 넘어갔고, 팀 성적이 바닥을 기자 오카다는 미츠이를 연일 비난했다.
은혜도 모르는 놈이라는 둥, 그놈 때문에 팀 기강이 흐려져 성적이 안나온 다는 둥, 모든 책임을 미츠이에게 전가했다.
본인이 자초한 일인데도 끝까지 인정하지 않은 고집쟁이, 결국 오카다는 성적부진에 책임을 지고 경질됐지만 이후에도 활발한 활동으로 일본 야구에 적잖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런데 은둔생활을 하던 미츠이가 활동을 재개하고 유명세를 타자 은근 신경이 쓰였겠지, 여기에 다카기가 좋은 활약을 하면서 야구 팬들의 관심도 MLB 쪽으로 쏠리고 있다.
오카다는 일본에서 600홈런을 넘겼고 내가 뛰는 리그가 최고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야구 본고장에서 커리어 대부분을 보낸 미츠이는 그딴 생각은 해 본 적도 없다.
투수들의 빠른 볼이 워낙 좋기 때문에 밀어치는 타격은 생산력이 떨어질 뿐,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밀어 치는 걸 못해서 안 하겠나? 현대 야구를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은 발언, 예전부터 오카다 감독을 좋게 보지 않은 미츠이는 다카기의 심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반격에 나섰다.
“오카다 씨는 메이저리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본야구가 아직도 최고라는 환상에 젖어 있는 것 같은데, 여기 있는 선수들의 실력은 국내 선수들과 차원이 다른 수준입니다.”
일본 여론은 약간 미묘한 반응을 보였다.
다 알고 있는데 그렇게 대놓고 말해야 하나. 한 기자는 오카다 위원이 일본 야구의 자긍심을 높일 생각으로 그런 발언을 할 건데, 미츠이가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 아니냐는 뉘앙스의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이 소식은 다카기의 귀에도 전해졌고, 기자들 앞에서 포문을 열어젖혔다.
“그럼 WBC에서 한 판 붙어봐야겠네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 ”
“일본 프로야구 수준이 그렇게 대단하다면 붙어봐야죠.”
다카기는 내년 WBC에서 일본 대표팀 유니폼을 입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그렇게 일본 리그가 대단하면 나 없이도 우승을 할 수 있겠지, 그러니 나는 수준 떨어지는 메이저리그를 대표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농담 아닙니다. 저는 이곳이 세계최고의 야구선수들이 모이는 무대라고 믿고 도전을 택한 겁니다. 이 타이밍에 그런 발언을 했다는 건 절 무시하는 짓입니다. 반드시 짓밟을 겁니다.”
미국 국적을 가진 메이저리거들도 발끈하고 나섰다.
그 오카다라는 노인은 우리가 실력이 없어서 그동안 미일 올스타전이나 WBC에서 일본과 대등한 경기를 펼친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올스타전은 이벤트 성 경기라 대충 어울려 준 것뿐, WBC도 이름값이 떨어져 스타 선수들이 출전을 고사한 것뿐이다.
이것들이 봐주니까 무서움을 잊은 것 같은데, 다음 대회에선 메이저리그의 위대함을 깨닫게 해주겠다며 너도 나도 출전을 약속했다.
“다카기가 미국 대표팀 유니폼을 입겠다면 문제될 게 없다.”
한 술 더 떠, 메이저리그 사무국도 WBC 흥행을 위해 논란에 부채질을 더했다.
미국은 워낙 뛰어난 선수가 많아 WBC 선택권을 엄격히 정해버리면 다른 나라와 밸런스를 맞출 수가 없다. 당연히 국적 선택권을 폭 넓게 인정할 수밖에 없고, 메이저리그 재진입을 노리는 선수들은 사돈의 팔촌까지 뒤져가며 다른 나라 유니폼을 입는다.
물론 이건 미국 내에서도 유효한 규정, 다카기는 아직 미국 시민권이 없고, 양친도 미국인이 아니지만 고모가 미국에서 20년 넘게 거주하고 있다.
선선대 조상까지 뒤져가며 유니폼을 갈아입는 대회에서 친척의 국적을 선택하는 게 이상한 일인가.
뭣보다 대회 주최자인 WBCI는 메이저리그 사무국과 선수노조가 이끌어 가는 단체, 다카기가 미국 대표로 나가겠다면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 벌집을 들쑤신 것, 하지만 이 소식을 접한 오카다는 그럴 거면 아예 미국으로 귀화하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다카기는 처음부터 순혈 일본인이 아니었다. 다들 그 사실을 잊고 있는 것 아닌가?”
설상가상 다카기의 집안까지 들쑤셨고, 격노한 고영길은 그 입 다물라며 발끈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은둔하고 있지만 한때 교토야구본부 협회장을 지냈던 인물, 수많은 스타 선수들을 배출한 만큼 그 목소리엔 무시할 수 없는 힘이 실려 있었다.
