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기대에 응하는 방법 - (11)
“우릴 가지고 놀겠다는 거냐?”
다카기의 발언에 휴스턴 선수단은 발끈했다.
우릴 얼마나 만만히 봤으면 삼진 18개를 잡아내겠다는 헛소리를 하겠나. 하지만 휴스턴은 올 시즌 가장 많은 삼진을 당한 팀, 그만큼 홈런도 많이 때려냈지만 타선의 유대감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라 할 말은 많지 않았다.
그저 실력으로 건방진 루키를 단죄할 뿐, 그렇게 시간은 흘러 결전의 날이 밝았고 다카기는 여느 때처럼 불펜에서 연습투구를 했다.
“너 아직도 그거 붙이고 있냐?”
“얼른 떼 버려.”
여전히 얼굴의 일부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반창고, 동료들은 참 없어 보이는 액세서리라고 놀렸지만 다카기는 깨끗하게 무시했다.
미국은 몰라도 일본에선 제법 화제가 된 패션, 앞으로도 반응이 좋다면 나만의 정체성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뭐가 이렇게 빨라?’
1회 초 휴스턴의 선공, 초구를 지켜본 존 해먼드는 위협을 느꼈다.
같은 97마일이라도 유독 빠르게 다가오는 공, 투 스트라이크 원 볼에서 들어온 느린 슬라이더에 헛스윙을 돌렸다.
‘다음엔 다를 거다.’
삼진을 당했지만 해먼드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얼마 전, 메이저리그 전문 기자는 스탯 캐스터를 통해 축적한 자료를 근거로 릴리스 포인트와 볼넷의 상관관계를 밝혀냈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캔자스시티의 패트릭 브린은 RPV(릴리스 변동폭)이 겨우 0.1에 불과했고, 실제로 9이닝 당 볼넷이 가장 적은 것으로 증명됐다.
브린 뿐만 아니라 상위권 10명 모두 볼넷이 적은 편, 하지만 여러 가지 구종을 일정한 릴리스 포인트에 던져야 좋은 투수라고 할 수 있을까?
결과는 물음표, 실제로 많은 투수들은 구종에 따라 팔각도나 릴리스 포인트를 바꿔준다.
투수의 사소한 버릇까지 캐치하고 분석하는 메이저리그에서 이건 자살행위 아닐까? 통계는 그렇지 않다는 해석을 내놨지만 존 해먼드는 상대 투수의 버릇이나 특징을 잡아내는 눈썰미로 명성이 높은 편, 통계를 근거로 한 분석 따윈 믿지 않았다.
다카기는 슬라이더를 던질 때 릴리스 포인트가 높은 편, 고급 정보를 동료들에게 흘렸다.
‘확실히 ··· ’
‘차이가 있어.’
휴스턴 타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먼드의 말대로 약간 차이가 있는 편, 타순이 한 바퀴 돌자 너도 나도 마음먹고 배트를 돌렸다.
하지만 생각처럼 잘 되진 않았다.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고 스트라이크 존 한 가운데로 납작하게 떨어지는 궤적, 결정구가 슬라이더라는 걸 알고도 당했다.
설마 이 정도 수준의 변화구를 스트라이크 존에 넣었다 뺄 수 있다는 건가? 다들 느린 슬라이더에 손발이 묶여 버렸다.
“지켜봅니다. 이것도 슬라이더죠?”
“네. 지금도 팔을 끌고 나오지 않고 그냥 휙 던져버리거든요. 패스트볼과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빠른 볼은 릴리스 포인트를 최대한 타자 쪽으로 당겨줘야 위력적인 구위가 나온다.
패스트볼과 거의 비슷한 궤적으로 날아가다 마지막에 꺾이는 슬라이더도 그렇게 던져줘야 정상, 물론 다카기도 고속 슬라이더를 활용할 땐 그렇게 던지지만 느린 슬라이더라면 좀 다르다.
다카기처럼 위력적인 포심을 던지는 투수를 상대하려면 준비자세를 그만큼 빨리 해야 되는데, 갑자기 느린공이 들어오면 어떨까.
앞발에 장전된 힘이 풀리면서 밸런스가 무너지는 사태가 속출, 눈에 보이는 공이라도 다카기가 선보인 슬라이더는 수직 무브먼트가 13인치, 수평 무브먼트가 10인치나 됐다.
안다고 정확히 칠 수 있는 수준도 아니거니와 큰 스윙을 하는 휴스턴 타선에게 상성이 좋지 않은 구질, 구종을 알고도 당하는 상황이 반복됐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 ’
더그아웃 벤치에 앉은 앤드 프론스키는 잠시 추억에 잠겼다.
불같은 강속구와 느린 커브, 슬라이더로 타자를 압도하는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구위가 떨어져 다양한 구종에 의지하고 있으니, 내 예전 모습을 보는 것 같다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프론스키는 다카기의 느린 슬라이더를 커브로 분류했다.
