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132화 (132/361)

132화. 기대에 응하는 방법 - (10)

[다카기 신인왕 거의 확정]

[경쟁자가 없다]

시즌이 9월에 접어들자 개인타이틀 경쟁도 조금씩 윤곽을 드러냈다.

다카기는 9승 무패, 평균자책점 1.48을 기록하며 신인왕 경쟁에서 라이벌들을 여유 있게 따돌렸다.

아니, 신인왕이 문제가 아니라 최고 투수에게 주어지는 만테냐 어워드 경쟁도 가능한 성적, 하지만 시즌 첫 한 달을 불펜으로 보내고 야수 기용도 잦았던 편이라 거른 등판이 적지 않다.

탈삼진율이나 임팩트는 대단하지만 누적 스탯만 따지면 캔자스시티의 패트릭 브린에게 뒤지는 게 사실, 여론도 AL 만테냐 어워드는 브린의 몫이라는 의견이 대세를 이뤘다.

[부탁이야, 투수에만 전념해 줘]

[조금만 더 분발하면 돼]

보스턴 팬들은 다카기에게 앞으로 투구에만 전념해 달라며 애원했다.

조금만 분발하면 신인왕, 만테냐 어워드 동시 수상이 가능하다.

메이저리그 120년 역사 동안 두 명 밖에 이루지 못한 대기록, 본인이 타격에 재능이 있고 야수에 대한 미련이 있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지만 이건 지금 밖에 이룰 수 없는 대기록 아닌가.

수더랜드 단장도 다카기를 설득하고 나섰다.

‘솔직히 싫은데’

2년 전, 다카기는 대학진학과 프로 진출을 두고 마지막까지 고민을 거듭했다. 내 학창시절의 추억과 열정 그 자체였던 야구, 프로에 진출해서도 진심으로 즐기는 야구를 할 수 있을까.

그래도 기왕 선택한 길이니 내가 원하는 플레이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팀 사정은 그게 안 되는 상황, 투수나 하라고 등을 떠미는 잔소리가 솔직히 달갑지 않았다.

‘기왕이면 최고가 돼야지. 지금부터 타격한다고 30홈런 치겠어?’

하지만 만테냐 어워드 수상도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어중간한 걸 제일 싫어하는 성격이라 기왕이면 최고가 될 수 있는 길을 가는 게 좋겠지, 하지만 다카기는 단장에게 야수를 포기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맥킬립이 떠나고 교통정리가 끝난 외야진, 경쟁자가 없어진 초원에서 생명이 어떻게 진화하겠나. 적당한 경쟁은 선수들에게 자극을 주겠지, 남은 시즌은 투구에 전념하겠지만 그걸 공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건 수더랜드 단장도 동의, 여론을 통해 다카기는 앞으로도 투타 겸업을 계속 할 거라는 입장을 밝혔다.

‘진짜 뺏길 수도 있어.’

보스턴 선수단은 바짝 긴장했다.

농담이 아니라 다카기는 외야진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실력자, 바짝 긴장한 선수들은 잘하든 못하든 경기 내내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너 계속 그런 스타일로 갈 거냐?”

“뭐가?”

“수염을 길러보는 게 어때? 지금 이미지는 너하고 뭔가 안 맞아.”

그러던 어느 날, 스캇 포데스와는 다카기의 얼굴을 걸고 넘어졌다.

보스턴은 유독 턱수염을 기른 선수가 많은 편, 수염을 기르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남자다움과 야생성을 어필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카기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긴 머리와 수염 없는 매끈한 얼굴을 유지했고, 지금도 스타일은 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북미권의 미적 기준으로 따지면 뭔가 심심한 얼굴, 하지만 다카기는 난 얼굴에 털이 안 난다며 피식거렸다.

“그럼 문신이라도 좀 해라.”

“됐어. 내 매력은 소년다운 풋풋함이라고”

190이 넘는 큰 키에 벌어진 어깨, 덩치만 보면 메이저리거지만 다카기는 소년만화 주인공 같은 외모로 제법 많은 팬을 확보했다.

그런 내가 얼굴에 수염을 붙이고 몸에 문신을 하면 소녀, 아가씨 팬들이 실망할 거 아닌가. 뭣보다 수염 달린 수컷들 덕분에 유독 돋보이는 소년 외모, 경기장에서 강하게 보이는 건 실력으로 충분, 인상까지 험악해지는 건 사양했다.

* * *

시간은 흘러 9월 12일, 다카기는 뉴욕을 상대로 시즌 10승 사냥에 나섰다.

올 시즌 한 번 붙어본 상대, 첫 만남에서 12삼진을 헌납한 뉴욕은 이번에야 말로 한 수 가르쳐주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원정팀 보스턴의 1회초 공격은 득점 없이 종료, 이날을 벼르고 있던 뉴욕 팬들은 마운드에 오르는 다카기를 향해 야유를 퍼부었다.