“어린 선수가 미국에서 일본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 뭣보다 내 손자는 두 번이나 일본 대표 팀 유니폼을 입었고, 청소년 대회에서 우승까지 일궈냈다. 그런데도 일본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면 놓아줘라. 나도 내 손자가 저런 말까지 들으면서 일본 대표 팀 유니폼을 입길 바라지 않는다.”
일본 여론도 고영길의 의견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동기는 둘째 치고 다카기는 고교 1학년, 3학년 시절에 일본 유니폼을 입고 청소년 대회 우승 1회, 준우승 1회를 이끌었다.
이 정도면 일본의 위상을 높였다고 해도 좋을 정도, 그런데 메이저리그에서의 활약을 깎아내리고 먼저 시비를 건 게 누군가? 누가 봐도 잘못한 쪽은 오카다, 프로야구 원로라고 해도 잘못한 건 따지고 넘어갔다.
“이쯤에서 그만 하시죠.”
일이 커지자 일본 야구 위원회는 사태 수습에 나섰다.
지금이라도 다카기의 활약을 인정하고 화해하라는 것, 하지만 오카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 녀석 한 명 없다고 일본이 우승 못하는 건가? 협회가 이렇게 겁을 먹고 있는데 무슨 우승을 하겠나?!!”
“아니 ··· 저는 그런 뜻으로 말씀을 드린 게 아니라 ··· 이대로 논란이 계속되면 위원님의 명예에도 좋을 게 ··· ”
“됐어!! 내 앞에서 그런 소리 다시는 꺼내지도 말게!!”
일본협회는 한숨을 내쉬웠다.
감독 시절, 저렇게 행동하다 스타 선수들을 다 떠나보냈는데 그 버릇을 아직도 못 고쳤을 줄이야, 그나마 말이 통할 것 같은 다카기를 설득하고 나섰다.
“자네가 이해하게. 그 인간 노망난 거 다 알고 있어.”
일본 대표 팀 지휘봉을 잡은 아사쿠라 감독도 급히 미국으로 날아와 다카기를 다독였다.
선발 주자로 미츠이 씨를 먼저 보냈지만 이제는 더는 미룰 수 없는 일, 하지만 기분이 상한 다카기는 지금은 포스트 시즌이 우선이니 WBC 출전 논의는 다음에 하자며 퇴짜를 놨다.
보스턴은 뉴욕에 2게임 뒤진 AL 동부지구 2위에 머물고 있다.
와일드카드 경쟁은 여유 있게 앞서고 있지만 지금은 1위를 노리는 게 우선, 수더랜드 단장은 지난 등판이 올 시즌 마지막 선발경기라고 못 박았지만 다카기는 팀의 1위를 위해서라면 불펜으로 나갈 수 있다는 개인적인 의견을 드러냈다.
[Respect you]
보스턴 팬들은 그런 루키에게 찬사를 보냈다.
이제 겨우 1년 차인데 실력이나 팀의 승리를 위하는 마음은 베테랑 급, 이런 선수에게 면박을 준 오카다라는 인간을 직접 겨냥하기도 했다.
[넌 메이저리그에서 뛰었으면 홈런 50개도 못 쳤어]
-> 50개는 무슨, 메이저리그 승격도 못했지. 계약제의나 받은 적 있냐?
[압축 배트 쓰고 펜스도 짧은 구장에서 600홈런 쳤다고 자랑하네]
-> 일본 야구는 딱 더블 A급이다. 그 이상 평가하는 건 선수들에게 모욕이다.
미국 현지 팬들의 조롱에 오카다는 발끈했지만 다카기는 침묵을 유지했다.
내가 나서지 않아도 이제 팬들이 알아서 싸워주는데 무슨 상관인가. 그저 감독의 호출을 기다릴 뿐, 앞으로 남은 경기에서 마운드에 오를 의무는 없지만 불펜에 앉아 언제든 경기에 나설 수 있도록 몸을 풀었다.
‘안 풀리네 ··· ’
적지 클리블랜드에서 맞이한 최종 3연전, 보스턴의 브라이스 감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올 시즌 95승을 거뒀지만 이 정도로 만족할 수 없는 게 사실, 어제 뉴욕이 패했으니 오늘 경기는 무조건 잡아야 역전이 가능한데, 초반부터 선발투수가 흔들리며 리드를 내주고 말았다.
타자들도 어깨에 힘이 들어간 탓인지 칠 수 있는 공을 놓치는 중, 그렇게 답답한 경기가 5회까지 이어졌다.
따아악 ~ !!
“강하게 친 타구가!! 좌측 담장 밖으로 넘어갑니다!! 맥 리스의 시즌 30호 홈런!! 보스턴이 4대 2까지 추격을 개시합니다!!”
“3년 만에 30홈런을 달성하네요. 돌아온 걸 환영합니다.”
2017시즌 리그 MVP 2위까지 올랐던 스타의 부활, 간만에 연봉 값을 한 맥 리스는 동료들이 두드리는 물통 박자에 맞춰 춤을 추는 세리머니를 펼쳤다.
