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기대에 응하는 방법 - (12)
‘이게 뭐야’
클럽하우스에서 말로만 듣던 전설과 마주한 다카기는 할 말을 잃었다.
미츠이 유사쿠는 현역시절 190이나 되는 큰 키에 탄탄한 몸, 단정한 외모로 일본에서 제법 많은 여성 팬을 확보 했다.
커리어 말년에도 철저한 몸 관리로 균형 잡힌 몸을 유지해 많은 선수들의 귀감이 됐는데 지금은 슬쩍 밀면 굴러 갈 것 같은 체형, 이 사람이 정말 미일에서 통산 178승을 거둔 전설이 맞는 의심스러웠다.
“이거 뭔가 잘못된 건 아니죠?”
“하하 ~ 내가 살이 좀 찌긴 했지.”
미츠이는 그러려니 하는 반응을 보였다. 내 모습을 보고 놀란 건 기자들도 마찬가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뭣 때문에 먼 길을 날아왔을까, 딱히 시구뿐만이 아니라 미츠이는 얼마 전 프로구단의 인스트럭터 제안을 받았다. 선수를 지도하려면 그만한 지식을 갖춰야겠지, 상식을 파괴하는 다카기를 만나보고 그 비법을 전수 받고 싶었다.
“글쎄요. 제가 어르신에게 가르침을 드릴 수준이 될지 모르겠네요.”
곁에 있던 기자들은 웃음보가 터져버렸다.
하긴, 미츠이도 이제 60을 앞둔 몸, 호칭이 마땅치 않아 어르신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 같은데 본의 아니게 굴욕을 당한 전설은 헛기침으로 민망함을 다스렸다.
“그냥 선배라고 부르게.”
“그래도 될 까요?”
“어르신보다는 그게 낫지”
다시 훈훈해진 분위기, 어쨌든 미츠이는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다시 한 번 가르침을 구했다. 그렇게 자리는 불펜으로 옮겨졌고 미츠이는 다카기의 피칭을 유심히 지켜봤다.
‘저러면 중심이 잘 안 잡힐 텐데 ··· ’
자동차가 달리려면 시동을 걸어야 하는 건 당연, 투수들도 축발이 되는 오른 발에 힘을 실어주는 과정을 거친다.
이걸 와인드업이라고 하는 건 상식, 그런데 다카기는 그 자세가 거의 생략됐다. 비유하자면 바로 시동을 걸고 달리는 자동차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잘 하고 있는 선수에게 이런저런 참견을 하는 건 실례라 조용히 지켜봤다.
현역 시절, 미츠이는 와인드업을 크게 하는 역동적인 투구 폼과 강속구를 앞세워 많은 삼진을 잡아냈다.
하지만 이런 폼은 도루를 내줄 위험이 있기 마련, 그래서 주자가 나가면 세트 포지션 자세에서 투구를 했다.
반면, 다카기는 와인드업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주자가 있든 없든 투구 폼이 일정한 편, 구종에 따라 릴리스 포인트를 바꿔주긴 하지만 큰 차이는 없다고 봐도 좋았다.
‘말도 안 돼. 저게 가능하다고?’
미츠이는 다카기의 투구를 TV로 접하고 경악했다.
저렇게 단순한 중심 이동으로 100마일을 던지다니, 뭣보다 미츠이는 유니폼을 벗는 날까지 세트포지션 상태에서 구위가 떨어지는 약점을 극복하지 못했다.
내가 평생 동안 고민한 문제를 저 어린 선수가 이렇게 쉽게 해낼 줄이야, 그동안 고생한 게 억울했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와인드업을 안 하는 것 같은데, 동작을 조금 더 추가하면 구속이 더 빨라지지 않겠나?”
“와인드업 하고 구속이 무슨 상관이 있는데요?”
다카기는 전설의 이론에 의문을 품었다.
많은 사람들이 와인드업을 하면 구위가 더 살아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다카기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와인드업을 하는 이유는 기술적인 문제도 있지만, 사실 투수의 심리와 연관이 있다.
아무리 배짱이 좋은 투수라 해도 바로 스트라이크 존에 공을 던질 수 있을까? 숨 한번 고르고 캡도 한 번 어루만지고, 팬들 눈엔 쓸데없이 시간을 끄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다 마음을 가다듬기 위한 과정이다.
와인드업도 그 연장선, 바로 시동을 거는 게 아니라 천천히 가면서 마음을 가라앉히는 거다.
중심이동만 잘 이뤄진다면 시동이 늦게 걸리든 일찍 걸리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다카기는 제법 날카로운 질문으로 전설의 가슴을 꿰뚫었다.
