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적없는 용병-131화 (131/361)

131화. 기대에 응하는 방법 - (9)

“자, 앤디 프론스키가 보스턴 유니폼을 입고 첫 등판을 치릅니다. 올 시즌 20경기 등판 8승 5패 평균자책점 3.33, 121과 1/3이닝 동안 볼넷 31개, 탈삼진은 101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위가 떨어졌다고 해도 여전히 뛰어난 투수죠. 통산 2500탈삼진까지 2개가 남았는데, 오늘 또 다른 역사가 새겨질 겁니다.”

8월 4일, 앤드 프론스키는 보스턴 유니폼을 입고 첫 선발등판에 나섰다.

스타플레이어를 맞이한 기쁨에 어느 때보다 들 뜬 팬들, 그에 반해 데이비드 크로스 포수는 표정 없는 얼굴로 사인을 기다렸다.

크로스는 상대를 철저히 분석하고 공략법을 미리 짜는 유형, 반면 프론스키는 작전 따윈 세우지 않았다.

아무리 위대한 작전도 전장에선 휴지조각이 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상대를 연구하지 않는 건 아니다.

12년 동안 메이저리그를 경험하면서 작전이라는 게 무의미한 짓이라는 걸 깨달았을 뿐, 타자에 투구를 맞춰주는 게 아니라 그날 가장 좋은 공을 위주로 투구 패턴을 짰다.

전혀 다른 성향의 선수가 배터리를 이뤘으니 조금 불안한 게 사실, 브라이스 감독은 약간 불안한 눈으로 두 선수의 호흡을 지켜봤다.

‘뭐 이런 ··· ’

초구를 지켜 본 타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체는 70마일도 안 되는 느린 커브, 어린애도 안하는 장난이라고 폄하하기엔 코스가 너무 절묘했다.

요즘 타자들은 스트라이드를 넓히고 힘을 한껏 장전했다 풀어내는 유형이 많다. 넓은 스트라이드는 변화구에 약한 법, 구속이 떨어진 프론스키는 느린 커브를 적절히 활용해 타자의 타이밍을 흩트렸다.

물론 이런 투구는 노림수에 걸리면 끝장, 적절한 타이밍에 빠른 볼을 섞어주며 커브 위력을 살려주는 노련함을 보였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3회까지 무실점 투구가 이어졌지만 다카기는 이런 흐름이 언제까지 계속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무리 기교를 부려봤자 구위가 떨어진 공을 스트라이크 존에 밀어 넣는 건 위험, 아니나 다를까 프론스키는 4회 초 좌중간을 넘어가는 대형 홈런을 허용했다.

거기다 아직 안타는 개시도 못한 타선, 팀이 지고 있는 상황이지만 남의 일처럼 평온한 태도를 보였다.

‘너희들이 잘 하면 되잖아? 안 그래?’

사실 동료들의 부진은 요만큼도 슬프지 않았다.

말이 좋아 동료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경쟁하는 사이 아닌가, 저 녀석들이 부진하면 내가 타석에 들어설 가능성은 더 높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이런 내게 혐오감을 느낀다?

처음부터 동료들이 잘 했으면 이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틈을 보이면 뒤통수를 맞는 건 세상의 이치, 그게 아군이라도 이상할 건 없다. 다카기는 야수로 뛰길 원하는 입장, 야수들의 부진을 슬퍼할 이유는 없었다.

따악 ~ !!

5회 초, 또 다른 사건이 터졌다.

좌익수 폴 돈론이 달려오면서 타구를 처리하다 공을 뒤로 빠트리는 실책을 저지른 것, 안전하게 원 바운드로 잡아도 됐을 텐데 왜 저런 짓을 한 걸까.

단타로 끝날 타구가 3루타로 이어지자 프론스키는 격분했다.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던 선수, 단장에게 빼 달라고 그렇게 요청했는데 하는 짓이 밉상이라 불만이 터져버렸다.

“넌 저기 구석으로 가!! 얼굴도 보기 싫어!!”

프론스키의 분노는 더그아웃으로 이어졌다.

순식간에 싸늘해진 분위기, 원래 성격이 소심한 돈론은 진짜 구석으로 기어들어갔다. 2실점의 빌미가 됐으니 무슨 말을 하겠나, 거기다 짬밥도 부족한 입장이라 반박도 못했다.

프론스키는 성격이 불같아도 그 자리에서 표출하면 다음 날 잊어버리는 성격, 본인은 잊어버려도 다른 선수들이 기억한다는 게 문제지만 몇 년 겪어보면 익숙해진다.

하지만 이제 막 동료가 된 입장에선 당황스러운 게 사실, 12년 동안 이렇게 살아온 선수라 이제 와서 바로잡기도 애매했다.