하지만 아직 기뻐하긴 이른 상황, 후속 타자 실 쿠퍼도 타석에서 집중력을 높였다. 원정경기를 치르면 술을 입에 달고 다니지만 이번 시리즈는 팀 운명을 위해 스스로 금주를 했다.
그만큼 기강이 잡힌 클럽하우스 분위기, 보스턴 팬들이 통산 10번 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기대하는 건 당연했다.
따아악 ~ !!
“이번에는 우측!! 이 타구의 종착점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백 투 백 홈런!! 실 쿠퍼의 시즌 27호 홈런으로 원 런 게임이 됩니다!!”
“역시 지난 2년에 비해 팀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올해는 기대해 볼 만 합니다.”
후속타자 후안 위긴스의 백투백투백(21호 홈런)이 나오면서 보스턴은 기어이 경기를 원점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6회 말, 하버스태드가 방화를 저지르며 경기는 재역전, 아메리칸 리그 최하위 팀이 오늘 왜 이리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건지, 보스턴 선수단은 떨어지라며 팔을 휘둘렀지만 클리블랜드의 공격은 계속 됐다.
아차 하는 사이 5대 3까지 벌어진 게임, 더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브라이스 감독은 스티븐 루카스를 마운드에 올렸다.
하지만 루카스는 싹쓸이 2루타를 맞으며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경기가 7대 3으로 벌어지자 흥에 들떴던 보스턴 더그아웃은 침묵에 휩싸였다.
그동안 철벽을 자랑하던 루카스가 왜 하필 여기서 무너진 건가. 믿음이 컸던 만큼, 선수들의 어깨는 축 늘어졌다.
“정신 차려 이 자식들아!! 경기 끝났어?!! 어?!!”
이때 애리조나에서 굴러들어온 앤디 프론스키가 분위기를 다잡았다.
성격은 까칠해도 경기를 대하는 투지는 확실한 선수, 너희들 같은 급료 도둑에게 돈을 지불하는 팬들의 입장을 생각하라는 독설을 퍼부었다.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
“뭐가 그렇게까지야?!! 내가 단장이라면 너 팔고 코긴 데려왔어!!”
프론스키는 보스턴으로 넘어온 이후, 트레이드 마감시한이 끝나는 날까지 단장에게 매리언 코긴(시카고)을 영입해 달라는 제안을 계속 했다.
코긴은 눈으로 드러나는 지표에 비해 저평가를 받는 선수, 수더랜드 단장이 조금만 관심을 기울였다면 데려올 수 있었을 텐데, 빈자리가 없어서 트레이드에 실패했다.
코긴과 비교당한 데이비드 크로스 입장에선 자존심 상하는 발언, 보란 듯이 7회 초 공격에서 안타를 치고 나갔다.
그리고 보스턴은 이를 발판 삼아 거짓말처럼 재역전에 성공, 프론스키는 한걸음에 브라이스 감독 옆으로 달려갔다.
“다카기 안 올릴 겁니까?”
“지금 뭐라고 했나?”
“올려야죠. 지금 불펜에 그 녀석만큼 확실한 방패가 어디 있습니까?”
브라이스 감독은 코웃음을 쳤다.
스캇 포데스와라는 확실한 마무리가 있는데 왜 다카기를 입에 올린 건가. 진짜 올리면 그건 포데스와의 자존심을 짓뭉개는 짓이다.
프론스키가 야구를 보는 안목이 예사롭지 않다는 건 인정했지만 선수기용은 감독의 몫, 이 이상 날뛰는 건 두고 보지 않았다.
“좀 조용히 할 수 없나? 자네는 입만 다물고 있으면 나무랄 게 없어.”
“좋아요. 하지만 다카기가 최선책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고요.”
프론스키는 끝까지 한마디 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브라이스 감독은 예정대로 포데스와를 투입, 포데스와는 시즌 37번째 세이브를 거두며 감독의 기대에 부응했다.
이제 뉴욕과의 격차는 1게임, 극적인 승리를 거둔 보스턴 선수단은 하이파이를 주고받으며 하루를 마무리 했다.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웠어?”
이와중에도 포데스와는 프론스키에게 서운함을 표했다.
다카기와 친하게 지낸다고 너무 그 녀석을 밀어주는 건 아닌지, 하지만 프론스키는 너스레를 떨었다.
“생각을 좀 해라. 이 자식은 지금 일본의 미친 XX한테 무시당하고 있잖아, 우리가 기를 살려줘야지 누가 해주겠어?”
“그런 거야?”
“그래, 오늘은 네가 잘못한 거야. 감독이 등판하라고 해도 거부했어야지.”
“그쯤 해두지 그래?!!”
가만히 듣고 있던 다카기는 프론스키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차라리 무시를 할 것이지 동정을 받는 건 질색, 프론스키는 장난이었다고 둘러댔지만 다카기는 뚱한 얼굴로 호텔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