“와인드업에 신경 쓰는 건 망설임이 있었기 때문 아닐까요?”
“망설임? 내가 말인가?”
“네, 솔직히 선배님 주자 있을 때 제구가 흔들린 건 사실이잖아요.”
미츠이는 지나간 기억을 되돌려 봤다.
데뷔 경기에서 17삼진을 잡아내며 혜성같이 등장한 에이스, 이후 미츠이는 6경기 연속 10삼진을 잡아내며 NPB 무대를 휩쓸었다.
하지만 그 행진은 오래가지 못했다.
상대 팀은 미츠이가 세트 포지션 상황에서 제구가 흔들린다는 걸 간파, 타자들이 변화구를 골라내기 시작하자 수세에 몰렸다.
그래도 4년 연속 250탈삼진을 잡아내며 최단 기간 1000탈삼진을 잡아내는 위용을 뽐냈지만, 볼넷도 417개나 내줬다.
왜 나는 유독 세트포지션 상황에서 약했던 걸까? 도루를 막기 위해 와인드업을 생략한 게 구위와 제구 하락으로 이어진 걸까?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거겠지.
진짜 문제는 당신의 망설임 아니었냐는 말에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충격을 받았다.
그에 비해 다카기는 투구에 망설임이 없다.
휴스턴 타자들이 다카기의 릴리스 포인트를 잡아냈다고 의기양양 했지만 결과는 16삼진 헌납, 투구가 워낙 빠르게 이뤄지고 암 스윙이 빨라 버릇을 잡아내는 게 큰 의미가 없다.
글러브 위치나 세트포지션 자세에서 뭔가 좋지 않은 버릇이 잡혔다면 바로 공략을 당했겠지, 하지만 엇 ~ 하는 사이 날아오는 볼을 눈썰미로 잡아내는 건 쉽지 않았다.
‘역시 내 이론을 고집할 이유가 없군.’
미츠이는 다카기의 조언에 깨달음을 얻었다.
스타 출신 지도자가 실패하는 이유는 본인의 고집 때문이다. 본인의 방식대로 성공을 했으니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겠지, 하지만 그걸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면서 문제가 시작된다.
현역 시절, 미츠이는 통산 617홈런을 날린 오카다 감독이 타자들에게 천편일률적인 지도를 하는 걸 보고 기자들 앞에서 불만을 표한 적이 있다.
그리고 바로 시작된 보복, 오카다 감독은 이후 미츠이가 완투를 할 때까지 마운드에서 내리지 않았다.
상식을 초월하는 내구력을 지닌 미츠이는 11경기 연속 완투를 기록, 그렇게 단일 시즌 284이닝이라는 말도 안 되는 기록을 세웠다
일본 여론은 역사적인 시즌으로 포장해주고 있지만 선수에겐 그리 유쾌한 않았던 경험. 미츠이가 은퇴 이후 지도자의 길을 걷지 않고 은둔 생활을 한 것도, 일본 야구 특유의 폐쇄성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자신의 지도에 따르지 않는 선수를 쓰지 않는 감독들이 있는 게 현실, 그땐 그게 그렇게 싫었는데 나는 왜 어린 선수에게 이딴 소리를 하는 건가. 내가 지도자 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은둔을 택한 게 아닐까.
지금까지 부정해 왔던 속마음이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녀석이 일본에 남았다면 이런 투구를 할 수 있었을까?’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다카기의 투구 이론은 일본 지도자들의 정석과 완전히 배치된다.
만약 NPB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면 이런저런 수술을 강요받았겠지, 혹시 그걸 예견하고 미국으로 넘어온 건 아닐까. 그게 사실이라면 선견지명이 대단한 것, 어쨌든 어린 나이에 메이저리그 무대를 폭격하고 있는 게 기특하고 자랑스러웠다.
“내일 경기 보고 가실 거죠?”
“그럼, 기대하겠네.”
“꼭 보세요. 그날 제가 선배님 기록 깰 겁니다.”
다카기는 마지막까지 건방졌다.
그래도 밉지 않은 건방짐, 시구를 마친 미츠이는 바로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미국에 남아 다카기의 시즌 마지막 등판을 지켜봤다.
오늘의 초대 손님은 토론토, 타격이 강한 팀이지만 다카기 앞에선 그리 강해 보이지 않았다.
‘느린 슬라이더는 어디 갔냐?’