“헛스윙!! 삼진입니다!! 통산 2500번째 탈삼진!! 역대 33번째 선수로 이름을 올립니다.”

“이제 시작이죠. 보스턴에서 3000탈삼진을 잡고 은퇴하길 바랍니다.”

그래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실력, 6이닝 동안(3실점) 볼넷 없이 6삼진을 잡아낸 프론스키는 더그아웃에서 경기를 지켜봤다.

차라리 더그아웃으로 들어갈 것이지, 굳건한 프로정신 덕분에 보스턴 선수단은 눈동자를 굴리며 눈치를 살폈다.

“자, 이제 3대 0으로 뒤진 보스턴의 7회 말 반격입니다. 선두 타자는 후안 위긴스, 오늘 안타 없이 삼진만 2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스턴이 후반기 들어 경기 당 5.5점을 기록하고 있는데, 오늘은 너무 무기력하네요. 이런 때일수록 위긴스 선수가 장타력을 발휘해 줘야 합니다.”

선수를 분석하는 취미가 있는 프론스키는 위긴스의 타격을 유심히 살폈다.

준비 자세부터 앞발과 뒷발 사이의 공간이 넓은 편, 자신만의 배팅 공간을 설정해 두고 파워스윙을 하는데, 배트가 다른 타자들보다 뒤에서 출발하는 편이다.

배트 스피드와 타고난 손목 힘을 갖췄다면 문제가 없지만 현실과 이상은 다른 법, 공의 변화가 시작된 타이밍에 타격이 되기 때문에 정확도는 그만큼 떨어질 수밖에 없다.

올 시즌은 그럭저럭 잘 해주고 있지만 앞으로 이 험난한 메이저리그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장래가 걱정됐다.

프론스키는 투수가 본업이지만 지난 12년 동안 내셔널리그에서 실버슬러거 2번, 홈런도 9개나 때려냈을 정도로 타격에 재능이 있는 선수, 여기에 특유의 눈썰미로 위긴스의 장단점을 잡아냈다.

은퇴하면 스카우트로 활동할 예정, 아내는 가정에 좀 더 충실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야구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프론스키는 은퇴 후에도 그라운드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

어쨌든 위긴스는 중견수 플라이로 아웃, 공격이 풀리지 않자 브라이스 감독은 다카기를 대타로 내세웠다.

본업은 투수지만 올 시즌 홈런이 2개나 있는 선수, 프론스키의 눈은 흥미로 반짝거렸다.

따악 ~ !!

“초구 타격!! 파울 라인을 타고 흐릅니다!! 다카기 하루요시는 여유 있게 2루까지, 보스턴이 4회 이후 다시 한 번 득점권 기회를 맞이합니다.”

“겉보기엔 엉성한데 참 잘 친단 말이죠. 왜 이 선수가 잘 치는지 누가 설명 좀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타격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죠. 그냥 보고 즐기면 됩니다.”

훈훈한 중계석 분위기와 달리 학구열에 불타는 프론스키는 분석에 들어갔다.

일반적인 거포는 체중을 장전하고 풀어내는 과정을 거친다.

이런 메카니즘 때문에 하나 ~ 두울 ~ 셋 하는 일정한 리듬을 보이는데 다카기는 그게 아니다.

공이 오면 그냥 딱 치는 느낌이랄까, 스트라이드가 넓은 것도 아니고 힘을 장전하는 과정도 거의 생략됐는데 어떻게 저런 타격이 가능한 건가. 본인의 타격 이론으론 이해가 안 됐다.

‘납득 못해. 뭔가 비결이 있을 거야.’

본인이 패전 위기에 몰렸다는 건 이미 뒷전,

프론스키가 학구열을 불태우는 사이, 맥 리스가 적시타를 때려내며 보스턴은 한 점을 따라 붙었다.

여기에 8회 말, 구박덩이 신세로 전락한 폴 돈론이 속죄의 솔로 홈런을 쏘아 올리며 스코어는 3대 2, 추격이 가시권에 들어오자 브라이스 감독은 전력을 풀가동했다.

9회 초에 올라 온 스캇 포데스와는 100마일을 넘나드는 구위로 템파베이 타선을 찍어 눌렀고, 보스턴은 정규이닝 마지막 공격에 나섰다.

선두 타자는 다카기, 홈 팬들은 홈런을 연호했지만 다카기는 앞발을 1루 로 뻗으며 빠른 볼을 가볍게 밀어냈다.

따아악 ~ !!

“우측으로 가는 타구!! 계속 뒤로!! 넘어 ~ 갑니다!!!! 다카기 하루요시의 시즌 3호 홈런!! 이게 바로 보스턴의 야구입니다!!”