지난 6월, 보스턴 팬들은 원정팀 뉴욕에 필요 이상의 야유를 보낸 전과가 있다.

특히 모리슨 어머니의 과거사까지 들춰낸 건 조금 지나친 정도, 받은 만큼 돌려주는 건 당연했다.

“초구, 들어옵니다. 오늘도 다카기는 공격적인 투구를 하는 군요.”

“이 선수는 여느 아시아 투수들과 다릅니다. 모리슨도 그걸 알고 있을 텐데, 일단 지켜보는군요.”

많은 일본인 투수가 메이저리그에서 고전하는 이유는 의외로 볼넷이다.

제구가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프로의 세계, NPB를 평정하고 미국까지 진출한 투수가 볼넷 때문에 고전한다? 얼핏 들으면 이해가 안 되지만 도전자들에게도 나름 사정은 있었다.

예를 들어 올 시즌 뉴욕과 1억 달러가 넘는 계약을 맺은 쿠사나기 하루는 지금까지 12승을 거두며 선발진 노릇을 잘 해주고 있다.

문제는 빠른 볼 위력이 점점 힘을 잃고 있다는 것,

패스트볼 피안타율은 0.240로 나쁘지 않지만 피OPS가 0.782나 된다.

평균 구속이 91마일에 불과하니 조금만 몰려도 장타로 연결되는 게 현실, 일본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 하루타는 구위로 타자를 압도하는 걸 포기했다.

그리고 더 철저한 바깥 쪽 제구와 다양한 구종을 활용하는 테크니션으로 돌파구를 열었지만, 이런 투구는 피안타율을 낮추고 볼넷을 높이는 역효과를 불러왔다.

투구 수가 많아지다 보니 이닝소화력이 떨어지는 건 당연, 후반기 들어 이닝을 먹어주는 페이스가 급격히 떨어졌다.

뉴욕 현지 여론에서도 1억 3천만 달러 투자는 오버 페이라는 주장이 고개를 들고 있는 중, 결국 하루타도 여느 일본인 투수들과 비슷한 수순을 밟게 됐다.

‘치려면 쳐라.’

하지만 다카기는 달랐다.

빠른 볼 피안타율은 0.241로 하루타와 큰 차이가 없지만 피 OPS는 0.581, 빠른 볼에서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데 어떻게 두 선수를 동급으로 칠 수 있겠나.

기다리는 타격으로는 공략이 어려운 상대, 초구를 지켜본 모리슨의 접근법은 현명하지 못했다.

“볼 ~ ”

2구는 바깥쪽 경계선에 걸치는 빠른 볼, 모리슨은 허리를 굽히며 눈과 공 사이의 거리를 좁혔다.

키가 워낙 커서 허리를 굽혀야 공의 위치가 제대로 보이는 편, 번트 훈련으로 선구안을 가다듬는 다카기와 비슷한 접근법이었다.

‘재미있군.’

3구는 파울, 다카기는 모리슨과의 맞대결을 즐기기 시작했다.

벌써 한 판 붙어봤어야 했는데 지난 번 경기는 모리슨이 퇴장당하면서 맞대결이 무산 됐다. 역시 뉴욕의 미래를 짊어진 선수다운 실력, 다카기도 비슷한 입장이라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이걸 따라오네.’

모리슨이 빠른 볼을 커트해 내자 데이비드 크로스 포수는 체인지업을 요구했다.

일부 타자들은 최대한 공을 몸 쪽으로 붙여놓고 타격을 하는데 이 때문에 히팅 포인트가 점으로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

공이 변하는 시점에서 타격이 되기 때문에 정확도가 떨어지는 건 당연, 보스턴의 후안 위긴스가 이런 경우다.

그에 비해 모리슨은 스트라이크 존 앞에서 공을 때려낸다. 히팅 포인트가 선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공이 변하기 전에 타격이 가능, 선구안이 받쳐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기술이다.

이런 선수를 상대로 체인지업을 던지는 건 큰 효과가 없지만, 빠른 볼에 반응하는 선수에게 빠른 볼로 대응하는 건 어리석은 짓, 실제로 모리슨은 변화구를 골라내고 빠른 볼을 타격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줬다.

거기다 장타력도 있는 편이라 정면 승부는 위험, 하지만 다카기는 빠른 볼을 고집했다.

홈런을 내줘도 볼넷은 절대 사양, 크로스 포수도 고집에 백기를 들었다.

따악 ~ !!

“투수 정면!! 오!! 지금은 맞고 튀었는데요. 일단 타자 주자는 아웃 됐습니다.”

“부상인가요? 보스턴 입장에선 재앙이군요.”

땅볼 타구를 처리한 3루수 잭 개리슨은 서둘러 마운드로 달려갔다.

뒤이어 달려오는 내야진, 트레이너를 대동한 브라이스 감독도 서둘러 현장으로 달려갔다. 얼굴을 붉게 물들인 핏자국, 깜짝 놀란 브라이스 감독은 트레이너를 닦달했다.

“어떤가?”