원래 커브와 슬라이더의 차이는 손목을 얼마나 더 틀어주느냐는 정도일 뿐, 저런 무브먼트라면 슬러브라는 표현도 틀리지 않았다.
투수에게 가장 짜릿한 경험은 뭘까?
삼진? 그것도 좋지만 앤디 프론스키는 타자가 내가 뭘 던질지 아는데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때 가장 큰 희열을 느꼈다.
상대를 정신적으로 능욕하는 느낌이랄까, 좀 심하게 말하면 합법적인 강간, 실제로 프론스키는 과거에 이와 비슷한 인터뷰를 했다가 기자들에게 물어뜯긴 경험도 있다.
그래도 절대 잊을 수 없는 짜릿함, 지금도 타자의 정신을 능욕하는 투구를 즐긴다. 그런데 저 어린 녀석은 벌써부터 그런 짓을 하고 있으니, 아주 대견했다.
“빠른 볼! 돌아 나옵니다!! 오늘 경기 13번째 탈삼진!! 자신과의 약속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슬라이더를 신경 쓴 것 같은데, 역으로 빠른 볼이 들어왔죠. 수준급의 낚시질을 하고 있습니다.”
다카기는 6회도 끝나기 전에 삼진 13개를 낚아채는 괴력투를 선보였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 경기가 중반에 접어들자 아껴놨던 힘을 본격적으로 개방했다.
슬라이더도 성가신데 이제는 구속까지 조절하고 있으니 타자 입장에선 미칠 지경, 휴스턴 타선은 삼진 헌납하는 기계로 전락했다.
‘이상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특히 존 해먼드의 정신적인 피해는 대단했다.
지금까지 눈썰미로 공략한 투수가 몇 명인가. 야구를 나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저 녀석은 상식이 안 통하는 수준, 무슨 구종인지 알고도 당하고 있으니 베테랑의 자존심은 처절하게 난도질당했다.
“우와아아 ~ !!”
그 사이 14번 째 삼진이 적립되자 관중석은 환호에 휩싸였다.
올 시즌 다카기의 213번째 탈삼진, 미네소타의 에이스 도미닉 레논을 제치고 AL 탈삼진 2위로 올라섰다.
1위는 캔자스 시티의 패트릭 브린(227개), 브린은 올 시즌 210이닝을 소화하고 있지만 다카기는 아직 150이닝도 못 채웠다.
야수 출전 때문에 등판이 들쭉날쭉 했던 게 문제, 거기다 구단의 철저히 관리까지 받으면서 이런 결과가 났다. 만테냐 어워드는 그렇다 쳐도 규정 이닝은 채울 수 있을까.
팬들의 닦달이 이어지는 것도 당연, 그런데도 탈삼진 타이틀 경쟁을 벌인다는 게 대단한 거 아닌가. 적은 이닝은 오히려 다카기의 구위를 증명하는 지표로 작용했다.
“어우 ~ 추워”
경기는 이제 7회 초, 보스턴 외야진은 추위에 몸을 떨었다.
보스턴은 해안에 가까운 도시,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엄청 춥다. 아직 9월이지만 밤이 되면 제법 쌀쌀한 날씨, 극성팬들은 다카기의 괴력투에 추위를 잊었지만 할 일 없는 외야진은 펜스 주위를 서성거렸다.
3회 나온 우익수 플라이가 마지막 입질,
공은 안 날아오고 할 일은 없고, 가슴을 졸이는 긴장감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따분함이 더 힘들었다.
따악 ~ !!
“내가 잡을게!!”
“내가!!”
마침 날아온 플라이, 오늘 중견수로 출장한 후안 위긴스는 내가 잡겠다는 신호를 보냈지만, 좌익수 돈론은 나도 좀 끼자며 달려들었다.
두 선수가 가볍게 충돌하면서 타구는 그라운드에 추락, 공을 2루로 던진 위긴스는 돈론과 말싸움을 주고받았다.
‘상관없어.’
반면 다카기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삼진이 목표, 추락한 타구 따윈 마음에 두지 않았다.
따악 ~ !
“밀립니다. 98마일, 역시 구위는 그대로군요.”
“지금 휴스턴 타자들은 특급 불펜을 경기 내내 상대하는 기분일 겁니다. 구속이 전혀 떨어지질 않고 있어요.”
휴스턴의 마크 머피 감독은 루키의 위력투에 손을 놔버렸다.
15번째 삼진을 잡아낸 공은 89마일 체인지업, 빠른 볼을 노리고 있던 타자는 살짝 가라앉는 낙폭에 꼼짝도 못하고 얼어붙었다.
저런 공을 던지는 투수를 어떻게 공략하나.