“지난 5월 17일 이후, 거의 석 달 만의 홈런이네요!! 그것도 9회 말!! 극적인 동점 홈런으로 장식합니다!!”

동료들이 좋아서 팔짝 뛰는 이 와중에도 프론스키는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도 두 박자 스윙, 그것도 밀어서 홈런을 만들었다. 상식으로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녀석, 더그아웃에 들어오자마자 추궁부터 했다.

“너 뭔가 공을 잘 칠 수 있는 비결이라도 있는 거냐?”

“공이 오기에 그냥 쳤을 뿐이야.”

한 마디 툭 던진 다카기는 저 쪽으로 멀어졌다.

탐구욕을 불러일으키는 녀석, 너의 비밀을 반드시 풀어내겠다는 결심은 확고해졌다.

이날 보스턴은 10회 말, 극적인 끝내기로 승리를 쟁취, 후반기 17경기에서 13승을 거두는 가파른 상승세를 탔다.

오늘 승리 투수는 되지 못했지만 통산 2500삼진과 퀄리티 스타티를 기록한 프론스키의 활약은 훌륭했고, 기자들은 인터뷰를 요청했다.

하기 싫지만 안 하면 벌금을 무는 게 메이저리그 규정, 올해 252억을 받는 거물이지만 벌금이 아까운 베테랑은 인터뷰에 응했다.

“통산 3000탈삼진은 언제 쯤 달성 가능할까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예상대로 수준 떨어지는 기자들의 질문, 사무국은 왜 이런 걸 거부하지 못하게 하는 건가. 까칠한 반응은 이후에도 계속됐고 이때 한 기자가 화제를 전환했다.

“유망주를 분석하는 취미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입니까?”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당신이 경기가 없는 날 마이너리그 경기를 직관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그리고 뭔가를 열심히 적는 모습을 봤다는 팬들의 증언도 있습니다.”

“훗 ~ 변장하고 간 건데 잘도 알아챘네요.”

다소 누그러진 태도, 분위기 전환에 성공한 기자는 질문을 이어갔다.

“유망주들을 눈 여겨 보는 이유가 있습니까?”

“은퇴하면 스카우트로 활동할 예정입니다. 미리 연습을 해두는 거죠.”

“혹시 눈 여겨 보는 선수가 있습니까? 있다면 한 말씀 해주시죠.”

“일단 제 근처에 한 명 있습니다.”

프론스키는 앞으로 다카기를 집중 연구해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야구뿐만 아니라 사상, 사생활까지 모든 걸 파헤칠 셈, 최근 게임 밖에 할 일이 없었는데 좋은 흥밋거리가 생겼다며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다카기 선수가 허락한 일입니까?”

“당신들도 내 허락 받고 미행한 거 아니잖아요? 그런데 내가 그 친구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까?”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반격, 그날부터 프론스키는 그림자처럼 다카기 뒤를 따라다녔다. 흥미가 있는 상대는 반드시 해부하는 성격, 다카기는 저리 가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프론스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타격이 가능한 거야? 말 좀 해보라고”

“천재니까 가능한 거야. 됐어?”

“그 재능은 어떻게 타고 난 건데? 가족 중에 운동하던 사람이 있어?”

“그냥 멱살 잡고 싸울까?”

사실 다카기는 어느 정도 운동 재능을 타고 났다.

친가 쪽엔 운동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외가 쪽은 반전의 연속, 특히 외할아버지는 무려 1984년 LA 올림픽에서 체조 금메달을 획득한 아마카지 토무네다.

급성 간경화로 인한 합병증으로 46세에 요절했지만 일본 올림픽 역사에 이름을 남긴 스타라 잊혀질만하면 여론의 입에 오르내린다.

하지만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에 대한 언급을 꺼리는 편이다.

술을 마시고 가족을 학대한 전력도 있고 스포츠 세계에선 영웅이라 불리고 있지만 가족에겐 그리 달갑지 않았던 존재다.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분이라 다카기도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고, 일본 여론도 아마카지 토무네의 좋지 않은 말년을 알고 있었기에 그에 대한 질문은 다카기 앞에서 꺼낸 적이 없다.

한창 메이저리그에서 주가를 올리는 선수 앞에서 그 이름을 입에 올려 좋을 게 뭐가 있을까.

하면 그냥 싸우자는 짓, 다카기도 가족을 학대했다는 외할아버지를 입에 담기 꺼려했다.

그 사람의 운동신경을 일부 물려받았을 수도 있지만 내가 잘 써먹으면 그만 아닌가. 존경한다느니 뭐니 이런 마음은 요만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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