“피부가 찢어졌습니다.”

실밥이 얼굴에 스치면서 일어난 가벼운 부상, 일단 소독약과 의료용 솜으로 응급처치를 했다.

절대 무리시켜선 안 되는 선수, 브라이스 감독은 교체를 권했지만 다카기는 콧방귀를 뀌었다. 코뼈가 부려져서 피가 철철 흐른다면 숨을 쉬기 어려우니 마운드를 내려가는 게 맞다.

그런데 얼굴 좀 찢어졌다고 경기를 그만두다니, 별 거 아니니까 다들 돌아가라며 유니폼에 뭍은 흙을 털어냈다.

‘흉터 생길라, 표정은 진지하고 무겁게’

다카기는 이후에도 투구를 계속했다.

응급처치한 상처가 벌어져서 얼굴에 흉터가 생기면 팬들이 실망하겠지, 석고로 만든 흉상처럼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정말 괜찮겠냐?”

‘말 시키지 마’

그럭저럭 마무리한 1회, 동료가 말을 걸어와도 다카기는 대답 대신 손을 저었다.

말을 하면 얼굴 근육이 움직일 거 아닌가. 그것도 모르고 말을 거는 녀석들, 저리 가라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얼굴에 의료용 솜과 반창고를 붙인 모습은 영락없는 스포츠 만화의 주인공, 학창시절부터 잘 생긴 외모로 인기를 끌었는데 투혼을 상징하는 액세서리까지 장착하면서 다카기는 일본 야구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삼진입니다!! 오늘 5번째 탈삼진!! 시즌 199번 째 탈삼진입니다!!”

“1회에 아찔한 경험을 했는데도 정신력이 대단하네요. 같은 남자가 봐도 멋있습니다.”

200탈삼진까지 앞으로 한 개, 마침 타석엔 얼굴에 상처를 남긴 모리슨, 일본 시청자들은 또 하나의 스토리가 만들어지길 기대했다.

‘아차, 나도 모르게 힘이 ··· ’

99마일을 던진 다카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상대가 상대라 어깨에 힘이 조금 들어갔는데 상처가 약간 욱신거리는 느낌, 200탈삼진보다 얼굴에 남을 상처가 더 신경 쓰였다.

‘너는 내가 언젠가 다시 한 번 손 봐 준다.’

삼진은 포기하고 투심으로 땅볼을 이끌어 냈다. 안타는 맞지 않았지만 그것보다 더 기분 나쁜 상처, 내가 원래 이렇게 얼굴에 집착하는 타입이었나.

200탈삼진까지 딱 하나 남았지만 5회까지만 소화하고 마운드를 넘겼다. 그리고 바로 병원으로 달려가 상처를 봉합하는 수술을 받았고, 다음 날 아침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기자들을 마주했다.

투구 수가 67개 밖에 안 됐는데도 마운드를 내려간 선수, 얼굴의 상처뿐만 아니라 뭔가 다른 부상도 있었던 게 아닐까. 다카기는 그런 게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저도 신경 안 쓰려고 했는데, 5회에 얼굴이 따끔 하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대기록을 앞두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상처는 잘못 다루면 평생 남잖아요? 이런 때는 얼굴에 수염이 안 나는 게 좀 불만이네요.”

“수염이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얼굴에 수염이 있었으면 방패 역할을 해주지 않았을까 ··· 어제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몇 몇 기자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저 매끈하고 흰 얼굴에 수염이라니, 순간 그 얼굴을 떠올려봤는데 전혀 안 어울렸다.

“저도 수염 안 어울리는 거 알고 있어요. 그렇게 대놓고 웃지 마세요.”

유쾌하진 않지만 분위기를 위해 던진 말, 덕분에 분위기는 많이 풀어졌고 기자들의 질문은 계속됐다.

“브라이스 감독의 말에 따르면 앞으로 2 ~ 3경기 정도 더 등판하실 것 같은데 ··· 미츠이 유사쿠 선수의 기록, 깰 자신이 있으십니까?”

미츠이 유사쿠는 1994년, 메이저리그 진출 첫 해에 219이닝 동안 234삼진을 잡아냈다.

이건 지금도 아시아 선수 역대 한 시즌 최다 탈삼진 기록, 앞으로 3경기 등판한다고 치면 경기 당 12삼진을 잡아내야 경신할 수 있다.

9이닝 당 탈삼진이 13.4나 되는 루키에게도 조금 무리한 도전이겠지, 하지만 다카기는 못 할 것도 없다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어제는 제가 상처가 신경 쓰여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뿐입니다. 상처만 잘 아문다면 못할 것도 없죠.”

“글쎄요. 포스트 시즌을 고려하면 2경기가 한계라고 생각하는데 ··· 조금 어렵지 않을까요?”

“그럼 한 경기에 18개씩 잡아내죠 뭐”

밑도 끝도 없는 이 자신감은 뭔가, 하지만 실력이 있는 선수라 기자들도 더는 뭐라 하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