분명 루키인데 던지는 수준은 7 ~ 8년 차에 접어든 베테랑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 타자를 압도하는 구위 - 상대를 농락하는 완급조절 - 그리고 어느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정신력,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지 않은가.
1년 전, 휴스턴의 스카우트 제리 보이콧은 다카기의 타자 재능을 높게 보고 영입을 주장했지만, 마크 머피 감독은 그 의견에 동의 못했다.
이게 저 선수의 진짜 모습, 하지만 그때 왜 영입하지 못했을까 라는 아쉬움은 들지 않았다.
이미 지나간 일, 이제 와서 아쉬워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거기다 선수 영입은 구단 수뇌부가 결정할 일, 오늘 패해도 그건 내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사이 다카기는 16번째 삼진을 적립하고 7회를 마무리, 쏟아지는 환호 속에서 다카기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외야에서 사소한 충돌을 일으킨 문제아들을 기다린 것, 다음 이닝에도 플라이가 나오면 떨어트리라는 농담을 던졌다.
하지만 위긴스와 돈론은 다음에도 또 그러면 가만 안 둔다는 협박으로 받아들였고, 추위와 지루함에 늘어진 몸에 긴장감을 우겨 넣었다.
이어지는 7회 말 보스턴의 공격, 타선이 한 점을 더 추가해주자(5대 0) 다카기는 투구에 공격성을 더했다.
따악 ~ !!
“좌중간으로 가는 타구, 몸을 날려 잡아냅니다!! 폴 돈론의 멋진 다이빙 캐치!! 다카기의 어깨에 힘을 실어줍니다!!”
“돈론이 수비가 그렇게 좋은 선수가 아닌데, 7회에 다카기가 돈론에게 뭐라고 하는 모습이 잡혔거든요. 거기에 자극을 받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시스트를 받은 당사자의 표정은 떨떠름했다.
삼진으로 처리할 아웃카운트 하나가 소비된 게 문제가 아니라 힘이 정말 떨어진 느낌, 예고한 18삼진까지 2개가 남았지만 더 해봤자 의미가 없었다.
다카기가 손짓을 주자 브라이스 감독은 바로 마운드로 직행, 불펜에 대기 하고 있던 스티븐 루카스가 바통을 이어 받았다.
승계 주자 한 명을 남겨뒀지만 7과 1/3이닝 동안 피안타 4개, 볼넷 1개, 삼진만 16개를 잡아낸 원 맨 쇼, 약속은 지키지 못했지만 홈 팬들은 최선을 다한 루키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하지만 벤치에 앉은 주인공은 여전히 못 마땅한 표정, 본인이 결정한 일이지만 마지막까지 마운드를 책임지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스티븐 루카스가 남은 2이닝을 잘 막아주면서 다카기는 시즌 11승을 달성, 구름처럼 몰려온 일본 기자들은 그 앞에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다카기 선수, 아쉽게도 2개 모자랐군요.”
“알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20삼진 잡아야죠 뭐”
기자들은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냥 올해는 힘들 것 같다고 인정할 것이지, 마지막까지 강한 척 하는 모습은 고시엔 시절과 다를 게 없었다.
[다카기 선수는 내 기록을 아득히 뛰어넘을 선수입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 후, 미츠이 유사쿠의 인터뷰가 일본에서 화제가 됐다.
은퇴 후 여론과 인연을 끊고 조용한 나날을 보내던 사람이라 더욱 의외, 기자들이 전설의 인터뷰 요청을 외면할 리 없었다.
“다카기 선수가 내년엔 어느 정도의 성적을 거둘 거라 예상하십니까? 구체적으로 말씀을 해주시죠.”
“하하 ~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다.”
“미츠이 씨는 메이저리그에서 100승을 넘긴 분 아닙니까. 국내의 다른 전문가들보다 훨씬 더 정확한 예측을 하실 것 같은데 ··· ”
“글쎄요. 투구에만 전념을 하고 180이닝 이상을 던진다는 가정 하에 ··· 270 아니 ··· 280삼진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평균자책점은 운이 많이 작용하는 기록이라 그건 변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일본야구의 전설이 고평가를 내리면서 다카기를 향한 일본 야구팬들의 기대치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그건 보스턴 현지 여론도 마찬가지, 유사쿠는 한때 보스턴에서 뛴 적이 있다.
비록 1년뿐이었지만 시즌 14승, 200이닝을 소화하며 좋은 인상을 남겨주고 떠난 선수, 은퇴한지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유사쿠를 기억하는 골수팬들은 제법 있었다.
보스턴의 수더랜드 단장도 기왕 세상에 나온 김에 시구 한 번 해달라는 요청을 했고, 유사쿠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과거 메이저리그를 호령한 전설과 현재 진행형인 초신성이 얼굴을 마주하는 역사적인 순간, 수많은 일본 기자들도 유사쿠를 따라 미국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