토론토 타선은 휴스턴을 침몰 시킨 느린 슬라이더를 경계했다. 하지만 실전에서 마주한 건 빠른 볼과 고속 슬라이더, 예상했던 시험지가 아니라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딱 ~
“파울입니다. 카운트는 원 볼 투 스트라이크”
“슬라이더겠죠. 과연 이번에도 알고 당할지 지켜보겠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삼진!! 흘러나가는 공에 배트를 돌리는군요. 첫 타자부터 삼진을 잡아내고 있습니다.”
“저도 예상한 조합을 타자들이 모를 리 없을 텐데 ··· 이 선수는 미래를 보는 수정구슬이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요?”
보스턴 현지 해설위원은 이젠 놀랍지도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타자의 속마음을 읽는 베테랑은 가끔 있지만, 이 어린 선수가 이런 투구를 해도 되는 건가. 마치 미래를 보는 것처럼 망설임 없는 피칭과 따라오는 결과, 미래가 보이는 수정 구슬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농담처럼 들리질 않았다.
“어떻게 ··· 어제 대화 많이 하셨습니까?”
“네, 생각보다 더 대단한 선수더군요.”
“하하 ~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한편, 수더랜드 단장은 특별석에서 미츠이 유사쿠와 이런 저런 잡담을 나눴다. 평소 경기를 볼 때 말이 없는 스타일이지만 다카기가 올라오는 날은 예외, 그만큼 믿음이 있었기에 잡담까지 하는 여유를 보였다.
“미리 말씀드리는데 다카기는 WBC에 안 내보낼 겁니다.”
“글쎄요. 다카기 선수의 입장도 들어봐야죠.”
두 사람은 미묘한 신경전을 벌였다.
얼마 전, 미츠이는 2021 WBC 일본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아사쿠라 토무라 감독과 면담을 나눴다.
본인도 조만간 선수 차출을 위해 미국으로 오겠지만, 그 전에 미츠이에게 보스턴 구단을 염탐하도록 부탁, 정보력이라면 누구보다 앞서는 보스턴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
‘절대 안 되지. 다카기는 이제 우리의 소중한 자산이라고’
수더랜드 단장은 WBC 차출 따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제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한 슈퍼 에이스, 2년 차 시즌이 얼마나 중요한지 두말 하면 잔소리 아닌가.
WBC 우승이 월드시리즈 우승보다 대단한 것도 아니고, 일본이 계속 압박을 한다면 구단의 역량을 총동원해 다카기를 변호할 계획도 세웠다.
하지만 일본도 다카기가 필요한 입장, 오늘은 이 정도로 끝났지만 앞으로 벌어질 기싸움은 더 격렬할 게 분명했다.
“와아아 ~ !!”
그 사이 다카기는 두 번째 타자마저 삼진 처리, 3번 타자 버나드 길키가 타석에 들어섰다.
지난 4월, 버나드 길키는 하버스태드의 위협구에 격분해 보스턴 클럽하우스까지 쳐들어 온 적이 있다.
다카기를 루키라고 모욕하다 멱살잡이까지 당했으니 오늘은 그 빚을 청산할 차례,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따아악 ~ !!
“센터 쪽 멀리 가는 이 타구가 ··· 아 ~ 담장을 넘어가는 군요. 버나드 길키의 시즌 29호 홈런, 토론토가 선취점을 가져갑니다.”
“지금은 바깥 쪽 높았는데 버나드가 잘 때려냈네요. 그리고 다카기의 19이닝 연속 무실점 기록도 마감이 됩니다.”
깔끔한 1회를 기대했던 홈팬들은 긴 탄식을 품어냈다.
그동안 워낙 압도적인 투구를 펼쳤던 선수라 더 아쉬운 홈런, 하지만 다카기는 아랑곳 하지 않고 다음 타자와의 승부에 집중했다.
‘선배님에겐 망설임이 있었던 게 아닐까요?’
미츠이는 그런 후배의 투구를 유심히 지켜봤다.
무서울 정도로 내 속마음을 꿰뚫어 본 녀석, 홈런을 맞으면 좀 위축될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아니라 괘씸하면서도 대견했다.
일본 대표 팀에 필요한 재능, 단장은 출전에 반대하고 있지만 떠나기 전에 WBC 출전 여부를 슬쩍 찔러보기로 했다.
‘이번엔 내 차례다.’
그렇게 경기는 흘러 3회 초, 다카기는 홈런을 내 준 길키를 삼진으로 잡아내고 포효했다.
배트 플립, 산책 주루도 야구의 흥미를 더 하는 조미료, 그까짓 거 이해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이번엔 내가 이겼으니 똑같이 갚아주면 그만, 삼구 삼진을 당한 길키도 별 반응 없이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루키라도 잘 하는 건 사실, 그 실력을 인정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